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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제4시집 <방랑자의 노래> 시인의 후기 3

제4시집 <방랑자의 노래> 시인의 후기 3

 

시와 철학의 관계는 한 길을 함께 가는 동반자여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일관성을 가지고 주장하는 화두다. 서사시가 아닌 한, 글을 함축하여 표현하려면 반드시 철학적 사유를 포함하여야 그윽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된다. 나는 낭만주의 경향이 있는 시는 그 방면에 관심 있는 시인이 써야 하며, 불교가 종교가 아닌 철학이라는 신념이 확실한 사람이며, 불교철학 외에 동서양의 철학에 관심이 많으므로 철학적 성향이 짙은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시집 발행인이나 편집인은 반드시 낭만시를 요구한다. 이럴 때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깨달음에 관한 견해는 언어의 선택을 잘못 했다는 것이다. 붓다는 ‘스스로 깨어난 자’라고 칭했으니 그보다 높은 단계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은 분명 오류다. 그러므로 ‘깨달음’보다 ‘깨어남’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적절하다.

 

선불교는 엄격하게 따지자면 순수불교는 아니다. 도가와 유가 사상이 버무려진 까닭이다. 그러나 선불교 중 간화선은 혁명적 발상이다. 뭐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도태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증거는 생물학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선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자성自性은 자성성불自性佛性의 줄임말이다. 여래장 사상의 ‘심즉시불心卽是佛’의 구호는 자성론과 입장을 같이 하며, 유식학은 유아론에 치우쳐있는 듯하지만 공사상을 표방한 용수의 중관론中觀論은 당연히 무아론의 입장이다. 자성은 붓다의 무아론에 배치되지만 붓다도 그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무기無記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다. 무아론자 강병균 교수와 한자경 교수는 불교학 발전에 큰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그들의 무아론적 입장은 아직 강경하다. 특히 한자경 교수는 무아에 비아가 들어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훌륭한 발상이지만 그것을 보는 나의 입장은 내 일이 아니므로 즐기는 편에 속한다.

 

현대불교 지휴 선사는 ‘깨달음은 없다’며 역설적 표현을 쓰면서 무아론에 충실한 입장이며, ‘끝’이라는 언어를 자주 사용하고, 불교의 세계화에 공헌한 숭산 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알쏭달쏭한 언어를 자주 사용했다. 그만큼 아직도 완전하게 논쟁이 끝나지 않은 주요한 사안이다. 우리도 그것을 흘낏 보면서 여행을 떠나보자. 한국선불교의 세계화에 헌신한 숭산 대선사는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 젊은 날의 내 머리를 혼란시켰다.

 

‘깨달음’이란 불교역사 2500여년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이고,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이다. ‘붓다(buddha)-불타(佛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 의해 성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돼 왔다는 사실이다. 2500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에는, 깨달음, 열반, 해탈, 대오, 혜오, 증오, 증득, 돈오, 돈증, 대각, 정각, 도피안, 득도, 달도, 견성, 성불, 등각, 무상정등각, 구경각, 묘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원돈, 원각, 원적, 적멸, 멸도, 적정, 한소식… 등 수십 개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 한 마디로 ‘깨달음’을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상황에 따라 그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깨달음, 해탈이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소멸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며, 그것은 곧 불교의 핵심 가치인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 · 공(空) · 유식(唯識)에 대한 이해를 완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타니파타(경집/經集)>에서 붓다는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 바 있다.

 

“나는 알아야 할 바(苦聖諦)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滅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사람)이다.-수타니파타 558게” 이는 곧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徹見)’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에서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서 정각을 이루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苦集滅道/사성제를 증득하라는 것이다.

 

붓다는 많다. 과거 7불과 법신불 비로자나불, 보신불 노사나불, 미래의 미륵불, 서방정토 극락의 아미타불 등이 있으나 현실적인 분은 하나이고 나머지 부처님들은 붓다가 말씀하신 상황 개념인 것이다. 보통명사화하면 많고 고유명사화하면 오직 한 분이다. 그 외에도 많은 호칭이 있으나 나는 이 시집을 쓰면서 붓다, 부처, 석가, 석가모니, 여래, 눈뜬 자, 깨달은 자, 스스로 깨어난 자, 빛을 본 자, 응공 등 여러 호칭 중에서 여래가 접근성과 친근감이 들어 좋아 선택하고, 비교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부른 ‘스스로 깨어난 자’와 항상 깨어있는 자‘가 가장 행적에 부합하고 시적인 표현으로 적합하다는 선택을 하였으므로 두 개의 호칭을 주로 사용하였다.

 

저자는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신과 관계있는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이야기나 기적 등에 대해 용어를 통일하겠다. 오랜 숙고 끝에 신과 관계가 있으면 신화, 붓다와 같은 인간과 관계가 있으면 설화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