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시집 <방랑자의 노래> 편집•발행인의 후기
편집•발행인의 말
시인의 법우들이 선불교의 공안집 중 벽암록 100칙에 대해 현대적 감각으로 선시를 써볼 것을 권해왔다. 시인은 선문답의 동문서답에 관심을 갖는 것은 별로 남지 않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포기했다. 아쉬웠다. 동문서답이라니 선사들을 폄훼하는 소리로 들었다. 그는 자신은 결코 불자가 아니며 그 이유는 재가자 오계를 지키지도 못할 텐데 불자인 양 답답한 탈을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붓다가 이루지 못한 모든 대중의 견성성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붓다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역사와 문학과 철학과 비교종교, 우주물리학, 양자역학 등의 과학을 공부하면서, 예수, 소크라테스, 붓다, 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묵자, 한비자, 고자를 비롯하여 제자백가 등 수많은 성자가 다녀갔어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수행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깨달아서 뭐할 건데.”라고 한마디를 내던지며 좌절했음을 밝혔다. 특히 창조자인 야훼를 아버지로 둔 예수에 이르러서는 존경의 마음과 동시에 일신론적 신앙에 더욱 심하게 좌절했다. 선불교에 좌절하고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시자가 되어 이적을 보여서라도 불자의 수를 늘리려는 청전 스님의 의지는 차라리 눈물겹지만 아름답다고 했다. 프랑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유슈비츠수용소 학살 사건 이유로 낭만주의는 종언을 고했다’고 했다. 하여 시인은 서정성의 낭만주의 시를 쓰는 비율이 극도로 적다.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 600만 명이 독가스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에 그는 절망을 느낀 나머지 하늘을 쳐다본 것이다. 전쟁의 신 야훼를 아버지로 둔 그들은 아직 자손끼리 전쟁 중이며 앞으로도 그칠 이유가 없어졌다. 그들의 숫자는 대책 없이 늘어나고 보이지 않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직업종교인 혹은 경제적 종교인으로부터 천당행을 약속받고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들의 신앙심을 이길 종교나 이론도 없으며 과학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실험과 검증을 통하여 확신을 증명할 때 가설에서 정설로 가는 가장 합리적인 과학적 진화론을 포함한 과학적 합리성은 휴지통 속 쓰레기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악은 집단의 속성이며 존재의 이유인 까닭에 인간의 이기적 유전자가 인간 생존과 보존,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아담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국가의 부는 개인의 이기심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했다. 다만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알파고, 즉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면 태어나면서 받는 이기적 유전자를 호혜적 유전자로 받게 제어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물론 모두 호혜적 행동을 한다면 무척 재미없는 세상이 되겠지만 말이다. 교리문답의 대화체 형식으로 쓰므로 자신을 지칭할 때는 ‘여래’를, 제자들이 부를 때는 ‘세존’을 사용한다. 동시에 제자들을 ‘존경하는 수행자’라 부른다.
시인은 붓다의 일대기를 서사시의 형태로 쓰려고 초고를 2만 매를 준비했다. 시집은 원고지 분량으로 많아야 300매 정도가 필요한데 준비한 분량을 보니 어이가 없다. 초고는 늘이기보다 줄이기가 더 어렵다. 장편소설로 봐도 20권 분량이다. 시집은 분량에 한계가 있어 초안을 무지하게 긁어냈다. 시인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당연히 아쉽고 누더기가 된 기분이 든 것은 시인도 나도 공감한다. 그의 마음을 모른 척, 아까운 마음에 연작시집을 거론했으나 한 마디로 거절한다. 더 이상 불교에 매달리기 싫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 같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무시하거나 꺾는 사람은 다시는 상대하지 않는 성정을 갖고 있다. 겨우 설득하여 시집을 발간한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푹 쉬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마 산행을 계획한 눈치지만 설악산을 100번 넘게 간 사람인데 설마 또 가겠는가, 몸도 온전하지 않은데. 작품을 떠나 수고와 열정과 약속을 지켜주심에 아쉬운 감사를 드린다. 사고로부터 회복하지 못한 몸, 건강을 유지하기 바랄 뿐이다.
이용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