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도 문화사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천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문자(文字)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원전 2천 년경 인더스 문명기에 사용되었던 인더스 문자가 아직 해독되지 않은 채 역사 속에 묻혀 버렸고, 다시 그 이후 인도에 문자가 등장한 때를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비문의 문자가 나타난 때로 본다면, 고대인도인들은 최소 1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자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 싯다르타가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싯다르타는 정말 무문자(無文字)의 사회 속에서 살았던 것일까. 우리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모른다.
인도 고전 속에는 고대 인도인들이 문자를 사용했을 법한 약간의 단서가 보이기는 한다. 아마도 싯다르타의 시대와 가장 근접한 사람 중에 기원전 4세기 중반 빠니니(Pini)가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는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의 문법서에 ‘리삐(lipi)’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글자’ 또는 ‘문자’를 뜻할 수도 있다. 또한 ‘그란타(grantha)’라는 단어도 썼는데 이는 ‘책’을 가리키는 말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따라서 싯다르타 당시에 문자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는 이유는 이런 희미한 단서를 통한 것이다. 하지만 리삐나 그란타라는 단어가 실제로 당시에 글자와 책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유사한 시기에 또 다른 증인으로 그리스인이 있었는데, 그는 기원전 4세기경(B.C 325년경)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인도 북서부 지역에 들어왔던 장군 네아르코스(Nearchos)였다. 그의 기록은 후대의 역사가 스트라본(Strabon)에 인용되는데 네아르코스에 따르면, “인도사람들은 천조각에 글자를 썼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정반대의 그리스인 증인도 있다. 네아르코스보다 20여 년 뒤늦게 인도 땅에 등장한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다. 그가 인도에 살면서 남긴 인도 역사서 〈인디카(Indica)〉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인용되는데, 그에 따르면, 인도사람들은 ‘기록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인들이 남긴 단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네아르코스는 주로 인더스 강 하류의 인도지역을 기록한 사람이었고, 메가스테네스는 갠지스강 유역의 인도를 기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차이는 당시 인도의 생활상에 대한 이해를 크게 바꾸어놓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더스강 유역의 인도북서부 지역은 그리스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아람어가 통용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람어와 아람(Aramaic) 문자는 인도북서부 지역까지 퍼졌던 국제공용어(lingua franca)로서 탁실라 등지에서 아람어 비문을 보게 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네아르코스가 “인도사람들이 천조각에 글자를 썼다”고 한 것은 인도 고유의 문자가 아니라 아람 문자를 사용하는 누군가를 관찰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갠지스 강이나 야무나 강을 따라 마우리야 왕조의 본거지 파탈리뿌뜨라를 방문했던 메가스테네스의 기록은 인도 본토의 내부 상황에 더 충실했을 수 있다. 즉, 이방인의 유입이 빈번했던 인도북서부와 달리 싯다르타가 활약하던 인도 동북부 지역은 문자 활동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5세기 전후에 살았던 싯다르타는 과연 문자 없는 사회 속에 살았던 것일까. 현재로서는 추측과 상상만 가능할 것이다. 비록 그 당시에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어도,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비문에 나타난 브라흐미(Brhm) 문자는 그 형태가 이미 꽤나 발전한 상태의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대에는 아쇼카 비문에 나타난 브라흐미 문자의 초기 형태를 사용했거나, 아마도 브라흐미 문자가 파생되어 나온 어떤 근원 문자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로서 학자들은 브라흐미가 아람 문자에서 파생했을 것이라는 데 거의 동의한다. 지중해 연안의 셈족 언어를 표현하던 아람 문자가 충분한 변형의 과정을 거쳐 인도 동북부까지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싯다르타는 그 문자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