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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균여의 周側學(주측학) 2-1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고영섭

균여의 周側學(주측학) 2-1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고영섭

 

목 차


1.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1.1. 본성()과 표상()의 융회

1.2.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의 무애
2. 敎判(교판)을 보는 눈

2.1. 균여의 삶과 저술

2.2. 화엄 五敎判(오교판)의 새 해석
2.3. 대승원교에서 同敎(동교)別敎(별교) 이해
3. 균여의 주측학

3.1. 橫盡(황진)의 법계

3.2. 竪盡(수진)의 법계

3.3. 周側(주측)의 법계

 

1.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종래 우리는 종족(species)을 흔히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종종 '만드는 인간'(Homo Faber, Man the Maker), 심지어는 '생태학적 인간'(Homo Oecologicus)이라고까지도 부르고 있다. '20세기의 야콥 부르크하르트'라 불리는 J. 호이징하(Johan Huizinga, 1872~1945)는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호모 파베르'이기보다는 오히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Man the Player)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형태의 문화는 그 기원에서 놀이 요소가 발견되며, 인간의 공동생활 자체가 놀이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만드는 인간''생각하는 인간'보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규정이 훨씬 더 적확하고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마인베르크 역시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고찰을 철학이 마땅히 담당해야 하며, 또 그것이 철학의 본래적이며 고유한 임무에 속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 Anthropologie)이 생태위기와 관련하여 자기의 과제를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불교는 인간을 연기적 존재로 본다. 연기는 (;조건)이라는 타자를 통해 나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원리이다. 때문에 나를 규정하는 어떠한 외연을 벗어난 내포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기의 그물을 벗어난 ''라는 존재는 없다(無我;무아)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호이징하가 말하는 '놀이하는 인간'도 결국은 '연기적 인간'인 것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인간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多羅三三菩提;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기 위해 발심하는 존재이며, 발심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현실적 인간인 중생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서원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러면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리고 화엄가였던 균여(923~973)는 불교적 인간(보살)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세계는 사물의 총화이고, 인식주체(6;)와 인식대상(6;)의 부딪침(;)을 통해 구성되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현실적 인간인 나의 삶의 총화(一切;일체)이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변화하고(顯色;현색, ;) 공간적으로 거리끼는(形色;형색, ) 것이 사물(故 名爲色;변애고 명위색)의 성질이다. 때문에 '변화''점유'의 속성 위에서 사물은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들에게 표상되는 것이다. <한문-그칠·거리낄애;+>

신라 말엽 가야산 해인사에 화엄의 대가였던 觀惠(관혜;견훤의 福田) 법사와 希郞(희랑;왕건의 福田;복전) 법사가 있었다. 이들을 따르는 문도들은 점차 華嚴圓敎(화엄원교)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져 南岳(남악;화엄사)北岳(북악;해인사)으로 갈려 매양 싸웠다.


해인사(북악) 화엄원교의 법통을 이은 균여는 두 파의 宗趣(종취)가 모순되어 분명하지 않음을 탄식하고는 무릇 막혀서 여러 갈래로 된 것을 하나의 바퀴자국(일철;一轍)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다. 균여가 뒤에 圓通首座(원통수좌)에 올라 화엄교학과 禪學 그리고 재편되는 瑜伽(유가;法相;법상)교학의 통일을 모색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균여는 의상으로부터 상승되어 오는 한국화엄과 智儼(지엄) 이래 法藏·澄觀·宗密(법장·징관·종밀)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본성()과 표상(), (橫盡;황진)(竪盡;수진)의 기호를 통해 和會(화회)를 시도함으로써 佛說(불설)의 핵심인 중도의 가르침을 재천명하고자 했다. 그의 周側(주측) 개념은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아우르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본성과 표상을 융회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때문에 '周側(주측)'은 법계를 바라보는 균여의 기표일 뿐 아니라 그의 전 사상을 표현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종래 균여 화엄의 접근 방식은 性相(성상) 융회의 개념으로만 접근해 왔다. 이는 균여의 불교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집중하기보다도 당시 불교교단이 처한 정치·사회사적인 측면에 치중한 연구자들이 광종에 의해 발탁된 균여가 고려 초기의 통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華嚴;화엄)(:瑜伽;유가)의 융회를 꾀했다고 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균여 화엄의 핵심은 화엄과 유식, 性相(성상)의 융회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화엄 고유의 두 관점(橫盡;황진/竪盡;수진)을 아우르는 주측의 프레임워크로 설명될 수 있다. 주측은 불교사상사의 고유 개념인 理事(이사)의 코드나 性相(성상)의 기호와 달리 균여가 정립한 독창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균여가 정립한 주측 개념을 통해 균여의 인식틀을 살펴보고자 한다.

1.1. 본성()과 표상()의 융회


균여가 살았던 시대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전환기였다. 신라 말부터 전국의 각 지역에서 자본을 축적해 온 여러 호족세력들은 왕권과 결탁하여 더욱 강고해져 있었다. 새로이 세워진 왕조는 이들 지방호족 세력의 강력한 지지 위에서 정립될 수 있었다. 때문에 재위에 오른 고려왕들은 호족중심의 체질로부터 벗어나 왕권중심의 체질로 전환하려고 하였다.


균여가 활동을 개시할 무렵은 후삼국의 통일이 막 시작되어 고려왕들이 천하를 왕권중심으로 집중하려는 시기였다. 국가적으로는 아직 후삼국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였으며, 교단적으로는 견훤의 복전이었던 남악의 관혜(화엄사)와 왕건의 복전이었던 북악의 희랑(해인사)으로 나뉘어 교단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균여 자신은 비록 북악계 출신이었지만 두 계파를 華嚴一乘(화엄일승)의 입장에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한 그의 노력은 본성과 표상의 융회, ()()의 융회라는 형식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균여의 性相(성상) 융회사상은 불교계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목적보다는 광종대의 전제정치를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시각이 있다. 이것은 인간학의 다양한 가능성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정치·사회사적인 시점으로만 파악하려는 시각이다.


균여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비껴가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는 자세를 취했다. 가난한 서민들과 중산층의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서원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보현십원가}는 바로 화엄행자였던 균여의 원행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균여의 사상적 화두는 정치·사회적 시선보다는 당시 인민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시선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존재의 속성을 본성과 표상의 기호로 설명한다. ()은 우리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이며, ()은 우리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서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인 존재이자 그것이 대상화되어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사물이 지니고 있는 그 자신의 정체성이 이라면, 사물이 지니고 있는 현상적 모습은 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본래성인 과 그의 겉모습인 , 즉 본질과 특성은 사물의 총화인 세계의 안()과 밖()의 두 측면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호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기도 했다.


본성과 표상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두 모습이다. 존재의 근원적 모습이 이라면 현상적 모습은 이다. 궁극적 진리가 眞諦(진체)라면 방편적 진리는 俗諦(속체)이다. 존재를 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 가지 모습이 三性(삼성)이라면, 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 가지 모습은 三無性(삼무성)이다. 유위적 원리가 緣起(연기)라면 무위적 원리는 性起(성기)이다. 이렇듯 불교사상사에 등장하는 개념들은 ()()의 기호처럼 존재의 두 측면으로 표현된다.


인도불교사상사에서 (;진제)(;속제)의 코드로 자아와 세계를 설명했다면, 중국불교사상사에서는 (;진여)(;생멸)의 기호로 인간과 자연을 해명했다. 그리고 한국불교사상사에서는 , 의 코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도 의 기호로 껴안으면서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이해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文雅(문아;圓測:원측), 元曉(원효), 義湘(의상), 太賢(태현) 등과 같은 불학자들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균여 역시 화엄가로서 ()(), ()()의 기호를 사용하면서도 ()()의 코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했다.


불교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존재의 속성에 대한 치밀한 통찰이 투영되어 있다. 즉 현상계의 존재를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相宗(상종)이라면, 그 존재를 空觀(공관)에 입각하여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性宗(성종)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가 유식사상의 특징이라면, 후자는 반야중관 및 삼론·화엄사상 등의 특징이다.


또 화엄사상 안에는 유위적 측면인 緣起(연기)와 무위적 측면인 性起(성기)가 내재해 있다. 이는 현상계의 모습을 法界緣起(법계연기)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如來性起(여래성기)로 인식하느냐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현상계가 지니고 있는 圓融(원융)한 모습을 강조하면 性起論(성기론)으로 전개되며, 차별적인 모습을 강조하면 緣起論(연기론)으로 전개된다. 때문에 연기론과 성기론의 긴장과 탄력 위에서 화엄의 일승학은 구축된다.


균여는 불교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인 본성과 표상의 문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했다. ()()은 중관과 유식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화엄과 유가(법상)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이는 인도대승불교의 중심적 과제이자 중국불교의 핵심적인 쟁점이다.


더욱이 ()(), ()()의 문제는 ()()의 문제로도 설명된다. 균여는 화엄의 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근원적 원리()와 구체적 사태()를 주측의 개념을 통해 표현한다. 여기서 ()는 근원적 원리인 진여이자 理實法界(이실법계)이다. 여기서 理實(이실)은 진여의 무자성을 의미하고 법계는 진여의 실체를 말한다.
균여는 이치적인 측면에서, 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이 道理(도리)라고 하였다. 그는 차별성을 강조하는 연기적인 측면보다는 원융성을 강조하는 성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균여는 를 시간적으로 변화하고 공간적으로 점유하는 구체적인 사태, 즉 집이나 수풀, 연못, 산 등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 (), ()의 차별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균여는 연기의 법문을 구체적인 사태인 라고 하면서도 그 一乘(일승) 안에 있다고 파악한다. 그는 연기의 법문 안에서 동교일승이 아닌 별교일승을 강조한다. 이는 {법화경}을 돈교와 원교로 보면서, 별교로 보지 않고 동교로 보는 교판관에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서 균여의 연기의 事法(사법)은 별교일승 중에서 논해지므로, 일승과 삼승이 ()에서뿐만 아니라 뜻에서까지 차별이 없는 本來無二(본래무이)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체적 사태인 를 두고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일체로 파악하는 강력한 융회적 입장이 바로 균여사상의 특색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균여는 에 의한 성불을 眞空(진공)本性(본성)卽入(즉입)하는 성기론적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본다. 그는 세 가지의 성불로서 (), (), ()成佛(성불)을 든다. 성불은 六相(육상)차별을 방편으로 보는 것이며, 성불은 자신의 근기에서 가장 수승한 구경의 경계를 얻음으로써 성불에 이른다는 것이다. 의 성불은 차별성을 방편으로 하여 佛果(불과)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의 성불은 모든 차별의 나머지 모습이 다하여 본성으로 돌아가야만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균여는 이 를 법성과 연기의 면으로 이해한다. 즉 근원적 원리인 는 법성의 으로, 구체적 사태인 는 연기의 ()으로 이해하거나 ()(), 法身(법신)應身(응신), 不變(불변)인 진제와 隨緣(수연)인 속제로 파악하는데, 이것은 법장의 설을 소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 의 관념으로 수용하였다. 非劫(비겁), ()으로 설정하거나 九世(구세), 非世(비세)에 짝짓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 圓融(원융)行布(항포), (), ()(), 평등과 차별, 本有(본유)修生(수생), ()(), 眞空(진공)으로 돌아가는 것과 三世(삼세)를 만나는 것 등으로 짝 지었다.


이는 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는 데 비해서 는 그 모습을 가지지 않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 때문에 어떠한 인식의 대상()이 스러져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 와 구체적인 인식 대상과 더불어 하는 는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균여는 , , 등의 무수한 二項(이항)을 통해 융회의 사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곧 그가 모색하고자 한 독창적 코드인 ()()의 기호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균여가 의 기호를 통해 융회를 모색한 것은 종래 화엄의 무수한 이항의 담론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주측의 코드를 통해 자신의 인식틀을 정립하기 위해서였다.


()()의 무애를 통해 대중교화로 나아갔던 것 역시 화엄행자였던 균여 자신의 실천적 화엄을 주창하기 위한 모색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균여의 시선 역시 이러한 융회적 관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1.2.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의 무애


균여는 평생을 화엄행자로 살았다. 출가한 뒤 그는 화엄학통의 두 계파가 반목 질시하여 대립할 때도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열심히 敎說(교설)하여 계파간의 알력과 분쟁을 종식시켰다. 균여는 오로지 '불법을 넓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洪法利人;홍법리인) 일에 전심전력했다.


여러 諸家(제가)들의 章疏類(장소류)에 일반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주석(記釋;기석)을 달아 편의를 주었다. 당시의 보편적인 언어(方言;방언)를 취하여 누구나 알기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대표적인 장소류들에 주석을 단 것이다.


이는 교단을 정비하고 교육을 통한 제자 양성의 노력, 그리고 다수의 관음 정토 계통의 발원문을 통해 서민 대중에게까지 화엄원교의 가르침을 전하려 했던 의상의 노력과도 겹친다. 하지만 교단의 소임을 맡으면서 갈등 역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현덕 5(958)불일사 안에 벼락이 떨어졌다. 재변을 없애고자 하면 모름지기 큰 법력에 의지해야 했다. 대사를 청하여 강연을 벌이는데 한낮부터 한밤까지 거의 3주일을 쉬지 않았다. (대사가) 묻고 대답함에 있어서 '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진행하였다. 모인 무리 중에 悟賢徹達--徹達(오현철달--철달)은 지금의 승통이다--이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을 했다. '강연의 주제자가 비록 명민하나 그래도 후배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그래도 선배다. 그런데 어찌하여 묻고 대답하는 데 겸양과 사양의 예를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 이러한 혐의를 두고 곧 비방의 말을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한 거사가 다가와서는 말리며 말하기를 "시기하고 분해할 것 없습니다. 오늘의 강사는 그대 선조 義湘(의상)대사의 제7化身(화신)입니다. 큰 가르침을 널리 펴시고자 다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현이 듣고는 깜짝 놀라 곧 대중에게 말을 전하여 "내가 잘못 알았다" 하고 참회를 하였다.


이 기록은 선배 학승인 오현과 후배 학승인 균여의 갈등이 뜻밖의 정보에 의해 해소됨을 보여주고 있다. 갈등 해소의 열쇠는 단연 의상과의 연계성이다. 의상의 제7화신으로 비정된 균여의 미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의 무애를 위해 화엄행자로서의 보살도를 실천한 의상과 균여의 행적이 서로 겹치는 지점에서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무릇 大聖(대성)의 좋은 가르침에는 일정한 방도가 없고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라서 같지 않으니 …… 그러므로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의거하여 간략히 槃詩(반시)를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이 그 이름을 넘어선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화엄의 핵심 종지를 뽑아내고 그것을 다시 반시의 형태로 만들어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참된 근원으로 이끌고저 했던 의상이나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오로지 '불법을 넓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洪法利人;홍법리인) 일에 전심전력했던 균여의 보살행은 모두 화엄행자로서의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을 이항대립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화회하려고 했던 의상과 균여는 화엄행자의 삶을 살았다. 화엄행이 바로 보현행원이듯이 의상이나 균여 모두 보현행을 통해 을 융회하려고 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균여는 '노래 중의 노래'詞腦歌(사뇌가)를 지어 세상을 교화시켰다. [보현십원가] [普賢十種願往歌(보현십종원왕가)] 11수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는 의 무애 위에서 전개된 그의 보살행의 일환이었다. 그는 향가 11수를 지으면서 서문에 이렇게 썼다.

대저 詞腦(사뇌)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데 쓰는 도구요, 願往(원왕)이라 하는 것은 보살이 수행하는 데 줏대가 되는 것이라. 그리하여 얕은 데를 지나서야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가까운 데부터 시작해야 먼 곳에 다다를 수가 있는 것이니, 세속의 이치에 기대지 않고는 저열한 바탕을 인도할 길이 없고, 비속한 언사에 의지하지 않고는 큰 인연을 드러낼 길이 없도다.


이제 쉬 알 수 있는 것은 비근한 일을 바탕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심원한 宗旨(종지)를 깨우치게 하고자 열 가지 큰 서원의 글에 의지하여 열한 마리 거친 노래의 구를 짓노니, 뭇 사람의 눈에 보이기는 몹시 부끄러운 일이나 모든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될 것을 바라노라. 비록 지은이의 생각이 잘못되고 언사가 적당치 않아 성현의 오묘한 뜻에 알맞지 않더라도 서문을 쓰고 시구를 짓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의 선한 바탕을 일깨우고자 함이니,
비웃으려고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인연을 맺을 것이며, 훼방하려고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이익을 얻을 것이니라. 엎드려 바라노니 훗날의 군자들이여, 비방도 찬양도 말아 주시기를!

모름지기 중생을 교화하려고 할 때에는 세상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도구(詞腦;사뇌)를 매개하는 것만큼 요긴한 방법은 없다. 어린아이도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直立(직립)'을 통해 언어를 발견하고 도구를 발견하여 활용할 줄 알듯이, 해당 분야의 가르침을 문외한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성장 과정과 같이 낮은 데서 높은 데로,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나아가야만 한다.


보살이 중생구제의 손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수행의 줏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誓願(서원)의 벼리인 '願往(원왕)'인 것이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내 살갗을 벗겨 종이로 삼고, 내 뼈를 쪼개 붓을 삼으며, 내 피를 뽑아 먹물로 삼아, 경전 베껴 쓰기를 수미산만큼 쌓더라도, 불법을 소중히 여기므로 내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다"고 했듯이 균여는 그러한 마음으로 [보현십원가] 11수를 지어 보살행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중국 정통문법과는 달리 우리 고유의 서민적인 문체로 중국과 한국 화엄의 성취를 유감 없이 집대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지은 다수의 저술은 오히려 뒷날 新編諸宗敎藏總錄(신편제종교장총록) 高麗敎藏(고려교장) 3권을 집대성하는 義天(의천)에 의해 비판된다.

海東(해동)의 선대 여러 법사가 남긴 기록은 그 학문이 날카롭거나 두루하지 못하고 억설이 더욱 많음이 한탄스럽다. 그리하여 어리석고 어두운 後生(후생)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어서 중생이 능히 聖敎(성교)로써 거울로 삼아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구히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梵雲·眞派·靈潤(균여·범운·진파·영윤) 등 여러 법사의 책은 잘못된 것으로, 그 말은 글을 이루지 못하고 그 뜻은 通變(통변)함을 얻지 못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무지로 만들고 後生(후생)을 현혹시킨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이러한 의천의 시각은 의상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화엄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법장으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정통으로 여기는 사대주의적 발언이다. 아울러 균여의 문체와 시각을 비판하고 晋秀淨源(진수정원)으로 이어지는 중국화엄을 상승한 자신을 정통으로 내세우는 발언이라 보여진다. 즉 한국화엄과 중국화엄을 융회적 시각으로 집대성한 균여계의 화엄을 비판하고 법장의 문법을 계승해 온 정원의 화엄을 상승한 자신의 인식틀을 세우기 위한 거대한 문화적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균여의 저술이 天其(천기) 등에 의해 방언이 삭제된 텍스트라 해도 위의 지적처럼 "글을 이루지 못하고 그 뜻은 通變(통변)함을 얻지 못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무지로 만들고 後生(후생)을 현혹시킨 것"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기에는 주측으로 표현되는 균여의 인식틀까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어떻든 의천의 이러한 발언은 [보현십원가]를 지어 성속의 무애를 도모했던 균여의 보살행을 평가절하하는 발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황해도 해주의 미미한 집안의 후예로 태어난 균여와 뒷날 고려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祐世僧統(우세승통)에까지 오른 왕족인 의천과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런 격의 없이 가난한 백성들과 힘없는 대중들의 생각을 담기 위해 노력했던 균여의 보살행과, 신이한 법력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무하려 했던 그를 의천이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방언을 즐겨 사용했던 균여의 문체나, 이론보다 실천 중심의 화엄을 표방했던 균여를 정통문법을 지향하며 이론 중심의 중국화엄을 흡수하려 했던 의천이 수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방언과 화법을 통해 화엄원교의 골수를 높게 형상화한 [보현십원가]를 통해 불교를 대중화시킨 균여의 보현행은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지향의 불교와는 달랐던 것이다. 난해하고 복잡한 화엄의 哲理(철리)를 법계연기의 因陀羅網(인타라망)으로 짜낸 법장의 조직적 章疏類(장소류)와 달리 화엄행자인 균여의 서원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보현십원가]는 바로 화엄보살의 원행이었으며 중국화엄과 변별되는 균여 화엄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균여는 諸家(제가)들의 장소류에다 일반인들까지 읽을 수 있는 주석을 달아 널리 유통되게 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보편적인 언어와 문체를 취하여 세인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이 비록 의천에 의해 비판받아 [신편제종교장총록]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었으나 뒷날 균여를 알아본 天其(천기) 등이 방언을 삭제하고 임금에게 주청함으로써 [고려대장경] [보유편]入藏(입장)되었다. 그것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텍스트이다.


균여 시대 고려 초기의 불교계는 신라 이래 상승되어 온 화엄교학 중심의 교단이 주도해 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새로이 정립되기 시작하는 禪法(선법)의 산문이 하나의 물결로 떠오르고 있었고, 아울러 瑜伽(유가;法相:법상) 교단도 다시 정비되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균여의 ()()의 무애행은 이론(저술)과 실천(노래 교화)이 하나되는 화엄행자의 도정 위에서 시행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2. 敎判을 보는 눈(교판)


균여의 본성은 邊氏(변씨)이고 법명이 均如(균여)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품이 밝고(煥性;환성) 뜻이 고상하였으나(尙志;상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亡名;망명). 후에 낙랑군부인의 존호를 받았던 어머니 占命(점명)은 나이 60에 임신하여 일곱 달 만에 대사를 낳았다. 대사의 용모가 추하여 길거리에 버렸더니 까마귀 두 마리가 날갯죽지를 펼쳐서 아이의 몸을 보호하였다. 길 가던 사람이 놀라서 부모에게 알린 덕분에 잘못을 뉘우친 부모의 손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15(志學之歲;지학지세)에 사촌형인 善均(선균)화상을 따라 부흥사에 가서 識賢(식현)화상에게서 공부하였다. 아울러 영통사의 義順(의순)화상에게도 나아가 더 큰 공부를 하였다. 이는 가르치는 이의 그릇이 가르침 받는 이의 자질보다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스승을 옮겨 배운 균여는 화엄학승으로 대성했다.

2.1. 균여의 삶과 저술


균여는 祈晴祭(기청제)를 통해 광종과 인연을 맺었다. 광종 4(953) 3월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때마침 後周(후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했다. 비가 계속되어 책봉의례를 거행할 수 없자 후주 사신이 "동쪽 나라에는 반드시 성인될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 그로 하여금 날이 개도록 기도드리게 하지 않습니까? 만일 날이 갠다면 나는 聖賢(성현)의 징험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광종은 다음날 기청제를 지낼 만한 성현의 사문을 천거하게 했다.


그때 국사 謙信(겸신)均如(균여)대사를 천거했다. 법사는 그때 젊은 나이였는데 나라의 청함을 받고 경건하게 걸음을 옮겨 사자좌에 오르셔서는 圓音(원음)으로 연설했더니 천둥과 번개가 없어지고 잠깐 사이에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잦아지면서 하늘이 개이고 해가 나타났다. 이때 광종은 대사를 공경하여 아홉 번의 절을 올리고는 대사가 태어난 곳을 물었다.
대사는 "黃州(황주)의 북쪽 둔대엽촌이 제 고향입니다"라고 하였다. 광종이 '용과 이무기가 난 곳이 큰 연못(大澤;대택)이 아니긴 하나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 어찌 열 집(十室;십실)의 작은 마을에 없으리요?'라고 생각하여 얼마 뒤 대사를 大德(대덕)에 봉하고 아울러 칙명으로 속세의 식구(眷屬;권속) 십여 명에게 각각 25()의 밭과 남종 여종 각각 다섯 명씩 내리고 황주성 안에 옮겨 살도록 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균여는 황해도 황주 둔대엽촌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균여는 용과 이무기나 태어날 만한, 다시 말하면 대호족의 집안이 아닌 열 집 남짓 모여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광종의 妻家(처가) 역시 황주의 대호족인 황보씨 집안이었다. 균여의 집안이 처음부터 황보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균여가 광종과 인연을 맺고 난 뒤부터 균여 집안과 황보씨 집안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듯하다.


하지만 광종과 관련을 맺은 균여가 교단의 요직을 맡아보기 시작하면서 다른 문중과의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균여전]에 의하면 正秀(정수) 등과의 갈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개보 연간에 귀법사의 사문 正秀(정수)가 법관에게 나아가 일을 꾸며 참소하기를, "균여대사가 반역의 마음을 품고서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관리가 그 일을 아뢰었더니 광종이 듣고 노하여 대사를 급히 부르게 하여 입궐하면 해하려 하였다. 대사가 대왕의 처소에 이르러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엎드리었다. 광종이 그 정상을 보고는 정직하다 여기고 칙령을 바꾸어 의관 두 사람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곧이어 承宣薛光(승선설광)을 절로 보내어 위무하게 하였다. 이날 밤 대왕의 꿈에 키가 한 길이나 되는 神人(신인)이 나타나 침전을 누르고 서서 말하기를 "대왕께서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法王(법왕)을 능욕하였으니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일이 크게 일어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자 땀이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가까운 신하를 불러서 꿈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송악 북쪽에서는 바람이 없는데도 소나무 몇 천 그루가 저절로 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대왕께서 이 변괴를 들으시고 점을 쳐 보라 명하시니 후회스럽고 두려워 곧 대궐 안에 消災道場(소재도장)을 시설하고 법관에게 명하여 正秀(정수)의 방을 철거하라 하였다. (정수의) 在家(재가) ()은 문서를 날조하여 아우로 하여금 무고하게 한 죄로 정수와 한날 죽임을 당하였다.


정수와 균여는 화엄원교에 대한 입장이 달랐던 듯하다. 정수는 균여가 신이한 법력으로 불법을 폄으로써 불교의 정통문법을 파괴하고, 아울러 {보현십원가}를 통한 균여의 불교 대중화 노력이 지극히 비불교적이라고 여겼던 문중의 대표일 수도 있다. 때문에 화엄에 대한 정수의 입장과 균여의 입장 차이에서 벌어진 사건일 수 있다.


또 출가자의 위계질서가 분명한 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후배인 균여의 강력한 교단개혁 과정을 그와 다른 입장에 서 있던 정수가 거부했다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화엄에 대한 남악과 북악의 이해 방식이 서로 달랐듯이 균여가 화엄사(남악)와 해인사(북악)의 입장을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악 출신인 균여와 달리 정수는 남악 출신일 수 있다. 때문에 균여의 교단 개혁이 정수 자신이 속한 문파의 이익과 위배되므로 그것을 막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광종과의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균여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또 권력과의 긴밀한 관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정수계에서 관계 복원을 위한 계략으로 만들어 낸 사건일 수도 있다.


하여튼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교적 입장이나 대 국가·사회적 관점이 달랐던 그룹의 시각을 대표했던 正秀(정수)가 균여를 참소하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균여는 남악과 북악으로 대립하던 교단을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시켰다. 이는 국가에 대한 불교계의 목소리를 한 곳으로 모을 통로를 모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균여는 광종 14(963)歸法寺(귀법사)가 창건되자 그곳의 주지를 맡으면서 입적 때까지 광종의 귀의를 받는다. 이후에도 나라가 처한 여러 차례의 천재지변을 法力(법력)을 통해 물리침으로써 광종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광종과의 긴밀한 과정은 오히려 균여를 權僧(권승)으로 보게 하거나, 또는 불교를 광종대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했다는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많은 저술을 통해 그러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


많은 저술을 통해 중생교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던 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1159권의 저술에는 중국화엄과 한국화엄이 망라되어 있다. 화엄 2조인 지엄의 저술을 주석한 搜玄方軌記(수현방궤기)(10), 孔目章記(공목장기)(8), 五十要問答記(오십요문답기)(4), 十句章圓通記(십구장원통기)(1, 2)3조 법장의 저술을 주석한 敎分記圓通(교분기원통초)(7, 10), 旨歸章圓通(지귀장원통초)(2), 三寶章圓通記(삼보장원통기)(2) 그리고 의상의 저술을 주석한 法界圖圓通記(법계도원통기)(2)가 이를 말해 준다. <한문: ; +>


또 현존하지는 않지만 入法界品抄(입법계품초)(1)智儼(지엄)義湘(의상)澄觀(징관)의 저술목록에 모두 들어 있으며, 심지어 원효의 저술목록에도 들어 있는 것이다. 균여 화엄의 성격이 특히 징관과 종밀의 화회적 체계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입법계품초]는 아마도 징관의 저술에 대한 주석으로 추정된다. 그의 저술은 6('보현십원가' 11수 포함) 18권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면 그의 불교 이해, 즉 화엄 오교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로 한다.

2.2. 화엄 五敎判의 새 해석(오교판)


敎相判釋(교상판석)은 붓다의 가르침을 계통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 즉 붓다의 가르침을 시간적으로나 내용(형식) 또는 방법적 잣대를 통해 체계 지우는 틀이다. 때문에 교판의 출발은 어떠한 편향 없이 정립되었다. '天台智(천태지의)'의 표현대로 '南三 北七(남삼 북칠)'로 대표되는 당시의 교판은 각 종파가 형성되면서 자종의 이론적 틀로서 자리매김된다. 양자강 남쪽의 3종 교판과 북쪽의 7종 교판이 당시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南三 北七(남삼 북칠)에 입각하여 많은 교판이 생겨 나왔다. 그러나 중국의 남북조를 거치면서 점차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적 모습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가장 위에 온다'(後來居上;후래거상)는 것처럼 각 종파들은 自宗(자종)의 소의 경론을 가장 나중에다 배치하였다.


그래서 모든 경론들을 오직 자종의 소의경론의 등장을 위한 배경으로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佛說(불설)을 자종의 해석틀에 맞추어 지극히 편벽되고 국집된 시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판은 결국 중국 종파불교 성립의 근간이 되었다.


한국의 고승들 역시 불설 이해의 틀인 교판을 세웠다. 문아(원측), 원효, 승장, 태현 등 유수한 사상가들은 불학을 보는 자신들의 안목이 있었다. 그 안목은 자신이 속한 집안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균여의 교판은 법장(643~724)의 교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균여의 교판은 법장의 華嚴一乘敎義分齊章(화엄일승교의분제장) (화엄오교장)에 관한 주석인 釋華嚴敎分記圓通(석화엄교분기원통초)에 실려 있다. 법장은 同別(동별) 2교판, 510종판, 4종판의 교판을 세웠다. 그 중에서 화엄의 대표적 교판으로 정립된 법장의 510종판은 그의 [화엄오교장]에 잘 나타나 있다. <한문: ; +>

법장은 먼저 慈恩窺基(자은규기;632~682)8종판 중 7종판을 자신의 10종판 안에 그대로 흡수하고 여덟 번째에 여래장 전통의 不空宗(불공종)을 배당시켜 眞實不空宗(진실불공종)으로 설정했다. 거기에다 不二(不二)적인 가르침을 머금고 있는 유마경을 배당하여 相想俱絶宗(상상구절종)을 아홉 번째에 배당하고, 마지막으로 완전한 가르침으로 화엄경을 배당하여 圓明俱德宗(원명구덕종)이라 했다.


법장은 오교판을 소승교(1~6)로부터 시작하여 대승시교(7대승종교(8대승돈교(9대승원교(10)로 짰다. 먼저 小乘敎(소승교)에는 {아함경}을 중심으로 하는 근본경전을 짝지웠다. 大乘始敎(대승시교)에는 반야경과 해심밀경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두 사조인 중관과 유식으로 설정했다.


大乘終敎(대승종교)에는 여래장경 등을 중심으로 설정했으며, 大乘頓敎(대승돈교)에는 이후 선법의 소의경론이 되는 능가경과 유마경 등의 경전을, 大乘圓敎(대승원교)에는 법화경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정했다.


그러다가 법장은 나중에 [화엄경탐현기]를 지으면서 종래 자신의 510종판을 4교판으로 수정했다. 그는 소승교는 隨相法執宗(수상법집종)으로, 대승시교는 둘로 나누어 하나는 반야중관의 교학을 空始敎(공시교)眞空無相宗(진공무상종)으로, 다른 하나는 유가유식의 교학을 相始敎(상시교)唯識法相宗(유식법상종)으로 설정하고, 대승종교를 대승돈교와 대승원교를 포괄하는 如來藏緣起宗(여래장연기종)으로 재편한다.


균여는 법장의 [화엄오교장]을 해석한 [교분기원통초]에서 지엄이 [수현기]에서 언급한 3종 교판에 대해 순차적으로 요약하여 이름붙였다. 修相漸(수상점)修相(수상)은 삼승의 지위에 기대어 이 일승 스스로의 덕을 나타내므로 별교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서, 오교 가운데에서는 점교는 아래의 3교를 말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漸頓圓 三敎(점돈원 삼교)에 대하여 점교를 修相漸(수상점), 돈교를 實際頓(실제돈), 원교를 窮實圓(궁실원)이라고 이름붙인다. 實際頓(실제돈)의 실제는 一乘行者(일승행자)解行(해행)을 말하며, 窮實圓(궁실원)窮實(궁실)果海(과해)를 말한다고 풀이했다.


균여는 지엄이 말한 화엄경에 대한 세 가지의 이름, '大方廣佛華嚴毘盧遮那所說經(대방광불화엄비로차나소설경)', '大方廣佛華嚴普賢菩薩所說經(대방광불화엄보현보살소설경)', '大方廣佛華嚴諸菩薩修業經(대방광불화엄제보살수업경)'을 전제하고 搜玄記(수현기)를 인용하여 자신의 화엄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균여는 지엄이 '처음에 다섯 바다를 관찰한다'(初觀五海等;초관오해등)라는 경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일으키는 것'의 열 가지 뜻(十義;십의)을 나열하고 第一義(제일의)에서 第三義(제삼의)까지에 해당된다고 했지만, 지엄이 화엄경 전체를 세 가지 이름으로 총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균여는 이 세 가지의 이름이 점교와 돈교와 원교 3교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질문세 경을 3교에 준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첫째는 다음과 같이 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세 ()이 각기 세 가르침을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오직 頓敎(돈교)圓敎(원교) 안에서만 세 경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 지금 세 번째 뜻을 따라 풀이하면 이 경의 세 敎義(교의) 가운데에서 頓敎(돈교)圓敎(원교) 2五敎(오교) 第五 圓敎(제오 원교)에 포섭된다. 때문에 이 세 경만이 頓敎(돈교)圓敎(원교)이다.

지엄의 [수현기]에 나오는 漸頓圓(점돈원)三敎相(삼교상)'對治方便行門差殊(대치방편행문차수)'에 근거하여 '方便修相對治緣起自類因行(방편수상대치연기자류인행)', '實際緣起自體因行(실제연기자체인행)', '窮實法界不增不減無障緣起自體甚深秘密果道時(궁실법계부증불감무장애연기자체심심비밀과도시)'라고 하는 行門(행문)에 세 가지의 차제를 나누어 설하고 있는 것을 순차적으로 요약하여 이름붙이고 있다.


균여는 점교와 돈교와 원교의 3교 가운데에서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에 짝 짓고 있다. 법장의 오교판인 소승교와 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의 틀로 말하면 화엄경은 대승원교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지엄의 [수현기]에 근거한 修相漸(수상점)을 점교, 實際頓(실제돈)을 돈교, 窮實圓(궁실원)을 원교에 짝지우면서 화엄경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다.


균여는 이러한 세 가지 뜻에 의거하여 점교와 원교 및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의 5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섯 번째인 원교로 귀일시키고 있다. 균여는 화엄경을 원교 또는 돈교와 원교로 설정하고 그 나머지 교의나 경전에 대해서는 확고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질문옛사람이 이르기를 이 경 가운데에는 三敎(삼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修相(수상)()은 이 경에 다 통하며, 實際(실제)() 역시 이 경에 다하므로 이 경 안에는 3교가 갖추어져 있거늘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는가?
대답비록 그 뜻이 있지만 그러나 아래의 4교는 修相漸(수상점)이며 華嚴經(화엄경)만이 頓敎(돈교)圓敎(원교)이기 때문이다.

균여는 점돈원 3교에서 화엄경은 돈교와 원교 2교라고 하면서도, 5교에서는 돈교까지를 포함하고 나머지 4교를 修相漸(수상점)이라고 한다. 즉 점돈원의 점교 가운데에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의 4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돈교가 5교의 중심인가 점돈원 3교의 중심인가는 화엄경에서 설한 교의에 해당되는가 아닌가에서 중요한 相違(상위)가 생겨난다. 이것은 [수현기]에서 光統律師 慧光(광통율사 혜광)의 설을 끌어들여 점돈원 3교를 설해 마치고 "이 경은 곧 ()() 2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화엄경을 판석하고 있다.


따라서 점돈원 3교로 보든 5교로 보든 균여는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법장의 오교판에서 원교인 법화경을 同敎一乘(동교일승)으로 보느냐 別敎一乘(별교일승)으로 보느냐의 구분과 함께 교판에 대한 균여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2.3. 대승원교에서 同敎(동교)別敎(별교) 이해
[출처] 균여의 周側學(주측학)|작성자 불교공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