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여의 周側學(주측학) 2-2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고영석
Framework of Zhou-Zhai in Kyunyeo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 -
고 영 섭 (Ko Yeong-seop):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강사 mansan@unitel.co.kr
목 차
1. 인간과 세계를 보는 눈
1.1. 본성(性)과 표상(相)의 융회
1.2. 성스러움(聖)과 속스러움(俗)의 무애
2. 敎判(교판)을 보는 눈
2.1. 균여의 삶과 저술
2.2. 화엄 五敎判(오교판)의 새 해석
2.3. 대승원교에서 同敎(동교)와 別敎(별교) 이해
3. 균여의 주측학
3.1. 橫盡(황진)의 법계
3.2. 竪盡(수진)의 법계
3.3. 周側(주측)의 법계
2.3. 대승원교에서 同敎와 別敎 이해 (동교 · 별교)
법장의 [화엄오교장]의 첫 장인 [建立一乘(건립일승)]에 의하면 일승을 동교와 별교로 나누고 있다. 동교일승은 分諸乘(분제승)과 融本末(융본말)로 나누어 설명하고, 별교일승에서는 性海果分(성해과분)과 緣起因分(연기인분)으로 나누고 있으며, 緣起因分(연기인분)은 分相該攝(분상해섭)으로 전개하고 있다.
동교일승은 별교일승이 다함이 없이 존재하며 널리 모든 근기의 인연에 응한 교의의 논거로서 諸乘(제승)에 걸쳐 설한다. 一乘敎義(일승교의)는 동별 2교에서 전개된 4문에 의거하여 건립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 별교일승의 分相門(분상문)에서는 10문을 세우고, 별교일승이 어떻게 삼승과 구별된 교의 내용인가를 법화경 [비유품]의 大白牛車(대백우거)와 三車(삼거)의 비유를 기본으로 하여 설한다. 법장에게 분상문은 어디까지나 별교일승을 설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균여의 시각은 그게 아니다.
균여는 동교와 별교의 2교판에서 대승원교를 다시 동교일승과 별교일승으로 분류하는 법장과는 달리, 법화경을 熟敎(숙교)[=終(종)교]와 頓敎(돈교)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동교와 별교의 2교에 모두 통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동교는 제4교인 돈교 위에 있는 것이지만 제5교인 원교는 아니며, 화엄원교에 동교일승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균여는 법장의 [교분기]에서 설정한 분상문 10문 중 제9문까지를 둘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의 여섯 차별은 同敎分相(동교분상)이지만 일곱·여덟·아홉 문의 세 가지 차별은 {화엄경}을 인용하기 때문에 別敎分相(별교분상)이다. 그러므로 權實(권실)의 차별 또한 初敎(초교)를 방편으로, 熟敎(숙교)와 頓敎(돈교)를 진실로 삼는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제1문의 權實差別(권실차별)에서부터 제6문의 附囑差別(부촉차별)까지는 법화경을 經證(경증)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동교의 分相門(분상문)이며, 제7문부터 제9문까지는 화엄경에 의한 별교의 분상문이다. 때문에 방편과 진실의 경계는 동교와 별교의 구분에서 경계지어지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동교와 별교에 대한 균여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를테면 法華經(법화경) 가운데에는 때(時)와 일(事)에 의거한 判釋(판석)이 있고 뜻(義)에 의거한 判釋(판석)이 있다. 때와 일에 근거하여 判釋(판석)하면 熟敎(숙교)와 頓敎(돈교)에 해당하고, 만일 뜻에 의거하여 높게 判釋(판석)하면 同別 二敎(동별 이교)가 있게 된다. 同敎(동교)는 華嚴(화엄)의 아래이면서 四敎(사교)의 위에 있다. 別敎(별교)는 華嚴(화엄)과 둘이 아니다. 지금은 別敎(별교)의 뜻에 의거하기 때문에 圓敎(원교)는 文證(문증)에 해당된다.
법화경의 敎相(교상)은 시간(時)과 대상(事)에 의거하면 숙교와 돈교 2교에 해당되지만, 뜻에 의거하여 判釋(판석)하면 同別(동별) 2교에 통하게 된다. 그러나 동교는 화엄의 아래이자 4교의 위에 있으며, 아래의 4교보다는 높지만 원교는 아니며, 화엄원교에 동교일승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그는 법화경이 일승사상을 설하는 경전이라고 하면서도 화엄경에 상대해서는 아래 단계에 설정함으로써 별교와 동교로 두 경전을 갈래지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균여는 법화경을 돈교와 원교로 설명하면서도 동교를 일승교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는 법장이 별교일승을 논증하기 위하여 법화경을 유용하게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균여는 지엄과 의상이 거론하였던 所流(소류)와 所目(소목)과 方便(방편)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교판 용어로 활용한다. 방편승의 영역에서 동교의 내용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流目(유목;所流와 所目)은 지엄의 [공목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며 의상 역시 이 개념을 원용하였다. 의상은 수행방편에 의거하여 수행방편 자체를 해명하는 대목에서 원용하고 있다.
의상은 방편일승에 의거하여 一乘所流(일승소류), 一乘所目(일승소목), 一乘方便(일승방편)을 구분한 뒤 앞의 둘을 緣起道理(연기도리)에 의거한 것으로 보고, 뒤의 방편은 智(지)에 근거한 용어로 보았다.
이것은 방편이 자신의 경지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나아가 廻心(회심)을 전제로 하여 중생을 이끌기 위해 五乘(오승)으로 펼쳐 교설한 선교방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流目(유목)은 수행방편의 논리적인 연기도리의 측면에서, 방편은 실천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균여는 별교가 화엄과 둘이 아닌 별교일승이며 별교만이 원교라고 말한다. 즉 별교와 동교를 구별하여 화엄경과 법화경의 교상을 경계짓고 있다. 이러한 同別(동별) 2교에 대한 해석은 五敎章(오교장) 본문에서나 다른 주석들에서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교판관으로 삼은 것은 균여의 독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균여는 법장처럼 법화경을 화엄경과 같이 원교로 짝짓고는 있다. 균여는 지엄의 漸頓圓(점돈원) 3교판과 법장의 5교판을 수용하면서도 동교로 분류되는 법화경을 일승교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법장과 다른 균여 교판의 독자성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균여의 교판은 여느 화엄학자와 변별된다. 그의 교판은 [오교장]을 주석할 때에 보여준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균여의 [화엄경]관은 그의 교판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화엄가들은 법장의 화엄교판을 수용해 왔다. 하지만 균여는 법장 교판의 틀을 원용하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해석틀을 만들었다.
균여 역시 光統律師 慧光(광통율사 혜광)의 3종교판을 인용한 지엄의 [수현기]에서의 漸頓圓(점돈원) 3종 교판을 거론하면서 화엄경을 돈교와 원교에 배치하고, 소승교·대승시교·대승종교·대승돈교·대승원교의 오교판에서는 원교에 설정하고 있다.
균여 교판의 특징은 법장이 대승원교로 취급한 법화경과 화엄경을 배치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균여는 {법화의 교상을 시간(時)과 대상(事)에 의거하면 숙교와 돈교에 해당하지만, 뜻(義)에 의거하면 동교와 별교에 통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교판에서 대승원교를 다시 동교와 별교로 나눠 볼 때 동교는 별교일승인 화엄의 아래에 있으며 5교판 중 4교의 위에 있기 때문에 아래의 4교보다는 위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균여는 화엄원교에는 동교일승인 법화경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화엄원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별교이며 그 별교만이 원교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은 종래 화엄학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균여는 화엄경을 頓圓一乘(돈원일승)이라고 하고 일승교학에 동교를 포함시키지 않는 독특한 同別 2교설과 5교설을 설하고 있다. 그는 법장이 별교일승을 논증하기 위하여 단순히 법화경을 끌어들여 동교라고 분류한 것과 다른 해석을 하였다. 균여의 교판에서는 {법화경} 역시도 중요한 교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3. 균여의 주측학
앞 장에서 균여의 교판 이해를 통해 그의 불교관 또는 화엄관을 살펴보았다. 균여는 화엄을 대승돈교이자 원교로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별교일승은 오직 화엄뿐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균여의 화엄관은 주측의 논리를 통해 구축한 법계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균여는 [석화엄지귀장원통초] 권상에서 周側(주측)의 '周(주)'는 橫盡法界(횡진법계)를 말하며, '側(측)'은 竪盡法界(수진법계)라고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다. 균여가 '가로' 또는 '수평'의 의미를 지니는 '周(주)'와, '세로' 또는 '수직'의 의미를 머금고 있는 '側(측)'의 키워드(核語;핵어)를 통해 구축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성기론과 연기론의 입장에 서 있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아우르려는 사상적 전략 위에서였다.
균여가 "티끌(塵;진)과 시방(方;방)에서 '塵(진)'은 微塵(미진)이요 '方'은 十方()이니 미진과 시방을 周側하는 것이다. (여기서) 周(주)는 횡진법계이며, 側(측)은 수진법계이니 지금의 풀이에서는 橫(횡)과 竪(수)를 반드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방삼세에 이 커다란 법(華嚴大法;화엄대법)을 두루 설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주측이라고 일컫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주측'의 논리를 통해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화회하려 했다.
그는 '周'와 '側'의 개념을 원용하여 본성과 표상의 융회, 성스러움과 속스러움의 무애, 티끌과 시방의 원융, 가로와 세로를 회통시키고 있다. 이러한 균여의 화회의 노력은 바로 의상의 횡진법계관과 법장의 수진법계관을 '주측'의 논리 위에서 융회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또 법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로 인해 갈라져 있던 당시 화엄사상계의 분열을 별교일승 원교의 입장에서 총섭하기 위함이었다. 균여는 주측의 기표를 통해 본성과 표상, 성스러움과 속스러움, 티끌과 시방, 가로와 세로, 횡진과 수진의 측면을 통해 화회해 가고 있다.
화엄에서 말하는 법계는 내 마음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뚱이와 사물의 총화인 세계 사이에서 일심으로 펼쳐지는 치열한 긴장과 탄력의 영역 자체이다. 그리고 이 법계를 통해 우리들 자신이 모두 重重無盡(중중무진)의 因陀羅網(인타라망;인드라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나라의 裴休(배휴;797~870)거사는 법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법계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일체 중생의 신심 本體(본체)이다. 본래부터 신령스럽게 밝아 막힌 데가 없으며 광대하여 텅 비고 고요한 것, 이것이 유일한 참다운 경계(眞境;진경)이다. 모습이 없되 대천세계를 펼쳐 놓고 가장자리가 없되 만유를 머금고 있다. 마음의 모습 사이에 뚜렷하지만 모습을 취할 수 없고 티끌의 안에서 빛을 발하되 理(이)를 헤아릴 수 없다. 진리를 꿰뚫는 지혜의 눈과 망념을 여읜 밝은 지혜가 아니고서는 능히 자기 마음의 이 신령한 통함(靈通(영통))을 보지 못한다.
이렇듯 법계는 우리의 "인식 주관에 의하여 대상화되고 인과적 범주에 속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그 자체로서의 존재세계"를 말하며, 이를 법성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법계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은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이다. 여기에 대해 균여는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융회하여 주측의 법계로 설정하고 있다.
화엄의 경론에는 다양한 비유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법계를 설명하기 위해 '돈'(錢;전), '塔(탑)', '數(수)', '菩薩(보살)수행위'(地;지) 등의 비유가 사용된다. 유수한 화엄행자들은 十錢喩(십전유), 十層十塔(십층십탑)과 十層一塔喩(십층일탑유), 一數(일수)와 十數喩(십수유), 初地(초지)와 十地喩(십수유) 등의 비유들을 원용하여 법계를 설명하고 있다. 균여 역시 종래 화엄행자들이 원용한 비유들을 통해 자신의 법계관을 설명해 내고 있다.
횡진과 수진의 법계를 화회하려는 균여의 노력은 중국화엄과 한국화엄의 융회의 과정에서 보여지고 있다. 먼저 균여의 법계관은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자신의 주측의 기호에 의해 아우르고 있다. 의상이 성기론적 관점에서 橫盡(횡진)의 법계를 설정했다면, 법장은 연기론적 관점에서 竪盡(수진)의 법계를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균여는 의상의 횡진을 '周(주)'로, 법장의 수진을 '側(측)'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때문에 균여의 주측은 의상으로 대표되는 해동화엄과 법장으로 대표되는 중국화엄을 화회하는 입장에 있다.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인 [일승법계도원통기]를 보면 법장과 의상의 법계에 대한 관점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하나(一)를 부를 때 일체가 입으로 답하는(一切口許;일체구허)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법장이 (이야기하듯이) 하나의 이름(一名;일명)을 부를 때 일체(一切)가 각각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自名口許;자명구허) 것이다. 둘째는 의상이 (이야기하듯이) 하나의 이름(一名)을 부를 때 일체가 모두 하나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 것(一名口許;일명구허)이다.
풀이하여 말하면, 의상대덕의 盡(진)과 不盡(불진)은 십 층짜리 열 탑(十座十層塔;십좌십층탑)을 나열한 것과 같아서 첫째 탑의 첫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은 첫째 층으로서 한꺼번에 입으로 답하며, 첫째 탑의 둘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 아홉 탑의 둘째 층은 둘째 층으로서 또한 모두 입으로 답한다는 뜻이니 이것이 橫盡法界(횡진법계)의 의미이다.
법장이 하나의 이름(一名)을 부를 때 일체(一切)는 각기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함(自名口許;자명구허)이라 한 것은 마치 십 층짜리 한 탑(一座十層塔;일좌십층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층을 부르자마자 (나머지 층이) 나는 첫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각각 자기의 이름을 입으로 답하는(自名口許;자명구허) 뜻이므로 (이것이) 竪盡法界(수진법계;의 의미)이다.
이 기록은 10層10塔의 비유를 통해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의상과 10層1塔의 비유를 통해 수진법계를 설명하는 법장의 예를 통해 횡진과 수진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횡진법계에서는 제1탑의 제1층을 부르면 제2탑 내지 제10탑의 제1층이 모두 "나도 1층, 나도 1층" 하고 답한다는 것이다. 수진법계에서는 제1층을 부르면 "나는 제1층 내지 나는 제10층" 하고 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엄의 [십구장]에 대한 주석으로 알려지는 十句章圓通記(십구장원통기)에는 횡진법계와 수진법계에 대한 설명이 위의 [일승법계도원통기]의 설명보다 쉽고 명료하게 풀이되어 있다.
의상은 곧 횡진법계를 주장했고, 법장은 수진법계를 주장하였다. 의상의 盡(진)과 不盡(불진)은 하나하나의 계위(一一地;일일지)를 세워 十地(십지) 중의 十地(십지)를 갖추는 것과 같아서, 初地(초지)의 歡喜地(환희지)를 부를 때 뒤의 구지(後九地;후구지) 중의 歡喜地(환희지)로 나아가게 되어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도 歡喜地(환희지) 나도 歡喜地(환희지)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법장의 盡과 不盡(불진)은 한번에 십지로 나아감(一往十地;일왕십지)과 같아서 첫 歡喜地(환희지)를 부를 때 뒤의 九地(구지)가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는 離垢地(이구지) 내지 나는 善慧地(선혜지) 나는 法雲地(법운지)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비유로 설명해 보면 의상의 주장은 마치 열 층의 열 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탑의 첫째 층을 부를 때, 뒤 아홉 탑의 첫째 층이 모두 덩달아 일컫기를 나도 첫째 층 나도 첫째 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橫盡法界(횡진법계)를 뜻한다. 법장의 주장은 마치 열 층짜리 한 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첫째 층을 부를 때 나머지의 아홉 층이 이르기를 나는 둘째 층, 나는 셋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竪盡法界(수진법계)를 뜻한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법계에 대한 의상과 법장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10地 중의 10地' 비유에서 初地(초지)를 부를 때 나머지 9地 중의 歡喜地(환희지)가 나도 환희지라고 응답하는 것을 의상의 횡진법계라 한다면, '한번에 십지로 나아감'(一往十地;일왕십지)의 비유에서 첫 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9地가 나는 離垢地(이구지), 나는 發光地(발광지) 내지 나는 善慧地(선혜지), 나는 法雲地(법운지)라고 응답하는 것을 법장의 수진법계라 할 수 있다.
위의 글에 의하면 의상이 '하나에서 열을 보려고 했다'면, 법장은 '열에서 하나를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의상이 十座十層(십좌십층), 즉 10층10탑을 세워서 횡진법계를 설정하고 있다면, 법장은 一座十層(일좌십층), 즉 10층1탑을 세워서 수진법계를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법계를 1중의 10(向上來;)으로 보느냐, 10중의 1(向下來;향하래)로 보느냐인 것이다. 이 1중의 10과 10중의 1을 開宗記(개종기)에서는 "생사를 버리고 열반을 향하면 향상래이며, 열반을 버리고 생사를 향하여 중생을 교화하면 향하거"라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의상이 10층10탑에서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 '일체가 모두 하나의 입으로 답한다'고 본다면, 법장은 10층1탑에서 '일체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입으로 답한다'고 보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상은 근원적 원리인 '理'와 구체적 사태인 '事'의 관계를 통해 차별과 일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균여는 이러한 두 입장을 주측의 체계를 통해 화회하고 있다.
3.1. 橫盡의 법계(횡진)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근원적 원리(理)와 구체적 사태(事)의 관계를 통해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일즉일체)라는 것은 차별(事;사)의 시작이요, '일체가 곧 하나'(多卽一;多卽一)라는 것은 차별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화엄행자들의 사유체계이다.
횡진법계를 설정한 의상은 10층10탑의 비유를 통해 十方世界(십방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法界圖印(법계도인)은 十地論(십지론)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의상은 10지를 들어서 법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의상은 보살 계위 하나하나가 모두 10지를 갖추는 '10지 중의 10지'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즉 초지의 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9지의 환희지는 모두 같은 것이 되어 그 안에 포함되며, 초지의 선혜지를 부를 때 나머지 9지의 선혜지는 모두 같은 것이 되어 그 속에 포함된다. 또 초지의 법운지 안에 나머지 9지의 법운지가 같은 것으로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10지'의 비유로 설명하면서 '10지 중의 10지'를 '一往十地(일왕십지)'의 비유로, 또는 '10층10탑'(橫盡;횡진)의 비유를 '10층1탑'(竪盡;수진)의 비유로 바꾸어 설명하기도 한다.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가 원용하는 비유를 아울러 원용하면서 비유를 들어 나간다. 아래의 기록에는 횡진의 법계와 수진의 법계를 융회하려는 균여의 생각이 담겨 있다.
만일 十地論(십지론)에 의거하여 初地(초지)에서 十地(십지)로 감(一往十地;일왕십지)을 세워서 말하면, 첫 歡喜地(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九地(구지)가 모두 덩달아 나도 歡喜地(환희지), 나도 歡喜地(환희지)라 일컬으면 (이는) 의상의 주장이다. 첫 歡喜地(환희지)를 부를 때 나머지 九地(구지)가 나는 離垢地(이구지), 나는 發光地(발광지) 내지 나는 法雲地(법운지)라고 하면 (이는) 법장의 주장이다. 만일 10층1탑을 세워 달리 비유하면 첫째 층을 부를 때 뒤의 아홉 층이 일컫기를 나도 첫째 층, 나도 첫째 층이라고 하면 (이는) 의상의 주장이다. 첫째 층을 부르는데 뒤의 아홉 층이 말하기를 나는 둘째 층 내지 나는 열째 층이라고 하는 것은 법장의 주장이다.
의상의 횡진법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지'이며 나머지 9지 역시 초지와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이는 초지를 환희지라 부를 때 나머지 9지들도 각기 덩달아 환희지라고 일컫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때문에 균여에게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10층10탑의 비유는 결국 수진법계를 설명하는 10층1탑의 비유로도 전이된다.
왜냐하면 10층10탑의 비유는 첫 탑의 각 층에 나머지 아홉 탑의 각 층이 속하게 되므로 곧 10층1탑의 비유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횡진법계는 시방세계의 무진연기와 관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층10탑'의 각 층이 첫째 탑의 첫째 층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의 제6구인 인타라문이 횡진법계가 되는 근거가 된다.
因陀羅(인타라)에 기대어 의미의 경계를 드러냄이란, 위로 融會(융회)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안으로는 中心(중심)이 없고 밖으로 경계에 힘쓸 수 없어서 因陀羅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다. 神琳(신림)이 이르기를, 비유하면 세계가 도는 것처럼 시작과 끝이 없고 안과 밖의 구별이 없듯이, 마치 한 마디의 손가락으로 물을 휘저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因陀羅 또한 그러하다.
한 손가락의 물결 속에 法界(법계)의 일체 세계가 나타나 안립하듯이 이 모든 세계는 낱낱의 티끌이 한 손가락의 물결 속으로 거둬들여지고 또한 이 한 손가락 물결 속의 法界(법계) 또한 다시 이와 같으므로 거듭거듭 다함 없게 된다.
티끌과 시방, 가로와 세로를 총섭하고자 하는 화엄에서 횡진법계는 실천의 지평 위에 서 있다. 때문에 횡진법계는 10층10탑의 비유에서의 첫째 층, 10지에서의 초지, 10錢(전)에서의 1錢, 10數(수)에서의 1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횡진법계는 인타라문과 같아서 중중무진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의상이 法性偈(법성게)에서 '一微塵中含十方(일미진중함십방)'이라 한 것은 한 티끌 안에는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하나 안에는 전체가 들어 있다는 언표이다. 이는 횡진법계의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상은 초지인 환희지를 통해서 10지를 말하듯 一卽多(일즉다)의 전개(확산)를 중심으로 多卽一(다즉일)의 통합(응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타라문의 중중무진의 표현은 횡진법계를 설명하는 기제가 된다. 그런데 끊임없이 펼쳐지는 重重(중중)과 無盡(무진)은 엄격히 말하면 구분된다. 즉 중중이 하나 속에 전체를 총섭하는 것(종;從--세로적인 면)이라면, 무진은 나머지 문이 모두 전체를 총섭하는 것(횡;橫--가로적인 면)이다. 때문에 10층10탑으로 비유되는 횡진법계는 무진으로, 10층1탑으로 비유되는 수진법계는 중중으로 설명된다.
즉 중중이 수진의 법계를 설명하는 기제라면, 무진은 횡진의 법계를 설명하는 기제가 된다. 다시 말해서 10층10탑의 비유가 횡진법계의 무진에 맞추어진다면, 10층1탑의 비유는 수진법계의 중중에 맞추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균여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10지'의 비유로부터 '10지 중의 10지'로 나아가며, 더욱이 수진법계의 비유인 '一往十地(일왕십지)'로까지 나아가 인타라문의 중중(竪盡;수진) 무진(橫盡;횡진)으로 융회하고 있다.
3.2. 竪盡의 법계(수진)
법장이 화엄의 두 코드인, 원리로서의 理(이;성기)와 차별로서의 事(사;연기)를 空(공)과 不空(불공)의 기호로 전개하고 있음에 비해, 균여는 근원적 원리인 理와 추상적 사태인 事를 性과 相의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도의 空有(공유)적 사유와 중국의 理事(이사)적 사유를 한국의 性相(성상)적 사유를 통해 종합하고 있는 균여의 사유체계를 엿볼 수 있다.
10층1탑의 비유로 설명되는 법장의 수진법계는 하나의 이름을 부를 때 一切(일체)가 각기 반응한다. 이를테면 첫째 층을 부르면 횡진법계의 10층10탑의 비유처럼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들이 모두 첫째 층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둘째 층, 나는 셋째 층 내지 나는 아홉째 층, 나는 열째 층으로 각각 반응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십지론]의 10지의 비유에 의하면 수진법계에서는 초지 환희지를 부르면, 횡진법계의 10지 중의 10지의 비유처럼 나머지 아홉 탑의 첫째 층들이 덩달아 환희지라고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離垢地(이구지), 나는 焰慧地(염혜지) 내지 나는 善慧地(선혜지), 나는 法雲地(법운지)라고 반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횡진법계에서는 첫 문이나 첫 층이 제일 중요하지만, 수진법계에서는 각 문과 각 층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진법계에서는 일체를 구성하는 개체가 각기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장의 입장은 균여에 의해 잘 정리되고 있다.
균여는 [십구장원통기]의 제7장인 '摠三三轉現際無窮門(총삼삼전현제무궁문)'에서 수진법계의 근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은 세로(竪位;수위)에 의해 법계를 논한 것이다. 한 티끌에 의거하여 법계의 일체의 法을 총섭하고, 그 총섭된 일체의 法 안에 다시 각기 일체의 法을 총섭하면 오직 가로(橫位;횡위)에 의거해 법계를 논한 것이라 이른다.
지금 이 문안에서는 三際(삼제)에 의지하여 相攝(상섭)을 논하였기 때문에 竪位(수위)에 의거해 법계를 논한 것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제목으로 摠三三轉現際無窮(총삼삼전현제무궁)이라 한 것이다. 이를테면 과거 안에도 三際(삼제)가 있고 현재 안에도 三際(삼제)가 있고 미래 안에도 三際(삼제)가 있기 때문에 摠三(총삼)이라 한 것이며, 三門(삼문)이 개별적이기에 三轉(삼전)이라 이른다.
불교에서는 과거(前際;전제)와 현재(中際;중제)와 미래(後際;후제)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설명한다. 과거 莊嚴劫(장엄겁)과 현재 賢劫(현겁)과 미래 星宿劫(성숙겁)을 통해 시공을 설명하듯이 三際(삼제=三世)는 우리들이 인식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균여의 [십구장원통기]에서 정리되고 있는 '摠三三轉現際無窮門(총삼삼전현제무궁문)' 역시 그러하다.
과거·현재·미래 안에도 각기 과거·현재·미래의 삼제가 있다는 것을 摠三(총삼)이라 하고, 그 삼세가 원융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 않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三轉(삼전)'이라 했다. 때문에 수진법계는 '총삼'과 '삼전'을 통해 한 티끌(一塵;일진) 안에 三世法(삼세법)을 드러내는 원융의 의미를 지녔지만 그 삼세법이 동일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菩薩瓔珞經(보살영락경)에서는 붓다가 梵摩達王(범마달왕)에게 말하기를, "네 앞에 누워 있는 개는 너의 과거 몸이며 장차 나는 너의 미래 부처"라 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가 한 시점에 현현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만일 三乘(삼승)의 뜻으로써 이 문장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오직 개(狗;구)만 있었고 사람(人)과 부처(佛)는 없었으며, 현재는 오직 사람만 있고 개와 부처는 없으며 미래에는 오직 부처만 있고 개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法을 세움이 외롭고 단조롭다. 一乘(일승)의 가르침에서는, 과거의 개 가운데에도 사람과 부처가 있었고, 현재의 사람 가운데에도 개와 부처가 있으며, 미래의 부처 가운데에도 개와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法을 세움이 원만한 것이다.
균여는 瓔珞經(영락경)의 경문을 三乘(삼승)과 一乘(일승)의 입장에서 각기 해설하고 있다. 이는 삼승이든 일승이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 안에서 개와 사람과 부처의 모습을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경문에서는 삼승의 뜻에서는 하나의 한정사를 지녀 삼세가 각기 구별되지만, 일승의 뜻에서는 하나 안에서 둘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를 통해 우리 몸은 개와 사람과 부처가 한 몸이지만 시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法體(법체)는 하나이지만 九世(구세)의 구별에 따라 法도 역시 달라진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法體(법체)와 九世(구세)의 입각지에 따라 삼승과 일승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횡진법계와 마찬가지로 수진법계 역시 원융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원융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지점은 일승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에도 각각 삼제를 갖추고 있다는 '총삼'의 입장은 일승의 시각에서 드러나는 원융의 뜻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구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三轉(삼전)의 관점은 현상의 하나하나를 강조하는 삼승의 관점인 것이다.
법체의 입장인 일승의 시각과 구세의 입장인 삼승의 시각에 의해 각각 총삼과 삼전으로 수진법계는 설명된다. 이는 현상계의 모습을 근원의 시작으로 보느냐, 차별의 끝으로 보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법장의 수진법계는 현상계를 연기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법장은 수진법계를 통해 현상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균여는 법장과는 달리 차별의 끝은 근원의 시작으로 돌아간다고 함으로써 차별의 시작과 끝을 융회하고 있다. 즉 구체적 사태(相;상)의 끝은 근원적 원리(性;성)로 돌아감으로써 하나가 되며, 그때에는 모든 차별성이 사라지고 진실성만이 남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법장이 현상계의 모습을 차별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균여는 근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상계를 바라보는 법장의 시각이 연기론적 관점에 서 있다면, 균여는 성기론적 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澄觀(징관)의 시각과도 겹치는 것이다.
3.3. 周側의 법계(주측)
균여의 현존 저술에서 '주측'이라는 술어가 보이는 곳은 [석화엄지귀장원통초]권상에서이다. 그가 이러한 '주측'이란 술어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적 틀을 형성하려고 했던 것은 당시 불교계의 사상적 대립을 화회하고자 함에서이다. 그의 화엄관을 살펴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 저술에서 균여는 '周(주)'를 횡진법계에, '側(측)'을 수진법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균여가 모색한 '주측'의 체계 또는 법계는 의상의 횡진법계와 법장의 수진법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주측'이란 개념을 특화시킨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균여는 '하나가 곧 일체'라는 관점을 통해 차별의 끝으로 이끌어 내는 주측의 틀을 제시하였다.
주측의 '周(주)'는 횡진법계를 말하며, '側(측)'은 수진법계이다. 여기서 미진(一)과 시방(多)은 주측을 통해 하나가 된다. 또 티끌(塵;진)과 시방(方;방)은 이 주측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미진과 시방을 두루 감싸안는 주측은 곧 균여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균여가 모색한 주측의 틀은 理理(이리)의 相卽(상즉)과 事事(사사)의 相卽(상즉)과 理事(이사)의 相卽(상즉)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있다. 균여는 의상의 화엄교학 중에서 특히 理理無碍(이리무애)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화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상 화엄이 균여 화엄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은 {법계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別敎一乘(별교일승)에 의하면 理理(이리)의 相卽(상즉) 또한 얻고 事事(사사)의 相卽(상즉) 또한 얻으며 理事(이사)의 相卽(상즉) 또한 얻어서 각각 相卽(상즉)하지 아니하기도 하고 또한 상즉하기도 한다.
의상은 화엄의 근본교의를 理理의 상즉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얻게 되면 理事의 상즉과 事事의 상즉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균여 역시 이러한 理理의 상즉에 {법계도기}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만일 別敎一乘(별교일승)에 의하면 理理의 相卽(상즉) 역시 얻고 理事의 相卽(상즉) 역시 얻기 때문에 이것이 別敎(별교)이다. 그 본위를 취하면 이리의 상즉과 이사의 상즉이니 이것이 三乘(삼승)이다. 비유하면 강물이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면 다 같이 짠맛이 됨과 같다. 理理의 無碍(무애)와 事事의 無碍(무득)가 모두 이 화엄경에 갖추어져 있어서 모두 사사의 무애에 해당한다.
균여는 의상의 理理無碍(이이무애)를 수용하여 자신의 주측의 틀을 전개한다. 즉 그는 4구의 상즉 가운데 理理의 상즉을 화엄의 근본으로 보는 의상의 관점을 수용한 뒤, 理理의 상즉이 理事(이사)의 상즉이나 事事의 상즉과 하나로 회통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는 理理의 상즉이 횡진법계의 논리적 근거임에 비해 理事의 상즉과 事事의 상즉이 수진법계의 논리적 근거임을 전제한 뒤 다 같이 짠맛인 바닷물처럼 셋을 하나로 화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균여는 주측에 기초하여 의상의 사상을 근간으로 법장의 사상까지를 융회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원칙적인 하나 속에 전체를 통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음미해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물의 事相(사상)에 대한 파악이 균여 화엄사상 속에 결여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事相이 원칙적인 理 속에서 융회되어 하나로 파악될 때 事나 理는 모두 泯滅(민멸)되어 존재를 초월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민멸된 일체로 나타나게 된다. 균여 화엄의 事相(사상)에 대한 관심은 法相(법상)에 대한 그것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그의 性相(성상)융회사상을 형성시키는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중국 화엄사상의 경우 대체로 事相의 민멸을 말하고 있으나 근본인 理의 민멸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균여는 事相뿐 아니라 理의 민멸까지도 주장하는 점에서 다른 화엄사상가와 큰 차이를 이룬다. 그가 주장한 理理無碍(이리무애)는 물론 의상 화엄의 전통을 이은 것이겠지만, 理의 민멸 때문에 가능해진다. 민멸되지 않은 원칙적인 理만일 경우, 그 사이에 무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원리로서의 理가 차별을 넘어선 眞空(진공)이며, 차별로서의 事가 妙有(묘유)인 것처럼, 균여는 자신의 性相的(성상적) 기표를 통해 가로와 세로, 근본(本)과 지말(末), 眞空(진공)으로 돌아가는 것과 三寶(삼보)를 만나는 것, 同體(동체)와 異體(이체) 등의 기호로 대비시키며 자신의 사상적 지평을 펼쳐 나가고 있다.
균여가 근원적 원리와 구체적 사태를 근본과 지말에 대비시키며 설명하는 까닭은 그가 차별보다는 원리를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말에서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성기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근본과 지말을 원리와 차별에 대응시킨 것은 비실체의 실체인 묘유를 통해 비실체인 진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균여는 원리와 원리의 무애(理理無碍;이리무애)에 역점을 두고 있음에 비해, 법장은 차별과 차별의 무애(事事無碍;사사무애)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균여가 의상의 화엄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그는 의상과 같이 원리를 절대적인 理로 보면서도 그 원리에 다시 다함(盡;진)과 다함이 없는(不盡;불진) 차별을 설정함으로써 원리와 원리의 무애를 말하고 있다.
균여는 의상의 화엄을 횡진법계로, 법장의 화엄을 수진법계로 정리한 뒤 다시 이 두 법계를 종합하여 주측의 프레임워크를 세운다. 횡진법계가 초지(환희지)를 강조하여 10지 전체를 초지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라면, 수진법계는 10지 전체를 이해하려고 할 때 10지의 의미를 하나하나 추구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의상의 횡진법계가 일체를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라면, 법장의 수진법계는 일체 중에서 그 각각의 의미를 달리 파악하려는 것이다. 법장은 '일체가 곧 하나'(十中一;십중일, 向下來;향하래)에서 차별이 시작되고 '하나가 곧 일체'(一中十;일중십, 向上來;향상래)에서 차별이 끝난다고 보고 있지만, 균여는 의상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곧 일체'에서 차별이 시작되고 '일체가 곧 하나'에서 차별이 끝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균여의 주측법계는 차별의 시작을 '10중의 1'로 파악하는 법장의 수진법계와 차별의 시작을 '1중의 10'으로 파악하는 의상의 횡진법계를 화회시키고 있다. 균여는 실천 중심의 의상의 법계관과 이론 중심의 법장의 법계관을 전관한 뒤에 다시 의상의 횡진법계의 입장 위에서 법장의 수진법계를 화회하여 주측법계를 건립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균여가 의상과 법장의 법계를 화회하면서도 실천적 화엄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측의 프레임워크를 정립하려고 했다는 사실과 주측이 자신의 화엄일승사상을 떠받치는 키워드라는 점이다.
균여는 불설의 핵심인 중도의 도리에 입각하여 주측 또는 性相(성상)의 코드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는 비록 의천에 의해 비판을 받았지만 뒷날 균여계 화엄가인 天其(천기) 등에 의해 그의 저술이 [고려대장경]에 입장될 수 있었다. 때문에 현존하는 그의 방대한 저술의 질과 양은 한국 불교사상가들의 추종을 쉽게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의 저술과 활동을 통해 그가 고려 초기의 화엄가로서만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는 신라 의상 이래의 화엄을 종합하고 중국의 화엄까지 아우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론적 측면에 치중해 있는 중국화엄과 실천적 측면에 치중해 있는 한국화엄을 자신의 주측이라는 코드를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한중화엄을 집대성했다. 따라서 우리는 균여의 저술 속에서 한국화엄의 성취만이 아니라 중국화엄의 성취까지 읽어 낼 수 있다.
[출처]균여의 周側學(주측학)|작성자불교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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