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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禪은 불교의 혁신적인 처방전 가운데 하나

왜 동양철학인가/한형조 교수 中에서

242.禪은 불교의 혁신적인 처방전 가운데 하나

선은 불교가 지혜의 이름으로 발전시킨 고원한 형이상학이나 심원한 심리분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무명 속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지혜를 버리고 계율을 밀치며 오직 선정에 집중했다.

불교는 진리에 이르는 8가지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고 三學 戒·定·慧는 팔정도의 구성요소이다. 선은 우선 혜를 버렸다. 선은 붓다의 사성제의 가르침에서 아비달마의 세계분석, 중관의 진리 변증과 유식의 정신분석이라는 불교사의 장관을 한가한 잡담으로 돌린 것이다. 이들을 안고 진리를 찾는 것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은 발전단계에서 계를 경시하고 부정했다. 선은 자신의 진리관에 의해 기존의 격식과 관행을 무시했고 이것이 우리가 선에서 곧바로 연상하는 고의적인 기행과 파격으로 나타났다.

선은 정을 남겨 여기에 집중했다. 선이라는 이름이 선정(禪定)을 말하는 디야나의 음사(音寫)인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선가에서 선을 디야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 판단이다. 선은 이론 아닌 실천으로서의 좌선에서 출발했다, 혹은 선의 중심은 좌선이다.

*혜능의 좌선(坐禪)이란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서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이며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

또한

"어찌 반드시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수행이며 해탈에 이를 수 있는 길이겠습니까?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여래라는 존재는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이 공적한 것임을 아는 것이 여래의 청정한 앉음[坐]이요, 가고 오는 생멸이 없음을 아는 것이 여래의 청정한 선[禪]입니다. 궁극에는 깨달아 얻어야 할 것도 없는데 어찌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 고집하겠습니까?”

245.불교와 선, 그리고 화두와의 관계

화두는 돈오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두는 불립문자를 표방한 선의 전통 위에 있으되, 한편, 그동안 선이 발전시켜온 다양한 교설(敎說)과 수련까지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의 부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선과 화두를 동일시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46.불교와 선의 정신은 일치한다

선은 불립문자를 표방했지만 불교 전통의 이념과 정신을 공유한다. 달마의 二/理入四行론은 선 또한 언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47.불교와 선의 차이는 그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 있다

그 방법 가운데 초기의 점수는 이전의 불교 전통과 연속되어 있지만, 후기의 돈오는 이전과는 달리 독창적 혁신이다.

연속에 대하여-신수의 게송은 붓다 이래 호흡법과 명상법, 그리고 九想觀 등의 다양한 법식, 그리고 그를 집대성한 淸淨道論의 연장선에 있다. 이 점에서도 선은 불교 전통과 별다른 단절이라고 볼 수 없다.

단절에 대하여-선의 독자성은 혜능을 기점으로 돈오의 방법을 제창한 데 있다.

이전까지 불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억겁에 걸쳐 선근을 닦고 모든 업을 정화해야 비로소 보일까 말까 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돈오의 선은 이 거리를 일소에 부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자적 전통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이 길은 위태롭다. 지속적이고 가열찬 수련의 의미 자체를 무화(無化)시키고 作用是性,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낙관론의 비도덕적 위험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간화와 돈오의 방법을 비판하는 근본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248.화두는 돈오의 발전이면서 위축이다

돈오의 길은 오직 훌륭한 스승의 지도가 인도할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근본적으로 사적이다. 제자는 자신의 내적 본질의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지평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고투하고, 스승은 이를 지켜보면서 빗나간 점은 바로잡고, 뒤처진 걸음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줄탁지기(茁啄之機 :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알고 밖에서 깨주는 것. 선가에서 제자가 깨칠 때 스승이 미리 알고 길잡이가 되어 길을 가르쳐주는 것). 이 수련법은 스승의 개성이나 山門의 가풍은 있어도 선의 이름에 걸맞은 보편적 방법으로는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당나라 말기, 선의 쇠퇴기에 공적 객관적 방식을 만들 필요가 있어 그렇게 꺼리던 문자로 정착되어 공적인 규범, 공안으로 정착되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화두법은 처방전 가운데 하나이나 그것이 유일하고 가장 뛰어난 수련법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뛰어난 禪匠의 지도를 따라 화두를 지속적으로 파지하면 어느 날 우리를 옥죄고 있던 칠통漆桶이 부서지고 하늘과 땅乾坤이 다시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준비를 마친 최상승의 예외적 근기에게만 유효한 처방이지, 보통의 학인이나 末法의 중생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249.화두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화두에 의미가 없다고 역설한다. 의미를 확인하거나 부여하는 순간, 화살은 십만 팔천 리 서역으로 날아가고, 뒤통수에는 몽둥이세례가 터질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화두가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주의 무는 확실히 무의미를 향해 있다. 뜰 앞의 잣나무는 의미 쪽에서, 혹은 무의미 쪽에서 읽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마조의 心卽是佛이나 心佛是佛, 그리고 非心是佛은 분명히 의미 쪽이 두드러진다.

의미에 대하여-전통적으로 이 측면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화두를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선가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心卽是佛의 경우 불교의 전통과 취지를 같이 한다. 아비달마가 제창하는 세계에 대한 비인격적 인식이나, 色卽是空은 반야의 지혜, 그리고 화엄의 법계에서 원효의 一心과 지눌의 眞心을 통관하는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화두는 불교 일반의 전통과 선의 간명한 취지와 다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고 보기 힘들다.

무의미에 대하여-돈오는 不二의 교설이고 방법이며 경지다. 분별은 본래 고요한 열반을 뒤흔들고 법계의 자기 과정에 개입하여 고통을 산출한다. 이를 치유하기 위하여 가령 불교 中觀은 ‘이다’ ‘아니다’의 두 극단을 떠날 것을 권한다. 선 또한 이 전통을 이어받아 무의미에 철저한 삶을 기획했다. 선에서 채용하는 역설이나 파격적 언행 등은 바로 그러한 고민의 산물이다. 무의한 언설, 엉뚱한 상상력, 몽둥이나 할의 직접적 행동으로 그 의식=無明의 준동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키려는 선의 장치는 다양하고 현란하다.

화두는 일상의 에너지가 왜곡되고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한 차단장치 중 하나이다. 그 차단이 깊어지면 산란으로 흩어졌던 에너지들이 지속적 집중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本來面目과 직접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 화두의 무의미한 차원을 강조해 마지않는다.

화두의 효용성

의미의 차원에서 화두는 너무 간략하고 압축적이어서 거의 암호에 가깝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의 전적이나 불교 일반의 교리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화두가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실천되지 않으면 예기치 않게 선의 위축과 쇠퇴를 부를 수 있으니 언설의 역설이다.

무의미의 차원에서 화두는 의식의 분열을 차단하는 유용한 장치이다. 그러나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대안으로 인류사에 여러 성인들이 있었지만, 붓다만큼 쉽고 간단하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위파사나는 단순히 불법의 정도(正道)인 것이 아니라, 모든 수행의 근본이다.

나는 화두를 들기보다, 차라리 서암의 화두처럼 ‘주인공’을 부르는 성성법(惺惺法)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대개 무의식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선사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각성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 본질과 분열되지 않고 일체가 되며,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주적 화해의 무도(舞蹈)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 의지와 욕망의 미세한 흐름까지를 각성하고 제어하는 통제력이 더 긴요하다. 자신의 호흡과 심신의 활동을 끈기 있게 파지하는 ‘자각의 훈련’이 지속되면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거친 오염들이 줄어들고 이윽고 미세한 의지의 충동들이 들여다보일 것이고, 심신은 점점 더 헐거워질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여럿이다.

1) 자신이 그 효과를 즉각 알 수 있고,

2) 지속적 파지(把持 : 기억 작용의 과정으로, 경험에 의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가 때때로 재현하는 작용)와 더불어 호흡이 안정되고 그와 더불어 내적 본질과의 일체감이 더욱 깊어진다.

이것은 점진적 과정, 즉 기본적으로 점수의 방법이다. 이 ‘자각’의 수련은 삶의 공간, 즉 일상의 일과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실천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결정적인 장점으로 제시한다. 바람직한 수련은 그 자체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화두는 그렇지 않다. 화두를 들 때, 그것은 에너지의 불건전한 전이를 차단시켜, 자신의 불건전한 욕망과 의지, 정감을 순화시키는 일차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더 이상 진전되기 힘들다. 그 지속적 파지는 일종의 자신감이라기보다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다가온다. 왜냐? 화두는 그 자체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를 보겠다는 초조감이 화두에 드는 자신을 늘 열패감에 시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력하게 하기 쉽다. 그 제자리걸음은 쉬 피로해지고, 흔들린다.

화두는 인위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가둔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화두를 들면,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농사를 지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상담을 할 수도, 물건을 만들 수도 없다. 이것은 산속의 소수 예외적 수도승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일이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정한 직무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의 수련법은 아니다. 화두는 그럴 경우, 역설적으로 “남의 돈을 세는 일”에 그치고 말 수 있다.

254.화두를 본다, 돈오를 향한 위태로운 암벽 타기

지금까지의 지적은 일반적 근기에 해당하는 말이지 상근기는 화두를 통해 일거에 자신과 어둠의 세계를 뚫고 상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극소수의 예외에 해당한다. 혜능조차 자신의 길은 최상승의 근기에나 해당된다고 말한 바 있다. 보통의 근기는 신수의 길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한국 선의 비조 지눌 또한 자신 교학을 통해 소식을 깨쳤고, 看話決疑를 보편적이 아닌 예외로 인정했다. 이 점 한국불교는 깊이 새겨야 한다.

혜능이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선의 전승이 지어낸 말이거나 곡해한 말이다. 혜능은 불교 교학의 복잡한 언설에 휘둘리지 않고 그 핵심을 단번에 장악하는 탁월한 이해력의 소유자였다. 지나가는 승려가 외우는 금강경의 한 구절 ‘응무소주 이생기심’ 한 번에 마음이 밝아졌다는 육조단경의 말을 잘 음미해야 한다.

선의 역사를 돌아보면, 뛰어난 선사들은 교학에 탁월한 사람들이었으니 당장 떠오르는 덕산, 향엄, 운문, 수산이 있다. 그러므로 선이 불립문자를 표방해도 문자와 언설을 버리면 불교뿐만 아니라 선 또한 죽는다. 서산의 선가귀감, 종밀과 지눌의 화엄교학으로 선을 받치려 했음을, 서산의 문하는 소의 경전으로 금강경을 생각했음을 다시 생각하고 敎와 禪은 더 이상 남으로 지내서는 안 된다.

256.한국불교의 활로-일상과 합리를 통한 점수의 회복

한국의 불교가 붓다의 실존적 고뇌와 그의 일생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그 원인, 해법에 대해 그야말로 근기에 맞게, 감동적은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설해주기 바란다, 근기에 맞춘 올바른 수행법과 그 효용에 대해, 서방정토의 구원에 대해, 불교 전통의 화려한 교학에 대해. 그래야 무지로 고통 받고 있는 말법 중생들이 작은 희망의 불씨에 환호하며 불법을 향해 발심할 것 아닌가.

병이 달라지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일단 화두는 아끼자. 시대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으나 불교는 선 이후 천 년을 새로운 혁신을 통해 거듭나지 못하고 있고, 화두 또한 천 년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화두와 선이 살아있는 전통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문화와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호시절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절체절명, 위기의 시대의 도도한 도전 앞에서 화두는 너무 좁고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활로는 ‘일상’과 ‘합리’의 지평 위에서 ‘대화와 설득을 통하지 않고는 길이 없다. 이 든든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초월과 불합리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아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께서 그리 하셨다.

불교와 선의 초점을 돈오가 아니라 점수 위에 세우자. 돈오는 잊어야 한다. 평생을 바쳤는데 하는 마음은 아만이고 욕심이다. 인생의 문제는 한 번으로 끝낼 만큼 단순하지 않다. 오직 점수만이 있으며 그에 다른 점오만이 있다. 그리고 그 점오에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 불교가 이웃을 향해, 미래를 향해 발전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화두는 아껴두기를 요청한다. 물론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선은 불교사적 발전의 한 국면임을 승인하고 화두를 과감하게 불교적 해석의 공간에 열러두자는 것, 그리고 방법으로서의 화두는 최상승의 상상근기의 돈오를 위해 ‘선택’으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1)우선 화두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미약해진 ‘선’을 활성화시키고 선의 정체성을 ‘좌선에 축을 둔 자신과 일상의 자각’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선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일정한 도그마의 장애물이 없으며, 유구한 불교정신인 실용주의적 정신의 산물이다. “네가 네 자신이 지우고 환경이 부추긴 심신의 고통과 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이렇게 해보라.” 선이 ‘좌선을 더 정교화시키고 보다 쉬운 일상으로 파고들어 더 쉬운 수련의 방법을 채용해야 한다.

2)다음으로 화두와 돈의 선이 빠뜨리고 건너뛴 ‘계율’을 다시금 살려야 한다. 계율이 없다면 불교는 없다. 다만 출가자 중심의 계율은 너무 엄격하니 일상의 삶이 그를 배반할 수 있으므로 중도를 갖추어야 한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계율 사이를 너무 크게 벌려놓아서도 안 된다.

3)마지막으로 지혜이다. 선이 주창한 불립문자의 깃발을 내릴 때가 되었다. 원효는 진리가 문자와 언설을 떠나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구원이 문자와 언설에 의지하고 있다依言眞如’라고 했다. 언어를 떠나면 불교는 생명력을 잃는다. 아니,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언어를 회복하지 못하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마지막으로 선에 충실하고 싶다면 먹물옷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수행자들이 생활을 통해 자립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백장 선사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수행공동체의 울력, 선·명상센터, 템플스테이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다만 일반인들이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화두는 아껴두라는 것이다. 옴 마니 반메 훔.

2114. 11. 15.

*뱀의 발(蛇足)

선의 속도로는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한다.

足脫不及. 불교 조계종이 위기다. 출가자 수는 갈수록 줄고, 종단은 고령화하고 있다. 간판처럼 내세우는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궁리하는 참선법)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어렵다며 고개를 젓는다.

종단 선거 후에 불거지는 내부의 분열과 다툼은 불교를 더 힘겹게 만든다. 조계종 내부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100년, 200년 후에 과연 종단이 남아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활기 잃어가는 불교

조계종의 출가자가 갈수록 줄고 있다. 2002년에 비하면 2012년 사미(沙彌·불교에 갓 입문한 예비 승려)·사미니(沙彌尼·갓 입문한 여자 예비 승려)의 수는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특히 여성 출가자 수는 10년 만에 41%로 줄어들었다.

더불어 종단 전체는 점점 고령화하고 있다. 대학·대학원 졸업에 사회생활까지 하다가 출가하는 늦깎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국 불교의 위협

급성장하는 중국 불교에 대한 위기감도 크다. 중국은 출가자 수만 25만 명이다. 중국 정부는 불교에 대해 전폭적 지원을 하고 있다. 불교 육성을 통해 세계 불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한다.

조계종 총무원 권대식 국제팀장은 “지금까지 중국은 새로 사찰을 짓는 등 불교의 하드웨어 양성에 주력했다. 신자들은 절을 찾아 기도하는 기복신앙 수준이다. 만약 중국이 신도 교육에 눈을 돌리고, 대중 법문을 하는 등 소프트웨어에 힘을 쏟기 시작하면 한국 불교가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계종이 내세우는 선(禪)불교 전통이 대부분 중국 조사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제 학술계에서 중국 불교가 “이건 우리 콘텐트야”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대응 논리가 빈약해진다. 원효 대사 등 한국 불교의 고유한 콘텐트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절실한 상황이다.

부록 : 위의 주장에 참고가 될 책의 메모를 붙인다.

왜 선문답은 동문서답인가

책을 내면서

제1장 동문서답

1. 격외구格外句· 2. 활구活句· 3. 반어反語

제2장 신체언어

1. 동작· 2. 방할어棒喝語· 3. 은유· 4. 기봉機鋒

제3장 선어의 수기성隨機性

1. 염정어艶情語· 2. 상말·욕설· 3. 맑고 유원한 운치

제4장 에둘러 말하기

1. 은어· 2. 관용어· 3. 현언玄言· 4. 차전법遮詮法

제5장 선어禪語의 통속성

1. 구어口語· 2. 속담· 3. 구어체 게송偈頌

제6장 선어禪語의 연금술

1. 번안법案法· 2. 점화법点化法· 3. 차용법借用法

제7장 농담과 문자 유희

1. 농담· 2. 대비체 해학

1. 오늘날 선불교는 왜 주목받고 있는가?

불교의 선(禪)이 근래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화두나 평상심 같은 선불교 전문 용어들이 매스컴은 물론 일상의 대화에 스스럼없이 사용되고, 선식(禪食), 선 디자인(son design), 선 스타일 등이 등장해 우리 일상의 삶과 함께한다. 원래가 ‘삶의 지혜’, ‘일상의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선은 새삼 각광을 받으며 21세기 대안 사상으로까지 부상했다.

직관과 감성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은 이제 불교의 종교적 수행과 신앙 차원을 넘어 경영학, 미학, 시학, 윤리학, 사회학 등 각 학문 분야는 물론 전 사업 분야에 그 사상과 철학이 응용되고 있다. 최근 서구에서 뜨고 있는 직관경영(intuitional management)을 비롯해 단순미를 강조하는 선 디자인, 유원하고 모호한 선 색(son color)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폭넓은 접근은 종교 신앙적 차원을 떠나 일반 상식 교양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이 같은 선에 대한 일반적 수요는 물론 전문적 접근에 필요한 첫 관문을 뚫기 위한 열쇠로서 선불교의 현란한 언어예술을 개괄적으로 조명했다. 우선 선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선학의 특수한 언어체계와 하층 농민들의 투박한 방언에서부터 사대부 등의 우아한 아언(雅言)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 선불교 언어들의 실제 사용 사례를 각종 선적(禪籍)들에서 발췌, 예시해 그 뜻하는 바를 풀어나갔다.

선어禪語들은 사람들에게 왕왕 정신을 일깨우는 교훈과 심령을 맑게 하는 지혜를 더해준다. 선은 이제 개인의 공령空靈한 정신적 자유를 확보하는 일상의 상비약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선사상은 20세기로 종말을 고한 현대문명 이후의 새로운 인류문명 건설에서 사상적 주춧돌이 될 수 있는 ‘대안 사상Alternative Thought’으로 부상하고 있다.

산사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하는 것이 선의 전부가 아니다. 선은 사상적, 철학적, 미학적, 언어학적, 윤리학적, 사회학적, 시학적으로 확대 조명해 학문적 체계를 수립해나갈 수 있는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서문> 중에서

2. 선불교는 중국과 한국의 경계가 없다

중국을 원산지로 하는 오늘의 선불교는 본래의 인도불교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동아시아적 특성을 강하게 띤 독자적인 불교이다. 한·중·일 3국을 중심으로 풍미한 선불교는 그 출발이 농민과 전란에 쫓겨 떠도는 유민(流民), 유랑승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견문과 사려의 알음알이(지해知解)를 배격하고 직관에 의한 돈오를 강조했다. 이는 번쇄한 논리의 귀족불교와 교학불교에 대한 대항이며 사회사적으로는 봉건 군주 체제에 맞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정치적 혁명을 종교라는 틀을 빌어 표출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당 말, 송 대에 이르러 사대부 등의 선불교 대거 수용에 따라 문인선(文人禪)으로 변화하긴 했지만 그 원초적 뿌리인 단순성과 과격성, 평민의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선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당송 대의 거물 선사 등 어록과 범백의 전등을 밝힌 등록(燈錄) 등에 나오는 선문답과 법문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선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고자 했다. 선의 경우 중국의 선불교가 곧 한국의 선불교이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구산선문(九山禪門) 개산을 통한 한국의 선불교 전래부터가 모두 중국 선사상 등의 법맥을 직접 이어왔고 선불교의 경전 격인 조사 어록이나 등록도 중국 선불교의 것을 그대로 받아 써왔다. 현재 한국불교 선방에서 수좌들이 들고 참구하는 화두도 모두 100% 중국 조사 스님들의 화두이다. 따라서 이 책이 중국 선불교 책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랜 역사와 오늘의 현실로 볼 때 선불교는 중국과 한국의 경계가 없기 때문에 오해할 필요가 없다. 중국 고대의 구어와 방언까지 원어를 예시, 설명한 것은 지금까지도 한문 원전을 그대로 읽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였고 특히 선사상의 원초적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3. 선문답은 과연 동문서답인가?

선의 핵심은 어록과 등록 등에 수록돼 있는 조사들의 선문답, 또는 법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조사들의 선문답을, 질문에 대한 엉뚱한 대답을 뜻하는 ‘동문서답’의 대표로 치부하고 무슨 알 듯 말 듯한 아리송한 말을 하면 흔히 ‘선문답 하느냐?’고 한다. 실제로 어록들을 읽다 보면 현란한 언어의 마술이 펼쳐지고 우리의 상식과 논리체계를 뒤흔드는 억지투성이의 연구들이 난무한다. 그래도 그 속의 알 듯 말 듯한 한마디가 우리를 통쾌하게 하고 10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선불교 언어예술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 통쾌감을 100배 즐길 수 있다.

문 부처란 무엇입니까?

如何是佛?

여하시불

답 마른 똥막대기다.

乾屎厥

간시궐

(…)

문 부처란 무엇입니까?

如何是佛?

여하시불

답 삼 세 근이다.

麻三斤

마삼근

-<제1장 동문서답> 중에서

선불교 책들에는 우리의 이성적 언로를 가로막는 동작어들과 일상용어에서부터 방언, 비속어, 욕설, 농담, 속담, 음사(淫辭)는 물론 깊은 뜻을 담은 현언(玄言), 우리의 언어체계를 벗어난 격외의 어구, 운치 넘치는 시어(詩語)들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가 넓고 깊다. 선불교의 고유 언어와 화법은 독특한 언어예술을 형성했다. 선언어들은 특수한 언어 형태로 각종 선적 등에 돌출했고 아언속어(雅言俗語), 문언백화(文言白話)의 각종 성분을 흡수해 자유로운 심령 활동을 조합하고 자극하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언어들은 사람들의 안목을 요란하게 하는 꽃처럼 휘날렸고 언어의 미궁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어느 날 두 학인이 조주 스님을 참문 왔다. 조주 스님이 먼저 학인들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한 스님이 답했다.

“예,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차나 마셔라.”

다른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여기에 와본 일이 있는가?”

스님이 답했다.

“처음입니다.”

조주 스님이 말했다.

“차나 마셔라.”

후에 원주가 와서 물었다.

“왜 처음 온 스님이나 그 전에 왔던 스님이나 다 차나 마시라고 하셨습니까?”

조주가 답했다.

“원주! 차나 마셔라.”

(≪오등≫ 권4 <조주종심 선사>)

-<제7장 농담과 문자 유희> 중에서

선문답이 동문서답으로 들리는 이유는 선가의 교육 방법이 무의어(無義語), 격외구, 은어, 관용어, 반어(反語), 차전법(遮詮法), 현언 등을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언설(不可言說)의 선리를 설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선언어는 세속의 논리를 뛰어넘는 초논리의 논리와 사로(思路)를 차단해버리고 직각적인 깨달음을 촉망시키려는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인들은 장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 선문답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느껴지고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선불교의 특수한 언어체계 때문이다.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불교 진리는 언어문자로 설명이 불가능함)라는 종지를 살리기 위해 상(象)을 만들어 그 속에 선리를 위탁해 설명하거나 신체의 동작, 방할(棒喝) 같은 언어 아닌 언어로써 불법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문 화상께서는 무엇을 위해 마음이 곧 부처라고 설하십니까?

和尙 爲什麽說卽心卽佛?

화상 위십마설즉심즉불

답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다.

爲止小兒啼.

위지소아제

문 울음을 그치면 어찌합니까?

啼止時如何?

제지시여하

답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한다.

非心非佛.

비심비불

(≪고존숙어록≫ 권1)

-<제6장 선어禪語의 연금술> 중에서

선문답 이해의 장애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본 선리를 이해하고 그 독특한 언어체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선문답은 동문서답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극복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장애의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어보고자 서툰 기술이지만 열쇠 제작의 공정을 시작해본 개척의 첫 발걸음이다.

[출처] 禪은 불교의 혁신적인 처방전 가운데 하나, 왜 선문답은 동문서답인가?|작성자 도봉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