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점논쟁(頓漸論爭)
지루가참․도안스님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 제시해
전통 중국철학 가미
중국화된 불교 열어
불교는 무엇보다도 깨달음을 중시하고 있다. 인도로부터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형성된 초기 중국불교는 역시 그 ‘깨달음’에 대하여 방법과 내용에 있어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러한 관심의 결과 중국불교에서는 인도불교와는 다른 독특한 관점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돈오론(頓悟論;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깨닫는 것. 남종선(南宗禪)에서 특히 강조함.)’이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전체적인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돈오를 주장하고, 그에 따라 돈(頓)․점(漸)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바로 도생(道生; 竺道生)스님이다. 도생스님은 이른바 모든 선근(善根)이 끊어진 ‘일천제(一闡提)’도 또한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제시하여 당시 불교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승단에서 축출되었다가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이 번역되어 그 가운데 ‘일천제’ 역시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그 식견의 정확함에 대중들의 찬탄을 받으며 복권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불교사에서 ‘돈오’를 제시한 것은 역경(譯經)으로 유명한 지루가참(支婁迦讖)과 도안(道安)스님이다. 하지만 그때의 돈오는 제칠지(第七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생(無生)’의 도리를 깨닫게 되어 점차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반하여 도생스님의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에서는 ‘십지(十地)’까지는 깨달을 가능성이 없는 ‘대몽(大夢)’의 경계이고, 십지 이후에서 얻는 ‘금강심(金剛心)’은 능히 활연대오(豁然大悟)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중국불교에서는 도생스님의 돈오를 ‘대돈오(大頓悟)’라고 칭하고, 그 이전의 돈오를 ‘소돈오(小頓悟)’로서 구분하고 있다.
도생스님과 함께 구마라집(鳩摩羅什) 문하에서 수학하고 중국의 ‘중관반야학’을 완성하였다는 평가를 받는 승조(僧肇)스님도 ‘소돈오’를 주장하였다시피 하며, 당시 중국불교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돈오[사실상 점오(漸悟;차례대로 수행계단을 밟아 점점 깨닫는 것.)]’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도생스님의 이론은 거센 반박을 받게 되는데, 불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깨달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돈오론은 바로 라집(羅什)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고, 최초로 ‘오시교판(五時敎判)’을 주장한 혜관(慧觀)스님의 반박을 받게 되는데, 그는 <점오론(漸悟論)>을 저술하여 점차적으로 깨달아 들어가 성불함을 역설한다. 그 후, 역시 라집의 제자인 담무성(曇無成)은 <명점론(明漸論)>을 저술하여 반박하고 있다.
그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돈오론’에 반박을 하지만, 최종적으로 당시의 유명한 문인 사령운(謝靈運)이 <변종론(辯宗論)>을 지어 적극적으로 ‘돈오’를 선양하고, 혜원(慧遠)스님 문하에서 수학하다 도생스님과 함께 라집 문하로 온 혜예(慧睿)스님이 <유의론(喩疑論)>을 지어 찬성함으로서 점차적으로 ‘돈오’의 이론은 주류로써 자리를 잡게 된다.
도생스님은 ‘이치[理]’의 ‘불분이성(不分離性)’, 다시 말하여 ‘이치’의 나눌 수 없는 성격을 강조하여 ‘돈오’의 이론적 근거를 삼고 있고, 그 직접적인 경전의 근거는 명확하게 <유마경(維摩經)>의 ‘불이법문(不二法門)’에서 찾아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돈오성불론’에는 당시 서역(西域)을 통하여 전입되기 시작하였던 ‘여래장(如來藏)’의 초보적인 사상도 보여지고 있다. 도생스님의 ‘돈오성불론’은 무엇보다도 당시 남방의 ‘의리불학(義理佛學)’과 북방의 ‘성공지학(性空之學)’을 모두 종합하여 본격적인 중국의 ‘불성론(佛性論)’을 전개하고 있고, 또한 전통적인 중국 철학적 요소를 더하여 보다 중국화된 불교를 열었다는 것에 지대한 사상사적 의의가 있다.
남종(南宗) ‘돈오(頓悟)’․북종(北宗) ‘점오(漸悟)’
선종의 정통성 관한 논쟁
신회선사의 ‘돈오’ 승리, ‘조사선’ 등장한 계기돼
도생(道生)스님에 의하여 ‘깨달음’의 방법론에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이 제시되고, 그에 따라 ‘돈점(頓漸)’ 논쟁이 일어나게 되자, 중국불교의 모든 종파와 불교인들은 ‘돈오’ 혹은 ‘점오’ 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불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바로 ‘깨달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각 종파와 종장(宗匠)들은 ‘돈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힘과 동시에 또한 새롭게 ‘돈오’와 ‘점오’를 ‘원만함[圓]’과 ‘치우침[偏]’을 사용하여 그 둘을 종합하는 사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중국불교에서는 ‘돈오’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론적인 합당함에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인들의 사유양식과 정서에 ‘돈오’의 이론이 적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사령운(謝靈運)의 ‘배움의 쌓임[累學]’은 다만 ‘가까울 뿐[殆庶]’이라는 유학에 근거한 설명과 또한 유학의 ‘심성론(心性論)’과 친근한 ‘불성론(佛性論)’의 전개는 더욱 ‘돈오’가 중국인들의 사유양식에 부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돈오’의 이론은 ‘불성론’의 발전과 동일한 행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돈오’가 중국불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불성론’에 입각하여 나타난 선종에서 다시 ‘돈점논쟁’이 나타난다.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논쟁인데, 혜능(慧能) 계통의 남종은 ‘돈오’이고, 신수(神秀) 계통의 북종은 ‘점오’에 머물러 있다는 논쟁이다.
사실상 ‘남돈북점’의 용어는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에서 북종을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타나는 혜능스님과 신수스님의 게송(偈頌)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대운사(大雲寺) 활대(滑臺)의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남종의 하택(荷澤) 신회(神會)선사와 북종의 숭원(崇遠)법사에 의하여 선종의 정통성을 정하기 위한 논쟁을 벌이는데(732년), 그 가운데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돈점’의 문제였고, 그로부터 ‘남돈북점’의 용어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무차대회’의 상황은 독고패(獨孤沛)에 의하여 기록되어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菩提達摩南宗定是非論)』의 제목으로 전해오는데, 그에 따르면 신회선사는 북종의 선사상을 “마음에 머물러 깨끗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을 비추고, 마음을 다스려 안으로 증득한다[住心看淨, 起心外照, 攝心內證]”는 것으로 규정하고, 달마(達摩)선사 이후의 육대 조사들은 “하나하나 모두 단도직입을 말하였고, 곧바로 요달하여 성품을 보며, 점차를 말하지 않았다[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고 하여 북종을 “사승은 방계이고, 법문은 점오이다[師承是傍, 法門是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북종의 선사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왜곡된 부분도 있지만 보다 철저한 ‘돈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활대에서 논쟁의 결과는 신회선사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고, 그 후 신회선사는 다시 천보(天寶) 4년(745)에 『현종기(顯宗記)』등을 저술하여 이른바 ‘남돈북점’과 남종의 정통성을 확정시키고 있다. 신회선사에 의하여 발생한 활대의 ‘남돈북점’ 논쟁은 이후 철저하게 ‘돈오’를 현실적인 ‘깨달음’에 적용시킨 ‘조사선’의 등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조사선에 있어서는 ‘돈오’의 이론과 내용이 상당히 달라지지만, 신회선사의 적극적인 ‘돈오’에 대한 선양은 이론적인 돈오를 보다 현실적이고 활달한 돈오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종(禪宗), 특히 혜능(慧能) 남종(南宗)이 중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면서 ‘돈오’의 이론과 방법은 명실상부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선종의 ‘돈오론(頓悟論)’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정서가 혼합되어 본래 인도불교의 교의(敎義)와는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색채를 지니는 것이다. 바로 중국에서 형성된 ‘돈오’와 인도의 전통적인 불교가 중국과 인도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만나 정면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이른바 ‘라싸의 쟁론’으로 알려져 있는 돈점논쟁(頓漸論爭)은 토번(吐藩; 西藏; 티베트)에서 792~794년간 라싸와 상야사(桑耶寺) 두 곳에서, 중국 선종에서 하택신회(荷澤神會;670-762)의 제자인 대승 화상(大乘和尙)을 대표로 하고, 인도불교의 대표로는 논사로 유명한 적호(寂護)의 제자인 연화계(蓮花戒; Kamalasila)를 대표로 하여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 논쟁은 당시 토번의 지배자였던 적송덕찬(赤松德贊)의 소집에 따른 것이고, 그가 친히 논쟁을 주지하여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 패한 측은 승리한 측에 화환을 헌상하고 토번을 떠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보다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대승화상의 주된 논점은 성불(成佛)의 도(道)는 마땅히 개인의 돌발적인 ‘돈오’를 거쳐서 이루어지며, 이 돈오는 선악(善惡)을 포함하는 모든 사유를 제거하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연화계는 어떠한 사람도 사유의 작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며, 자신한테 어떠한 사유도 하지 않음을 바라는 것 자체도 이미 일종의 사유라고 반박한다. 또한 다만 점차적인 수행을 경과하여야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고,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는 ‘돈오’는 단지 선행(善行)을 쌓지 않고 성불할 수 있다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두 손을 묶어놓고 넘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
티베트의 자료에 의하면 이 논쟁은 서로 간에 아주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초반에는 대승화상이 우세하였으나 결국 패배하여 사주(沙州; 지금의 돈황)로 쫓겨났고, 그에 따라 인도불교가 토번의 사회에 유행하였다고 되어있다. 그와는 다르게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필사본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에 따르면 대승화상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에 따라 중국의 선종이 토번에 유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티베트불교의 전통 등을 살펴볼 때, 티베트의 자료가 옳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돈점’의 논쟁은 이후 티베트불교에 ‘돈오론’이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토번에서 전개된 ‘돈점’의 논쟁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또한 중국문화와 서역문화의 충돌이라고까지 확대하여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돈오’의 이론은 인도로부터 전래한 불교의 교의에 대하여 전통적인 사유양식과 정서를 더하여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 중국불교 내부에서 수많은 ‘돈점’논쟁의 승리를 거치며 최종적인 주류로서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보다 충분한 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돈오’는 당시 토번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인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와 사유양식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대승화상이 초반에 우세를 보였다는 기사는 이론적으로 ‘돈오’가 우세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럼에도 최종적인 승리가 연화계에게로 돌아간 원인에는 문화와 정서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라싸의 쟁론’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보다 많은 흥미를 끌게 한다.
[출처] 돈점논쟁(頓漸論爭)|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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