頓漸論에 대해 탄허스님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불자들이 알아야 할 돈점 논쟁. 조선시대엔 3대 논쟁이 있었다. 현대엔 頓悟頓修가 맞냐 頓悟漸修가 맞냐는 논쟁이 있다. 성철스님이 보조국사의 頓悟漸修 사상을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보조국사의 돈오점수는 무엇이며 경허 한암 탄허스님으로 이어지는 견해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3대 논쟁 – 1.四端七情 2.禮訟 3.湖洛논쟁
몰록 頓 – 몰록은 국어사전에 없지만 불교에서 써오던 단어이기 때문에 등재되어야 한다.
1.Suddenly 갑자기 <:漸> 2.Perfectly 완벽하게
몰록은 음의 높낮이를 나타내는 平聲 上聲 去聲 入聲 중 입성이다.
돈오점수는 보조국사의 수심결 원돈성불론에 언급되어 있다. 돈오점수를 알기 위해서는 화엄학을 알 필요가 있다. 수행계위에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구경각>이 있다. 구경각에 와야 완벽한 깨달음이다. 10住의 시작 初住는 初發心住<초발보리심주>이다. 처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 住했다. 탄허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세계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 마음이 住했다는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금강경의 無住生心의 주는 집착을 뜻한다. 그러나 화엄경의 初發心住의 주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初發心時便正覺 10주의 初發心住가 정각과 같다는 이야기다. 10信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밖에 있는 부처님을 믿는 것도 맞다. 그러나 부처님의 果德을 믿는 것이다. 수행하면 부처님과 같은 果德을 우리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信滿成佛 믿음이 차면 성불이라 했다. 10신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 전 믿는 단계다.
大乘起信論의 신은 밖의 대상에 반연해 생겼다 사라지는 믿음이 아니다.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음을 완벽하게 믿어서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이 起信이다. 번뇌가 우글거려도 불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먹구름이 끼어 있어도 태양빛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중생이든 근본 광명의 불빛은 다 갖추고 있다. 이를 화엄은 普光明智<근본지>라 한다. 信爲道元功德母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가 된다. 믿음 하나면 된다는 이야기다. 나에게도 본래 부처가 있다는 말이다.
화엄경 80권에는 如來出現品 60권에는 寶王如來性起品으로 되어 있다. 석가여래 미륵불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근본 佛性자리가 구름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如來出現品이다. 조금의 부족함도 없을 정도로 10신이 구족되면 10주의 初住가 된다. 불교의 발심은 이것이 발심이다. 그러니까 頓悟漸修 사상은 初發心時便正覺이 기본이 되어 선교가 회통되면서 나온 이론이다.
頓悟漸修는 초발심住가 돈오라는 관점이다. 돈오는 수행해서 온 것이 아니고 믿어서 온 것이라 證悟라 하지 않고 解悟라 한다. 10주부터 등각 묘각까지는 닦아나간다 해서 漸修라 말하는 것이다. 보리심을 가지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頓悟漸修에서 중요한 점은 일단 發心하라는 것이다. 10주에서 묘각까지 가기는 너무나 힘들어 頓悟漸修는 불교 초심자나 입문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묘각까지 와야만 성불이다.
초발심을 돈오라고 인정하면 완벽함이라는 기준에서 보면 부족하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비판이다. 탄허스님도 등각은 결국 묘각은 아니라는 것이다. 등각은 깨달음과 같다는 뜻으로 거의 다가갔지만 아직 완전한 깨달음은 아닌 것이다. 나는 여자와 같다는 말은 아직 여자는 아니란 말이다. 등각도 아직 망상 경계다. 묘각에 와야 진정한 돈오다.
성철스님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頓修이어야만 頓悟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묘각에 닿기 전까지는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묘각의 경지에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갔다 해도 아직 완벽한 깨달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쉽게 인가해줄 수 없다. 부처님과 같은 완벽한 깨달음이어야 돈오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는 공부가 끝났느냐 아니냐를 점검하는 방식이다. 보조국사 한암스님 탄허스님의 주장은 頓悟頓修만 주장하면 시작조차 못할 사람들이 많아 그런 것이다.
發心畢竟二不別 발심과 필경 이 2가지가 다르지 않으나 如是二心先心難 이 2가지 중 발심이 더 어렵다 <열반경>
문광스님은 이를 성철스님의 법명을 딴 徹적관점 공부는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안 된다와 탄허스님의 법명을 딴 呑적관점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로 본다로 구분한다. 정상에서 1m만 부족해도 안 된다가 성철스님이라면 모든 천 개의 강을 다 수용하는 바다가 탄허스님의 입장이다. 염불 선정 독경 다라니 절 간화선도 좋고 어떤 수행이라도 수용하여 짠 맛 하나만 내자는 것이다. 단 첫수행의 시작은 발심이 되어야 한다. 선재동자는 10신을 구족할 때 문수보살을 만나 보리심을 구한다.
염불을 하라는 묘봉산의 덕운스님을 만났을 때가 초발심 初住다. 그때 선재동자는 저는 보리심을 발한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보살행을 하고 보살도를 이루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맨 마지막 미륵보살을 만나서도 저는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라고 같은 말을 한다. 화엄의 일승교학은 삼승과 다르다. 삼승교학은 3아승지겁을 닦아야 한다. 화엄은 한 生만에 간다. 그래서 화엄을 圓頓信解門이라 한다. 원에 온 순간 원에 동참한 것이다. 화엄도 점법이 아니고 돈법이다. 점차 닦아 나가지만 한 생에 다 끝난다.
初住=頓悟 라고 한다면 묘각의 신통력도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돈오라 할 수 있는가? <보조법어 중>
初住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다. 묘각은 완벽한 능력을 갖춘 어른이다. 능력은 없지만 어린아이도 사람이다. 그러나 점차 닦아 나가다 보면 어른<부처님>처럼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원력을 세워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頓悟漸修이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처님처럼 성불하지 않으면 돈오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이 頓悟頓修이다.
얼음이 있어 녹기 시작해 얼음 상태를 벗어났다는 것이 돈오점수의 관점이라면 그래도 얼음이 남아 있으면 안 되지 않나? 하는 것이 돈오돈수의 관점이다. 완벽하게 다 녹아 물이 되어야 녹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냐는 입장이다. 탄허스님은 유교든 노장이든 기독교 누구든지 다 받아주는 회통론적 관점에 서 잇는 것이 탄허스님의 頓悟漸修이다. 부처님은 팔만대장경 보고 교학으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한 치의 오차 없이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처럼 우리도 완벽한 돈오의 경지까지 가야 한다.
頓悟頓修에서 나오는 말이 動靜一如 夢中一如 熟眠一如다. 화두가 항상 일념으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탄허스님의 경우는 어떤 공부를 통해서라도 빨리 발심하러 들어오라는 것이다. 일주문을 앞에까지 빼주신 것이다. 외도란 없다. 마음 밖의 것을 이야기하면 외도이지 마음을 논한다면 전부 도에 해당된다. 성철스님은 쉽게 인가해주면 안 된다 하셨다. 그러면 공부가 다 된 줄 알고 안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공부를 시작하는 發心을 중시하는 頓悟漸修와 공부의 완료를 중시하는 頓悟頓修는 한 가지 닦아야 한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 두 분의 사상을 회통할 필요가 있다. 本覺을 강조하는 頓悟漸修와 완벽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始覺을 頓悟頓修라 할 수 있다.
불교는 유교와 달리 本覺의 입장에서 큰 이름 법명을 지어주는데 이는 본래 깨달았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 때문이다. 택성은 본각의 입장에서 받은 법명이고 시각의 입장에서 받은 법호는 탄허이다. 그래서 4글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고 어떻게 불법에 다가갈 것인지 지금도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돈점논쟁은 세계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