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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모든 것은 무상하다.숭산행원 대선사

모든 것은 무상하다.

숭산행원 대선사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己

적멸위락寂滅爲樂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일체가 끊어진 적멸의 경지이다.

 

제자 한 사람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열반경>은 매우 복잡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불교는 너무 어렵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극장에 간다.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이 나오는 액션 영화를 본다. 수많은 격투 장면이 나오고 여기저기서 폭발물이 터진다. 모든 것은 아주 빨리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일상의 삶도 이와 같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가고 온다. 우리 인생이란 시리즈 영화와도 같은 것이다.

영화 장면이 1초에 14컷 정도가 된다고 한다. 매 컷은 정지된 행동들이다. 각 컷만 떼어놓고 보면 움직이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완벽한 멈춤(정적)이다. 오고 가는 것도,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는 완벽한 멈춤이다. 영화 필름 한 컷을 집어 손에 넣고 빛을 갖다 대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 컷의 매 순간이 완벽히 움직이지 않는 행동이다.

우리 마음과 우주도 이와 같다. 실제로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하고 움직인다. 쉼이 없다. 1초 동안에도 아주 많은 움직임과 변화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마음(바로 지금)이란 셔터 속도가 무한대인 시간에 의해 나누어진 렌즈와 같다. 그것을 ‘순간의 마음’이라 부른다.

 

우리가 그런 경지를 얻으면 이 세계의 운동은 멈춘다. 순간순간 우리는 이 세계가 완벽하게 정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필름처럼 우리는 매 컷을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정지돼 있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다.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정지된. 필름처럼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는 깨달음이다.

매 컷에는 움직이는 것이 없다.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영사기, 즉 생각하는 마음은 언제나 계속 움직여서 우리는 이 세계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인 생각을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순간의 마음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해서 우리 마음의 렌즈를 멈추고 보면 실제 우리 삶의 각 순간이 진정으로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순간의 마음이라 부른다. 그것은 움직이지도 않고 언제나 완벽하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다.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매 순간의 경험이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 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때라야만 우리는 이 열반경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머리로만 이해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옛날 6조 혜능대사 당시 한 스님이 어려서 출가하여 30년 동안 매일같이 경전을 공부했다. 그리하여 8만 4천 경전 중 아무 줄이라도 뽑아 읽으면 그 경전이 어느 부분에서 나왔는지 즉각 알고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경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경>이었다.

 

어느 날 그는 6조 혜능대사를 찾아갔다.

“스승님, 저는 <금강경>도 읽고 <반야심경>도 읽고 <법화경>도 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열반경>만큼은 이해가 안 됩니다. 질문이 있는데 좀 답해 주시겠습니까?”

“무엇이 궁금하냐?”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것은 다음 대목입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경지가 바로 완벽한 정적, 즉 더 없는 기쁨의 경지다’ 하는 대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완벽한 정적에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모두는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육체적 몸인 색신色身과 법의 몸에 해당하는 법신法身입니다.

육체의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언제나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병들어 늙고 죽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납니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의 존재이고 정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법신은 형태도 없고 감정도 없고 인식도 없고 충동도, 의식도, 생각도 없습니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바위나 나무와도 같습니다.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열반경>에서는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없어질 때 이 정적의 상태가 더 없는 기쁨의 경지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혜능대사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그래, 그럼 누가 색신과 법신을 나누었느냐?”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지금 질문을 하는 너는 색신이냐 법신이냐?”

“둘 다입니다.”

“둘 다? 누가 둘 다라고 말했느냐?”

“제가 했습니다.”

“오, 내가 했다. 이 ‘나’라는 것은 색신이냐 법신이냐?”

그 순간 제자는 입이 딱 막혀서 말을 할 수 없었다. 혜능대사가 이어 말했다.

“놓아라. 너의 개념적 생각은 버려라. 너의 색신은 결코 한 번도 ‘나는 이런이런 모양을 갖고 있다’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법신도 마찬가지이다. 네 스스로 모양과 실체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각이 나오고 지적인 욕심이 나오고 고통이 나오는 것이다. 너의 생각을 내려놓아라. 거기에는 모양도, 실체도 없다. 알아듣겠느냐?”

제자는 깊이 절을 올렸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어떤 것도 만들지 말라.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말이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탕!” - 주장자를 한 번 내려치다.)

 

그것을 얻으면 ‘사라지는 것도 없고 나타나는 것도 없다.’ (“탕!”)

 

아주 간단하며,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결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숭산 대선사의 가르침 <선의 나침반>

[출처] 모든 것은 무상하다.|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