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형이상학적 무아 해석의 세 번째 동향은 무아와 윤회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이상적인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한 무아의 교설과 괴로움의 현실을 드러내는 윤회의 교설은 동일한 지평위에 아무런 충돌 없이 나란히 서게 된다. 이러한 논리의 귀결은 무아인 그대로 윤회를 한다는 것이며 또한 윤회하는 자체가 이미 무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아와 윤회의 상충된 성격은 이미 해소되어 있으며, 오히려 두 교설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입장을 표명했던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이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선행 연구를 통해 이러한 무아 해석의 문제점을 이미 언급하였다. 본고에서는 가급적 중복을 피하면서 이 입장에 내포된 문제점을 추가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第一義空經」의 경구가 지목되곤 한다.54)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과보는 존재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짓거나 과보를 받는 별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아라는 것이다. 윤호진은 이 구절에 대해 한마디로 불교윤회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며, 새로운 생존(punarbhava)의 발생에 대해서는 이전의 행위와 그 과보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충분한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55)
그는 이러한 입장에서 불교의 윤회란 이주(移住, transmi-gration)나 재현(再現, reincai-nation)보다는 재생(再生, rena-issance)이나 전달(傳達, tra-nsmission)에 가깝다는 견해에 찬성한다. 뿔리간들라(Puligandla) 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영속적인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존이 인과적 사슬로 묶여 있는 부단한 흐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56) 그는 영속하는 실체 개념을 연상시키는 화현(化現, reincarnation)이라는 말을 피하고 대신 재생(再生, rebirth)라는 말을 쓸 것을 권한다.
54)『대정장』2 p. 92c; 임승택(2015) pp. 16ff; 윤호진(1992), pp. 96-97 등.
55) 윤호진(1992) pp. 96-97.
56) 이지수(1993) 역 p. 72.
사실 윤회의 주체를 배제하더라도 전생(轉生)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예컨대 한자경은 위의 경구에 대해 “인간의 업(業)에 대해 그 업과 독립적으로 업을 짓는 작자(作者)로서 상정된 자아란 그야말로 우리 자신의 설정이고 개념일 뿐”이라고 지적한다.57) 자아라는 개념이 있을 뿐 실제로는 무아이며, 업과 과보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인과응보의 법칙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58)
이 입장에 따르면 인과응보와 윤회는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며, 연기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연기설은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 자체 안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핵심․본질․자성․실체를 결여한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한자경의 논리는 무자성(無自性)․공(空)을 내세우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으로까지 확장될 여지를 보인다. 무아와 윤회는 서로 공존할 뿐만 아니라 연기․무자성․공 등의 개념과도 소통 가능하다는 것이다.
57) 한자경(2010) p. 59.
58) 한자경(2010) pp. 63-64.
정승석 또한 “윤회의 주체가 없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해 ‘업에 의해’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59) 그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존이 유지되는 사례로서 붓다와 팍구나(Phagguna) 존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지목한다.60) ‘누가(ko)’ 의식(識)이라는 음식을 먹고 접촉하고 감수하고 열망하고 집착하느냐고 묻는 팍구나 존자에게 붓다는 그것은 좋은 질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신은 ‘누가’ 무엇을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대신 붓다는 ‘무엇에 의해’ 혹은 ‘무엇을 조건으로’ 무엇을 하게 되느냐의 방식으로 묻는 것이 좋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여섯의 감각영역(六處)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접촉을 조건을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집착을 조건으로 있음(有)이, 있음을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늙음과 죽음(老死)가 있다고 덧붙인다. 이 답변은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생존이 가능한 이유를 해명한다고 할 수 있다.
59) 정승석(1999) p. 117.
60) 정승석(1999) p. 116; SN. Ⅱ. pp. 13-14 “몰리야팍구나 존자가 세존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누가(ko) 의식(識)이라는 음식을 먹습니까?’ 세존께서 답하셨다.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 아니다.’ 나는 ‘[누가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 음식을] 먹는다.’라고 말한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이라는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나에게 ‘세존이시여, 의식이라는 음식은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타당한 질문이다. 거기에는 타당한 답변이 있다. ‘의식이라는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을 위한 [정신․ 물질현상(名色)]의 조건이다. 그러한 [정신․물질현상이라는 조건이] 있을 때 여섯 장소(六入)가 있고, 여섯 장소를 조건으로 접촉(觸)이 있다.’라고 …
정승석에 따르면 업이란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의 활동이 남기는 잠세력(潛勢力)이다.61) 잠세력은 오온이 파괴될 때 새로운 존재를 위한 연기적 조건을 만들고 그 결과 가아(假我)인 오온이 새롭게 형성되도록 한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것을 ‘오온의 상속(相續, saṃtāna)’이라고 부른다. 윤회란 업 혹은 오온의 상속에 의해 이루어지는 까닭에 주체로서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윤회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무아론과 업론은 내면적 연관성을 지니게 되며, 바로 그것은 불교의 업설 또는 윤회의 특수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와 같이 불변불멸의 주체 혹은 자아가 없이 윤회가 진행되는 것을 일컬어 다름 아닌 ‘무아 윤회’라고 부른다.62) 이러한 설명은 무아와 윤회가 공존한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규명하는 듯하며,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61) 정승석(1999) p. 117.
62) 정승석(1999) p. 285.
그런데 정승석은 사색의 범위를 현대의 생명체 복제 문제로까지 확장시킨다. 불교의 ‘무아 윤회’는 자아가 아닌 업에 의한 생존의 상속 방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3) 체세포에 의한 동물복제는 ‘무아 윤회’의 실험에 속하며,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복제의 성공은현대의 과학이 불교의 ‘무아 윤회’를 실증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된다.64)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무아 윤회’에 내포된 치명적인 약점을 들추는 것이기도 하다.65) 정승석 스스로 밝히듯이 “생명의 복제는 벗어나야 할 윤회의 양산이다.”66) 또한 “만약 인간 복제가 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식으로든 상속되는삶이라면 그러한 상속은 이미 윤회하는 이 세계에 이루어져 있다.”67) 안타깝게도 이러한 언급은 ‘무아 윤회’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윤회 자체에 대한 언명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노출한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무아 윤회’의 논리가 대승불교에서 가르치는 연기․무자성․공 따위의 개념에 연결될 만한 여지는 다분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무아에 대한 해석으로는 타당한 근거를 지니지 못한다.68)
63) 정승석(1999) p. 288.
64) 정승석(1999) p. 290.
65) 임승택(2015) pp. 10-14.
66) 정승석(1999) p. 297.
67) 정승석(1999) p. 297.
68) 임승택(2015) pp. 16-25.
조성택은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라는 문제의 경구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69) 그는 이 경구가 깨달음의 경험으로서의 무아를 언급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행위의 주체가 궁극적으로 없다는 것으로 무아설 자체에만 초점을 모은다는의미이다. 따라서 이 경구를 윤회에 결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의 선행 연구에서 다루었듯이 무아를 실현한 아라한(阿羅漢)에게도 이전에 지은 업보는 남는다.70) 그러나 아라한은 그러한 업보에 반응하여 스스로 업을 ‘짓는 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해서 업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종식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며, 결국 오온의 상속 또한 멈추게 된다. 조성택에 따르면 붓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세계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다름 아닌 무아가 자리해 있다.
69) 조성택(2003) p. 181.
70) 임승택(2015) pp. 17-18
이제부터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에 관련하여 고려해 볼 수 있는 부파불교 문헌들의 해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업과 과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다”라는 제일의공경의 구절에 대해 구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온(蘊)은 찰나이므로 그것의 옮겨감(輪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번뇌와 널리 익힌 업으로 인한 [오]온만은 중유(中有, antarābhava)라는 지각(想)의 상속을 통해 모태에 들어간다. 비유하자면 등불의 불꽃은 비록 찰나이지만 상속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자아가 없지만 번뇌와 업에 의해 생겨난 온의 상속이 [새로운]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성립한다."71)
71) Pradhan(1967, ed) p. 129; 서성원(1993) p. 24 번역 참조
; 대정장 29, p. 47c “蘊刹那滅於輪轉無能. 數習煩惱業所爲故.
令中有蘊相續入胎. 譬如燈焰雖刹那滅. 而能相續轉至餘方. 諸蘊亦然. 名轉無失.
故雖無我而由惑業諸蘊相續入胎義成”
인용문은 영속하는 자아를 부정하면서도 오온의 상속에 의한 옮겨감(saṃcarituṃ) 즉 윤회(saṁsāra, vaṭṭa, vṛtta)를 언급한다. 따라서 이 대목은 ‘무아와 공존하는 윤회’의 사례로 간주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을 표방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바로 이문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는 도입부에 묘사되고 있는 “옮겨감은 불가능하다(saṃcarituṃ nāsti śaktiḥ).”라는 구절에 주목한다. 저자인 바수반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상속에 의한 옮겨감’이 아니라 그러한 옮겨감 혹은 윤회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인용문 전체에 대해 오온이 찰라마다 소멸한다는 진리와 유리된 범부 중생들에 한해 중유(中有)의 상속을 통한 윤회가 있게 된다는 의미로 파악한다.
한편 남방상좌부(Theravāda)의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타난다. 다음의 구절은 앞서 언급했던 구사론에 대한 필자의 이해를 더욱 공고하게 뒷받침해준다.
"그때 그에게 그 [오]온의 상속은 네 가지 도(magga)의 독약과 접촉함으로써 윤회의 뿌리인 번뇌들이 모두 근절된다. [그렇게 될 때] 단지 작용만 하는 상태로 경험된 몸의 업 등 모든 종류의 업은 분쇄되기에이르고, 미래의 재생을 생산하지 못하는 법성(法性, dhammataṁ)에도달하여 다음 생의 상속을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다만 최후의의식(識)의 소멸과 함께 마치 연료가 다한 불처럼 집착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72)
인용문은 오온의 상속을 묘사하면서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종식되는 순간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즉 번뇌가 근절되면 업이란 단지 작용으로만 남게 되어 윤회가 사라진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오온의 상속에 의한 윤회는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며 설령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궁극의 목적에 해당하는 열반이란 바로 그러한 상속이 멈춘 경지에 다름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
가 있다.
살펴본 부파불교의 논서들은 앞서 다루었던 조성택의 관점을지지한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오온이란 찰라마다 소멸한다. 그러한 사실을 체득하게 되면 주체로서의 ‘인간’이란 해체되고 더 이상 윤회란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 점에서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란 와해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번뇌를 지닌 존재들은 새로운 모태에 들어간다. 즉 무아임에도 무아를 수용하지 못하는 까닭에 윤회에 떨어지게 된다. 무아를 체득하지 못한 그들에게 윤회란 엄연한 현실의 세계가 된다. 구사론의 관련 구절은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 그러한 사실을 환기시키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중유라는 개념을 고안하여 윤회의 매개로 설명한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한편 청정도론의 해당 구절은 번뇌의 소멸을 통해 윤회가 종식된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밝힌다. 오온의 상속에 의한 윤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연료가 다한 불처럼 집착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Ⅵ. 마치는 말
붓다는 스스로의 가르침에 대해 괴로움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다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사변적 견해(diṭṭhi)는 열반의 성취에 보탬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언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괴로움의 현실을 조장할 뿐이다.73) 이 점에서 붓다의 무아는 사변적인 방식으로 제시되는 ‘자아에 대한 주장(自我論, attavāda)’을 거부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집착의 제거라는 실천적 관심에 소용이 되는 한에서 무아의 교리를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서 굳이 그의 침묵을 깨뜨리고 정형화된 무아 이론의 구축을 시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제까지의 사례를 통해 볼 때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73) 임승택(2015) p. 7; 임승택(2012) pp. 252ff.
본고는 무아의 교설이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을 가능성을 전제하였다. 필자가 파악하는 무아의 시대별 단층은 ‘형이상학적 무아’ 와 ‘실천적 무아’라는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본고는 전자의 ‘형이상학적 무아’에 초점을 맞추었고, 다시 거기에 배속될 수 있는 3가지 해석에 대해 살펴보았다. 단멸론의 방식으로 윤회의 교리를 배척하는 ‘윤회 부정의 무아’, 초월적 자아를 드러내기 위해 경험적 요인들을 부정하는 방식의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 무아의 논리로써 윤회를 규명해 들어가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무아 이론의 구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그러한 시도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려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형이상학적 무아’란 경험 너머의 영역을 경험적 언어로써 구성해 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먼저 ‘윤회 부정의 무아’는 죽음 이후 자아를 부정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원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특히 ‘윤회 부정의 무아’는 삼매에 의한 초월적 지혜를 통해 제시되는 윤회의 교설과 정면으로 부딪힌다. 바로 이것은 사쌍팔배(四雙八輩)라는 교리체계를 거스르게 된다. 한편 ‘비아와 교체 가능한 무아’는 직접적인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구사론의 비판에서처럼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진실한 자아가 결코 초월적인 것일 수도 유의미한 것일 수도 없다는 논리적 난점을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아 윤회’의 논리를 펼치는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는 윤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는 타당성을 지닐 수 있지만 무아 자체를 설명하는 것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무아 윤회’는 극복해야 할 윤회의 상태와 윤회가 멈춘 이상적 경지를 동일한 차원으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문제점을 노출한다.
이상과 같은 ‘형이상학적 무아’는 붓다가 제시한 원형적 가르침으로서 ‘실천적 무아’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본고의 분량 관계상 ‘실천적 무아’를 규명하는 작업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필자는 양쪽 모두를 순차적으로 검토하고서 서로를 비교․대조할 예정이며, 그것을 통해 붓다 자신이 가르쳤던 무아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실천적 무아’의 양상은 오온(五蘊)에 대해 자아가 아니라고 진술하고서 멈추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소극적 진술은 논리적 완결성이 떨어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바로 이것이 형이상학으로의 도약을 의도적으로 멈춘 무기(無記, avyākata)의 정신과 통해 있다고 생각한다. 붓다는 특정한 견해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양된 인격의 실현을 위해 무아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무아 자체를 내세우는 주장이나 견해마저도 그것에 집착할 경우 붓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필자의 일관된 의도는 ‘형이상학적 무아’에 얽매이지 말고 원래의 가르침인 ‘실천적 무아’에 각성하자는 것이다. ■
[출처] 윤회와 공존하는 무아|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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