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초기불전을 보면 ‘무아(無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무아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아(我)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그러면 ‘아’란 무엇인가요. 무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무아는 빠알리어 anatta(Sk. ana-tman)의 역어입니다. 〈청정도론〉 등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asa-rakatthena anatta-)’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야자나무나 파초 등은 보기에는 멋지지만 ‘심재(心材. 속재목. sa-raka)’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모든 존재도 그 본질을 꿰뚫어보면 속이 텅 비어있어 실다운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아(我)’란 ‘실체’를 뜻하고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인도의 바라문 전통은 이러한 고정불변의 자아(아뜨만)를 인정하고 그러한 자아를 터득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을 그들의 제일의 교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자아사상을 단지 ‘자아가 있다는 인식(我相)’일 뿐이라며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무아라 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무적멸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레라는 실체, 주먹이라는 실체, 집이라는 실체 등이 없다는 의미이지 조건의 화합으로 유지되고 있는 수레나 주먹이나 집 그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色).느낌(受).인식(想).심리현상들(行).알음알이(識) 그 자체가 무아이지 이러한 오온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란 없습니다. 오온을 떠나서 별다른 무아를 구한다면 그러한 무아야말로 무아라는 인식이나 관념이 되고 맙니다. <보특가라 : 오온을 짊어진 자>
무아는 ‘지금 여기(現今)’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중무진의 정신-물리적인 현상들의 참모습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전개는 바로 연기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는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용수스님은 〈중론송〉에서 “연기한 것 그것을 바로 공이라 부른다”고 천명했으며, 〈회쟁론〉에서 “연기.무아.공은 같은 현상을 표현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자아(아뜨만)를 존재의 본질로 생각하는 인도 지식인들이 제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무아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공(空)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더 적극적으로 불성이나 진여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해석이 작금의 소인배들에 의해서 실체론적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어 유감스럽기도 합니다. 물론 무아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무아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아니 진인이니 영혼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아니 본질이니 궁극이니 하는 ‘미세한 인식(相. 想)’에 얽매인 것일 뿐이지 결코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아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모라는 고정 불변하는 꼴이 있다면 그것은 세모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만일 고정 불변하는 특정한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만나는 모든 곳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를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로 표현합니다. 진정한 무아는 이처럼 대기대용이요 살활자재한 가르침이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금강경〉에 “참으로 무아에 통달해야 그를 일러 진정한 보살이라 한다(若通達無我法者 如來說明眞是菩薩)”고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