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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무작자(無作者)와 연기(緣起) / 근본불교의 무아론 3

무작자(無作者)와 연기(緣起) / 근본불교의 무아론 3

일체는 자기 자성이 있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화합의 결과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행위에 있어서도 주관적 실체라고 할 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有業報 無作者가 의미하는 바이다. 업과 보는 있어도, 업의 주체로서의 작자(作者)는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업과 보에 있어 작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나 뜻을 가지게 될 때,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내가 있어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뜻을 갖는다고 여긴다. 이것은 자아에 대한 실체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느낌이나 생각이나 뜻은 그런 것들을 가지는 내게 속하는 성질,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속성들을 가지는 나는 속성의 담지자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실체론적 사유에 따르면, 느낌이나 인식이 있으면 그런 것들은 반드시 그런 느낌이나 인식을 가지는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느낌에 대해 "누가 느낌을 갖는가?", 인식에 대해 "누가 인식을 가지는가?" 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것이다. 내가 느낌이나 인식을 갖는 나로서 존재하기에, 그 내가 이런저런 느낌을 가지고, 이런저런 인식을 하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잡아함경』은 식에 대해 "누가 인식을 가지는가?" "무엇이 식을 가지는 식의 주체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식의 인연이고 또 무엇이 식의 결과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식의 주체를'식을 먹는 자'로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식(識)을 먹는가? 석가가 비구에게 말하기를 나는 식을 먹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식을 먹는 자가 있다고 말한다면, 너는 마땅히 그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식이 곧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엇을 인연으로 먹는 식이 있는가?" *47


*47 잡아함경』, 권15 372 「파구나경」(대정장, 2, 102상), "誰食此識?佛告颇求那,我不言有食識者,我 若言有食識者,汝應是我

 

식에 대해 "누가 식을 먹느냐?"고 묻는 것은 "식의 작자가 누구냐?"를 묻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 식의 작자가 존재한다고 설정해 놓고 묻는 것이다. 반면 석가는 식의 활동인 업(業)과 보(報)는 있지만, 식의 작자는 따로 있지 않다는 '유업보 무작자'를 주장한다. 따라서 식이 있을 뿐이지 식을 가지는 자, 식을 먹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식을 가지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으로 인해 식이 있고 또 그 식으로 인해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행위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 행위 주체를 자기 자신으로 설정하는 것은 행위와 행위 주체가 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밥을 먹는다면, 밥을 먹는 행위와 그렇게 먹는 자로서의 나를 둘로 구분해서 그 각각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며, 이는 곧 밥을 먹는 나인 내 몸과 그 나에 의해 먹히는 음식인 밥을 따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밥 먹는 현재 순간으로 보면 먹는 내 몸과 먹히는 음식이 구분되지만, 오늘의 내 몸은 오늘까지 내가 먹은 음식의 결과이다. 내가 먹은 음식은 나에게 먹힘으로써 나의 몸으로 변화하며, 결국 그렇게 음식이 변화한 그 몸이 그 다음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것이다.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의지한다고 여기지만, 그 나란 결국 그 이전까지의 느낌이나 생각들이 나로 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이전 순간까지의 느낌이나 생각들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한 느낌이 그 다음의 느낌을 낳고, 그것이 다시 어떤 생각을 일으키며, 그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낳고, 그 다른 생각이 또 다른 의지를 낳고,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느낌이나 생각이나 인식 등은 그런 것들을 속성으로 갖는 속성 擔持者(담지자 : 생명이나 이념 따위를 맡아 지키는 사람이나 사물)로서의 실체가 작자로서 따로 존재해서 그 작자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느낌이나 생각이나 인식과 동일 차원의 것인 이전의 느낌이나 인식이나 뜻이나 생각 등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이처럼 느낌이나 새가 인식 등의 현상을 자기 동일적 주체를 상정함이 없이 인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연기론적 사유이다. 연기론적 사유에 따르면 느낌이나 생각, 인식 등은 모두 여러 衆緣(중연 :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일어나는 것이지, 단일한 주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처럼 느낌이나 생각이나 인식 등이 여러 중연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이나 생각이나 인식 등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 여기지 않고, 그들과 구별되는 개별 실체인 내가 존재해서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인식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의 의식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오직 현재적 의식에만 머무를 뿐이다.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들은 그것이 의식에 떠오르는 현재적 순간에는 명료하게 의식되고 포착되지만, 그 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과거화되면서 의식의 뒤편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렇게 뒤로 물러난 과거의 의식 내용은 의식에 가려져 있어 의식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거의 의식 내용으로서 현재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기에 현재의 느낌이나 생각이나 의지를 일으키는 중연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의 의식을 일으키는 것이 과거의 느낌이나 생각이나 인식 등인데, 그것이 현재의 의식에는 가려져 있기에, 즉 밝게 드러나 있지 않기에, 그 밝지 않은 무명(無明)상태에서 우리는 그것을 현재적 의식활동의 주체로, 자아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 의식 흐름이 의식의 무명 상태 안에서, 즉 무의식 안에서 바로 ‘나’라는 자기 의식을 형성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 자기 의식에 따라 매순간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의지한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식을 갖는가” 또는 "누가 식을 먹는가?" 라는 물음은 현재의 표면적인 의식만을 포착할 뿐 그 의식의 기반은 의식하지 못하는 무명 상태에서 제기되는 물음이다. 결국 무명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의 의식 흐름을 자아로 설정하는 실체론적 사유 경향에 따라 묻는 물음인 것이다. 반면 “어떻게 해서 식이 생하는가?" 의 물음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정된 자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현재의 느낌이나 사유의 주체로 설정된 자아는 결국 과거의 느낌이나 사유 자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물음이며 실체론을 부정하는 연기론적 물음이다. 이처럼 무아의 관점에 서면 '누가?' 의 물음은 '무엇으로 인해?' 의 물음으로 바뀌게 된다.

너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엇을 인연으로 먹는 식이 있는가?" 그러면 나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식은] 능히 미래의 존재[有]를 부르며, 상속하여 생하게 한다. 유가 있으므로 육입처가 있으며, 육입처를 인연하여 촉이 있다. *48

 

*48 잡아함경』 권15, 372 「파구나경」(대장 2, 102), 言, 何츠緣故 有識食? 我則答言,能招未來有令相生,有有故有六入處 六入處緣觸“


여기에서는 식이 무엇을 인연하여 생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진식을 인연하여 미래유가 생하고, 그 존재로 인해 육(六入違)가 정하고, 또 그 육입처로 인해 부딪침[觸] 이 생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무엇으로 인해 식이 생기는가?"를 답해야 할 자리에서 “식으로 인해 무엇이 생기는가?"를 말하는 것이 동문서답이 아니라면, 그렇게 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를 생겨나게 하는 인연이 A로부터 생겨나는 것들 속에서 찾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나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나요?" 를 물을 때,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네가 더 자라나서 어른이 되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겠지. 그 사람하고 결혼해서 서로 사랑하게 되면, 아이가 생기게 된단다." 이것은 그 아이로 인해 생겨나게 되는 것을 통해 그 아이가 생겨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을 통해 식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는 결국 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 실재로 식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식을 일으키는 원인과 식으로 인한 결과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식의 발생을 설명하며, 그 식의 발생이 곧 그 다음 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을 설명한다. 이것이 곧 앞 장에서 논의된 바 연기가 가지는 순환 구조를 말해 주며, 연기적 설명이 발생에 대해 외적인 제1원인을 설정하지 않는 내재적 설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식을 둘러싼 연기의 순환성이 성립한다.

識 → 行(業)
↑ ㅡ ↓

 

이런 이유에서 석가는 "무엇으로 인해 식이 있는가?" 를 묻고는 "식이 미래유를 불러 생하게 하며, 그로 인해 육입처가 있고, 또 그로 인해 촉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무엇으로 인해 식이 생기는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다"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럼 그 행은 무엇을 인연하여 있는가? 그것은 무명을 연하여 있다.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 *49


*49 「잡아함경」, 권12, 298 법설의설경(대정장, 2, 85상중), "緣無明行···緣行識”

 

“행(行)으로 연하여 식이 생한다" 에서 식을 가능하게 하는 행은 결국 식으로 인해 생기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싸잡아서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식이 어떻게 생하게 되는가의 설명은 식으로부터 무엇이 생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밝혀진다. 『잡아함경』은 행으로 인해 식이 있고, 그 식으로 인해 명색이 있으며, 그로 인해 육입처가 있고, 다시 그로 인해 촉이 있다고 말한다.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처(六入處)가 있고, 육입처를 인연하여 촉이 있다. *50

 

*50 『잡아함경』, 권12, 298 설경(대장 2, 85중), “緣無明行…緣行識 …緣識名色 緣 名色六人處 緣六入處觸"

여기서 식으로 인한 명색은 수상행식의 명과 색을 합한 오온을 뜻한다. 그리고 오온을 연한 육입처란 12척 중에서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가지 내 입처를 말한다. 이 내입처가 외입처인 6경과 화합하여 촉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분석할 때는 색수상행식을 '오온(五蘊)'이라고 하고, 안이비설신의를 '육근()'이라고 말하지만, 연기 과정에서 그것들을 지칭할 때는 주로 '오취온(五取蘊)''육입처(六人處)'라고 '말한다. 오온과 육근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개념이고, 오취온과 22 E육입처는 그러한 것들이 발생하게 되는 과정이 무명과 집착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취착된 오온이고 탐진치의 번뇌 세계로 진입한 육근이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51 무명에 근거한 행으로부터 식이 생하고, 그.......(중략)

*51 이중표는 「육입처와 육근은 동일한가?」(『범한철학』, 17집, 1998)라는 논문에서 육근과 육입처가 다르다는 것을 논하는데, 그 의미가 본서에서 논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중표는 12지 연기에서 무명으로부터 행 · 식 · 명색을 따라 연기하는 것은 육입처이지 육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만약 육입처가 육근을 의미한다면, 육근이 무명에서 생긴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명이 사라진 세존은 육근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이중표, 근본불교』, 민족사, 2002, 137쪽). 여기서 사실 문제가.......(중략)

이와 같이 12연기란 행위의 작자를 따로 상정함이 없이 행위 자체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되는 과정을 연결해 놓은 것이다. 연기 주체의 상정없이 각 항목의 업으로부터 인연법에 따라 그 다음의 항목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곧 업과 보는 있되 업을 짓는 자, 보를 받는 자에 해당하는 작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유업보 무작자의 논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과의 연속성은 처음 무명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노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노사로 인해 무명이 있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은 일종의 순환이 된다.

이렇게 해서 12지 연기의 각 항목은 실체 내지 작자가 없음으로 인해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는 순환적 인과 관계, 상호 의존적 인과 관계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