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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불교의 無我論 - 무아와 비아, 무엇이 옳은가 / 한자경

 

불교의 無我論 - 무아와 비아, 무엇이 옳은가 / 한자경

 

21

불교 무아론이 정말로 '자아는 없다'는 무아론(無我)인가, 아니면 단지 '오온은 진짜 자아가 아니다'라는 비아론(非我論)인가의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 논거를 경전상에서 찾아보자.

 

23

이 구절은 『잡아함경』무아설 중 다음과 같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1. 색은 나이거나 다른 나이거나 함께 있는 것(是我異我相在)"이 아니다.

 

불교의 無我論 - 무아와 비아, 무엇이 옳은가 / 한자경

 

21

불교 무아론이 정말로 '자아는 없다'는 무아론(無我)인가, 아니면 단지 '오온은 진짜 자아가 아니다'라는 비아론(非我論)인가의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 논거를 경전상에서 찾아보자.

 

23

이 구절은 『잡아함경』무아설 중 다음과 같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불교의 無我論 - 무아와 비아, 무엇이 옳은가 / 한자경

 

21

불교 무아론이 정말로 '자아는 없다'는 무아론(無我)인가, 아니면 단지 '오온은 진짜 자아가 아니다'라는 비아론(非我論)인가의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그 논거를 경전상에서 찾아보자.

 

23

이 구절은 『잡아함경』무아설 중 다음과 같은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1. 색은 나이거나 다른 나이거나 함께 있는 것(是我異我相在)"이 아니다.

 

그런데 이 유형의 의미는 이것의 변형 내지 좀더 친절한 설명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유형을 통해 더 잘 알아볼 수 있는데, 이는 것을 『상응부경전』중의 두 번째 유형과 상통하는 것이다.

 

2. 색이 나이거나, 색이 나의 것이거나, 내가 색 중에 있거나 색이 나에 있다(色是我 色是我所 色在我 我在色)”고 보는 견해를 부정한다."

 

이와 같이 우선 색에 대해 “① 색은 내가 아니다 ② 색은 나와 다른 것[異我] 또는 나에 속하는 것[所我]이 아니다 ③ 나는 색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④ 색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 네 가지를 말한 후, 마찬가지 방식으로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온 각각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네 가지 방식으로 말하므로,

 

24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모두 20가지가 되며, 이를 20가지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불교의 무아론은 이와 같이 잘못된 20종의 아견을 비판하며,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색수상행식이 자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구절만을 보면, 거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단지 색수상행식이 자아는 아니라는 비아론(非我論)에 그치며, 어떤 형태의 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론(無我論)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의 교설을 무아론 아닌 비아론으로 해석하며 불교에서 진정한 자아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비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위 무아의 주장에 사용된 팔리어 아나트만의 단어의 의미에 주목한다. 아나트만(anatman)은 자아 아트만(atman)에 부정어 안(an)이 덧붙여진 것으로, 여기에서 자아는 '자아가 있지 않다'는 방식의 주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 는 자아가 아니다'라는 방식의 술어로 쓰인 것이며, 따라서 이 문형에서 문제되는 것은 ‘………이 있다 없다'의 존재 문제가 아니라,........ 이다 아니다'의 술어적 규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서양 철학에서 be동사에 '이다'와 '있다'의 의미가 구분되지 않기에 많은 형이상학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과 상통할 만한 착안이다. 불교가 말하는 아나트만은 아트만이 없다는 무아론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집착하는 오온이 아트만이 아니라는 비아론이라는 것이다.*9

 

*9 예를 들어 "일체법무아라고 말하는 것은 일체의 법 속에 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체법은 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25

이와 같이 비아론자는 "오온은 자아가 아니다" 라는 말을 그러기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오온을 참된 자아로 여기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자아가 아닌 것(오온/비아)을 자아(아트만)로 보는 것을 배척" 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교는 아트만, 즉 참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오온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참된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오온 화합물로서의 가사(假我)와 구분되는 진정한 자아, 진아(眞我)가 인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를 무아론 아닌 오온 비아론으로 읽은 비아론자들의 관점이다. 이렇게 불교를 비아론 내지 진아론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인도의 베단타 철학자들이며, 일본의 불교학자 중촌원 외 여러 여래장계 학자들도 이런 관점을 취한다.

 

28

그렇다면 불교의 주장은 과연 비아론인가, 무아론인가? 비아론자처럼 불교의 무아를 “오온은 자아가 아니다" 의 비아로 해석하면서 그 안에서 오온과 구분되는 자아, 즉 진아의 주장을 읽어내려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업에 따라 형성되는 오온 안에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그처럼 오온 안에서 찾고자 하는 자아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불교가 비아론을 부정하는 무아론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을 단지 오온 화합물만으로 간주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적 해탈론은 업력이 다해 오온이 무너질 때 그로써 그냥 끝이 아니라 해탈하여 열반에 이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트만적 자아도 아니고, 오온도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비아론과 무아론의 논쟁을 해결하자면, 불교경전 속에 긍정과 부정으로 뒤섞여 있는 자아의 의미를 좀 더 상세히 분석하고 구분하여 무엇이 부정되고 무엇이 긍정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연기나 무아의 논의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아를 무아로서 아는 것이 바로 진여이다. 이 역설은 자아 實有性을 부정하는 무아의 차원과 무아를 무아로 바로 아는 진여(眞)의 차원을 구분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차원의 구분이 없는 한, 연기와 무아가 가지는 역설의 구조에 따라 무아와 비아의 논박이 계속될 뿐이다.

 

이하에서는 비아론과 무아론 각각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비아론자는 "색수상행식은 자아가 아니다" 라는 것은 오히려 오온이 아닌 참된 자아,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자아의 존재를 전제한 것이므로 불교는 무아적가 아니라 비아를 주장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일주재의 자아란 단지 관념이고 말에 지나지 않는 가설(假)일 뿐이라는 불교의 핵심 주장을 간과한 것이다. 반면 무아론자는 존재하는 것은 단지 오온일 뿐이며, 그것은 자아가 아니기에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논한다. 그러나 이것은 색수상행식 오온은 단지 가(假)일 뿐이라는 불교적 깨달음과 해탈의 차원을 간과한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상일주재적 자아가 어떤 의미에서 가설이고, 색수상행식의 자아가 어떤 의미에서 가아(假我)인가를 밝혀 본다.

 

31

오온이 자아가 아님을 설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색은 무상하다고 관하라.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고다. 고는 곧 나가 아니다.

 

색은 나가 아니다. 만일 색이 나라면, 색에서 병이나 고통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색에 대해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색에는 나가 없기에 색에 병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색에 대해 이렇게 되었으면 또는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도 이와 같다. *15

 

*15 "色非有我, 若色有我者, 於色不應病苦生, 亦不得於色, 欲令如是不如是 以色無我故 於色有病有苦生 亦得於色, 欲如是不亦復如是

 

33

오온을 자아로 여겨 '중생, 푸드갈라, 지바'라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할 뿐 아니라[非我], 그런 '중생, 푸드갈라 지바'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아라는 것 자체가 단지 생각이고 말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無我]. 그러므로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단지 말에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단지 생각이고 말일 뿐인 자아의 관념에 매여서 그런 상일주재적 자아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바로 그 아집이 일체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러면서 위의 문장은 불교의 무아론이 왜 비아톤의 형식을 먹게 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즉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왜 오온은 자아가 아니라는 것[비아]을 말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무아로서 그 존재가 부정되는 자아가 바로 우리가 오온을 보며 일으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오온]에 대해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어 '중생, 푸드갈라, 지바'라고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우리가 오온을 대하면서 상일주재적 자아의 관념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그 관념을 따라 오온을 상일주재적 자아로 간주하면서 그 오온에 집착하기에, 오온은 상일주재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상일주재의 자아는 단지 생각과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음 문장도 온갖 고통과 집착의근원이 되는 자아의 관념, 상일주재적 자아의 관념이 오온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4

불교는 일상적 범부의 자아의식뿐 아니라, 브라만교의 아트만 역시 이와 같이 오온에서 얻어진 관념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오온이 있다. 어떤 다섯인가? 색수상행식 오온이다. 만일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자아가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이 오온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18

 

오온에서 자아를 보기에, 오온으로부터 상일주재적 자아의 관념을 얻어낸다. 다시 말해 오온이 상일주재적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상일주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오온에서 자아를 보고,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고, 그 자아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고통을 증장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에 대한 집착은 오온에 대한 집착과 맞물려 있다. 결국 상일주재적 자아가 실재한다는 我執은 오온이 상일주재적이라는 생각[五蘊卽我]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상일주재적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無我]을 말하기 위해 오온은 그런 자아가 아니라는 것[無我]을 말하기 위해 오온은 그런 자아가 아니라는 것[非我]을 말하는 것이다.

 

39

색수상행식 각각의 온이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의 인연 화합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오온에 있어서는 전체로서도 그 각각의 요소로서도 궁극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色)은 사대(四) 인연으로 하고, 수상행은 촉을 인연으로 하며, 식은 명색(名色)을 인연으로 한다. 근경식이 화합하여 촉이 생하고, 촉을 연하여수상행이 생하는데, 그 수상과 식을 합한 명과 색을 연하여 다시 식이 생하므로, 그 발생은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환적 과정이다. 이는 곧 일체의 존재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 화합에 따라 형성되며, 그것도 상호적으로 인과 과의 관계를 이루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색수상행식 그 어느 것도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는 것, 색수상행식 그 어느 것에서도 실체시 될 수 있을 만한 궁극적인 것, 단단한 핵심, 존재의 알맹이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자신 안에 그 자신의 핵, 단단한 알맹이를 가지지 않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불교는 색수상행식을 각기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색(色)은 모인 물방울 같고 수(受)는 물 위의 거품 같으며, 상(想)은 봄날의 아지랑이 같고 행(行)은 파초나무와 같으며, 식(識)은 꼭두각시/아지랑이와 같다는 것을 관찰하라. *23

 

*23 『잡아함경』, 권10, 265 포말경」(「대정장』2,69상),“觀色如聚沫, 受如水上泡, 想如春時談, 諸行如芭 蕉諸識法如幻"

 

오온에 있어 단단한 실체적 알맹이는 찾아지지 않는다. 오온 안에서 불변의 실체를 찾고자 하는 것은 파초나무 안에서 재목이 될 만한 단단한 것을 구한다거나 물거품이나 아지랑이 안에서 불변의 실체를 구하는 것과 같다. 오온을 아무리 분할하고 분할해 봐도, 가상의 껍질을 아무리 벗겨 봐도,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것,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단한 알맹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 따르면 오온으로서의 자아는 인연 화합하여 형성되었다가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가(假)의 존재일 뿐이다. 바로 이 가의 오온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아라고 생각하는 그 나이며, 업을 짓고 그 업의 보를 받는 당사자이다.*25 오온이 업을 짓고 그 업의 업력이 새로운 오온을 형성함으로써 윤회가 계속되어도, 그 윤회 과정에 오온과 오온의 업을 넘어서는 자기 동일적인 실체적 자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무아론이 주장하는 바이다.

 

*25 그러므로 도덕적 책임을 묻기 위해 또는 업의 주체나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오온 너머에 오온과 구분되는 자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불교적 기본 통찰에 어긋나는 것이다. 물론 오온을 통해 어떻게 행위의 연속성, 도덕적 책임 귀속성, 윤회의 문제 등이 설명될 수 있는지는 그 자체의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이는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오온으로서 행위하고 그 업보를 받고 윤회한다고 해서, 그러니까 인간이란 오온 내지 오온 화합물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불교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윤희가 아니고 바로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기 때문이다.

 

42

그러므로 불교는 그러한 오온적 자아를 떠날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오온의 무상 · 고 · 공 · 무아를 논할 때는 언제나 그 결론이 자아의 실상을 바로 그런 것으로 바르게 파악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인 줄을 바로 알고 그것을 떠나라는 것이다.

 

색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하라. 이렇게 관하면 바른 관찰이다. 바르게 관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을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역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처럼 불교는 상일주재의 자아 관념을 떠날 뿐만 아니라, 무상·고·무아인 오온까지도 떠날 것을 촉구한다. 오온이 상일주재의 자아가 아니라는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결국 오온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온은 그것이 상일주재적이라고 잘못 안 상태에서든 아니면 무상 ·고 · 공인 것으로 바로 안 상태에서든 우리가 그 안에 머무르며 우리 자신과 동일시될 수 있는 자아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상일주재의 자아에 대해서도 '무아'를 주장하고, 마찬가지로 무상 · 고. 공인 오온에 대해서도 '무아'를 주장한다. 상일주재적 자아의 관념도 떠나고, 무상 ·고·공인 오온으로부터도 떠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상일주재적 자아는 단지 시설된 개념인 가설(假)일 뿐이고,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단지 중연화합하여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가상의 가아(假我)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