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無我論 1강
오늘날 우리가 흔히 자아를 몸과 마음의 결합체로 이해하듯, 불교 또한 인간을 색수상행식의 오온 화합물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오온 화합물로서 살아간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나’라고 생각하는 것, 곧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오온 화합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자아는 바로 오온 화합물이다. 만일 불교가 "자아는 존재한다. 그 존재하는 자아란 색수상행식 오온 화합물*1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면, 문제는 간단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오온 화합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주장하는 유아론(有我論)을 표방한다고 해서, 불교가 인도 정통 브라만교의 아트만설이나 육사외도의 유물론과 혼동되었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자아를 규정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2
그런데 불교는 스스로 무아론을 내세웠을 뿐 아니라, 다른 학파들로부터도 무아론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무아론을 내세우면서도 업보설이나 윤회설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위를 하는 자, 즉 업을 짓는 자와 그 행위에 의한 결과, 즉 업보를 받는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생에서의 업에 따라 다음 생으로 윤회하는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불교에 따르면 그것은 오온 화합물로서의 인간이다.*3 그렇다면 오온 화합물로서의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업과 윤회의 주체를 오온 화합물로서 인정한다면, 그런 오온 화합물로서의 자아가 존재하는 것인데 굳이 무아론을 표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 안에 '그것이 나다' 라고 할 만한 자기 동일적 실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몸 바깥의 빵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 빵을 먹어서 된 나의 몸도 ‘나’라고 할 수 없으며, 내 생각 밖의 특정 이념을 ‘나’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 이념을 받아들여 형성된 나의 생각도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는 오온을 중연(衆緣 :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형성된 연기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아를 주장한다.
나아가 이 연기의 원리를 모르고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여 그에 집착하는 아집(我)을 무너뜨리기 위해 무아를 설한다. 불교는 인생의 허다한 고통이 모두 집착에서 비롯되며 그 집착의 궁극 지점에는 자아에의 집착인 아집(我)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오온을 자아로 인정할 경우, 그 자아에의 집착이 더 커질 것이며, 그 집착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더 심할 것이다. 따라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불교는 자아에 집착하고 애탐하는 마음을 끊어 해탈에 이르게 하기 위해 무아를 설한다. 그러므로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해 그것이 무상(無常)이고 고(苦)이고 공(空)임을 강조하며, 결국은 무아(無我)라는 것을 깨닫는 그 바른 통찰이 곧 해탈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색은 무상하다는 것을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바른 관찰이다.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즐겨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그것을 마음의 해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상행식 역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과 같이 그것들은 고요, 공이요, ‘나’가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4
식의 전변설
제7말나식은 제8아뢰야식을 자기의 자아로 잘못 인식하고 자아의식을 일으킵니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배후에 있는 자아의식이지만 제6의식이 일으키는 자아의식처럼 명료하지는 않고, 말나식은 제6의식이 활동하지 않을 때에도 활동하고 있으며, 기절했을 때도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자아의식을 저절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無常과 空
무아론과 함께 무상(無常), 공(空)등 불교의 핵심 키워드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정리했다. 흔히 존재의 무상성을 설명하면서 생명체가 언젠가 죽음을 맞아 죽게 된다거나, 무생물도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고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설명은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불교의 무상은 언젠가 존재가 끝나기 때문에 무상이 아니라 그 존재의 순간 그 자체에 非存在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순간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각주 / 한자경 불교의 무아론 18~20쪽
*1. 오온 자체에 관한 더 상세한 내용은 본서의 마지막 장 5부, 무아론에 담긴 불교 존재론'의 1. 현상 세계 존재론 5온 12처 18계 부분을 참조할 것.
*2. 브라만교는 우주 창조자인 절대신 브라만과 그 브라만이 개체화된 절대 자아 아트만의 존재를 주장한다. 아트만은 우주 창조자 브라만이 자신이 창조한 각각의 개체 안에 다시 내재화되어 각각의 주체가 된 개별 자아이다. 이 아트만은 개체가 지은 업에 따라 옷을 바꿔 입듯이 몸을 바꿔 가며 윤회를 계속하는데, 브라만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트만이 더 이상 업에 따라 윤회하지 않고 개체의 신체를 벗어나 다시 브라만과 합일하게 되는 것이다. 윤회하는 개체적 몸 배후에 순수한 정신적 자아가 개별 아트만으로서 존재한다고 보며, 그 아트만이 절대자 브라만과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는 梵我一如사상이다. 브라만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철학서가 바로 우파니샤드이다. 육사외도는 당시 인도 브라만교의 정신주의와 선정주의에 대립하여 대두된 여섯 학파들로 대개 유물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색채를 띤다. 인간과 세계를 가시적인 물질적 현상 너머의 정신적 자아나 정신적 신의 창조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며 일체를 지수화풍 등의 물질로 구성된 존재로 간주한다.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을 그 자체 존재로 간주하며, 자아 또한 물질적 결합물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브라만교의 아트만은 순수 정신적 자아이고, 육사외도의 자아는 물질적 자아이다. 이에 반해 불교에서 자아를 오온으로 설명할 때 오온은 색수상행식 오온으로서 물리적 측면과 심리적 측면이 결합된 것이다. 색수상행식 오온이 물질이나 정신 어느 하나에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즉 색수상행식 그 어느 것도 자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무아를 강조하는 것이 불교의 특징이다.
*3. 행위 주체와 윤회 주체가 어떤 의미에서 오온인지는 이하에서 상술될 것이다. 윤회 주체를 불변의 아트만이 아니라 오온으로 본다는 점에서 불교의 無我 윤회가 브라만교의 有我 윤회와 구분된다.
*4. 『雜阿含經』, 권1, 1 「무상경」(『大正新修大藏經』제2권, 1上), “當觀色無常, 如是觀者, 則爲正觀 正觀者, 則生厭離, 厭離者, 喜貪盡, 喜貪盡者, 說心解脫. 如是觀受想行識無常... 如觀無常苦空非我, 亦復如是" 이하에서 『大正新修大藏經』은 『대정장』으로 약하여 표기한다. 그 옆의 숫자는 권수를, 그 다음의 숫자와 상중하는 쪽수 및 인용 구절의 위치를 가리킨다. 『雜阿含經』을 비롯하여 본서에서 인용하는 불경은 모두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에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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