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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메모

오장환 '피 흐르는 시인'과 '이지(理智)의 프리즘

오장환   '피 흐르는 시인'과 '이지(理智)의 프리즘

 

 

The Last Train

 

저무는 驛頭에서 너를 보냈다.

悲哀야!

 

開札口에는

못쓰는 車票와 함께 찍힌 靑春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病든 歷史가 貨物車에 실리어 간다.

 

待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路線이

너의 등에는 地圖처럼 펼쳐 있다./아프리카로 펄럭인다/은유

 

소설에 화두가 있듯이 시에는 비전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시인의 의식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비전에 원천을 두지 않은 일루전은 지리멸렬하게 혹은 파상적으로 흩뿌려진다. 이 경우, 감정이 섬약하거나 혹은 다혈질이면 감상 아니면 격정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특히 時代苦의 중압에 시달릴 경우, 시인은 자신의 독자적인 비전을 정립하지 못하고 감정의 소용돌이나 격랑 속에 표류하기가 쉽다.

 

오장환은 감정과 비전 사이의 거중간에서 어려운 몸부림을 쳐온 시인이다. 민태규가 "그의 시가 레아리티(리얼리티 reality)하려고 고투하나 그는 고만 공상적 로맨티시즘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한 것이나 김광균이 "無形한 하늘을 향하여 내어젓는 조그만 生活의 觸手, 不斷히 하는 자기 위치와 가치관에의 疑와 自笑, 상실한 「이데아」에의 鄕愁, 어두운 지하에서 그가 낙엽같이 띄워 보낸 이 詩”이라고 한 말은 모두 앞에서 지적한 그의 양면 요소 사이의 갈등적 현상과 유사한 성격을 이야기한 것이다. 임화가비전의 순수성을 잃고 스스로 로맨티시즘을 거부한 것과는 달리 오장환은 비전의 실체를 향유하지 못한 채 낭만적 열정으로 그것을 모색하는 데열중했다. 그래서 그의 정서는 비전의 주변을 애틋하게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특유의 진지성 때문에 그의 시는 어쩌다가 깊은 페이소스/정념에 젖어 있으면서도 센티멘털리즘으로 빠져들지 않는 건전한 측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비애'와 '병든 역사'를 '화물차'에 실려 보내면서 '대합실'에서 무언가 기다린다. 그 무엇의 정체는 없고 오리무중에서 카인(원죄의식)을 만난다. 이것이 일제 암흑기에 우리 시인들이 빠진 좌절의 공통늪이긴 하지만 그는 이 좌절에 함몰하지 않는 개성을 보여준다. 이 시 마지막 연은 얼핏 보면 짙은 감상의 궤적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슬픔의 하중을 실은 거북이의 느린 걸음에는 막연하기는 하지만 미래 지향의 강인한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감상의 태내에서는 이러한 참신한 비유가 산출될 수가 없다.

 

荒地에는 거칠은 풀잎이 함부로 엉클어졌다./

번지면 손가락도 베인다는 풀

그러나 이 땅에도

한 때는 썩은 果일을 찾는 개미떼 같이 村民과 노라리꾼이 북적거렸다

끊어진 산허리에

金돌이 나고

끝없는 노름에 밤별이 해이고

논우멕이 도야지 數없는 도야지

人間들은 人間들은 웃었다. 함부로

웃었다/ 웃었다!/ 웃는 것은 우는 것이다/

사람쳐놓고 원통치 않는 놈이 어디 있느냐!!

廢鐵이다./

荒無地 우거진 풀이여!/

文明이 氣候鳥와 같이 이곳을 들려간 다음/

너는 다시 原始의 피를 돌이키었고

엉클은 풀 욱어진 속에 이름조차 감추어 가며/

[중략] /

벌레 먹은 같이 洞에서 멀리하였다.

 

[중략]

 

鑛夫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은 헐은 도록달

廢驛에는 달이 떴다/

텅 – 비인 敎會堂 다 삭은 생철 지붕에

十字架 그림자

빗/

두/

로/

누이고/

洋 唐人 鑛山의 아버지, 聖堂의 牧師/

企業과

술집과 旅幕을 따라 떠돌아가고

軌道의 無數한 枕木

끝없는 레일이 흐르고 휘이고

썩은 버섯 질긴 비름풀!

녹쓴 軌道에 엉클어졌다./

해설피 장마철엔/

번개불이 /

쐉ㅡ

쐉ㅡ 하늘피 구름을 갈라/

다이나마이트 爆發에/

山脈도 鑛夫도 景氣도 웃음도 깨어진 다음

비인 待合室 門 앞에는 石炭 쪼가리 /

싸늘한 달밤에 /

잉, 잉/

잉, 돌뎅이가 울고

無人境에/

달빛 가득 실은 헐은 도로꼬가 스스로히

구른다/

부엉아! 너의 우는 곳은 어느 곳이나

어지러운 회리바람을 따라

不吉한 뭇새들아 너희들의 날개가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은 어느 곳이냐(

 

「荒無地」)

 

이 시는 철저한 사실적 묘사가 특징이다. 이 사실적 묘사의 배경에는 「The Last Train」이 그랬듯이 비극적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작용한다. 폐광을 무대로 한 폐촌, 폐역, 광부에 대한 일그러진 상황은 물론 을씨년스러운 주변 자연 현상까지도 하나같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鑛夫의 피와 살결이 말러붙은 헐은 도록고”는 광부의 처절한 삶의 도구를 통하여 극화한 사실적 묘사의 극치다. 비뚤어진 십자가가 서 있는 삭은 양철지붕의 교회당과 더불어 자본가와 성직자의 타락상 하며 녹슬고 휘어진 레일과 썩은 침목, 특히 그 틈 사이사이를 비집고 자라는 질긴 비름풀, 그것은 모질고 질긴 광부의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오장환이 그 당시 유행병처럼 번져 있던 아나키스트적 알레르기성이나 프롤레타리아트적 열병에서 애써 탈출하려는 의지를 이 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의지에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기능 역할을 하는 것이 악마의식이다.

 

저기 한 줄기 외로운 江물이 흘러

깜깜한 속에서 차디찬 배암이 흘러 싸탄

이 흘러………… /

눈이 따겁도록 빨간 薔薇가 흘러…

 

(「할렐루야」)

 

내 노래를 들으며 오지 않으려느냐

毒한 香臭를 맡으러 오지 않으려느냐/

늬는 귀 기우리려 아니하여도

딱따구리 썩은 枯木을 쪼으는 밤에 나는 한

거름 네 앞에 가마

(「無人島」)

 

여기 오는 뱀이나 독(毒)한 향취는 윤곤강의 「」나 서정주의「花蛇」에 나오는 원죄 의식이나 미의식 같은 집중적 테마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악마적 에너지의 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그의 시적 상상력을 끌고 나가는 추진력이긴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상상적 의지다. 그의 의지는 전경(前景)과 후광 사이에 가려 있는 비전을 모색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비전을 굳이 미래의식이나 재생의식이나 아니면 원형의식이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 때문에 그의 시는 생명력을 얻게 된다.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墓에는/

옛 흙이 향그러/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나의 노래」)

 

김동석은 오장환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는 斗鎭의 「墓地頌」을 읽고 좋아하면서 詩란 사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墓地頌」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쨌든 이 시는 그의 의식 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미래의식의 한 윤곽을 그려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또 “朝鮮 詩人 가운데서 章煥만치 歷史의 濁流를 잘 表現한 詩人도 없다"고 하면서 그의 시를 ‘탁류의 음악'이라고 압축해서 평했다. 그렇다. 그는 “비인 紙匣과 事務를 박구며, 시들어가면서도 "花甁에 한떨기 붉은 장미와 히아신스" 같은 청춘의 체온을 느끼면서 살았고 鐵柵 안 짐승처럼 울면서도 “五腸에서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는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고 자신을 지키면서도 무너지는 내면의 벽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피 흐르는 詩人에게 理智의 프리즘은 眩氣로웁소” (「不吉한 노래」)라고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