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의 시는 감정이입의 기법으로 엮어진 것이 많다. 그녀의 뛰어난 연상 작용은 이 시에서 보듯이 동음이의의 형식을 취하면서(보리-보리(菩提) 단순한 감각적 존재(보리)를 정신적 의미(불교의 보리(菩提)) 쪽으로 이입시킨다. 단순한 존재물이 정신적 상징의 무게를 싣게 된다. 언 땅을 뚫고 나온 보리나 눈 속에 든 보리는 단순한 서정적 소재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동안거 끝낸 수행자나 설산고행하는 노고승에 비유될 때는 새로운 정신적 의미로 승화하게 된다. 이 시에서 이러한 사실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새파란 보리'다. 이 '새파란'은 이미 감각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종교적 성스러움의 의미로 탈바꿈한다.
누가 말했을까요/
살아 있는 것처럼 완벽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여린 잎 속의 푸른 벌레와 생각난 듯이 날리는 눈발과
훌쩍거리며 내리는 비가
얼마나 기막힌 눈(目)이라는 것을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읽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런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하나의 자연일 때
편하고 편함은 곧 마음의 길을 열어 /
숨은 얘기 속삭인다는 것을//
뒤곁의 대나무숲 바람소리와 소리없이 피는 꽃잎과 /
추위에 잠깬 부엉이 소리가
그토록 작은 것들이 세상을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보았다는 것을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는 것을
(「누가 말했을까요」)
이 시는 생명의 기쁨을 노래한 시다. 생명의 기쁨은 항상 깨어 있을 때 찾아온다. 자연의 미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현상은 세상을 정확히 보고 듣는다. 그 자연의 눈과 귀가 우리에게 열리는 때가 바로 우리의 생명이 기쁨으로 눈 떠 있을 때다. 대개 전통적인 동양 시에서 자연은 관조의 대상이다. 즉 직관으로 그 세계를 음미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자연은 그 자체가 아주 작은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 눈과 귀가 '나'의 눈과 귀를 거쳐 자연의 순연한 모습과 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아니 작은 것은 끝까지 줄이면 하나가 된다. 너와 나는 하나로 줄여서 '우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의 생명일 때 기쁘고 기쁨은 곧 마음의 길을 연다"고 환호하게 된다. 창은 마음의 눈이다. 자연현상이 눈과 귀의 창을 달고 인간으로 들어올 때 시인은 이렇게 자연의 내면적 생명성을 직감하게 되지만 문제는 반복되는 설문 '누가 말했을까요'가 제시하는 누구의 뜻으로 누구의 손으로 이러한 신비로운 경이가 이루어지는가의 물음이다. 동서고금의 시에서 우리는 종종 이러한 성운에 가린 신비의 얼굴을 보게 된다. 하늘에 뜬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는 것이나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는 잎에서 누구의 발자취를 생각하는 시인의 감정은 종교적인 사념으로까지 번져갈 수 있다. 왜 "하늘이 텅 비어 있었다"고 했을까. 깨달음을 경탄하기 위해 깨닫기 이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대조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깨닫고 난 다음의 불교적 무상념일까. 아무튼 그녀는 시를 종료할 때 의미의 비중을 무겁게 두는 것이 특징이다.
강물에 돌을 하나 던진다 퍼지는 파문! 강둑까지 퍼진다/
돌 하나가 강을 흔들어 놓는다 저녁때
물결은 자꾸 소용돌이 치고 물길은 오래 물굽이를 숨긴다/
물소리 깊어, 물새떼들 이 어둠보다 먼저 갈대숲에 든다
내 생각에 내가 잠겨 저숲까지 갈 수 없다
숲 너머 강 끝에 나루터가 있고 나룻배 띄울 사람이 있다/
나는 몇 번 발끝을 들고 샛강 너머 다른 강을 바라다 본다/
강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문득 일어서는 물보라, 마른 내 등 짝 후려친다/
젖은 몸 강쪽으로 조금 기운다 나는
또 돌 하나 집어 힘껏 던진다
던진 돌에 맞은 건 강인데 내가 다아프다/
모든 돌은 끔찍해 돌 하나로 때론 세상이 끔찍하다/
돌이란 건 함부로 던지는 게 아닌 거야 그래도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키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는 물줄기를, 물의 줄기를 몰래 당겨본다/
강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나아가야 한다고
강바람이 강하게 나를 떠민다
소리치며 사람들이 강 옆을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괜히 돌팔매질이나 한다 그때마다 퍼지는 강의/
파문, 파문들! 파문을 막으려고
누구도 돌을 버린 이는 없다
(「돌을 던지다」)
그녀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인위적 행위(고의성)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삶의 이치와 길을 찾으려고 한다. 길이 잘 찾아지지 않으니 회의가 꼬리를 문다. 강물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 듯 회의가 잇달아 일어난다. 그녀는 돌을 버리지 아니한다. “누구도 돌을 버린 이는 없다”고 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누구'에게 돌린 간접화법이다. 그래서 조용한 강물에 '괜히‘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돌을 던진다. 그 파문을 강보다 더 아프게 느끼면서도 그것을 즐긴다. 돌 하나가 때로는 세상을 흔들어놓는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강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강의 물줄기를 몰래 당겨보려고까지 하면서(지속적 · 선지적 감각) 강에 돌을 던진다. 강물에 돌을 던지는 행위의 의미는 그녀의 예지(智)에 닿아 있다. 옛날 선각자(공자)가 발견한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가는 물의 지혜를 그녀가 활용한 것이 아닐까(지자요수(知者樂水)). 그녀의 시에는 물과 함께 바람의 이미지도 많이 출현한다. 시 「발 없는 새」를 보면 바람이 불면 새는 발을 잃고 바람 속에서 쉰다. '나'도 바람속에서 쉬고 싶어 한다. 그렇다. 그녀는 이 세상의 온갖 신비와 신기를 바람의 손으로나 물의 눈으로 찾아가는 것을 즐긴다.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천양희 시의 소재는 매우 광범위하다. 크게는 자연과 인간사를 총망라하고 있지만 특히 인간사에서는 일상생활의 면면에서 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단추를 채우면서」다.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단추를 채우면서」)
한마디로 섭생의 어려움을 시화한 것으로 시경의 “전전긍긍(戰戰兢兢)여리박빙(如履薄氷) : 세상을 사는 것이 살얼음을 밟는 것과 같이 두렵다는 뜻"을 연상시킨다. 자연에서는 꽃 한 송이나 물새 한 마리의 표정과 동작에서 숨어 있는 자연의 비밀스러움을 찾아내지만 여기서 보다시피 일상의 사소한 생활 주변의 다반사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런 지혜가 때로는 시적 상상력으로 여과되지 않고 직설적 언지(言志)로 토로될 때는 어희) 내지 잠언성 현학으로 빠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