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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메모

박인환 니힐리즘의 토루소(體)와 센티멘털리즘의 음영

박인환

니힐리즘의 토루소()와 센티멘털리즘의 음영

 

 

木馬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庭園草木 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 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紙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그는 시대고와 세대고를 동시에 앓고 있었다. 1930년대 이상이 거쳐간 모더니즘적 고뇌를 1950년대에 와서 재현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상이 협애한 내면적 자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데 비해서 박인환은 보다 지적이면서 세계적인 시야로 시상의 내역을 넓게 가진 것이 다르다. 그는 후반기동인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후반기에 속하는 시인의 대부분은 1920년대 불안의 세계에 태어났다. 이들의 어떠한 한 사람도 그들이 성장되고 사고하는 방법이 그 기반을 황폐한 정신적 풍토에 두었다는 것을 부인치 않는다" 라고. 그렇지만 그가 앓고 있었던 지적 고뇌는 남다른 특징이 있다. 구미 문학에 상당히 심취했던 그는 특히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 시인이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실존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서로 상반되는 이념의 주의다. 그러나 그는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적 파동과 실존주의의 의식적 탐색(실존적 고뇌)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사실상 제1차 세계대전 후 발생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 나타난 실존주의와 동의() 영역을 가질 수 있다. 초현실주의가 '혁명적 니힐리즘' 이며 '창조적 일원론적 니힐리즘'이라고 한다면 실존주의는 실존을 둘러싼 가상적 실체 일체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에 사색의 근거를 두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는 사르트르와 實存主義라는 글에서 사르트르의 臨吐허무에서 존재에의 정신의 변태를 미묘하게 그려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그의 시에서 니힐리즘적 정서가 내면 깊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니힐리즘의 다양한 양상의 이론적 근거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에 따른 그의 지적 모색이라고 하는 시작(詩作)상의 특성도 감지할 수가 있다.

木馬淑女는 그의 시에 종종 등장하는 초현실주의 시인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본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는 이 작품과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회상의 형식이다. 미라보다리는 실연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 하지만 여기에는 과거를 즐겨 회상하는 형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木馬淑女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잠시 회상에 대한 박 시인의 인식의 근거를 살펴보자. 그는 작품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의 부제로 T. S. 엘리엇의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거의 모두가 미래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는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 첫 연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冷酷)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라고 적고 있다.

아 창백(蒼白)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 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疲勞)에서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를 써 본다.

(세 사람의 가족(家族))

이 시의 회상의 형식이 초현실주의의 문법적 도구는 아니지만 여기에 단절의 형식이 작용하면 놀랍게도 무의식의 단편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올 수가 있다. 다음의 시는 그 단편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처녀(處文)의 손과 나의 장갑을

구름의 의상과 나의 더럽힌 입술을.....

 

이런 유행가의 구절을 새벽녘 싸늘한 피부가 나의 육체와 마주칠 때까지

노래하였다.

노래가 멈춘 다음

내 죽음의 막이 오를 때

(종말(終末))

김규동은 박인환의 밤의 노래를 예로 들면서 시행의 도치적 배열을 단절의 기법이라 했고 조향은 초현실주의적 단절법은 아니지만 이미지즘계의 단절법을 구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그러한 것들보다도 수사상의 차질로 드러난 단절의 불협화 현상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의혹의 기()에 나오는

 

얇은 고독처럼 퍼덕이는 기()

그것은 주검과 관념의 거리 (距離)를 알린다.“

 

최후처럼 인상은 외롭다.

안구()처럼 의욕은 숨길 수가 없다

 

가 그렇다. 문제는 여기에 사용된 비유 형식은 비유의 정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즉 본의(不義: 인상, 의욕)와 유의 최후, 안구)가 서로상응하지 않는다. I. A. 리차즈가 말하는 이 둘 관계의 결합이 비록 '폭력적 결합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일치해야 하는 논리에 안 맞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윌리엄 엠프슨의 난해성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유법의 논리나 난해성의 적법성을 비약한 것이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의 기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시가 무의식의 기법을 준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조향이 지적한 이미지즘적인 단절법이라고하기엔 이미지 위주의 의도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시 거리를 보면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市場)이 있고

과실(果實)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敎會)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陰影같이 따른다

 

는 표현이 있다. 이는 마치 이상의 시를 연상하리만큼 초현실주의적이면서도 이미지즘적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감각적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심적 상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심적 상황에서 야기되는 심의 활동의 주된 형식이 회상이다. 이 회상의 기류 속에 그의 특유한 에스프리가 함께 등장한다. 이 에스프리는 그의 시에서 모더니즘적 감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위에서 예시한 의혹의 기()가 그렇지만 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에서는 그런 현상이 짙게 나타난다.

 

"여우(女優 가르보의 전기책(傳記)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디택티브 스토오리가 쌓여 있는 /

서점의 쇼우윈도우/

손님이 많은 가게 안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

내 모자 위에 중량이 없는 억압이 있다."

 

모더니즘 시의 지적 에스프리는 주로 문명비판적 풍자 형식을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시의 그것은 시니컬한 공격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같이 회상의 기류 위에 뜨는 지적 에스프리도 문제지만 이와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비극적 정황이 짙게 깔려 있다. 센티멘털리즘의 황홀한 노을 빛혼자 길을 가는 여자와 같이 / 정다운 것은 죽고 다리 아래 강은 흐른다” (센티멘털 쟈니)과 니힐리즘(혹은 페시미즘)의 회색 빛 그림자-“오래도록 네 욕망은 사라진 회화(繪畵) 무성한 잡초원(雜草園)에서 환영(幻影)과 애정과 비벼대던 그 연대(年代)의 이름도 허망한 어젯밤 버러지" (기적(奇蹟)인 현대)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집어삼키는 검은 죽음의식-황제의 신하처럼 우리는 죽음을 약속합니다. 지금 저 광장의 전주()처럼 우리는 존재됩니다” (불행한 신())이 있다. 이것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정)의 총 목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木馬淑女는 바로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느끼는 매력은 이러한 비극적 서정을 피우면서도 그 속에 생명의 불씨를 품고 있는 점이다. 강인한 다이너미즘. 그는 프로이트의 뱀(티비도의 상징)을 원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뱀과 한 잔의 술, 미당의 「」에서 우리는 강렬한 탐미적 엑스타시를 맛보는가 하면 박인환의 특와 淑女에서는 이처럼 질척한 리비도의 축제의 한마당을 체험하게 된다.

시인에게나 철학자에게나 그 밖의 사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상상의 진로를 차단하는 벽이 있게 마련이다. 이 벽은 차단의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진이나 돌파를 위한 충전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박인환은 사르트르를 알고 그의 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인환의 을 보면 실존주의 철학자나 작가가 극한 상황의 고독 속에서 실존의 여윈 눈빛이나 실태를 붙잡으려고 한 것과는 달리 철저한 단절의 방벽을 치고 일상적인 허무 뒤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을 호흡하는 데 급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분명히 어제의 것이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중략)

옛날 그위에 명화(名畵)가 그려졌다 하여

즐거워하던 예술가는 모조리 죽었다.

 

지금 거기엔 파리와

아무도 읽지 않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격문(承文)과 정치 포스타가 붙어 있을 뿐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다!

 

그것은 감성(感性)도 이성(理性)도 잃은

滅亡의 그림자

그것은 문명(文明)과 진화(進化)를 자랑하는

사탄의 사도(使徒) 나는 그것이 보기 싫다

그것이 밤낮으로

나를 가로막기 때문에

나는 한 점의 피도 없이

말라 버리고 여왕이 부르시는 노래와

나의 이름도 듣지 못한다.

 

「壁」

'여왕의 노래''나의 이름 이것은 그가 추구하는 실존적 의미의 궁극적 실상일 수 있다. 이것을 위한 싸움은 자신의 전생명을 건("한 점의 피도 없이 말라버리는 싸움이다.

박인환,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들 自身分裂精神을 우리가 사는 現代社會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純粹本能體驗을 통해 본 不安希望의 두 世界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作品들을 발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