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창작 교실의 철학 강의 노트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역사 8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역사 8

 

기회 원인론

눈에 보이는 것만을 관찰 대상으로 하는 실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과학의 연구 대상은 어느 범위까지 들어가야 할까? 그 경계선에 있는 생각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실증주의라는 생각이다. 실증주의란 과학의 대상은 관찰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사고이다. 실증주의는 현재까지 과학 철학의 사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증적인 사고에 영향을 준 수도사

 

실증주의 사고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니콜라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1638~1715)라는 수도사이다. 그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촉발되어 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저작 활동의 최종 목적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에 대한 생각과 데카르트의 이성을 융합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브랑슈는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그것을 계기(기회)로 해서 신이 발동되고 최종적으로 신이 여러 가지 물체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기회 원인론'이라 한다.

말브랑슈에 의하면 예컨대 눈앞의 사과를 보고 우리 머릿속에 사과 이미지가 나타날 때, 눈앞의 사과가 직접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과가 거기에 있다는 ‘기회’를 신이 보고 우리에게 사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이미지는 신의 손에서 모두 관리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신이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말브랑슈는 이 생각을 '모든 것을 신 안에서 본다.'고 표현했다.

말브랑슈의 생각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물체의 움직임'뿐이며 물체 속에 들어 있는 '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알고자 하는 이 생각이 의외로 나중에 과학의 실증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에서 신학을 배우다

말브랑슈는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사진)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러나 논리를 추구하는 스콜라 철학에 싫증을 내고 대학을 중퇴했다. 그 후 오라토리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였던 피에르 베륄(Pierre de Berulle)이 설립한 것이었다. 그 후 말브랑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사제로 서품되었을 때 이 건물에서 우연히 데카르트의 유고인 <인간론>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나중에 기회 원인론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경험론 ②

 

'문 뒤의 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체의 존재에 의문을 던진 철학자

우리는 물체를 보거나 만짐으로써 물체가 거기에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면 예컨대 '문 뒤의 의자'처럼 직접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물체는 정말 그곳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로크의 경험론을 받아들인 아일랜드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는 이러한 의문을 품고, ‘문 뒤의 의자'처럼 누구에게도 지각되지 않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이 의문을 계기로 해서 버클리는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지각과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인정되던 ‘물질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버클리의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말에 그의 생각이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로크는 마음 밖의 세계에는 크기와 형태만 가진 원형(물질 존재)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버클리는 물체의 크기나 형태조차도 색깔이나 냄새 등과 마찬가지로, 오감이 자극되어 생기는 마음속의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물질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입장을 '비물질론'이라고 한다.

버클리와 비슷한 생각은 ‘양자론’에도 등장한다

실은 버클리의 이러한 생각과 비슷한 개념이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양자 역학)’에 오 등장한다. 양자론에 의하면 전자 같은 미시적인 입자의 위치는 관측하기 전에는 확정되지 않으며, 관측됨에 따라 비로소 확정된다. ‘관측함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성립한다.'는 점에서는 버클리와 양자론의 생각이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버클리는, 결국은 인간에 의해 지각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때 인간에 의해 지각되지 않아도 신에 의해 지각됨으로써 신의 개념(이데아)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존 버클리

1685년 아일랜드 태생의 철학자. 기독교의 성직자이기도 했고, 북대서양의 버뮤다 제도에 대한 포교 계획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계획이 좌절되었고 실망한 채로 귀국했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
버클리의 생각에 근거해 지각되지 않는 '문 뒤의 의자'나 '등 뒤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그렸다. 로크에서 시작된 경험론은 버클리를 거쳐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경험론 ③

 

‘조건이 같으면 결과도 같다‘는 것은 환상이다

과학의 뿌리를 뒤흔든 놀라운 철학

로크, 버클리로 이어진 영국 철학에서 경험론은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흠(1711~1776)에 의해 더욱 놀라운 전개를 맞이한다. 흄은 당시 철학의 꽃이었던 '뉴턴 역학'의 뿌리를 뒤흔들고 철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컨대 위의 그림처럼 내 공을 큐(막대)로 쳐서 정지해 있는 첫째 공을 맞히는 일을 생각해 보자. 내 공의 위치, 큐로 공을 치는 힘, 공끼리 충돌하는 각도 등 모든 조건이 완전히 같다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시도해도 충돌한 뒤에 내 공과 첫째 공이 나아가는 방향이나 빠르기는 완전히 같을 것이다. 뉴턴도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뉴턴 역학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흄은 그 전제가 정말로 옳은지 의심했다. 예컨대 똑같은 조건으로 당구공의 충돌을 되풀이했을 때, 가령 1억 번 똑같이 공이 움직였다고 해도 그 다음에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즉 흄은, 한정된 횟수의 실험밖에 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떤 때라도 100% 옳은 법칙'을 유도하는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과 관계의 존재는 '믿는 것'밖에 할 수 없다


흄은 '인과 관계'를 환상이라고 파악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인과 관계란 'A가 B를 일으켰다.'는 '원인'과 '결과'를 잇는 관계성을 말한다. 우리는 2개의 공이 부딪쳐 튕겨 나가는 모습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공이 부딪친 것'이 '공이 튕겨 나간 것'을 일으켰다는 인과 관계는 실은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실험을 거듭해도 그 추측이 절대로 옳은 것이 될 수는 없다.

이리하여 흄은 뉴턴 역학을 출발점으로 하는 '실험을 바탕으로 구축된 이론'의 약점을 부각했다. 그리고 인간이 쌓아 올리는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것은 과학의 뿌리를 뒤흔드는 그러한 지적이었다.

 

공이 나아가는 방식은 1억 1회째에 바뀔 수도 있다.

1억 1회째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이 나아갈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흄

1711년 스코틀랜드 출생. '인간 본성론'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철학책과, 역사책 <잉글랜드사>를 발표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에 신앙심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무신론자'라는 의심을 받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원하던 대학 교수가 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