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진달래능선(詩山會 제133회 산행)
산 : 북한산
코스 : 4.19탑(배향)-백련사-진달래능선-대동문-백운대
소요시간 : 쉬엄쉬엄 4시간
일시 : 2010년 4월 18일(일) 10시
모이는 곳 : 전철 4호선 수유역 1번 출구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사진기(하산 후 한정식으로 뒤풀이 예정)
연락 : 이재웅(010-3454-7717)
블로그 : 사진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삶 - 고은(1933∼ )
바람이 일지 않아도 잎새는 지고, 지켜보는 이 없이도 쓸쓸한 바다는 밀물과 썰물로 영원을 교대한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우리는 가난한 목숨 외에 무엇을 더 가졌다 하겠느냐. 지상의 삶이란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 자체를 누리는 일. 젊은 내외여, 우리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라도 이미 자연은 우리가 내려놓을 아이들에게도 살아내는 일의 숙명을 가르친다. 우리는 다만 보잘것없음을 겪고 나야 하는 생명이니! <김명인·시인>
그가 한때는 승려였기에 이 시는 옛 조사들의 선문답 같은 느낌을 주는 시다. 주변에 삶을 나타내는 구절이 많다. 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많다. ‘새옹지마’가 있고 ‘동전의 양면’도 있고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다. 그 중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와 ’빛과 그림자‘라는 말이 내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말이다. 지천명을 지나 이순(耳順)의 길목에서 우리는 ' KBS 아침마당'에 나와 인생의 행복에 대해 강의하던 오종남 선배의 말처럼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주어진 삶이니 살아야 한다. 이왕 사는 삶은 행복해야 한다. 그의 결론처럼 행복의 그릇을 알고 80%만 채워도 행복하다는 말에 공감한다. 나머지는 불행이다. 불행이 없으면 삶이 아니다. 빛은 온 세상에 나와 있어 보이니 모두 알지만 그림자는 뒤편의 어둠이니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남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지 않았어도 우리는 건강하니까, 남보다 많이 배웠으니까, 좋은 친구들과 가족이 있으니 우리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난 것은 덧없고 그리워지나니.
-도봉별곡
시산회 제132회“마이산(탑사)”산행기 (2010. 04.04, 맑음 /김종화)
▣ 참석자 : 16명 (기세환, 김용우, 김정남, 김종화, 나창수, 남기인, 박형채, 신원우,
이경식, 이원무, 이재웅, 이향주, 임삼환, 임용복, 조문형, 최광일)
▣ 산행코스 : 북부주차장-천황문-화엄굴-은수사-탑사-부부시-저수지-금당사-납부주차장
▣ 동반시 : “봄 편지” / 정한용
▣ 뒤풀이 : 오리고기(진흙구이, 훈제구이)/ “가나안 덕”(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어제는 행복 씨와 함께 봄나들이를 나섰다.
양수리역 앞의 양평군에서 지정한 ‘명가’라는 음식점에서 연잎 밥에다 뱀장어구이로 맛있게 점심식사를 위해 들어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장이 모른 척 한다고 행복 씨는 다른 곳으로 가잔다. 살이 통통히 쪄 움직임이 둔한 주인장은 손님들이 많아서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 보니 뜨내기손님인 우리에겐 시큰둥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집을 나와 이곳, 저곳을 한참을 헤매고 있는데, 마나님은 그냥 국수나 한 그릇 먹자고 인근에 있는 메밀국수집으로 가잔다.
모처럼 야외에 나와 몸보신도 할 겸, 맛있는 장어구이로 관심을 살려고 하였는데, 내 의도대로 되질 못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메밀국수로 점심을 때우다니 환장할 노릇이다. 몇 일전 이재웅 회장으로부터 이번 마이산 산행에 꼭 참석할 것을 권유받고, 그 때는 이번 일요일 부활절예배 때문에 동행하기 어렵다고 했었는데,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어 오늘 마나님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야외에 선심을 베풀려고 계획하였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행복 씨는 청평으로 가서 냉이, 달래, 쑥 등의 봄나물을 캔다고 한다. 양수리시장에서 칼을 하나 사서 북한강 가를 따라 청평 쪽을 향해 달렸다. 휴일이라 강가의 음식점마다 주차해 있는 차량들과 상춘객들로 봐 이미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청평에 근무할 때 가끔 찾았던‘문창소리’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온데간데없어 지고 펜션을 신축하는지? 다른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청평의 조종천가에서 마나님이 쑥을 캐고 있는 동안, 난 호명산을 올랐다. 이곳에 있을 때에 수 없이 오르던 길이라 곳곳마다 정겹고, 등산로 길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는 쉼터와 목을 축이던 약수터가 날 반겨주는 것만 같다.
청평은 내가 살고 있는 성남에서 채 1시간도 걸리지 않고, 겨울에 조금 추워서 흠이지 살기좋은 곳 중의 하나이다. 해서 직장을 그만두면 경치가 좋은 이런 곳에 자그마한 보금자릴 마련하고, 텃밭을 가꾸면서 건강을 챙길까? 계획하고 마나님께 의사를 물었는데, 자긴 서울에서 산다고 혼자 나가 살란다. 지금까지도 혼자서 외롭게 살아왔는데, 말년에도 혼자서 살아야 한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찰 노릇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이 남아 운길산 수종사 아래 마을에 잠시 들러 냉이와 달래를 캐려 했지만, 먼저 왔던 사람들이 벌써 캐 가고 없어 인근에 잘 가꾸어 놓은 농원만 잠시 구경하고 돌아왔다.
이번 마이산 산행은 금년 들어 1월 23일의 주흘산 산행이후 두 번째 가는 원거리 산행이다.
미안한 마음에서 행복 씨에겐 야식을 챙겨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5~60대의 남자들은 마나님께 져주고 살아야만 인생이 편안하다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야하니 썩 편치 않은 마음이다. 언짢은 기분을 추스르려고 방우달 시인의‘주말산행’이란 시를 되내어 보았다.
오늘 하루는 제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제 생각대로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저 산에 들고나오며
오늘 하루는 제 생각대로 살다가 왔습니다
하늘도 홀로였고
태양도 홀로였습니다
숲속의 나무도 안아보니 홀로였습니다
홀로 사는 것만이 제 생각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대로 사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면 저는 족합니다
해질녘이면 내려가고 싶은
제 생각대로 살 수 없는 세상이 그리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루만 제 생각대로 살면
일주일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 친구 동료 길을 가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따뜻한 웃음으로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시 정각에 잠실역 곰두리상 옆(석촌호수 쪽)에 도착하니 예정대로 25인승 하늘색 미니버스가 대기 중이다. 어제 이재웅 회장으로부터 17명이 참석한다고 연락이 왔었는데, 한양기 산우만 불참이란다. 아마도 늦잠을 잤거나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나 보다. 새로운 산우도 보인다. 이향주 산우, 화술이 달변이라 한양기 산우가 참석하지 않아도 즐거운 산행이 될 것이라고 몇몇 산우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랜만에 나 원장과 임 수석도 참석하였다.
금번 마이산 산행은 지난 131회 도봉산 산행 때에 김 왕회장님이 특별히 추천하여 결정한 듯하다. 마이산의 두 봉우리 중 서봉(암마이봉)만이 오를 수 있다고 하며, 고개마루 천황문 쉼터에서 불과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북부주차장에서 천황문을 지나 탑사를 구경하고도 남부주차장까지의 소요시간은 2~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좋은 관광코스라 모두들 한두 번쯤은 다녀갔으리라 짐작되지만, 무릎이 좋지 않은 기세환 김 전 회장을 각별히 배려해서 정했다고 하나 지난번에 원거리 산행(선자령)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측이 된다.
기세환, 이원무 산우만이 조금 늦게 도착, 7시 15분경에 진안 마이산을 향해서 출발이다. 남기인 산우는 기흥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이 회장은 금년 산행일정표와 함께 1/4분기가 지났다고 지난해와 금년 들어 지금까지의 산행 참석자와 회비 입출금 결과를 보고한다. 총장이 해야 할 일을 회장이 겸하고 있으니 딱한 마음이나 다른 한편, 고마운 일이다. 당초 예고도 하였지만, 금년 들어 처음으로 참석한 나창수 원장이 그동안 참석하지 못함을 사죄하는 마음에서 고향 영산포에서 특별히 흑산도 홍어를 공수하여 준비해 온단다.
대부분의 산우들이 아침을 거르고 온 터라 이 회장이 미리 준비해온 시루떡과 막걸리를 홍어와 함께 적당한 장소(휴게소)에서 먹자고 한다. 마침 남기인 산우가 기흥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어 휴게소에 잠시 들러 길가 잔디밭에 판을 펼쳤다. 주변엔 벌써 많은 산객들과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는지, 상춘객들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루떡은 아침 일찍 떡집에서 사 왔는지? 따듯해서 먹기 좋았고, 막걸리에는 역시 홍어안주가 별미였다. 박형채 산우는 잽싸게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곳으로 가 밥과 안주, 국물을 얻어 온다. 어디 내놔도 굶어죽지는 않을 친구이다. 떡과 막걸리로 배를 채웠으니 다시 출발이다. 활력소가 들어가서인지 모두들 한마디씩 한다. 최근 백령도 앞에서 좌초된 천안함의 사고가 화제의 대부분이다. 확실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실종된 군인들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깊은 바다 속을 잠수하고 있는 UDT대원들과 민간인구조대원들에게 무탈하기를 기원해 본다.
우리의 애마는 천안ㆍ논산 간 고속도로를 막힘없이 달려 호남고속도로를 잠시 타는가 싶더니 2007년 말에 개통된 익산ㆍ장수 간 고속도롤 달리다가 10시 30분경, 진안톨게이트를 빠져 나간다. 저만치 멀지 않는 곳에 말의 두 귀 모양으로 우뚝 솟아있는 마이산의 자태가 차창 가에 뚜렷하게 보인다.
마이산(馬耳山)은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 두 암봉으로 된 산이다. 산 모양이 마치 말의 귀와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동봉은 숫마이산, 서봉은 암마이산 이라고도 부르는데, 곧 남녀 양신(兩神)으로 믿어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마이산의 높이는 서봉(암마이산)이 685m, 동봉(숫마이산)이 678m이며, 노령산맥의 줄기인 진안고원과 소백산맥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남쪽 비탈면에서는 섬진강의 수계가 시작되고, 북쪽 비탈면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신라 때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렸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馬耳山)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른데,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 해서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해서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448개의 나무로 만든 층계가 있고, 동봉 중턱의 화엄굴에서는 옛부터 약수가 솟는다고 한다.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인 탓에 나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데군데 관목과 침엽수, 활엽수가 자란다. 1979년 10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의 100대 명산 중 18위로 알려져 있다. 4월 중순엔 남부주차장 입구에서부터 탑사(약 2.5Km)에 이르기까지 벚꽃이 만발해 진안군에서 주최하는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10시50분경, 북부주차장에 도착하여 상가 뒤 쪽을 따라 출입구서부터 나무계단을 올랐다. 동봉과 서봉의 사이 고갯마루인 천황문 쉼터에서 잠시 휴식이다. 동봉(숫마이산)은 오를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서봉(암마이산) 또한 2004년 10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10년간 자연휴식년제 기간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었다. 철재 난간으로 등산로를 복원 중에 있단다. 등산로 입구에는 '무단출입할 경우에는 50만원의 과태료'라는 위협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동봉의 화엄굴 (華嚴窟)로 올라가는 곳에는 철조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플랜카드에 커다란 글씨로 ‘위험, 낙석으로 통행(접근)금지’ 안전조치 후 개방하겠다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화엄굴 안에는 물이 샘 줄기처럼 떨어져 내리는데 예로부터 이 물을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득남을 한다고 전해진다고 하나 최근에는 새들이 서식하여 물이 오염되어 음료수로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한다.
휴식을 취하며 가까이서 동봉과 서봉을 자세히 보니 하나의 거대한 수성암으로 자갈과 같은 큰 돌들을 모래와 시멘트로 버무려 다져서 쌓아놓은 탑과도 같다. 게다가 적당한 크기로 움푹하게 작은 굴들이 파여져 있었는데 큰 돌들이 제 무게에 빠져나간 자리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풍화작용이 표면 아닌 바위 내부에서 일어나서 표면 밖에 박힌 바위를 밀어내서 생긴 모습들이다. 이를 타포니지형이라 한다는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의 하나가 이곳이라 한다. 또한 이 지역은 아주 옛날에 호수였다가 지각변동에 의해 바닥이 솟아올라 형성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마이산의 군데군데에 쏘가리 형태의 민물고기의 화석이나 고동류, 조개류의 화석 등이 발견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단다.
시계를 보니 12시20분이다. 우리를 싣고 갈 기사님과 남부주차장에서 2시에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어서 시간이 넉넉하다. 서두를 것도 급한 것도 없다. 남들보다 앞서서 바쁘게 가야 할 이유도 없기에 경상도 지역에서 온 투박한 사람소리, 새소리, 시원한 봄바람에 온몸을 씻고서 탑사가 있는 쪽을 향해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섰다. 우리가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은 틀에 짜인 시간 때문에 반사적으로 생긴 강박관념 때문이다. 오늘은 그런 생각을 버리고 물 흐르듯이 그냥 홀가분히 자연과 함께 하자. 자연에 순응하면서 하루를 보내자는 뜻이다.
몇 십 계단을 내려가니 커다란 북(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북이라 한다)을 설치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북을 치며 소원을 빌게 하는 은수사(銀水寺)란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 은수사는 조선시대 태조(太祖)가 임실군의 성수산(聖壽山)에서 돌아오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마당 한 곁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안내판에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라고 적혀있다. 우린 배나무아래 평상에서 잠시 쉬면서 감로수를 한 잔씩 마시고 탑사로 가며, 숫마이봉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남겼다.
탑사에는 돌탑을 구경하는 수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돌탑의 유래는 조선조 후기 임실에 살던 이갑용(李甲用)이라는 사람이 25세 때인 1885년(고종 25년)에 이곳에 입산하여 은수사에 머물면서 솔잎 등을 생식하며 수도하던 중,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기 시작, 10년 동안에 120여 개에 달하는 여러 형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차곡차곡 그대로 쌓아올려 조성한 이 돌탑들은 높이 1 m 쯤서 15 m 의 것으로, 각양각색의 모양이다.
그는 수도하며 낮에는 멀리서 돌을 날라다가 밤에 탑을 쌓았는데,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와 8진도법(八陣圖法)을 적용, 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림으로써 돌탑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피라미드형 등 여러 모양의 탑 80여 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은 1976년 4월 2일자로 전라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갑용 처사는 98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그의 생애비와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었다.
사찰의 대웅전 앞에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이, 대웅전 뒤의 절벽 쪽으로는 오방탑, 천지탑 등이 조성되어 있었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단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란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인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 쌍의 탑이었다. 밑에서 볼 적엔 윗부분이 비스듬히 바람만 살짝 불어도 넘어질 것 같았는데, 위쪽에 올라 바라다보니 정교하게 수직으로 쌓여져 있었다. 서봉(암마이봉)의 중간에 돌들이 빠져나간 틈 사이엔 누가 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자그마한 석불상과 돌탑들이 눈길을 끌었다. 우린 천지탑 위쪽에서 개인 기념사진을 찍고서 탑사를 빠져 나왔다.
산행을 하지 못한 탓에 땀도 흐르지 않고 배도 썩 고프질 않다. 준비해 온 간식과 막걸리를 이곳에서 먹고 뒤풀이는 너무 늦게 출발하면 귀경시 정체될 것을 감안해 저녁식사를 겸해서 분당에서 하잔다. 오늘 뒤풀이는 임 수석이 지난달 장인어른 별세때 산우들의 문상에 대한 보답으로 제공 하겠다고 한다. 탑영지(塔影池)란 저수지옆의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 부부시비가 세워져 있는 잔디밭에서 산우들이 준비한 간식을 내어 놓았다. 김밥, 고구마(신원우), 한과(김정남), 방울토마토(이향주), 딸기(임삼환) 등등의 과일과 주꾸미(남기인) 등을 안주로 마신 막걸리 한 잔은 꿀맛이다. 어린 시절 소풍가서 먹었던 그리운 추억이 떠올라 그런대로 색다른 정감이 있어서 좋다.
먹는데 정신이 팔리다 보니 오늘의 동반시를 빠뜨릴 뻔했는데, 그냥 지나칠 산우들이 아니다. 동반시(‘봄 편지’/정한용 시인) 낭독은 김 왕회장님의 안내대로 오랜만에 참석한 기세환 전회장이 낭독하고, 프롤로그 시(‘꽃을 보려면’/정호승 시인)는 오늘 산행기를 쓰기로 한 내가 읊었다. 두 편의 시 모두가 난해하나 봄을 주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는 시 인 듯싶다. 시를 읊고 나니 김 왕회장님이 말했듯이 한평생 지난날을 뉘우치며 돌탑을 쌓았던 이갑용 처사가 현생하여 우리 곁에서 활짝 웃으며 내려다보는 듯하다.
탑영지(저수지)에서부터 남부주차장의 입구까진 커다란 벚나무가 일정간격 조성되어 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아 아직도 꽃망울도 맺지 못한 채 상춘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가 보다. 4월중·하순경 벚꽃이 활짝 피면 아름다운 산책로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꽃구경 올 것을 기약하고 금당사와 숯불흙돼지고기 등의 음식점들이 즐비한 상가를 지나 남부주차장이 있는 출입구에서 버스에 남겨둔 홍어와 막걸리로 암마이봉을 못 오른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오후 3시경, 이젠 출발이다. 대기 중인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뒤풀이(한방오리구이)를 기대하며 귀경길에 올랐다. 뒤풀이 장소는 이원무 산우의 군대시절 친구가 운영한다는 야탑역 영장산 옆에 있는“가나안덕”이라는 오리고기 전문집이란다. 진흙구이는 3시간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하기에 이 산우는 전화로 예약을 하였다. 오는 도중 진안에서 천안까지는 일부 정체구간이 있었으나 휴일치곤 그런대로 잘 빠져 나간다. 김용우 총장은 분당에 사는 동생과 가족모임이 있어 야탑역 앞에서 내리고, 나머지 15명의 산우들은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오후 6시반경, 뒤풀이 장소에 도착, 2층에 미리 마련된 식탁 앞에 좌정하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옆 좌석에서 갑자기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생일을 축하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뒤돌아보니 일가족이 나이든 할머님을 모시고 이곳에서 외식을 하는 모양이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좋아 보여서 우리도 함께 박수로서 박자를 맞춰 축하해 드렸다. 이윽고 진흙 속에서 3시간동안 기름이 잘 빠진 오리안주에 소ㆍ맥을 한 잔씩 하니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오늘의 메뉴를 누가 선정했는지? 잘 선택한 것 같다. 조금 부족한 것이 좋은데, 먹산회라 식욕이 왕성한 산우들이 있어 훈제구이를 추가로 시켰다.
배부르게 잘 먹고, 잘 마시고, 다음 산행지의 추천순서에 나 원장은 용문산엘 가자고 한다. 한참 뒤에서야 세 번째 일요일에 본인이 선약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랬다며, 다음 기회로 연기하잔다. 용문산은 중앙선전철이 용문면까지 연장되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하시라도 갈 수 있는 곳이다. 해서 내 생각은 가뜩이나 참여기회가 부족한 나 원장을 배려해서라도 용문산산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른 산을 정했으면 한다.
어제 오후, 김 왕회장님과 전화가 있었는데‘용문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산행기 작성과 안내문 발송을 부탁하신다. 오전 중에 계속하여 회의 때문에 전화를 하지 못했었는데, 산행기는 일이 바쁘면 본인이 쓰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경식 문화부장님께서 모처럼 나에게 주신 기회인데, 그것도 간단히 쓰면 좀 서운할 것만 같아 쓰다 보니 장문의 기행문이 되어 버렸네 그려. 긴 글 양해를 구하며, 오늘 좋은 안주(홍어)를 특별히 준비하여 온 나 원장, 더불어 간식을 챙겨 온 산우들, 또한 맛있는 뒤풀이(한방오리고기)를 제공한 임 수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항상 수고가 많은 이 회장님도.(잘 먹었나이다.)
오늘 아침에 KBS-1TV에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고교선배인 오종남 전 특허청장이 한 강의에서 인생 90년에서 우린 아직도 3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남아있다. 환갑이 지났거나 환갑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멋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산우들 모두가 복된 노후를 설계하시기 바란다. 항상 건강한 몸 관리로 한 달에 두 번 실시하는 시산회 산행 때에는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 관련사진 :“K-20마을(cafe.daum.net/K-20, 시산회 사진)”참조.
“봄 편지” / 정한용
두 점 사이에 우린 있습니다.
내가 엎드린 섬 하나와
당신이 지은 섬 하나
구불구불 먼 길 돌아 아득히 이어집니다.
세상 밖 저쪽에서 당신은
안개 내음 봄 빛깔로 써보냅니다.
잘 지냈어…… 보고픈…… 나만의……
그건 시작이 아니라 끝, 끝이며 또한 처음
맑은 흔적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혹시 압니까
온 세상 왕창 뒤집혀 마른잎 다시 솟고
사람들 이마에 꽃잎 날릴 때
그 너울 사이사이
흰 빛 내릴 때
그쪽 섬에 내 편지 한 구절 깊숙이 스미고
이쪽 섬에 당신 편지 한 구절 높이 새겨져
혹시 압니까
눈물겨운 가락이 될지 섭리가 될지
아프게 그리운
한 흙이 될지.
* <참고자료> *
정한용 시인은 195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현재 고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고, 1985년‘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1990), [슬픈 산타 페](1994), [나나 이야기](1999), [흰 꽃](2006)을 냈으며, 그 외 저서로는 [민족문학 주체논쟁](1989 편저),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1995 평론집), [울림과 들림](2006 평론집)등이 있다. 2003년 IWP(미국 아이오와대학교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했으며, 2006년 이후 제노사이드에 관심을 갖고 폭력과 평등의 문제를 시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인터넷 문학동인회 [빈터]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동반시‘봄 편지’는 그의 네 번째 시집인“흰 꽃”(문학동네, 2006)의 16편의 시들 중에 두 번째로 실린 시 이다.
< 을왕리에서 김종화 씀 >
다음 산행은 북한산 진달래능선으로 정한다. 나 원장이 이번에 선약이 있어 못 간다는 마음을 비췄고 김종화 전 회장님이 다른 곳으로 정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재웅 회장님은 남쪽의 산우들을 위한 배려로 청계산으로 가자했으나 이경식 문장관 등과 상의를 하여 진달래꽃이 만발한 북한산으로 정한다. 청계산은 5월의 첫째 산행으로 미룬다. 둘째 산행은 국립공원 주왕산-주산지로 미리 예정을 잡는다. 물론 산우들의 동의가 있어야 확정된다. 마침 4.19 의거의 전 날이다. 2006년 4월 16일에 34회 산행 때 4.19탑에 배향하고 칼바위능선으로 올라 진달래능선으로 내려왔다. 벌써 4년이 흘렀다. 지금도 사진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프롤로그시로 소월의 ‘진달래꽃’을 올렸다. 이 날도 그 시를 읊조리며 올라가면 가슴에 담긴 아름다움으로 모두의 마음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질 것이다. 코스는 백운대까지 잡았지만 대동문에서 칼바위능선으로 하산할 수도 있고 내친 김에 백운대까지 가는 수도 있다.
시인 T.S. Eliot는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다. 겨우내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틔우기 때문이라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한 의미를 새겨본다. ‘잔인한 달’의 가운데에서 수유역에서 모두 만나 정하자.
동반시다. 시인은 ‘소나기’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련하게 새겨주는 황순원의 아들이다.
황순원은 소설‘카인의 후예’와 ‘나무들 비탈에 서다’로도 유명하다. 모두 영화화되어 젊은 날 우리들 가슴에 아직 남아 있다. 시인은 영문학자이다. 그가 쓴 시 ‘즐거운 편지’를 영역한 것을 읽어 봤는데 제목인 '즐거운 편지'를 'A Happy letter'로 번역했으니 우리는 행복한 편지로 직역할 수밖에 없다. 실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즐거운’을 영어로 나타내는 표현이 ‘happy'밖에 없어서 일 것이다. 하여 우리 한글은 참으로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어 시적 표현을 하기에 지구상에서 최적의 문자가 아니겠는가.
뒤풀이 때 물었던 집오리의 한자는 鴨(압)이다. 鳩(구)는 비들기, 雁(안)은 기러기다. 광주의 이향주가 이 글을 보면 좋겠다.
황순원은 ‘나그네’의 시인 박목월과 친구 사이였는데 아들이 생기면 이름을 같이 짓자하여 동규라 했으며, 목월도 아들의 이름을 동규라 했다. 황동규는 서울대 영문과, 박동규는 국문과 교수로 한 대학에서 강의했다. 대학 시절 황순원 교수를 자주 본 적이 있는데, 시인 조병화 교수처럼 항상 화가모자를 쓰고 다니셨는데 얼굴이 밝고 깨끗했다. 난 국문과 학생은 아니었지만 모임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온화한 얼굴과는 달리 학점이 매우 짜다고 했다. 조병화 교수는 항상 파이프를 물고 다녔다. 국문과 교수들이 모두 그랬지만 황순원 교수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 시국’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사랑의 상처는 끝내 흔적을 남긴다. 비운다고 추억조차 지울 수는 없다. 추억을 지울 수 있으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욕망과 집착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끊는다고 쉽게 끊어지면 어디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 사랑도 소나기처럼 오고 간다. 사랑이 시골의 5일장처럼 때 맞춰 오고 가는가? 한여름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오는 게 사랑이다. 소나기가 끝나야 하늘이 쨍하게 밝아온다. 이 절절한 사랑을 읊고 싶은 산우는 진달래꽃이 만발한 북한산으로 오라. 소월의 시도 함께 읊어보자.
쨍한 사랑 노래
황동규(1938 ~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그어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2010년 4월 14일 새벽에
詩를 사랑하는 山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