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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관악산(삼성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137회 산행)

관악산(삼성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137회 산행)

 

◇ 산 : 삼성산(479미터)

 

◇ 코스 : 서울대 입구-물개바위-번뇌바위-깃대봉-삼성산

 

◇ 소요시간 : 오름1시간 반, 내려옴 1시간 반(총 3시간)

 

◇ 일시 : 2010년 06월 20일(일) 10시

 

◇ 장소 : 서울대 정문 앞(2호선 서울대역 하차 버스 다수, 서울대역 750, 501번)

 

◇ 준비물 : 살얼음낀 막걸리, 안주, 과일, 카메라(하산 후 뒤풀이 겸 점심)

 

◇ 연락 : 이재웅(010-3454-7717)

 

◇ 블로그 : 사진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은

 

저 마을 저녁 불빛이

 

아직 따뜻한 굴뚝 연기 사이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은

 

아직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은

 

갈 데 없는 고라니 토끼 고양이들이

 

우리 집 뒤뜰에 내놓은 궂은 저녁을

 

아직은 먹으러 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은

눈 깊은 골짜기에

얼어붙은 물줄기가

아직 푸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 가는 것은

 

아아, 그대여

 

그대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의 이름으로 그대가

 

어디에나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힘(전문) 강경화(1951~2009)

 

시내에 나갔다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사왔다. 시집 ‘이제 나는 머물지 않을 수 있는데’에 수록된 시다. 강경화 시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시인의 연대표를 보면 우리와 거의 동시대를 살다 갔다. 영문학 교수였던 그녀는 오랫동안 투병하며 그러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다. 사랑의 시를 끝까지 놓지 않고 갔다. 지상의 우리들은 오늘 모두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이 시대의 사랑들이여, 위대하구나 죽음이여.

 

탄생과 죽음처럼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세상의 모든 것은 오고 간다. 불가에서는 사람의 한 생을 영원히 흐르는 시간과 무한한 공간 속에서 영혼 위에 육신이라는 옷을 한 번 입었다 벗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그것의 진실을 모르겠는가? 알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비운다고, 버린다고 채워지는 것은 무엇이며 살아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이며 죽음은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을 모르지 않으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죽음의 맞은편에 환생이 놓여있다.

 

해서, 죽어가는 우리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보여 주시고 천당과 지옥을 말씀하셨다.

 

죽어가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지혜로우신 부처님은 생명의 윤회를 말씀하셨다. 다음 생에는 좋은 몸을 받아서 태어나라고. 그나마 그것이 한 조각의 희망이라도 될 수 있을 런지.

 

생노병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모든 삼라만상도 같다.

 

나이 들어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가서 좋다고 했더니 주변의 지인들이 떠나가는 아픔이 많아진다.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죽음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도봉별곡

 

 

136회 중원산 산행기(2010.06.06)/이경식

참석 : 김정남, 이재웅, 한양기, 이경식, 조문형, 전작, 이원무, 위윤환, 박형채, 고갑무, 김종화, 김용우 (12명)

 

용산역, 아침 8시.

등산객들로 북적북적하다.

덕소행 열차로 등산객 반쯤 빠져 나가고 나머지는 8:13분발 용문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옆에는 선그라스를 머리에 쓴 젊은 여자가 앉았다.

향기도 좋고 어깨가 맞닿는 약간의 부드러운 촉감도 좋았다.

거기다 교양 넘치게 책까지 읽는다. 슬쩍 곁눈질 해보니 만화책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이게 요즈음 젊은이들인가 싶어 약간의 웃음이 나온다.

차장 밖으로 스치는 한강과 6월의 녹음들을 감상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9시50분 용문역에 도착했다.

 

나와 이재웅 회장이 마지막으로 도착 했나 보다.

기다리고 있던 다른 회원들이 반갑게 손을 내민다.

언제 봐도 반갑고 좋은 친구들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정이 새록새록 돋아날 것이고 우리 모두가 노후에 서로의 자산이 되는 그런 관계가 되리라 생각한다.

뭐 골치 아프게 직장도 사업도 우리에겐 관심 밖이다.

가벼운 농담과 적당한 운동, 그리고 음주, 좋은 숲과 저 푸른하늘, 거침없는 대화가 우리의 전부다.

그러니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출발 전에 이재웅 회장이 오늘의 기자를 정하자고 한다.

회원들의 고사에 할 수없이 시산회에서 문화부장이라는 末職을 맡고 있는 내가 오늘의 산행기를 쓸 수밖에 없다.

산행기로 인해 회원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쓰든가 네가 쓰든가 그도 아니면 쓰지 말든가...

우리 모두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산행을 즐기면 그만이다.

따지고 보면 글도 산행을 즐기기 위한 양념 아니겠는가?

 

 

용문역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용문사행 버스가 등산객을 가득 채우고 바로 출발해버린다.

저걸 타야 되는데...그러나 실망도 잠시.

임시버스를 운행하게 되어 모두 자리에 앉아 가게 되었다.

앞 차에 오른 부지런한 사람들은 만원버스에 시달리고 뒤 차를 탄 게으른 사람들은 널널하게 간 셈이다

부지런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그 운을 누가 알겠는가?

10시30분에 용문사 정류장에 도착했다.

중원산을 향하여 출발, 처음부터 길 아닌 길을 위윤환 등반대장이 선두로 들어섰다.

명확하게 이정표가 없어서 부득이 2번의 시행착오 끝에 제 길을 찾아서 오르기 시작했다.

인적도 별도 없었고, 사람이 다닌 흔적도 별로 없다.

오직 용계골의 물소리와 가끔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우리의 잡담만 빈 골짜기를 메우면서 오르고 올랐다.

지난 가을의 낙엽만이 아직도 제 갈 길을 못 찾고 우리들의 발뿌리에 채이고 또 채였다.

낙엽은 빨리 썩어 부엽토가 되어서 중원산을 살찌우는 게 낙엽의 사명이다.

뒤에 따라오던 조문형이 한마디 뱉는다.

“낙엽은 여름에 썩는다네”

 

合水지점을 지나 조금 지나가니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나온다.

아무리 등산경험이 많아도 이런 코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평탄 완만해야 마음도 몸도 편한데, 이건 사서 고생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어느 산인들 정상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을 정복했다고 하지 않는가?

몇 번인가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르면서 1시15분에 800미터의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서 멀리 용문산 북쪽의 산, 산, 산. 산들을 바라보며 김정남 전 회장이 오르면서 이야기한 6.25 때 용문산 전투를 그려본다.

요즈음 중앙일보에서 연재하는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60년’에서도 이 용문산 전투를 크게 다루었다.

이 산하 어디에도 조국을 지키려다 산화한 젊은 넋들이 잠들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이곳은 너무 처절했기에 약간은 엄숙한 마음이 생긴다.

‘살아 남아있는자의 훈장은 죽은 자의 영혼 앞에서 그 빛을 잃는다’라고 했던가?

 

호국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이 용문산 전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용문산 전투는 미국방교범에도 나오는 전투라고 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1951년 국군 제6사단(사단장 장도영)은 용문산지구에서 중국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섬멸함으로써 중국군의 참전으로 역전된 전세를 다시 우세하게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용문산전투는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아내는 방어전투의 모범으로서 6·25전쟁 최대의 전승(戰勝)으로 기록된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은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의 피해를 입은데 비해 중국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국 제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다. 제 6사단의 용문산 전투는 단순히 용문산을 방어했다는 전술적 승리라기보다는 중부전선의 절단을 위해 총공격을 가해온 중국군을 막아냄으로써, 수도권에 미칠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의미가 있다.

용문산 전투에 이어 후퇴하는 중국군을 쫓아 5.24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국군과 UN군의 반격작전으로 중국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육군은 용문산 전투의 주역이었던 제 6사단 2연대에 ‘용문산 부대’라는 호칭을 부여해 오늘까지 이 날의 승리를 기리고 있다.

 

백선엽 장군의 기록과 회고에 의하면 장도영 장군의 6사단은 사창리에서 밀린 뒤 5월의

중공군 공세를 맞아 전혀 다른 부대로서 싸움에 임했다. 2개 연대를 용문산 후방에 포진해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1개 연대를 앞에 내보내 적을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앞에 선 연대의 방어선을 주저항선으로 오인한 중공군이 총력으로 덤비게 한 뒤 2개 연대를 우회시켜 이들을 포위했다. 그 다음은 6사단의 대승이었다. 포위된 중공군이 후방으로 밀리면서 화천 저수지까지 패주했다.

 

6사단은 이들을 조직적으로 침착하게 몰았다. 5월 28일 하루에만 3만8000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잡아들이는 대단한 승리를 거뒀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 6만2000여 명이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혀 저수지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에 ‘오랑캐를 무찌른 곳’이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힘겹게 정상에 도달은 했으나 쉴만한 휴식처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하산,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쉴만한 장소를 물색하면서 내려갔다.

오를 때 힘든 산은 내려갈 때도 힘든 법.

급경사면이어서 여기저기 미끄러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두들 오를 때 보아둔 그늘이 있고 충분한 공간과 의자가 놓여있는 장소를 마음에 그리면서 쉬지 않고 내려갔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 60대의 남녀그룹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를 때부터 자리를 선점하고 있더니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독점하고 있는 그들이 얄미웠지만 자리를 안 비켜주니 어쩌랴.

 

그 근처 빈터에 자리를 잡고 간식보따리를 풀었다.

단연 김정남 전 회장의 문어, 두부김치, 게맛살, 한과 등이 빛을 발휘했다.

錢 여사하고 사이가 좋은 결과가 우리에게까지 혜택이 왔다.

그는 두부의 포장을 벗기면서 푸념(?)을 늘어놓는다. “많이 싸오니 산우들은 신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음식보따리를 풀고 있으니 참 불공평하네.” 자네가 아니고 錢 여사가 복 받을 겨.

 

얼음이 살짝 떠 있는 막걸리와 복분자주가 돌고 우리들의 취흥도 비례했다.

먹긴 잘 먹었는데 제공하신 분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미안 미안.

이게 나의 한계리라.

 

약간 빠른 걸음으로 용계골의 물소리를 즐기면서 힐끗힐끗 씻을만한 자리를 곁눈질 하면서 내려왔다.

쉴만한 자리는 많았고 등산객들은 별로 없었다.

물가에 자리를 잡자마자 땀에 찌든 옷을 훌훌 털어버리고 팬티만 걸친 채로 몇몇의 산우들이 물속으로 덤벼들었다.

상의를 벗고 물속에 머리를 푹 처박았다.

이 시원함. 이걸 어디에 비하랴 어떻게 표현하랴.

 

거의 다 내려왔는데 아무래도 비바람이 세차게 분다.

조금 내려오니 꽤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피할 데도 없고 민박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 일행을 만나 용문사 주차장 근처로 향했다.

 

이재웅 회장의 강력한 방침에 의하여 용문전철역 근방에서 생맥주로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여기 용문사 근방에서 한잔 쭉 들이켜고 싶었으나 살림살이를 책임진 회장의 숨겨진 경제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다수의 의사는 용문사 근방에서 뒤풀이를 원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결국은 용문전철역까지 봉고차로 모셔 주겠다는 정류장 옆 식당주인의 말에 따라 뒤풀이를 거기서 했다.

막걸리와 소맥을 쭉 들이켰다.

 

약간의 취기를 느끼면서 전철을 탔다.

우리 모두 서로 마주 앉아서 용우의 로맨스 얘기를 경청했다.

숨겨진 强者다. 이 방면에 문형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 황혼의 로맨스도 좋다.

우리에겐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즐기며 살자.

 

시산회 이경식 올림

 

 

이번 산행은 근교 산행지로 관악산으로 간다. 아니 정확히 관악산 옆의 삼성산이다. 관악산은 여름철 산행의 조건인 깊은 계곡도 없고 계곡의 물도 없다고 했더니, 이경식 산우가 이곳은 계곡도 물도 있다고 추천하여 정한다. 회장님도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라니 어련하랴. 모두 가서 계곡물에 발도 담그고 담소도 즐기자. 나는 도봉산 회룡계곡을 지나 송추계곡으로 내려오든지, 약간 긴 코스지만 도봉계곡으로 올라 오봉 옆의 오봉샘에서 점심을 먹고 683고지 - 일명 소발굽바위 -에서 송추폭포로 내려오는 코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요즈음 나는 코스를 먼저 제안하지 않고 제안자가 없을 때만 의견을 말한다. 다음 산행지를 제안하는 산우는 거의 정해져 있는데 점잖은(?) 산우들도 자주 제안해주기 바란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숲에 대한 회귀본능이 내재돼 있다.’ 숲의 치유 효과를 뒷받침하는 미국 하버드대 윌슨 교수의 ‘바이필리아’ 가설이다. 약 500만∼700만 년 전 동아프리카 사바나에서 탄생한 인간은 숲과 더불어 살았다. 도시생활을 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결국 인간이 숲에 가면 심리적 안정을 찾고 건강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숲은 ‘그린 닥터’다. 나무는 항산화·항염 효과가 있는 피톤치드를 뿜어내고, 계곡에선 부교감신경을 자극하는 이온이 방출된다. 피톤치드는 편백나무, 구상나무, 삼나무, 화백나무, 전나무의 순으로 발산한다. 나뭇잎 소리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킨다. 우리가 산에 가야 하는 이유다.

 

동반시를 쉽게 정했다. 중원산행 때 동반시로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8’을 동반했는데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들어 사랑시를 하나 더 동반했다. 산행기를 쓰기에 낭송권이 있는 이경식 산우는 그 사랑시를 더 낭송하고 싶어 했다. ‘초토의 시 8’은 선정한 김종화 산우가 낭송했다.

 

하여 이번은 사랑시를 동반한다. 당연히 산행기를 쓰는 산우가 낭송권이 있다. 블로그 친구에게서 퍼왔다. 좋은 시와 훌륭한 글은 많이 올리는 분이라 배울 것도 많고 퍼올 시도 많아 덕분에 시 선정의 노고를 덜 수 있으니 고맙다. 고향이 같은 영광분이라 친근감이 더 들고 베품과 나눔의 의미를 잘 알며 따뜻하고 겸손한 분이다. 어두운 세상의 빛같이 밝은 분이기도 하다.

 

산행기는 산행의 양념 같다고 이경식 산우가 말했다. 그런 마음으로 쓰니 글이 편하고 맞는 말이다. 초기에는 내가 주로 썼지만 기념집을 펼 때 교정하기 위해 읽었는데 내가 이런 글을 언제 썼는지 기억에 없는 글이 많았다. 과연 5-6년 전에 이런 글을 어떻게 썼는지 믿기지 않기도 하고 불만스러울 때도 있었다. 지난 것은 잊히기도 하고 절대 잊을 수 없기도 하는 게 세상사다.

 

젊은 시절, 아련한 사랑의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시쳇말로 누구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하나쯤은 간직하고 산다. 그 사랑이 있어 인생은 풍요롭고 살만하지 않겠는가? 조용히 읊어봐라. 얼마나 좋은 사랑의 시인가. 나라면 자진하여 산행기를 쓰고 이 시를 서울, 아니면 고향의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이 시를 읊겠다.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 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풀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2008년 6월 14일 새벽에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이 모이는 시산회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