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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청계산 이수봉(詩山會 제157회 산행)

청계산 이수봉(詩山會 제157회 산행)

산 : 청계산

코스 : 대공원역-이수봉-옛골

소요시간 : 4시간

일시 : 2011년 4월 10일(일) 10시

모이는 곳 : 전철 4호선 대공원역 4번 출구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사진기(하산 후 오리훈제고기로 뒤풀이 예정)

연락 : 박형채(011-250-5382))

블로그 : 사진 blog.daub.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1.시를 통한 시론

 

바람이 시작하는 곳/정현종(1939 ~ )

하루를 공친다

한 여자 때문에.

하루를 공친다

술 때문에.

(마음이여 몸이여 무거운 건 얼마나 나쁜가)

정신이라는 과일이 있다.

몸이라는 과일이 있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두엄이고 햇빛이고

바람이거니와

바람 없는 날은

자기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대지여

여자는 바람인가

술은 햇빛인가

그러나 언제나

마음은 하늘이다

바람이 시작하는 그곳이여.

바람이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 하늘인가 들판인가. 마음인가. 이런 질문으로 나날의 양식을 삼고, 그 대답의 궁구로 나날의 잠에 드는 사람을 시인이라 부르자 하는 그런 약속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약속 몰라도, 그때 A의 거짓말, 그런 따위는 대체 어디서 오는가를 묻는 것으로 나날의 양식을 삼는 이보다야 시의 나라 신민임을 절로 알 수 있다. 무거운 건 나쁘다고, 바람 없는 날은 대지도 자기의 무거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라고, 바람이 시작하는 곳 바람의 눈을 그리며 형체 없는 바람을 감각하는 마음. 수년 마음에 맺혀 알아보고 싶은 일, 지지한 이러저러한 의문투성이 일 지우고 ‘바람이 시작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런 오롯한 물음으로 몸 채우고 싶은 오늘이다. <이진명·시인>

 

햇빛에만 그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바람에도 그늘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쉬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술인가, 햇빛인가, 여자인가, 아니면 바람의 그늘일까. 바람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4월의 초장에서 춘풍이 분다. 유별나게 춥고 어두웠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바람이 분다. 봄바람은 여인의 가슴에만 부는 것이 아니고 겨울이 춥고 길었던 가난한 남자들의 좁은 가슴에도 불어야 한다.<도봉별곡>

 

2.산행기

詩山會 제156회 춘천 오봉산 산행기/김용우

일시/장소 : 2011. 3. 26(토) / 춘천 오봉산

산행코스 : 상봉역-춘천역-배후령-오봉산-청평사-소양호-소양강댐-춘천역-상봉역

참 석 자 : 7명 (김정남, 이경식, 이원무, 한양기, 최근호, 박형채, 김용우)

동 반 시 : 생의 계단/헤르만 헷세

뒤 풀 이 : 섬마을수산(섬마을 회선생/섬마을 생생샤브샤브.02-439-0035.7호선 상봉역 5번 출구)

 

집을 나서는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운 것은 오랜만에 산우들을 만난다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산우들의 얼굴을 보게 되면 친구의 가슴으로 들어가 볼 수 있고 생각상자를 열게 되어 한없이 즐겁다. 직원 결혼도 있고 전 직장 동기생들의 체육모임도 있었으나 모든 걸 포기하고 우리 시산회 산우들의 마음을 만나러 옷깃을 여미며 혼자서 빙긋 웃으며 하늘을 본다.

상봉역 춘천행 환승로 광장에 08:40분 도착하여 보니 웬 사람들이 이리 많은지~? 남녀노소

전천후 세대들이 정겨운 대화와 만남과 기다림으로 발 딛기 어려울 만큼 북새통이다. 당연 우리 산우들의 얼굴은 아직 안 보인다. 상봉터미널과 역이라 뭔가 살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중국식 간판의 도너츠 전문점과 편의점밖에 안보이니 내심 빈 배낭을 생각하면서 조금 걱정이 생긴다.

 

키 큰 신사 이원무 산우가 손을 흔들어 첫 조우가 이루어지고 글로벌 지식인 이경식 회장, 이 시대 최고의 진정한 산악인 김정남 전 회장, 부지런하고 세심한 박형채 총장, 입담 좋은 한양기, 언제나 점잖은 최근호 산우 등 오늘은 겨우 7명이다. 전번 산행에 15명이었다 하는데 토요일 산행 참석이 일요일 산행보다 적은 이유를 궁금해 하며 원/근거리 탓인지 아니면 요일 탓인지 등을 분석해보기로 하였다.

 

상봉역(上鳳驛)은 중랑구에 있는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와 한국철도공사의 역으로, 서울 지하철 7호선의 부역명은 시외버스터미널(시외버스터미널)이다. 2010년12월 21일부터 서울 지하철 7호선과 중앙선의 환승역이 되었다. 수도권 전철 중앙선열차가 정차하며, 수도권 전철 경춘선의 열차는 이 역에서 시종착 한다.

 

경춘선 전철이 개통 97일 만에 이용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 서울~춘천 간 열차 운행시간이 27~37분가량 단축되자 기존보다 이용객이 5배가량 늘어난 것이라 한다. ‘2010년 12월 21일 개통한 경춘선 전철의 이용객이 3월27일 500만 승객을 돌파했다’며 ‘무궁화호가 운행될 때 하루 평균 1만1000여 명이던 이용객이 전철 개통 후 5만1000여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경춘선에 무궁화호가 다닐 때는 서울~춘천 간 운행에 79분이 걸렸다. 하지만 경춘선 전철 개통 후 급행열차는 41분, 일반열차는 51분이면 종착역에 닿는다. 또 경춘선 구간에는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 유명 관광지가 많아 수도권 이용객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경춘선 전철은 개통 직후인 지난해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열흘 사이에 6만292명의 승객이 몰렸다는 뉴스보도다. 하루 평균 기준으로 1월에는 4만8536명, 2월에는 5만1606명, 이달은 5만2689명이 이용했다는 소식이다.

 

10:00- 상봉역을 출발하는 급행열차에 오르고 모두 좋은 자리로 자리를 잡아 좌우로 맞은편에 산우들과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 나누며 가는데 5학년 중년의 여인이 간편한 복장에 단출한 여행길의 여유 있는 모습이라 말을 붙였다. 들고 있는 가방을 들어주며 어디 가느냐 하니 춘천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한다. 하룻밤을 묵을 예정이라 하니 오랜만의 친구와의 시간이 참으로 펄떡이는 여고시절만큼 상큼하고 아련한 시간이 되어 얼마나 즐거울 것인지 짐작한다.

여행은 언제나 자유와 충만의 시간이 되어 자기를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돈하며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양식의 보따리가 아니겠는가.

 

박형채 총장이 직접 채취하여 달여 온 참나무 가지에 기생하는 겨울이야기차는 향기가 그윽하고 뒷맛이 한없이 깊고 은근하다. 가지에서 채취하는 것이어서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 수반되는 대가로 얻을 수 있고 두 번째는 달이는 맛이 더 좋은데 오늘은 초벌달임이라 하며 항암효능까지 있다고 설명해준다. 무엇보다 그걸 준비하는 박형채 산우의 마음이 소중하고 고맙다. 생전 처음 마셔보는 겨울이야기의 차맛은 오래 기억될 것이다.

 

11시10분 춘천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탈 것인지 버스를 이용할 것인지 논의하던 중 한양기 산우가 버스를 탈 것을 제안하였다. 예전에는 산행들머리인 배후령까지 총알택시로 1만5천원이었으나 기름값 인상으로 만구천원이라 하고 승합차도 안 보이니 자연스럽게 승강장의 줄서기에 합류하고 동서울에서 양구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15분가량 굽이굽이 산허리를 돌아 산행들머리인 배후령에 하차하였다.

 

배후령인 여기가 626m고지이고 오봉산 정상이 779.0m이니 123m만 오르면 정산이라 하니 조금은 허탈하지만 우리의 종착지가 정상이 아니지 않는가. 정상은 또 다른 갈림길의 출발점인 것이니 청평사를 향하는 하산과 소양호를 건너는 뱃길을 가야하는 여정이 부담 없이 가볍게 생각된다. 완만한 경사길을 1시간 걸으니 정상이다. 흑인아가씨가 조금 힘들어하니 “You can do it~!!"하며 후미에서 격려하는 미국인 아가씨의 목소리가 음악의 리듬처럼 감미롭다.

 

오봉산은 춘천시 북산면과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경계에 위치해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소양댐 호반에 위치한 청평사(淸平寺) 바로 뒤에 솟아 있는 바위산이 오봉산이다. 산줄기로는 양구의 사명산(1,198m)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즉 금강산 남쪽의 매자봉(1,144m)에서 가지를 친 도솔지맥이 도솔산(1,148m)과 대암산(1,304m)을 거쳐 사명산에 이르고, 그 후 죽엽산(859.2m)을 지나 부용산(882m)과 오봉산에 이른 다음 그 주맥은 소양강에 가라앉으면서 서쪽으로 곁가지를 하나 쳐서 오봉산의 4촌 격인 용화산(878.4m)으로 뻗어간다. 해발 779m의 아담한 오봉산은 나한봉, 관음봉, 문수봉, 보현봉, 비로봉 등의 다섯 봉우리가 청평사를 감싸 안 듯 나란히 연이어 있고, 기암과 절벽 그리고 송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더구나 봄철에 진달래가 피면 기암과 노송 그리고 거기에 진달래까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데, 특히 오봉산 주능선의 북쪽 사면에 피는 진달래 군락은 압권이다. 거기에다 오봉산 자락에는 유서 깊은 청평사 외에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인 소양댐 마저 가까이 있어 산의 운치와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경운산(慶雲山), 혹은 청평산(淸平山)이라 불리어 왔던 오봉산은 산의 규모에 비해 변화가 많아서 경사가 급한 바위길이 있는가 하면, 세미크라이밍을 해서 오르내려야 하는 곳이 많아서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기기에 아주 적당하다. 사람에 비견한다면, 세상에 이름난 재벌이거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명문대가는 아니지마는 나름대로 뼈대 있는 집안이요 편안히 살만한 재산도 가진 깔끔한 선비를 연상시키는 그런 산이라 할 수 있겠다.

 

오봉산을 오르는 코스는 크게 배후령 쪽과 청평사 쪽의 두 방향이 있다. 춘천에서 46번 국도로 30분 정도 양구 쪽으로 가면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나타난다. 이 고개의 공식명칭은 배후령이나 지방민들은 대개 '오음리 고개'라 한다. 차편을 이용할 경우에는 배후령에서 내려 오봉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청평사 쪽 코스는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청평사로 가서 청평사 극락전 왼편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거나 아니면 절 앞의 선동계곡으로 해서 적멸보궁이 있는 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어느 쪽으로 올라가더라도 산행의 묘미를 즐길 수 있으나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차편 이용이 편리한 배후령(오음리고개) 쪽에서 올라가서 청평사로 하산한 후 배편으로 소양댐으로 나간다. 배후령까지는 춘천에서 양구로 가는 직행버스나 오항리(추곡약수)로 가는 시내버스(18번)를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승용차로 갈 경우에는 배후령에 주차를 해 두고 산행을 마친 후 소양댐 선착장에서 택시로 배후령까지 되돌아가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아니면, 배후령에서 오봉산 정상을 갔다가 되돌아오는 방법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산행의 의미가 반감한다 한다. 우리는 배후령에서 오봉산 정상 그리고 청평사로 하산하여 소양호 유람선을 타고 소양강댐으로 건너가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춘천역으로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배후령에 내리면 동쪽 산비탈에 오봉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등산로 도입부분은 가풀막 급경사 길로 시작되지만 산행기점인 배후령 마루가 해발 600m여서 15분 정도 올라가면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오봉산 주능선에 한달음에 올라설 수 있어 그만큼 산행이 수월해진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거기 팻말에 '청평사 7km'라 적혀 있다. 주능선은 삼거리 갈림길이어서 오른쪽으로 내려가서 능선을 타고 남진하면 마적산(610m)으로 가게 되고, 오봉산은 왼편으로 내려가서 우거진 참나무 숲길로 편안하게 갈 수 있다.

 

그런데 배후령에서 주능선에 올라선 그 삼거리 지점이 제1봉(나한봉)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주능선 삼거리에서 2∼3분 정도 동진하여 내리막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면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 바위를 왼편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거기가 제1봉이다. 119구급대에서 세운 제1지점이라는 팻말이 있는 곳에서 쳐다보면 바위봉일 것 같은데, 막상 올라가면 정상 부위가 편편한 흙 마당이다. 다섯 개의 봉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지점에서 잠시 쉬기로 하고 박형채 총장이 싸온 싱싱한 오렌지를 안주삼아 춘천 쌀 막걸리에 목을 축이면서 이원무의 삼립빵으로 간단한 요기를 채웠다.

 

제1봉에서 동쪽으로 올려다보면 제2, 3, 4봉이 연이어 있고, 서쪽에는 화악산(1,468m)과 명지산(1,267m)을 중심으로 한 한북정맥의 장대한 줄기가 시야에 들어오고, 그 아래 춘천댐의 푸른 물결이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오봉산에서 소양댐이 아닌 춘천댐이 보이는 곳은 여기뿐이고, 남쪽으로는 홍천 가리산(1050.7m)이 보인다. 제1봉은 그 외에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제2봉(관음봉)은 제1봉에서 30분 정도 동진하면서 두 번 정도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면 다다른다. 제1봉보다는 제법 높고 넓은 민둥봉이어서 쉬었다 갈 만하다. 그러나 나무에 가리어 전망은 북쪽으로만 트여 있어서, 그 쪽으로 용화산과 일산(1,190m), 사명산이 보이는가 하면, 용화산과 일산 사이 저 멀리에 아스라이 북녘의 산들이 아슴푸레 보인다. 그리고 화천댐이 만수위가 되면 제2봉에서 제5봉에 이르기까지 봉우리마다 화천댐의 푸른 물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2봉을 벗어나면 바로 119구급대의 제2지점이라는 팻말이 있고, 이어서 제2봉보다 표고가 다소 높은 자그마한 무명의 바위봉을 지나게 된다. 그 바위봉에 올라서면 소양댐이 보이고, 선동계곡이 한눈에 들어와서 남쪽 조망이 시원하다. 그리고 안부로 잠깐 내려서면 안전시설로 쇠줄이 쳐져 있는 곳에서 약간 오르막을 올라가면 또 하나 무명봉을 허리 길로 돌아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바위벼랑을 올라가게 되는데 거기가 제3봉이다.

 

제3봉(문수봉)은 쇠줄을 잡고 올라가는 첫 번째 바위봉이다. 제3봉을 올라가면 앞머리의 바위 위에 '청솔바위'라는 돌비석이 서 있고, 바위와 노송의 조화가 신기할 정도로 멋들어진다. 오르고 싶으나 '위험지역'이라는 표시가 있다. 그리고 제3봉의 정상으로 가면 까만 오석으로 된 자그마한 진혼비가 서 있다. 이 부근에서 변을 당한 분이 있었던 모양인가. 비석에는 '진혼비'라는 제목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삼가 명복을 빈다.

 

제3봉에서는 남쪽으로 소양호가 보이고, 북쪽으로 간동면 간척리와 오음리 일대의 산간분지의 산곡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 너머 사명산의 우람한 모습이 선명하다.

 

제3봉을 지나서 또 하나의 무명봉을 허리 길로 지나치면 쇠줄을 잡고 오르는 두 번째 봉우리인 제4봉(보현봉)을 오르게 된다. 오봉산의 가장 대표적인 암릉 봉우리인 제3봉과 제4봉을 오르려면 깎아지른 절벽으로 된 칼등 같은 바위 능선을 쇠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므로 아슬아슬하기는 하나 그만큼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다. 더구나 산 사면이나 심지어 암릉의 날등에 괴목에 가까운 소나무 고목이 바위에 붙어서 살아있는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나 다름이 없다. 제4봉을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또 하나의 무명봉의 산허리를 돌아가면 얼마 가지 않아서 제5봉(비로봉)인 오봉산 정상이다.

 

배후령을 출발하여 빨리 가면 1시간, 쉬엄쉬엄 가도 1시간 20∼30분이면 정상에 설 수 있다. 바위봉이 아닌 평범한 정상이나 북쪽으로 조망은 뛰어나서 사명산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고, 역시 화천군 간동면 일대의 산곡평야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며, 동쪽으로는 배치고개를 사이에 두고 부용산(882m)이 마주하고 있다.

 

부용산은 오봉산의 명성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으나, 그 산세나 규모가 오봉산을 능가한다. 따라서 오밀조밀한 바위로 이루어진 오봉산을 여신에 비유하고, 자못 육중한 모습의 부용산을 남신에 비유하여 서로 음양의 관계가 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부용산은 굴곡이 장대하고 깊으며, 특히 남서쪽 사면은 급경사 암벽지대여서 위험한 곳이 많아서 부용산을 갈 경우에는 기존의 등산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등산객의 발길이 뜸한 산이어서 길 찾기도 어려운 곳이 많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하므로 초행자들끼리 부용산을 찾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전해진다. 오봉산 정상에서 하산은 남쪽 능선 길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데, 정상에서 300여m, 5분 정도 내려간 지점에 119 구급대의 제3지점 팻말이 있고, 그 부근은 야트막한 둔덕 같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서 왼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배치고개로 해서 부용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희미하게 보이나 아무 표시가 없어서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리고 그 둔덕의 오른편 등산로로 들어서면 거기에도 조그마한 진혼비가 있다. 비문에는 「고 0 0 0 이곳에 잠들다 2000, 6, 8. 효성1동 새마을금고 산악회 일동」이라 적혀 있다. 별로 위험한 곳이 아니니 어디 다른 곳에서 변을 당한 이의 진혼비를 여기에다 세운 것 같다. 아무튼 먼저 간 이의 명복을 빈다. 하산 길은 한동안 급경사로 고약하게 전개되다가 비석이 있는 둔덕에서 200m,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간 지점에서부터 경사가 심해지면서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소나무가 울창한 지역이 전개된다. 바위와 굵은 노송이 어우러져 있는 경관이 참으로 멋있어 보인다. 그리고 소나무 군락지가 끝나면 이어서 홈통바위에 이른다. 홈통바위는 한 사람이 경우 빠져 나갈만한 좁은 바위 홈통인데 경사가 있고 미끄러워서 쇠줄을 잡고 낑낑대며 빠져나가야 한다.

 

이 홈통바위는 일명 구멍바위라고도 하며 남녀의 성기를 잇대어 표현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바위가 구부러진 길옆에 자리를 잡고 가져온 먹을거리를 내놓고 둘러앉아 젖은 몸을 쉬게 하며 가져온 음식을 꺼내어 놓는다. 이경식 회장의 콩가루찰떡, 팥찰떡, 박형채총장 마나님이 정성을 다한 찹쌀찐밥, 김치, 산나물 그리고 김정남 전 회장의 한과와 어김없는 석화굴이 향기를 더하고 최근호 산우의 김밥, 한양기 산우의 완도산 파래무침과 막걸리로 허기진 배를 맛나게 채우고 나니 젖은 몸에 제법 찬바람인지라 몸이 오들오들 한기를 느끼게 한다. 김정남 전 회장이 추천하여 선정된 오늘 산행의 동반시인 헤르만 헷세의 유리알 유희 중에서 “생의 계단”을 낭송하고 모두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하산길을 재촉한다

 

생의 계단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에서)

모든 꽃이 시들듯이

청춘이 나이에 굴복하듯이

생의 모든 과정과 지혜와 깨달음도

그때그때 피었다 지는 꽃처럼

영원하진 않으리.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문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재출발의 각오를 해야만 한다.

무릇 모든 시작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그것이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공간들을 하나씩 지나가야 한다.

어느 장소에서도 고향에서와 같은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단계씩 높이며 넓히려 한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그러면 임종의 순간에도 여전히 새로운 공간을 향해

즐겁게 출발하리라.

우리를 부르는 생의 외침은 결코

그치는 일이 없으리라.

그러면 좋아, 마음이여

작별을 고하고 건강하여라.

 

팻말의 지시대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적멸보궁을 지나 해탈문으로 해서 청평사로 가는 비교적 편한 길이다. 때문에 노약자는 이 길로 내려가야 한다. 다만 내려가는 초입 30여분은 급경사 길이어서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한다. 산우들과 담소하며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조그만 생활들을 이야기하며 내려오니 청평사가 보인다. 청평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수령 800년이 된 주목이다. 800년이라면 고려 후기에 심은 나무인 것이다.

아직도 잎사귀가 한창때인 것처럼 무성하고 가지도 힘이 넘쳐 보이며 높이가10M 둘레가 1.5M 나된다고 표시되어 있고 그래서 그런지 주목 옆에 서 있어보니 몸 기운이 편안하고 깊은 느낌이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 승현(承玄) 선사(혹은 永賢선사라고도 함)에 의해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절 이름만 보아도 구산선문이 한창 활발하던 당시 참선도량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폐사되었던 것을 고려 문종 22년(1069) 당시 춘천도감창사(春川道監倉使)였고, 훗날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던 이의라는 사람이 경운산(지금의 오봉산)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하여 옛 절터에 절을 다시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했다. 그 뒤 이의의 아들인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손자 이자현(李資玄)은 그의 친척 이자겸(李資謙)의 발호를 피해 젊어서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입적할 때까지 37년간 선학 연구에 일생을 바치면서 절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였고,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산에 도적떼가 있고 호랑이가 많았으나 이들을 다 평정하고 산 이름도 청평산이라 고쳤다고 한다. 그런 한편 청평산 골짜기 전체를 사찰 경내로 삼아 정원으로 가꾸었다. 지금의 구성폭포 부근에서부터 선동계곡 일대가 모두 정원이었던 것이다. 이 정원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서 고려정원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문수원 정원'이다. 이후 이자현이 죽자(1130년) 나라에서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적을 새겨서 문수원중수비(文殊院重修碑)를 세웠다. 비석의 비문은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金富轍)이 짓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탄연(坦然) 스님이 써서 이 비석의 글씨가 탄연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지금은 비석의 일부 파편만 남아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나 진락공 이자현의 부도는 지금까지 청평사 아래 부도 밭에 남아 있다. 그리고 고려말에 가서는 나옹화상이 청평사에 잠시 머문 적이 있고, 조선 세조 때에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이 서향원(瑞香院)이라는 건물을 짓고 은둔한 적도 있으며, 명종 12년(1557)에는 보우(普雨) 선사가 당우를 새롭게 중건하고, 회전문을 지었으며, 절 이름도 청평사라 하였다. 그리하여 퇴계 이황, 겸재 정선, 다산 정약용 같은 인사들이 청평사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6.25 때 보물 제164호인 회전문만 남기고 모두 불타버린 것을 최근에 와서 일부 재건하고 회전문을 보수하였다. 정교한 축대와 초석은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전성기의 청평사 규모를 짐작케 한다.

 

회전문(回轉門)은 얼핏 빙글빙글 돌아가는 문을 연상하기 쉬우나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절로 치면 천왕문(天王門)에 해당하는 사문(寺門)이다. 여기서 '회전'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회전문이란 절을 찾는 대중에게 윤회사상을 깨우쳐주려는 '마음의 문'이란 뜻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회전문은 절에서는 보기 드물게 홍살이 천장에 옆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지어진 대표적 건축물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청평사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1km에 달하는 계곡 길은 참으로 즐겁다. 짙은 녹음이 그늘을 드리워주고, 계곡엔 맑은 물이 흐르는데, 곳곳에 감자 부침개에 막걸리 집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인데 우리는 오늘 점심이 넉넉했던지라 아직 배가 부르니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2년 전 직장에서 춘계행사로 청평사에 온 추억의 잔영이 필름처럼 지나가는 길이다.

 

청평사에서 소양호 배편은 편도 3000원(유가 인상 전 2000원)이며, 30분 간격으로 있고(주말엔 10∼20분 간격), 청평사를 출발하여 소양댐의 선착장까지 10분이면 닿는다. 그리고 소양댐에서 시내로 나오는 버스는 20분 간격으로 있다. 시내버스를 타기위한 줄서기 행렬이 양 갈래로 서있는데 한쪽 줄은 춘천의 명물 닭갈비를 먹을 수 있는 행선지라 한다. 우리는 서둘러 상봉역으로 회귀하여 그곳에서 뒤풀이를 하기로 하였으므로 30여분의 지루한 콩나물 신세를 마다않고 춘천역에 도착하였고 곧바로 17:20분발 완행열차에 모두가 간신히 자리를 잡았으니 녹녹하게 무거워진 몸을 돌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직행보다 완행은 10여분이 더 소요 되어 18:40분에 아침 출발했던 상봉역에 되돌아 온 셈이다.

김정남 전 회장이 가평 칼봉 산행 시 뒤풀이를 했던 섬마을 생생샤브샤브를 추천하여 모두가 푸짐한 해산물과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러 조개들로 온몸의 구석마다 따끈한 포만감을 느끼며 행복한 하루였음을 재차 확인하고 다음 산행을 약속하며 오늘 오지 못한 산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2011년 3월 30일 김용우 올림

 

3.산행지

4월을 잎새달이다. 물 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는 달이라서 붙인 다른 이름이다. 오봉산 뒤풀이 때 기세환 전 회장이 허리가 좋지 않아 자주 빠지니 그의 참석을 위해 분당의 영장산을 가면 좋겠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참하니 집행부에서 근교의 산으로 정했다. 자주 오른 산이지만 완만하고 편한 산이니 경칩도 지나고 물 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 돋는 4월의 휴일이니 모두 모여 산행을 즐기세. 도움쇠는 불참하게 됐다. 본인과 마나님 사망 외는 시산회의 산행에는 꼭 참석하려 했으나 분(?)하게도 전 회사의 직원들이 미리 날을 잡아 도봉산행을 하자고 하니 참으로 난감하다. 3월 초에 그간의 동향도 들을 겸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답례를 하기로 자기들끼리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니, 내가 없으면 주빈이 빠진 행사가 되므로 꼭 참석하라는 거다. 내 원 참! 시산회의 일정을 얘기하고 연기를 주장했지만 막무가내다. 자신들은 모두 급여를 받는 직장인이고 현장직이라 휴일이라도 빠지기 어려운 줄 아실 테니 이해를 하시란다. 에효! 산우들에게 장담이나 말 것을. 그래도 참석자가 적은 토요일이 아니고 참석자가 많아지는 일요일이니 조금은 다행이다. 산우들! 동반시를 보내고 마음만 참석하니 내 몫까지 잘 다녀오게. 산우들이 자리를 펴고 한 잔의 술을 앞에 놓고 동반시를 낭송할 때면 나도 도봉산의 한 모퉁이에서 옛 직원들과 옛 이야기를 하며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을 거네.

 

4.동반시

'인셉션'이라는 3D 영화를 시산회원들이 단체로 본 적이 있다. 꿈속에서 꿈을 꾼다는 소재다.

 

장자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장자의 나비'라는 이야기가 있다. <장자(莊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고 자신이 장자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자가 되었다. 생각해보니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무슨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현실이 나비의 꿈이고 우리는 나비인지 모른 다는 것이다. 이것을 '꿈속의 꿈'이라 한다. 장자는 여기에서 '일장춘몽-봄 바람 아래서 꾸는 한마당의 어지러운 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으로 체득할 수 있는 세게요, 이런 세계를 체득할 때 쓸데없는 아집, 편견과 오만, 자기 중심주의, 일방적 단견 등에서 벗어나 관용과 아량과 트임과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세계에서 노닐게 된다는 것이다. 2,500년 전에 살았던 장자가 우리에게 일러주려고 한 결론이 아닐까. 사람도 적고 공간도 한정된 세상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서로 갈등하고 싸웠던 것이다. 그때도 선과 악은 심한 대립각을 세우며 싸웠으니 인간이 있는 곳에 고요한 평화와 행복은 있을 수는 없을까?

 

<장자>는 난해한 책이다. 무(無)와 유(有)를 말하면서 無 앞의 有를, 有 뒤의 無는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이때 有無를 있고 없음의 의미로 사유를 한다면 장자가 처놓은 덫에 걸리게 된다. 꿈속의 꿈은 무엇인가.

 

시인은 장자의 숲을 주제로 시를 풀어 가고 있다. 장자는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품은 책을 저술해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앞에 내놓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시인의 마음 속에 무엇이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이런 난해한 시를 우리 앞에 풀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는 난수표 같은 이 시가 좋아져서 이 시를 풀고 싶어졌다. 장자의 숲은 어디에 있고 장자의 배는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숲은 이상적인 자연의 숲이 아니다. 숲은 세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다. 그 숲속에는 삶이 있고 욕망이 있으며 모두가 살고자 하는 이상향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살이 자체가 거대한 숲속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아름다운 풍경 속 산과 숲, 그 속에서 세상을 보면서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금씩 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장자의 숲/강경화

 

삶의 쓸모없는 공간 속을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낙오자라고 한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공간은 사라지고

찻소리 가득한 강변에 나와 빈 병을 낚는다.

아아, 장자의 숲으로 들어가

굽고 휘어진 아름드리 팽나무나 될어볼까.

햇빛 가득한 고수부지에서 침묵이 되어

한가로이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면

흔들리는 마음은 연줄을 끊은 채 날아가고

어느 새 가을 코스모스들이 화사하게 나부낀다.

번쩍이는 차들처럼 맹렬히 흐르는 시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그대와 만나려면

숲을 나와 저 강에 한 치의 숨김도 없이

숨겨놓은 장자의 배를찾아야 한다.

 

2010년 4월 5일 청명에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