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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대모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185회 산행)

대모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185회 산행)

 

산 : 대모산(292미터)

 

코스 : 대모산역-대모산-구룡산-양재 시민의 숲

 

소요시간 : 3시간 30분

 

일시 : 2012년 5월 20일(일) 10시

 

모이는 곳 : 분당선 대모산 입구역 7번 출구 지상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사진기

 

연락 : 전작(010-9858-2858)

 

사진 :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 blog.daum.net/yc012175

 

카페 : cafe.daum.net/K-20

 

 

 

1.시를 통한 시론

 

빈 들판/이제하

 

빈 들판으로

바람이 가네 아아

 

빈 하늘로

별이 지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부르네

 

어쩌나 어쩌나

귀를 기울여도

 

마음속의 님

떠날 줄 모르네

 

빈 바다로

달이 뜨네 아아

 

빈 산 위로

밤이 내리네 아아

 

빈 가슴으로 우는 사람

거기 서서

 

소리 없이

나를 반기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이제하 선생님의 친구다. 시나 삶이나 허심탄회, 천의무봉인 그 어질고 아름다운 음유시인과 같은 시대에 살며 가까이 뵙고 지내니 고마운 일이고 영광이다.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어쩌면 다들 그렇게 짧은 시간을 살다 갈 거면서 저마다 그토록 영겁 같은 고통과 고독을 안고 있는지.

서릿발 같은 맥놀이 속에서 얼어붙어 갈 때 「빈 들판」이 먼 하늘 햇살처럼 나려왔다. 노래 「빈 들판」의 선율에 실려.

“빈 들판으로/바람이 가네 아아//빈 하늘로/별이 지네 아아”

글자로 보니 ‘아아’가 탄식하는 간투사일 뿐 아니라 바람이 가고 별이 지면서 짓는 의태어다. 탄식의 모양을 붓질하듯 그린 의태어.

나는 자잘한 일상사에 마음이 매여 있고 이사도 여행도 질색이어서 몸은 붙박여 있다. 고통은 사람을 크게 한다지만 편협한 사람은 더 움츠러들 따름이다. 그런 내게 「빈 들판」은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삶과 풍상의 아름다움을 흘긋 보여준다.

-시평<문학집배원 황인숙>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사이버문학광장'의 이름으로 나에게 배달되는 메일이 있는데 거기에 수록된 시다. 시보다 시평이 더 좋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경우다. 나는 아직도 신당동 도서관과 지인의 사무실, 집 근처의 도서관 등에 매어 살고 있다. 매일 읽고 쓰나 그것이 언제 세상에 나올지, 아니면 영원히 노트에만 남아 있을지 나도 모른다. 왜냐하면 수년을 읽었지만 읽은 책의 수가 너무 적으며, 내용이 너무 얇야 사유의 폭이 좁고 생각이 부족해 부끄럽기 때문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같은 불후의 저작에서 진화론을 주장했는데 연구기간은 28년이 걸렸다. 일본의 소프트뱅크의 손정의는 스물여섯살 때 5년 시한의 중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3년 반의 투병기간에 4,000권의 책을 읽으면서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송사에 지쳐간다. 상대는 도덕적으로 불리하니까, 그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데 나는 아직도 잽만 날리고 있다. '칼은 빼야할 때 빼지 않으면 진다'는 것도 알고 '칼을 빼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도 알면서 망설이고 있다.

 

마침내 5. 18의 아침이다. 이상하게 1시간이면 끝낼 수 있는, 산우들에게 보낼 메일의 정리가 며칠을 미루어지고, 오늘 5. 17.까지 보내지 못한 것을 보면 5. 18.의 새벽에 나도 모르게 할 말이 많은가보다. 광주 망월동 옆 빈 들판에는 오늘도 바람이 불고 먼 산에서는 달이 뜰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그들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할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이렇게 미안한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삶은 결코 길지 않고 한순간이며, 수레의 두 바퀴처럼 삶과 죽음은 함께 간다. 우리 사회는, 특히 국민들은 좋은 점도 많지만 그만큼 문제점도 많은 민족이다. 그들이 빨갱이라니, 폭도라니, 그런 소문이 들불처럼 광주 밖의 온 세상에 퍼져나가던 시절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나는 그때 서울의 한복판에 있었으니 광주 밖의 여론에 민감했었다. 젊은 혈기에 싸운 적도 있다. 우리는 아직 멀었다. 정확하게 듣고 판단하며, 틀리지 않게 알아가는 사회가 되려면 내 생각으로는 앞으로 30년은 더 흘러가야 한다. 30년이 흐르면 나는 이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때라도 올바른 사실이, 정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그때가 오면 좋겠다. 그때가 '우리들의 시대'다. 광주민주화운동 32주년의 신새벽에 김광석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들으며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시평<도봉별곡>

 

2.산행기

시산회 184회 '불곡산' 산행기 <2012. 5. 6(일) 맑으나 바람 불어 안 좋은날/염재홍>

산행일/집결지 : 2012.5.6(일)/양주역(10:00)

산행 소요시간 : 3시간 정도(10:40 ~ 14:30)

산행코스 : 양주역-대교아파트 입구-임꺽정봉-부흥사갈림길-상투봉-상봉밑에서 우측 하산길-유양리 공단-버스정류장

동참자 : 8명 (나양주. 박형채, 염재홍, 이경식, 이재웅, 전작, 정해왕, 조문형)

동반시 : ‘간이역에서’/ 김 경(1955~)

뒤풀이 : '김삿갓‘/경기 양주시 남방동 111-5호 (031)-856-8008(양주역 뒤)

 

아침 날씨는 화창하다. 일기예보 아나운서에 의하면 날씨는 좋으나 바람이 세다는 예보이다.

사실 지난주 일요일(4월29일) 북한산 향로봉을 뒤편 숨겨진 길로 우회하다 발목을 좀 다쳐 ,오늘 등산을 망설이다가 어제 도봉산 자운봉 밑까지 시험 운행을 하고 오늘 아침까지 경과를 지켜보았다.

연초에 우리 시산회가 시산제 지내던 그 코스를 우리집의 동반자와 같이 올랐다.

아침에 일어나니 상태가 괜찮은 것 같아 전 총장에게 참석하겠노라고 전화하고 바로 짐을 챙겼다. 돌미나리를 양념에 무쳐주고 갓김치 연뿌리 등 조금씩 넣어주길래 주는 데로 배낭을 꾸렸다.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넣고 지하철로 양주역에 도착하니 약속시간 10분전 쯤.

내려오다 만난 문형 친구와 같이 정문으로 광장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화장실 쪽으로 가니 부지런한 친구들이 벌써 모여 나양주와 재웅이만 오면 출발하자고 한다.

둘러서서 오늘 아침에 보도된 부산 가요주점 화재로 아홉 명이 사망 했다는 소식을 이야기하면서 사무실에 놓여있는 대피 밧줄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냐고 묻는데 아무도 아는 바가 없는 것 같다.

참고로 완강기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사진이 옮겨지지 않아 소개를 생략한다.

-별곡

 

또한 종화가 퇴원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고 양주에서 모이는데 가까운 곳에 사는 세 친구가 똑같이 안 나왔다는 하소연에 전 총장의 사정 설명도 있었다.

이때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명함을 내민다. 양주역 뒤에 있는 음식점인데 등산로 입구까지 태워다 줄 수도 있고 잘 해줄 테니 꼭 이용하란다. 낙지, 쭈꾸미, 오징어 철판구이가 주 메뉴이고 역에서도 가까우니 괜찮을 것 같다.

약간 늦은 친구들이 도착한 뒤 음식점에 부탁하여 차를 타고 오늘의 들머리인 대교아파트 입구로 향하였다.

들머리에서 막걸리와 안주를 약간 보충하고 등산 안내도를 보며 오늘의 산행 코스를 정한 후 드디어 산행 시작.

불곡산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의 경계를 이루며 대동여지도에서 양주의 진산이라고 표현되었던 산이다.밑에서 올려다보니 두 개의 암봉이 마주보며 솟아있고 그 사이가 암릉으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주며 산세가 가파르고, 정상과 군데군데 암벽 및 암봉이 있어 위험한 코스가 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이름의 불곡산은 분당에도 있으나 훨씬 낮은 산이고 산세도 차이가 있다.

 

출발하자마자 전 총장이 오늘의 기자를 지명하니 내가 이 산행기를 써야하는 의무감을 갖는 순간이다.

오른쪽으로 복사꽃이 시들은 흔적만 남은 복숭아 과수원을 끼고 오르니 악어바위 갈림길이 나오고 계속 직진하니 밀양최씨 문중 가족묘지가 왼쪽에 있다.

벌써 등골에는 땀이 흐르고 모자도 적셔진다. 때마침 옹달샘이 있어 그 위에서 간단한 휴식. 찬스다 싶어 약과를 두 개씩 배분하여 짐도 덜고 입맛도 다시고, 남자들이 모이면 항상 나오는 패설들을 듣고 발길을 재촉.

약간의 깔딱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주능선에 도착하여 갈 길을 바라보니 가파른 계단이 곧고 높게 서서 우리를 기다린다.

전에는 밧줄을 잡고 오르내렸다는 바위인데 계단을 설치하여 위험성은 줄었으나, 계단을 오르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몇 번을 쉬면서 위아래를 번갈아 쳐다보고 땀을 닦는다. 일기예보대로 바람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세게 불지만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다.

 

힘겹게 꼭대기까지 올랐는데 이게 임꺽정봉이 아니란다. 저 건너 진짜가 기다린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확 트인 조망을 만끽하고 또다시 오르기 시작하니 험난한 바위와 밧줄, 안전 철책이 우리를 기다린다.

 

드디어 임꺽정봉(해발 449.5m) 표지석을 옆에 두고 벤치에 앉아 유양리 공단을 내려다보면서 옛날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살아 인적 드문 으스스한 공단이었다는 등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전 총무가 오렌지를 깎아 놓는다.

배고프던 차에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 후, 표지석을 가운데 두고 인증샷을 하고 다시 출발.

그런데 임꺽정봉은 우리가 전에 등산했던 파주의 감악산에도 있다. 의적 임꺽정이 이쪽 고장에서 태어나 여기저기서 활동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다시 밧줄을 잡고 내려가다 계단타고 올라가고, 다른 팀에 섞여 줄지어 오르고 내려가면서 두 번째 고봉인 상투봉(해발 431.8m)에 도착 하였다. 역시 단체사진을 한 방 찍고 이제는 금강산도 식후경임을 되뇌이면서 그 아래 자리를 잡고 먹산회의 본성을 드러냈다. 홍어, 문어, 막걸리, 떡, 김치 등 모두가 맛있고 마나님들의 정성이 듬뿍 담겼지만 아침에 우리집에서 준비해준 돌미나리 무침이 인기였고 일찍 동이 났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 이 말은 안 하려고 했으나 꼭 쓰라는 성화가 있어 할 수 없이 여기에 언급한다. 우리집뿐만 아니라 모두가 정성껏 준비해준 마나님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 훌륭한 남편이 될 것을 다짐해 본다.

 

가정생활이란 생각해 보면 부부를 중심으로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인데 어찌 부딪치지 않고 항상 평온하기만 하겠는가? 그러므로 항상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부 사이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동행한다는 생각, 동반자라는 마음이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자리를 거두어 다시 출발하니 가슴 앞에 상봉으로 가는 바위가 갈 길을 가로 막는다.

이쯤에서 하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했으니 위험한 코스를 피해서 이제는 내려가잔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도 안내표지가 없어 날머리가 어디가 될 런지 알 수 없다. 그저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아까 위에서 보았던 공단으로 내려왔다.

아쉬움이 남았던지 물도 많지 않는 개울에서 발을 씻고 가자고 개울로 들어갔으나 발은 씻지 못하고 전문가인 조문형산우에게 부동산 재개발에 관한 강의를 들어 발 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유양리 회관 앞 버스정류장에서 아침에 만났던 그 식당의 도움을 받아 식당으로 이동.

차안에서 의정부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다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결론을 냈다.

 

그 유래는 ‘조선 제3대 태종이 방번(芳善)과 방석(芳碩)을 살해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태조는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成興)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 차례 사자(使者)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함흥(威興)의 사(使)‘ 또는 ’함흥차사‘라는 말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그후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하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태종은 부왕을 맞으려고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태조는 활의 명수이기 때문에 중신 하륜(河崙)은 부왕 태조가 반드시 태종을 해칠 것이라고 예상하고 천막에 큰 기둥을 많이 세웠다. 그 결과 태조가 활을 겨누자 태종은 순간적으로 기둥 뒤에 몸을 피하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부왕의 화살을 맞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곧 잔치가 시작되자 태종은 ‘헌수(獻壽)'의 뜻으로 친히 부왕 태조에게 잔을 올려야만 하나, 이 또한 하륜의 지략으로 하륜 자신이 잔을 올렸다고 한다. 태조는 소매 속에 감췄던 철퇴를 내던지고 “하늘의 뜻이다” 하고 포기하였다. 이리하여 태조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지방에 장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각 대신

 

(大臣)들은 한양보다도 지금의 의정부로 와서 정무(政務)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기 때문에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의정부시 홈페이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뒤풀이는 ‘김삿갓’에서 모듬철판구이에 맥주 4병, 소주 1병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다음 산행은 전날 재경동문회 체육대회도 있고, 건강상 못 참가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가까운 대모산으로 정하고 오늘 일정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상투봉 밑에서 본인이 읊었던 오늘의 산행시를 기록으로 남긴다.

 

간이역에서/김경

 

그대여,

이곳에서는 이별을 말하지 말라

우리가 오고가던 길 환하고 끝이 없는데

저렇게 반짝거리는데

무궁화호 새마을호 열차가 지나가며

철새들의 날개 죽지에 암각화를 긋는 가을 날

이별이거나 해후거나

플랫폼까지 들어와 핀 산국들 흔들어 놓고

어디쯤 울며 가는 무정한 기적소리

사람아, 사람아

백년쯤 기다려 줄 수 있겠는가

기차가 오는 쪽으로 기운 측백나무 몇 그루

옛 동무로 다가와 팔짱을

걸어주는 간이역

겹겹으로 멀어진 얼굴이 문득 떠올라

내내 그립고 그리워

아직 보내지 못한 내 사랑도

까마득하게 떠나가는구나

다만 저물 무렵이면

저녁이 별에게로 가는 길을 밝혀 든 간이역에서

곳곳이 어귀이며

출구인 간이역에서

이별을 말하지 말라

사람아, 사람아

2012. 5. 12. 염 재 홍 올 림

 

 

3.산행지

 

이번 산행은 토요일이 예정일이나 토요일에 재경 광주고 동문 체육행사가 있어 연기한다. 대모산은 서울에 사는 산우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시산회에서 111회와 138회 산행을 했으나 나는 그때마다 불참해서 한 번도 오른 적이 없다. 전 총장께서 나즈막한 흙산의 조용한 숲길이라고 강조하여 많은 참석을 유도한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하며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달이라 하여 '푸른 달'이라 한다. 산과 들에는 푸른 잎이 돋고 강물도 푸르다. 내려와서 양재의 숲길을 걷거나 양재천에 발을 담그며 정담을 나누면 좋은 달이다. 전 총장의 바람대로 많이 참석해주기 바란다.

 

 

4.동반시

 

염재홍 산우가 추천한 시다. 산행기를 돌아가면서 쓰니 시도 돌아가면서 추천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으며, 모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해주니 내 어깨도 훨씬 가볍고 고맙다. 정지용 시인은 아버지가 한의사였으니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본의 대학에 유학을 갔으니 배움도 충분했을 텐데, 그때의 지식인들이 약간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것은 일제에 대한 반감이었거나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깝게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인민군의 철수와 맞물려 실종이 됐으니 가입했던 보도연맹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면 집단으로 총살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고, 아니면 월북이나 납북의 가능성도 있어 박정희의 '레드 컴플렉스' 때문에 읽히지 못했다가 1988년에 해금된 시다. 박정희는 남로당원이었다가 총살 직전에 백선엽 등 주변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이 있다. 물론 전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문열 같은 사람도 아버지가 남로당의 간부였고 그 때문에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한 적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진보나 사회주의자를 빨갱이로 몰면서 의식적으로 더 심하게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레드 컴플렉스'라 한다. 육영수 여사와 같은 옥천 태생이고 그곳의 산천은 시의 표현과 비슷한 지형으로 기억한다. 젊은 날, 큰누님의 사과 과수원이 옥천에 있어 1년에 수 차례 밭일 겸 놀러간 적이 있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옥천(沃川)의 풀이를 보면 안다. 시인도 그런 고향이 그리웠을 것이다. 박인수 교수와 가수 이동원이 부르는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고향 같은 정감이 든다.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2012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 32주년의 새벽에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