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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검단산과 팔당호(詩山會 제187회 산행)

검단산과 팔당호(詩山會 제187회 산행)

산 : 검단산(하남시. 650미터)

코스 : 산곡초등학교-약수터-정자휴게소-정상(1시간 20분)-창우동(1시간 30분)

일시 :2012년 6월 16일(토) 10시(우천불구)

모이는 장소 : 전철 2호선 강변역 4번 출구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카메라

연락 : 전작(010-9858-2858)

사진 :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 blog.daum.net/yc012175

카페 : cafe.daum.net/K-20

 

1.시를 통한 時論

 

다시 유월에/유명진

 

저 무너지는 것들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며 쏘아대는

거리의 불꽃처럼

모조리 태울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무성한 잡초라고 사정없이 짓뭉개도

태우면 태울수록 되살아 우뚝 서는

우리나라 서러운 풀잎들

다시 유월에 서서

통분하는 두 주먹 불끈 쥐고

저 썩어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보내랴

 

눈물샘 뿜어내는 저 매연을 어찌 거두랴

다시 나무가 두 팔을 들고 일어서고

풀잎이 곳곳마다 살아나고

바람은 거리마다 불고 있는데

아직도 히죽거리며 놀고 있는

우리나라 어둠을 보아라

 

다시는 속지 말고 믿지도 말고

활활 타오르는 너와 나의 눈빛 속에

피맺혀 흐르는 분노의 세월

 

다시 유월에 서서

나가자, 나가자고

저 소리치는 바람을 보아라

 

지금 너의 귓가를 두들기며 불고 있는

저 유월의 바람을 보아라.

 

時論은 계절과 관련이 있는 자연이나 사건 등에 대해 가볍게 얘기하는 란이다. 시인은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을 얘기한 것 같다. 박종철 고문치사, 4.13 호헌 조치, 이한열 열사 부상, 6.10 전국 시위, 6.29 선언, 화순의 아들 이한열 열사 사망으로 이어진 25년 전의 민주화 열망을 노래한다. 나는 그 시간에 포천에서 없는 돈으로 욕심을 부려 아파트를 건축하느라 어려웠던 시기였으니 세상을 흔들었던 그 시기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젊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겨우 이루어간 민주화에 최근 전두환이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 것과 이명박 내곡동 사저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처분 등을 보면 올바른 세상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 박근혜는 과거의 연장이니 부적절한 사람이고 개인적으로는 문재인과 안철수 같이 정직한 사람들이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주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세상은 돈과 완장(권력)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움직여진다는데.

<도봉별곡>

 

2.산행기

백암산 산행 및 백양산 순례기(2012. 6. 3) 맑음 / 김정남

참석 : 김종화, 나창수, 김정남, 이경식, 이원무, 박형채, 고갑무, 최근호, 전작, 이재웅, 한양기, 신원우(12인의 시산인)

 

아침에 일어나니 4시다. 창밖을 보니 맑게 갠 동녘 하늘에는 벌써 먼동이 터온다. 4시경에 터오는 먼동을 보면서, 세월은 벌써 속절없이 흘러 추운 겨울이었다가 오고 간지도 모르게 빨리 지나가버린 봄을 느끼지도 못한 채, 덥고 지루해진 여름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모이는 곳인 영재역까지 가려면 집에서 늦어도 5시 20분에는 나서야 한다. 첫차가 5시 30분이니 그 차를 놓치면 산우들에게 미안해진다. 항상 피곤해하는 마나님을 깨우기도 곤란해서 한과 2곽을 챙기고 두부를 찾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김치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는 바닥에 조금 깔려있다. 굴은 시절이 지났고 문어를 파는 하나로마트는 8시에 문을 여니 준비할 수가 없다. 굴이나 문어는 생물이라 하루만 지나도 맛이 변한다는 것이 마나님의 변하지 않는 오랜 지론이다. 물론 굴 때문에 한 번 삐쳐서 하루 전에 준비해달라 해도 이제는 준비해주기 싫은 핑계인지 알고 있다. 오늘은 긴 산행도 아니고 다른 산우들이 간식을 챙겨올 것을 기대하고 한과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약속 15분 전에 도착하니 성실하고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전작 총장만 나와 있다. 당초 14인의 산우가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2인이 빠져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급변하고 복잡해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란 필연 같은 우연이 많으니 언제 변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처님이 말씀하는 무상(無常)은 ‘덧없다’는 표현도 있지만 처음에는 ‘삼라만상 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 백암산은 산보다 산 밑의 절인 백양사가 더 유명하니 절에 관한 화제가 더 풍성할 것이다. 더구나 국내에 다섯 곳뿐이며 최대종파인 조계종 5대 총림에 속하는 절이고 옛 백제땅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더 애착이 가는 절이기도 하다.

 

남기인 산우의 배려까지 포함해서 넓어진 중형버스의 공간과 좌석에 편하게 앉아가면서 휴게소에서 유부국수로 아침식사도 하며 가는 길이 우리 시산회원들의 마음처럼 여유롭고 한가하다. 박형채 회장님은 충무김밥을 먹던데 나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미각이 둔하고 속 좁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으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3시간이 걸려 도착한 백양사 입구에 국립공원관리공단 수석이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 신원우 동창회장의 연락으로 풍채가 좋은 소장이 마중을 나왔고, 백양사와 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는 두 개의 명물이 있는데 하나는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들러 시를 썼고 그 시가 현판에 붙어 있다는 쌍계루와 암봉인 백학봉인데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사복차림으로 보아 비번인데도 나온 것을 보면 아마 집이 서울이어서 가지 못하는 국내 기러기 아빠로 추측했다.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의 양옆에는 고목의 나이가 300년에서 700년으로 표시된 이름표가 붙어있는데, 두 아름드리 신갈나무들을 보며 그들은 온갖 풍상과 오랜 변화를 이겨내면서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는 것에 대한 놀람과 존경심(?)이 들었음을 산우들은 지나치게 서정적인 표현이라 흉보지 마시라. 참나무는 더디게 자라므로 목질이 단단해서 불에 오래 타기 때문에 유용한 땔감으로 쓰여서 참나무 숲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빨치산이 활발하게 준동했던 그곳의 그 참나무들이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서 수 백 년을 살아있는 것은 경이롭다는 표현에 무리가 없다. 산행지도 앞에서 오늘의 코스는 처음부터 백학봉까지는 약간 가파르고 정상인 상왕봉까지 가는 능선길은 편하며, 사자봉까지 가지 말고 중간의 안부에서 운문암을 지나 계곡으로 내려오면 약 4시간 반이 걸린다고 설명하니 모두 동의하였다.

 

백양사 입구에서 계곡과 쌍계루를 앞 배경으로 올려다 본 백학봉은 잘 생긴 암봉이었다. 계곡 옆에 서있는 쌍계루는 비록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지만 오랜 세월을 견딘 채 서있는 잘 생긴 누각이다. 고려 말, 목은 이색과 삼봉 정도전이 누각에 관한 기문을 지었고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청수 스님의 요청에 지은 시가 지금까지 현판으로 남아 전한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멋있는 시를 지어보나. 게으르고 한심한 나를 반성하며 정몽주 선생의 정의로운 일편단심과 충성을 느끼며 옮겨본다.

 

지금 시를 써달라 청하는 백암사 스님을 만나니

붓을 잡고 생각에 잠겨도 능히 읊지 못해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 스님이 누각을 세우니 이름이 더욱 중후하고

목은 선생이 기문을 지으니 그 가치가 도리어 빛나도다.

노을 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흘러 돌아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 간 세상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보리.

 

'옷을 떨치다'는 관복을 벗는다는 뜻이다. 정적 관계였던 정도전도 이곳에 들러 기문을 지었다니 묘한 인연이다. 선생은 이 시를 남겨놓고 결국 선죽교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으니 혼이 있다면 자주 이곳에 들렀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하기 전의 행사인 막걸리 점검의 시간에 손을 든 사람은 두 명이었으니 준비한 막걸리는 딱 두 병 뿐이다. 가게를 지나쳐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어 아껴서 마시기로 하고 출발의 첫 걸음을 당당하게 내딛는다. 도중에 김종화 산우의 초등학교 여자 동창들을 만나 반갑게 해후하는 통에 약 20분의 지체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세월이 비껴간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함께 오르자고 했겠지만

그녀들은 백양사만 구경하러 왔으므로 아쉽게 헤어지고 정식으로 출발.

 

그때의 시간이 11시 45분. 숲은 울창하게 우거지고 그늘길이 계속되었다. 역시 국립공원은 말 그대로의 가치가 있고 봄 백양, 가을 내장의 의미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이어진다. 예상한 대로 처음에는 가파른 비알길이 계속되었지만 고도계를 보니 백양사 부근의 고도는 200미터이고, 정상은 740미터이니 우리의 실력으로는 결코 무리한 코스는 아니다. 느린 속도로 선두와 후미의 간격이 멀어지지 않게 쉬엄쉬엄 올라가며 산중한담을 즐기며 떡도 먹고, 수박도 먹으면서 오르니 샘이 나온다. 백학봉 밑의 돌 틈으로 솟는 맑고 시원한 석간수를 마시며 건너편 산을 보니 이미 숲은 무성하게 자랐고 진한 초록색으로 변한 산의 색깔은 눈을 맑고 청명하게 한다.

 

약사암을 지나 백학봉 밑의 영천굴에 들러 경건하게 모신 부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며 합장. 이때 독실한 불교도인 임삼환 산우가 왔다면 불전함에 시주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오르는 길의 옆으로 단풍나무가 무성하다. 가을에 오면 내장사 단풍에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이유로 10월의 등산일정에 봄에 올랐던 설악산 십이선녀탕계곡의 단풍을 떠올리며, 올 가을의 단풍 산행으로 그곳을 추천한다. 선경이 따로 없다. 능선에 올라서니 맞은 편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산에 오를 때면, 가파른 산길을 따라 능선에 올라섰을 때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는 즐거움은 빼놓을 수 없다. 한때는 산행의 3대 즐거움에 대해 의견을 나눴지만 분분한 가운데 첫째, 먹는 즐거움 둘째, 정상에 오르는 즐거움 셋째, 능선에 올랐을 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즐거움이라는 결론을 낸 적이 있으나 그것도 변하는 것이므로 지금 산우들의 의견이 조금 궁금하다. 잠시 후에 백학봉 위에 서니 툭 트인 온 산의 조망이 좋다. 고도계를 보니 630미터다. 직원이 나눠준 지도를 보니 650미터인데 고도계는 기압으로 환산하므로 약 5%의 오차가 있으니 크게 틀리지 않다.

 

능선은 싱거울 정도로 평탄했고 울창한 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향은 언제 맡아도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중간에 힘이 들었던지 몇 산우는 옆길로 하산하자고 했지만 우리들의 훌륭한 리더인 박형채 회장님께서 곁눈질도 주지 않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앞으로”를 힘차게 외친다. 20분을 더 걸으니 헬기장이 나오고 점심을 먹자는 의견이 나와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식사를 했다. 식사 전에 위윤환 산우가 추천한 동반시 도종환 시인의 ‘저녁 노을’을 오늘의 기자 이원무 산우가 조용한 목소리로 읊은 후, 준비한 몇 가지의 음식이 나오고 두 병뿐인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회장님 사모님 김 선생이 새벽 5시에 일어나 마련해 준 찰밥과 김, 부침개, 양파졸임 등이 맛있었으니 지면으로 감사를 드린다. 호주가(豪酒家)인 위윤환, 임삼환 산우가 불참해서인지 막걸리 두 병으로도 충분했다. 과유불급이라. 작은 것이 더 아름답다 했듯이 부족한 양의 술이 더 맛있다고 해도 틀린 비유와 표현은 아닐 것이다. 30분을 더 걸어 오늘의 목표인 상왕봉에 도착. 해발고도 741미터. 정상은 넓지는 않으나 좁지도 않아 정상 표시석을 배경으로 한 인증샷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표정과 포즈는 점점 다양해지고 개성이 넘친다. 우리들의 인증샷의 처음 구호는 구수하고 친근한 남도 사투리로 “큰 사람은 앉거”다. 지난 산행기에 수 회의 산행에 사진이 빠져 200회 산행 기념 산행지 발행에 아쉬움이 있다고 했더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이번 산행에는 사진기를 많이 가지고 왔으니 우리들은 모범생들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박형채 회장님이 앞장서고 내가 바로 그 뒤를 따라가는데 왼쪽으로 희미한 오솔길이 보였는데 회장님은 보지 못했는지 지나친다. 말하고 싶었으나 이정표도 없고 오래 전에 올라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니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안부에 들어서니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맑고 시원하다. 이정표를 보니 백양사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겠다. 하산하는 길은 계곡이었으나 물은 말랐고, 운문암이 나오는데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푯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임에 틀림없다. 암자부터는 편편하지만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이런 길은 쉴 곳도 없으니 빠르게 내려가는 것이 상책이다. 백양사에 도달하니 4시 15분이다. 일부러 맞춘 것처럼 4시간 반이 지났다. 백양사에 들러 구경도 하고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돌아서는 시간은 약 20분 정도.

 

총림의 수장을 방장이라 하고 강원, 율원, 선원이 있어야 하니 절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백양사는 강원, 율원, 선원이 모두 갖춰 있어 전국 5대 총림 중 백양총림 혹은 고불총림이라 한다. 집단으로 모여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기간을 안거라 하는데 하안거는 음 4월 15일부터 3개월, 동안거는 음 10월 15일부터 3개월인데 마침 백양사에 들른 날이 음 4월 14일이라 하안거를 시작하기 하루 전이었다. 젊은 시절에 해인사에서 여승들의 수계식을 본 적이 있는데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여승들의 행렬은 2명씩 100줄 정도 이어졌고 그 의식의 경건함과 여승들의 결연한 표정에서 부러움과 함께 처연함을 느꼈던 것은 지금에도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세상과 떨어져 중이 되려 했을까?

 

경전도 없이 입으로만 전해진 석가의 말씀은 초기에는 연기와 중도, 사성제(고집멸도), 팔정도가 말씀의 주를 이루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일정한 형식으로 암송하여 구전으로 전해진 말씀이 경전으로 기록되고 제자들의 주장이나 생각 등이 살이 되어 붙어 팔만사천법문으로 완성되는데 석가의 말씀은 그 분이 주로 활동하셨던 코사다 국의 방언이나 마가다 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 석가 사후 300년이 지나 구전으로 암송하여 내려온 석가의 말씀이 범어(산스크리스 어)로 문자화 되어 경, 율, 론 삼장이 갖추어진 경전이 되었으며, 중국으로 오면서 한자,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니 4번의 변화가 있었다. 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제자들이 포교의 목적으로 신격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인데 그것을 여과 없이 말하는 승려들이나 받아들이는 신자들도 분별이 부족한 중생들이다. 석가께서는 그만큼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 아니고 자신은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셨고 적멸하시기 전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종교의 창시자가 될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공자님의 도(道)처럼, 노자의 무위(無爲)처럼 다만 선함으로 세상이 가득차기를 바라는 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석가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내세를 믿지 않고 만약, ‘윤회를 한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선하게 살면 더 좋은 인연으로 세상에 다시 올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인격적으로 완성되신 네 분을 4대 성인이라 하는 것은 종교적·철학적 해석에 불과하며 먼 훗날 붙여진 이름이다.

 

선가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오도송보다 한 세상 긴 만행 끝에 생을 마치고 내뱉는 임종게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부처님 얘기는 끝낸다. 사리를 탐내는 것은 못된 제자들이 불순한 목적으로 타버린 육신을 더럽히는 것에 다름 없다.

 

부처니 범부니 하는 것은 빈이름인데

그 가운데 실상을 찾는다면 눈 속의 먼지일세

내 사리는 하늘땅을 뒤덮었으니

빈산을 향해서 식은 재를 뒤지지 말게

-일본 조원 선사

 

뒤풀이는 가물치 매운탕으로 예정했지만 가물어서 가물치가 잡히지 않아 전작 총장의 사촌형집에서 토종닭 백숙을 먹기로 예약한 상태라 전작 총장의 사촌형집으로 갔다. 뒤풀이에 술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해 시원한 맥주 열 병과 막걸리 세 병을 샀다. 가는 도중에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시절의 학생은 한 학년에 400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한 학년에 6명 정도며 전체 50명에 불과한데 선생님 수와 비슷하다는 말에 모두 놀란다. 아!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마침 집 앞에서 밭일을 하시던 내외분께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미리 준비한 토종닭 백숙을 내어 놓으신다. 쫄깃한 육질에 덩치가 커서 12명의 식구가 먹기에 부족하지 않다. 마침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 죽순을 삶아 내놓으시는데 나는 이것이 더 맛있었다. 전 총장! 고맙고 잘 먹었고 수고했네. 형님과 형수께도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해주게. 올라오는 길에도 편안하게 올라오게 해 준 남기인 이사장에게도 감사드리네. 좋은 산과 절, 맛있는 음식, 항상 편한 산우들이 있어 행복한 하루였다.

 

이번 산행기는 이원무 산우가 쓰기로 했는데 얼마나 바쁜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해서 부득이 내가 쓰고 그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했다. 우리 나이에 바쁜 것은 좋은 것이니 부디 더 바쁘시게.

도봉산방에서 도봉별곡 올림

 

3.산행지

이번 산행은 검단산으로 정한다. 코스는 임의로 정하지만 만나서 산우들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날씨가 덥고 습한 여름이라 오르기 쉽고 하산하여 뒤풀이를 하기 좋은 산곡초등학교를 들머리로 잡는 것이 좋겠다. 내친 김에 팔당까지 가면 흐린 날이면 팔당댐 밑의 에메랄드 물빛을 볼 수 있겠지만 하산 후 교통편이 좋지 않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못한다. 전 총장이 상반기 ‘쫑’ 산행이라 하니 많이 참석하여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별 탈 없이 지나가는 상반기를 잘 보내주자.

 

4.동반시

동반시는 산행기를 쓰는 기자에게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하여 선정했는데 사정 상 내가 갑자기 기자가 되었으므로 시의 바다를 표류하면서 헤매다가 발견한 육지처럼 어렵게 얻은 시다. 마침 무명 씨의 시평이 있어 옮긴다. 요즘에 시 공부를 조금 하는데 욕심이 지나친 탓에 진전이 없다고 했더니 임 수석에게 꾸중을 들었다. 괜히 말했나.

 

요즈음 나는 詩를 읽는데 있어 몇 가지 내 나름의 기준을 설정하여 읽는다. 첫째, 꽃이 피어 그 꽃이 열매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문답 같은 시를 찾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치열한 삶을 다룬 詩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그 시인만의 향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나는 매일 시를 읽고 삶을 배운다. 꽃 속의 음표에는 꽃이 피어 흔들리고 향기나는 그 과정의 시간이 나의 이런 기준과 같은 일상들이 있다는 것이다. 꽃도 그 속에 피어나는 가락을 지니고 있는데 사람의 삶이야 그 음표가 어떠하겠는가 생각해 본다. 배한봉 시인의 시에서 과정에 대한 소중함이 무엇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삶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진실하지 않고서는 발설할 수 없는 것이 詩다. 나는 시인이 발설한 시에서 삶의 윤곽을 바라본다. 그 속의 음표 같은 배한봉 시인의 마음이 향기롭기만 하다. 사람 속에도 마음의 음표가 있을 것인데 그 음표를 어떤 표정을 나타내고 사는지 생각하게 하는 詩다.

-시평<무명 씨>

 

꽃 속의 음표/배한봉

 

꽃이 흔들리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제 몸 속 암술 수술의 음표들이 가락

퉁기기 때문이리, 벌 나비 찾아드는 것 또한

그 가락 장단이 향기 뿜어 내기 때문이리

 

그대여, 사랑은 눈부신 그 음표들이

열매 맺고 향기롭게 익는 일과 같은 것이니,

우리는 어떤 가락 장단으로 세상을 걷고

어떤 열매 키우며 서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 오늘, 만개한 복사꽃 보며

내 몸 속에서는 어떤 음표들이 가락 퉁기는지

궁금하여 햇살 속에 마음 활짝 펼쳐 본다.

 

2012년 6월 14일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