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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아차산(詩山會 제191회 산행)

아차산(詩山會 제191회 산행)

산 : 아차산(287미터)

코스 : 전철 5호선 광나루역-아차산-용마산-망우리

소요시간 : 3시간

일시 : 2012년 8월 5일(일) 10시

모이는 곳 : 전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과일, 카메라

연락 : 전작(010-9858-2858)

사진 :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 blog.daum.net/yc012175

카페 : cafe.daum.net/K-20

 

 

1.시를 통한 시론

 

여름 날의 독서/정희성

파리 한 마리 내 얼굴에 앉았다가

날아가 개똥 위에 다시 앉는다

어쩌다 골라 앉은 자리가 개똥 옆인가 싶은데

파리는 미안하다는 듯 손이 발이 되도록 비빈다

미안할 게 뭐 있는가 생각하며

신문을 보니 전아무개라는 사람은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진압했을 뿐이라 하고

노아무개는 기업인들이 성금으로 준 돈을

받아서 좋은 데 썼을 뿐이라고 법정진술을 했다 한다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바탕 하고

나는 신문을 접어 두고 차라리 산성일기를 읽었다

 

이십사일의 대위 나리니, 성쳡 직흰 군사 다 젹시고

어러 죽으니 만흐니 샹이 세자로 더브러 뜰 가온대 셔셔

하날긔 비러 갈오샤대 금일 이에 니르기난 우리 부자 득죄하미니

일셩 군민이 므삼 죄리잇고.

텬되 우리 부자의게 화를 나리오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오쇼셔

 

똥을 탐하는 것이 제 본성임에도, 개똥에 더럽혀진 몸으로 사람 얼굴을 범한 걸 파리가 미안해한다고, 시의 인물은 생각한다. 괜찮다고 말하며, 그는 사실 파리만도 못해 보이는 누군가의 후안무치를 문제 삼는다. 이 시는 은은히 사납다. 입이 찢어질 듯한 하품 속에는 가당찮은 현실을 같잖게 여겨 돌아앉는 노기가 들어 있다. 올림픽 중계에 밤잠을 설치다 보면 누구나 심장에 민족주의라는 모터가 돌고 있다고 느낄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좀 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란이 곧 역사인 나라에 나서 살지만, 같은 민족을 제일로 괴롭히는 건 결국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괴롭힘이 심한 나라는 약한 나라일 수밖에 없기에 외침도 잦았을 것이다. 늘 욕이나 먹던 임금 인조, 마음만은 왕 노릇 잘 하고 싶었구나. 아무개 두 분과는 달랐구나. <이영광·시인>

 

 

궁서체로 쓴 것은 고문이었던 원문과 달리 현재의 한글로 표시한 것이다. 인조는 저런 것을 말이라 했을까. 그것을 누군가 고스란히 기록한 것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산우들은 도서관에서 산성일기(김광순 저)를 읽어 보면 좋을 일이다. 47년간을 경상도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맹물 같은 국민들도 그렇고, 아직도 대통령이 누가 되며 어느 쪽이 정권을 잡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을 보며 우리의 정치적 후진성을 개탄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거나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국민이 편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이 더러운 정치판에 관심을 둘 것인가? 노자는 도덕경을 통하여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지도자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를 만드는 자라고 했다. 도덕경이 나온 시기는 춘추전국 시대였으니 백성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종교가 발생한 때도 어김없이 전쟁으로 백성이 핍박을 받던 때이니 백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를 믿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하여 백성들은 메시아나 예언자, 구원자, 구세주를 바랐던 것이다. 지금도 정치가가 아닌 안철수 교수 같은 구원자를 요구하는 시대임에 틀림없다. 인조 같은 임금은 우리 역사에서 지워야 할 한심한 인물이다. 역사에서 지워진 광해군 같은 임금보다 훨씬 더 못난 인간이다.

<도봉별곡>

 

 

 

2.산행기

 

 

중국 태항산(제190회) 산행기/이경식

- 산행기간 : 2012. 07. 26 - 2012 .07, 31

- 참 석 자 : 김용우, 나양주, 박형채, 신원우, 이경식, 임삼환, 전작, 조문형

(비시산회원) 서윤복, 이종진, 임경택, 정한 (계 12명)

오랫동안 시산회의 해외산행을 꿈꾸어 왔고 드디어 이제 실행되었다. 더군다나 산행후기 까지 쓰게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다. 그러나 그만큼 마음도 무겁다. 금방 금방 사라지는 기억력 때문에 어느 정도 충실하게 쓸 런지 약간 걱정스럽기도 하다.

사실 우리 시산회 정도의 산행역사가 있으면 중국이나 일본 대만 등 가까운 아시아권 산행은 진즉 다녔어도 될 만한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 까지는 직장에 얽매인 친구들이 많아서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금번은 여름 휴가철에 맞추었고 중국 연태에 한인학교 교장으로 나가있는 한천옥 교장도 참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전작 총장의 노고와 서비스가 계기가 되어 명실상부한 해외 원정 산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황산, 장가계를 다녀왔으나 관광의 일부로 약간씩만 산행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는 태항산을 가게 되었으니 들 뜬 기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사실 14년 전에 간 미국의 그랜드케년에서 느낀 장엄함을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었다.

많은 회원들도 느껴 보기를 기대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8명밖에 남지 않아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다행히 다른 동창친구들이 4명이나 참가하게 되어 12명이 한 팀이 되었으니 산행이나 차량 이동에도 아주 적정한 인원이 된 셈이다.

7월26일(목)의 아침이 밝았다.

등산 배낭과 여행용 케리어가방을 고심하다가 짐이 많아져서 여행용가방을 휴대하기로 했다. 둥근테의 등산용 모자, 선그라스, 허리쌕, 트레킹화 등 이게 내가 갖춘 기본모습이 되었다. 소고기장조림, 깻잎, 고추장 등 약간의 기본 밑반찬을 준비했으나 꺼내 보지도 못했다. 동인천역에서 하차하여 제2국제여객터미날에 도착하니 전작 총장이 택시 밖으로 스쳐간다. 두리번거리다가 2층에 있는 위동 해운사무실로 갔다.

반가운 친구들이 먼저 와 있었다. 특히 서윤복, 이종진, 임경택, 정한 등 네 친구들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모두들 알고는 있으나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교류는 없는 친구들이다. 그중에서도 광주에서 온 서윤복은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본 것 같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제 우리는 한 팀인데...... 조금 있으니 인천항 여객터미날 이준용 사장(20회)이 방문해서 인사를 서로 나누었으나 그 동안 교류가 없었던 친구였다.

많은 사람들이 여권심사대 앞에 줄을 서있는데 그들을 제치고 서해에서 제일 크고 제일 좋다는 3만 톤급 New golden bridge 5호에 탑승했다. 방 배정을 하려고 보니 흡연자가 6명, 비흡연자가 6명 이어서 끼리끼리 방 배정을 했다. 임삼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2인실은 TV, 침대 2개에 별도의 화장실 ,샤워실을 갖추고 있었다. 일박하기에는 충분한 시설이었다. 갑판으로 나갔다. 구명보트 등등 선박에 대한 전작 총장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출항 전 까지 삼삼오오 갑판을 다니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조금 있었더니 배의 사무장이 인사를 와서 그의 안내로 전 총장의 해양대 후배인 선장이 근무하는 선수의 조정실로 들어갔다. 사실 선장이 있는 조정실은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이었으니 특별 배려를 받은 셈이다.

선실 근무자로부터 인천항 갑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서해와 인천항이 서로 수위가 틀려서 갑문을 통과해서 출입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이윽고 갑문이 열리면서 인천항을 뒤로하고 인천대교도 지나면서 배는 서서히 서해로 접어들었다.

밤도 깊어가고 우리들의 얘기도 깊어가고, 선장의 배려로 비어있는 12인승 방에 갔더니 맥주와 다양한 안주거리가 한상 가득했다. 갑자기 시를 낭송 하자고 한다. 여기까지 와서 동반시를 낭송할 줄 몰랐다. 전 총장이 오늘의 기자로 본인을 정했기에 ‘초가(이육사)’를 낭송했다. 마침 한·멕시코 축구중계가 시작되었다. 각자 편한 자세로 기대거나 눕거나를 반복 하면서, 맥주도 들이키면서 축구를 관전했다. 오랜만에 젊은 시절의 우정을 그렸다.

여행 이틀째인 7월27일(금)의 하늘이 열렸다

아직도 배는 망망대해를 달리고 있었다. 밤새 달리면 청도에 닿을 줄 알았는데 중국 땅은커녕 세찬 바람소리만 빈바다를 스치고 다녔다.

한국 TV는 05:30으로 중국TV는 06:30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었다. 갑판에 나가 멀리 중국 쪽을 바라보면서 이제 세계적인 대국으로 커버린 중국을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리라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2001년에 배로 천진까지 온가족이 4인실에 묵으면서 북경을 가본 적이 있다. 그때는 거의 20시간 쯤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은 홍콩, 북경, 황산, 장가계에 이어 금번이 5번째다. 이외에 대만도 여행한 적이 있으나 앞으로도 중국을 몇 번 더 다녀갈지 알 수 없다 .이제 시간도 자유롭고 경비도 비교적 저렴하니 자주 들락 거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도상으로는 서해는 아주 적은 바다지만 막상 나와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큰 바다였다. 승객은 대부분 중국사람들로 한국사람은 많지가 않았다. 중국인들은 남녀 모두가 우리 한국사람보다는 좀 거칠어 보였다. 그런데도 습관적으로 “중국놈” “중국놈” 하니 말버릇을 고쳐야겠다고 임삼환이 지적한다. 저 멀리 긴 해상다리가 어렴풋하게 보이고 한참을 가니 드디어 청도항구에 도달했다. 멀리서 본 청도항구는 해변에 고층의 아파트 공사가 한창 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전망 좋은 해변가 아파트는 평당 3000만원에 육박하여 거의 강남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이 요즘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 했다고는 하나 그들의 평균 소득을 생각하면 과연 천문학적인 숫자다. 인구수가 너무 많아 전체인구의 5%만 잘살아도 우리나라 전체인구보다 많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청도는 100년 역사의 레져 휴양 도시이고 중국속의 유럽이고 맥주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8대 도시라든가? 10:30분 드디어 청도세관을 통과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가이드 조선족3세 미스터 조와 포스코 유니폼을 입은 현지 법인의 한국인 총경리 2명이 나와 있었다. 포스코 관계자는 임경택 친구를 환대하기 위하여 나왔다고 한다. 다양한 음료수와 김치를 비롯한 밑반찬을 차에 꽤 많이 실었다. 여행 동안 내내 잘 먹었다, 나중에는 바나나 등 과일의 일부는 버려야 할 정도였다.

점심을 먹기에는 좀 빠르고 해서 청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소어산 공원’에 먼저 가기로 했다. 공원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도는 해변의 넓은 백사장과 빨간 지붕의 유럽풍 주택들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짧은 공원 관광을 마치고 ‘경복궁’이라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보니 12명중 6명이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나도 한 때 저렇게 담배를 즐겨 피웠는데 나이와 더불어 건강염려증후군도 생기고 와이프도 노골적으로 싫어해서 별로 어렵지 않게 담배를 끊었던 생각이 났다.

자, 이제 가자! 저기 서쪽으로 산동성의 서쪽 끄트머리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길고 지루한 차량이동이 시작 되었다. 좌석이 많아서 1인 2석 꼴로 자리를 잡았다. 에어콘 소음이 좀 컸으나 차량은 비교적 신형이었다.

산동성 동쪽 끝 청도에서 출발한 차는 끝없는 옥수수 밭과 드문드문 펼쳐지는 포플라 군락지를 스치면서 한없이 달렸다. 갑자기 젊은 시절에 슬쩍 스쳐 본 펄 벅의 소설 ‘대지’가 떠올랐다. 펄 벅 여사가 이 비옥한 땅의 가치와 노동, 대지를 믿고 사는 중국농민들의 모습을 그려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던가...... 도데체 몇 시간을 달려도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자랑 호남평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는 누가 먹는단 말인가? 중국여행 내내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 20~30% 먹고 나머지는 동물사료라고 하는데...... 그리고 수많은 나무종류 가운데 유독 포플라만 저렇게 많이 심어 놓은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래전에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에도 포플라 군락지를 수없이 보았는데 여기서도 인공적으로 조성된 포플라만 보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가 오늘의 코스 중에 포함된 고차박물관에 잠시 들렸다. 도로 작업을 하다 땅속에 묻힌 고차들을 발견 했는지 고속도로 지하에 박물관을 건설해 놓았다. 중국역사 소설에 자주 나오는 다양한 고차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해놓은 특수한 박물관으로 아주 유익했다.

차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고 건물들이 쑥쑥 올라가는걸 보니 중국이 최근 들어 산업적으로 많이 발전하고 있긴 있나보다. 그러나 그들의 거칠은 외양과 아예 상의를 벗어 버렸거나 담배를 입에 물고, 뚝 불거진 똥배를 일부러 들어 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아직도 중국의 후진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거의 7시간 정도의 긴 차량 이동 끝에 오늘의 숙박지 ‘사평현’에 도착했다.

호텔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마침 포스코 관계자가 제공해준 김치를 먹으려고 호텔 식당 측에 준비해달라고 했는데 김치가 손바닥 반만 하게 썰어져 나왔다. 더 이상 요구 할 수도 없었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이프 나이프” 하면서 써는 시늉을 해도 상대가 이해를 못하니 방법이 없었다.

각자 방을 배정 받았는데 기준은 흡연 여부였다. 여행 내내 아래와 같이 조를 짜서 방을 사용했다. 박형채 전작/정한 서윤복/임경택 이종진/신원우 나양주/조문형 김용우/임삼환 이경식

 

각자 배정 받은 방에서 샤워를 끝내고 한방에 다시 모였다. 전작 총장이 종이 뭉치를 쓱 꺼내서 펴보니 오늘의 시였다. 여기까지 와서 날마다 시를 낭송할 줄 정말 몰랐다. 비시산회원이 읽자는 취지로 임경택 친구가 ‘너를 사랑한다(강은교)’를 낭랑하게 읊었다. 비시산회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고 시낭송에 같이 참석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성숙한 마음으로 상대의 전통을 존중해준 것이리라.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7.28(토)의 아침이 밝아왔다.

어렴풋하게 잠이 깨었는데 어디선가 쿵쿵하는 폭파소리가 났다. 임삼환 친구가 나갔다 오더니 결혼식 폭죽 소리란다. 아니 아침 6시경부터 폭죽을 그렇게 크게 터트려도 누구하나 항의하는 사람도 없나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대평원을 차량으로 무려 4시간이나 하남성 쪽으로 달렸다.

우리가 목표한 태항산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산동성과 산서성이 나뉘고 황하를 중심으로 하북성과 하남성이 나뉜다고 한다. 중국내륙으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건설이 여기 저기 눈에 많이 띄었다. 하지만 교통문화는 영 엉망이다. 끄떡만 하면 크략숀을 울려대고 틈만 나면 새치기 하는 게 교통관행처럼 보였다. 그외에 사람들도 줄서서 여유 있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하남성은 중국 인구의 10% 정도가 거주하는데 비교적 못사는 동네이고 특기는 발 맛사지란다. 발 맛사지라? 12:30 분경에 시골집이라 간판을 달고 있는 한식집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언급을 안했지만 우리 차에는 노부부와 젊은 부인, 어린이 2명이 동승 했었는데 이 식당이 이들의 집이라고 한다. 식당에 제법 한국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들보다 서둘러서 트레킹 계곡으로 이동했다

桃花곡 트레킹을 시작했다. 맑은 물과 폭포 구름다리를 지나고 또 겨우 한 자 폭이나 되는 이동통로를 지나면서 계곡을 음미했다. 계곡이 끝나면서 관관용 차량으로 드라이브 하다가 때로는 걷기를 반복하면서, 아스라하게 멀리 보이는 대협곡의 밑바닥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수직의 낭떠러지와 그 주변에 도열한 듯 보이는 웅장한 산맥들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색다른 풍경이었다.

정상의 소공원에서 오늘의 시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김기만)’을 서윤복 친구가 낭송했다. 우리 시산회 회원들보다 더 거리낌 없이 잘 낭송했다. 드문드문 농가들이 절벽 끝에 매달려 있었고 계단식 농법을 이용하여 단 1평의 땅도 놀려두는 땅이 없었다. 살아보고자 하는 중국 농민들의 강인함이 곳곳에서 보였다.

또한 쇠파이프와 철근으로 통로를 만들거나 절벽의 바위를 뚫어서 통로를 만들거나 하는 그들의 노력을 보면 머지않아 지금의 황산이나 장가계처럼 이곳도 유명해 질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그래도 일본인들이 많이 오지는 않을 것이란다. 중일 전쟁 시 이 협곡에서 일본군이 대패 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정상 부근부터는 걸어서 하산길을 잡았다. 급경사 길을 조금 내려오니 불교사찰도 아닌 것이 보여서 잠시 들어가 보았는데 도교 사찰 이란다. 예의상 가볍게 목례만 하고 바로 빠져 나왔는데 앞에 가던 박형채 회장이 갑자기 오리걸음 준비를 한다. 밑바닥이 아스라한 수직 절벽의 중간 부분을 도려내어 사람이 다니는 통로를 만들었는데 통로의 높이가 1미터 남짓밖에 안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포즈였다. 그 작고 좁은 통로를 빠져 나오니 조금 있다가 바로 80여 미터의 긴 쇠파이프에 둘레를 계단으로 꼬아놓은 수직하강 계단이 보였다. 빙글 빙글 돌면서 긴 협곡의 바닥으로 내려왔다.

중국은 땅 덩어리가 커서 큰 만큼 볼거리가 많다더니 정말 맞는 말이다.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더니 미국의 그랜드캐년과 비슷하긴 한데 받는 느낌은 서로가 달랐다.

태항대협곡 산행이 끝나자 19시경부터 하남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로등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달려 겨우 23시경에야 휘현호텔에 도착했다. 서둘러 저녁을 마치고 은근히 기대되는 족 맛사지를 받으러 12명 전원이 호텔 근처에 있는 맛사지샾에 입장했다. 여성맛사지사가 부족 했는지 2명은 30 분후에 도착해서 공개적으로 발과 전신을 맛사지 받았는데 경험자들 얘기에 따르면 별로 였단다. 12시 30분경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7.29(일)의 새벽과 함께 wake up call이 울렸다

어제 전신 맛사지를 받았음에도 몸도 눈도 무겁다. 사실 오늘이 금번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6-7시간의 산행이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날이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길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바닥은 울퉁불퉁 비포장이고, 폭은 좁아서 차량한대가 겨우 지나다닐 정도였다. 목적지 부근에 거의 다다를 무렵 도로 중앙에 고장 난 차량 한대가 길을 막고 있어서 우리 차도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 했다. 다른 차를 생각 한다면 조금 더 옆으로 고장 난 차를 주차해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려서 걷기로 했다. 조금 걷다가 마을 주변에서 빵으로 아침을 먹는데 주민 2~3명이 옆에 나타났다. 박형채 회장이 나눠 먹을 생각으로 빵을 건넸으나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현지인에게 줄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빵을 현지인에게 권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한사코 거부했다. 아마 이 지방의 풍습이나 문화 일 거라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등산하는 일행은 우리 밖에 없었다. 아니 이 유명한 산에 우리 밖에 없다니 조금 의아해 졌다. 조그만 산길로 접어들었다. 아까부터 등산하고는 인연이 없다는 이종진 친구가 약간씩 처진 기색은 했지만 특별한 일없이 꾸준하게 잘 올랐다. 주변경치는 환상적 이었다. 깎아지른 절벽과 봉우리들이 굽이굽이 등산길을 포위하고 있었다. 오르면 오를수록 멀었던 산들이 다가오고 우리들의 땀방울도 굵어졌다.

중간 쯤 도달하니 집 몇 채가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도란도란 모여 않아 주인이 가져온 몇 잔의 맥주로 목을 축였다. 조금 더 가니 평평하고 넓은 바위판이 나타났다. 그런데 오늘이 마침 이종진 친구의 60회 생일 이란다. 인정하긴 싫어도 환갑이다. 보릿짚 모자위에 초코파이를 놓고 심지를 박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중국땅 오지에서 박수를 치면서 생일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조금 더 가니 동굴이 2개나 나타났다. 전등하나 없어서 칠흑같이 어두웠고 동굴바닥은 물이 고여 있어서 잘못하면 빠지기 십상이었다. 몇 번인가 쉬기를 반복하면서 오르고 또 올랐다. 조금 속도를 낼 요량으로 본인이 선두에 서면서 좀 빠르게 걸었다. 계속 앞과 뒤의 거리 차이가 커져갔다. 조금 있으니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 졌다.

두 사람 빼고 우비나 우산을 갖추었기에 꾸준히 발걸음 옮겼다. 어느새 빗방울도 사라지고, 14:00 경에 1,700미터의 태항산 왕망령에 도달하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약간 지친 듯 했고 물이 떨어져 목말라 했다. 그래도 하늘은 빛났고 우리들의 기분도 덩달아 이 산이 우리 것인 양 우쭐해졌다.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주위를 산책하면서 차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갈 길이 꽤나 바쁘다. 산 밑의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들고 2번이나 차를 갈아타면서 우리 차량에 옮겨 탔다. 중국은 지방자치단체간의 이해관계로 타지방차가 관광특구에 입장을 못한다고 한다.

또 긴 차량 이동이 시작 되었다. 가자 곡부로~~ 중국에서는 4-5시간은 짧은 거리여도 우리 개념으로는 서울에서 부산가는 꽤 먼 곳이다. 끝없는 옥수수 밭과 포플라 나무숲을 보면서 이제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려 겨우 10:30경에 곡부에 도착했다. 호텔 앞의 식당에 들어섰다. 조문형 친구가 준비한 우리 재래식 밑반찬이 있어 한층 더 풍성한 저녁밥상이 되었다. 아울러 오늘의 시 ‘편지(조지훈)’를 오늘의 주인공 이종진 친구가 읊었다. 오늘의 노고를 서로가 치하 하면서 배갈 주를 서너 잔씩 마시고 늦은 밤에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 방만 카드키가 말썽을 일으켜 방문이 열리지 않아서 다시 카운터로 가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7월30일, 드디어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이곳 곡부는 공자묘와 공자부(저택)가 있는 곳으로 도시 전체가 전통적인 중국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거리 주변이 온통 중국풍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서안과 더불어 아직도 중국풍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이곳을 관람할 수 없다고 하여 임삼환과 같이 이른 새벽에 거리로 나섰다. 크기가 거의 자금성만 하다는 공자부를 옆에 두고도 못 보게 되어 정말 서운했다. 공자부 정문에서 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주변을 거닐었다. 아침체조를 한참 구경하고 호텔로 오는 길에 나양주 친구를 만나 가벼운 산책을 즐긴 뒤에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청도로 가야한다. 차를 탑승하니 중국지도와 부채를 파는데 돈에 비해서 물건이 좋아 보여 몇 개를 샀다. 특히 부채는 성능이 너무 좋았다.

산동성을 주로 다녔지만 예전보다 중국의 고속도로 건설이 크게 늘어난 것 처럼 보였다. 차안에서 둘러않아 동기들의 근황이나 향후의 우정 등등에 대하여 대담을 하면서 7시간만에 겨우 청도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뿔사!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청도 포스코 총경리가 거의 2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임경택교수를 보고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것인데 이렇게 늦고 말았으니 큰 실수를 한 셈이 되어 버렸다. 임 교수가 가이드한테 단단히 주의만 주고 말았다. 청도에서 제일 큰 한식당 자하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오랜만에 된장국, 냉면 등을 푸짐하게 먹었다. 다시 한 번 더 임경택 친구 그대에게 고마움을 표하네!!! 점심을 먹자마자 부지런히 차를 몰아 항구에 도착했다. 바로 New golden bridge 5호에 탑승했다.

이제 환갑이 되어 이러한 여행은 친구들 끼리 우정을 지속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모두들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비시산회 친구들인 서윤복, 이종진, 임경택, 정한 등 4명의 친구들도 나름대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우린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이제 청춘도 지났기에 친구들이 옛날보다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어 식당에 12인석이 셋팅된 자리로 모였다. 여기서도 시낭송은 빠지지 않았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멈춰 서서(로버트 프로스트)’를 마지막으로 정한 친구가 낭송했다. 이종진 친구가 고마움을 표하고자 한턱 쏘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 60회 생일축하를 고맙게 생각하며 친구들에게 즐겁게 한턱을 냈다. 참치회, 정종, 맥주, 등등...... 밤이 깊도록 우리는 마셨다. 취하도록 마셨다.

끝으로 금번 중국산행에 동참해준 4명의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드리며, 본 산행이 성공할 수 있도록 노고를 다 해준 박형채, 전작 2명의 집행부에게도 감사의 말을 올리나이다. 모두들! 정말 수고했습니다.

 

2012. 8. 2 . 이 경식 씀

 

 

3.산행지

수 년 전에 오른 적이 있는 산이고 최근에 번외로 비시산회 동창들과 오른 적이 있다. 시내에 있으니 접근하기가 편하고 내려오는 코스가 많으므로 많은 산객들이 찾는다. 아차산으로 올라 용마산을 거쳐 망우리 공원 묘역까지 가서 '명동 백작' 박인환의 묘 앞에서 머리를 숙이면서 잠시 나도 지금부터라도 저렇게 멋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오늘 아침에 뒤늦게 보내온 이경식 산우의 중국 태항산 산행기를 읽으면서 무척 부러웠고 아쉬웠다. 그들의 숨겨진 얘기와 후일담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니 이번에 모여서 허전했던 마음을 풀어보자. 망우리까지 가면 상봉역 앞의 샤브샤브가 맛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에 다녀온 친구들은 가지 못한 산우들을 위해 즐거운 여행담을 들려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 빠짐없이 참석하기 바란다.

 

 

4.동반시

지난 아차산 산행 때, 망우리 묘역에서 명동 백작 박인환의 묘까지 오신 박형채 회장님의 어부인 김 선생께서 함께 머리를 숙였으니 그 분도 시인의 시가 회상되었던가 보다. 항상 흰 색 정장을 입고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물지 않은 명동의 카페에서 도라지 위스키 한 잔을 앞에 두고 떠뜨렸을 분노와 사랑의 얘기를 이 시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목마와 숙녀',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등의 시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로맨티스트 박인환을 잊을 수가 없다.

 

무더위가 세상을 덮고는 쉽게 물러가지 않는다. 이럴 때 시원한 소나기가 내려주면 고맙겠지만 타는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줄 비 소식은 없다. 그렇다고 불 타는 한여름에 소나기가 시골의 5일장처럼 예고하고 내리는가. 하물며 사랑도 어디 5일장처럼 예고하며 오고 가는가, 사랑은 소나기처럼 예고없이 내린다. 잊혀진 얼굴처럼 잊혀진 사랑이 가장 슬프다 했는가!

<도봉별곡>

 

 

얼굴/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旗>를 꽂고 산들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2012년 8월 3일

 

詩를 사랑하는 山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