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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詩山會 제195회 산행)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詩山會 제195회 산행)

산 : 설악산

코스 : 남교리-십이선녀탕 계곡-안산 갈림길-대승령-대승폭포-장수대

소요시간 : 오름 4시간 내려옴 2시간

일시 : 2012년 10월 7일 7시

모이는 곳 : 전철 2호선 잠실역 3번 출구 너구리상을 돌아서 호텔 롯데 남측

준비물 : 중식, 막걸리, 안주, 과일(하산 후 기사문항에서 뒤풀이 겸 저녁)

연락 : 전작(010-9858-2858)

블로그 : 사진 blog.daub.net/sisan20

산행기 blog.daum.net/yc012175

카페 cafe.daum.net/K-20

 

 

 

1.시를 통한 時論

 

엄승화, 「미개의 시

튀어오른다. 머뭇거리는 시간의 휘장을 연다. 성년이 된 여인은 건강하고 단순하다. 응시하는 어둠 속 조종은 평화로이 울리고 붉은 정령들의 음악 짐승들은 섭리를 지켜 포효한다. 손톱 부서지고 새들은 알을 쪼아먹고 살찐 땅으로 흐르는 과즙 여인의 젖꼭지에 묻어 있다.

 

  오후는 끝없이 작열하였다. 태양으로 하여 청년의 이마 골짜기보다도 깊고 가장 화려하였던 꽃잎을 문신으로 새긴 처녀들 지붕 위에서 타악기처럼 적막히 소리지른다. 한때 아버지였던 사나이들 앵두나무 꽃가지에 매달려 지평선을 이루며 놀고 있다.

 

  이제 해 지는 언덕에서 불탄다. 무덤이 있는 숲의 상처와 습기들 핥던 사랑 종탑 위의 먼지 높이 날아 허공을 벨 때 아름다운 여인이 쓰러지는 것은 쓰디쓴 자유를 누림이라 밤이 오면서 지평선은 동트는 곳이 되었고 어둠의 짙은 광채 오랜 세월 공처럼 튀어올랐던 무릎에 휘감길 때 붉은 지렁이는 그곳에 있어 알 수 없는 세계의 뜨거움과 싸우고 이긴다.

 

 

시_ 엄승화 - 1958년 강원도 영월 출생. 시집 『온다는 사람』이 있음. 현재 뉴질랜드의 한적한 동네에서 아담한 와인가게를 운영하고 있음. 지난 7월 14일,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에는 가게에서 ‘프랑스의 날’이란 이름으로 행사를 열어, 호쾌히 제공된 치즈와 비싼 프랑스 포도주에 동네어르신들이 모처럼 근처가 들썩거리게 즐거워하셨다고.

인공의 기미가 전혀 없는 날것의 자연을 탐미적으로 그린 시다.

‘붉은 정령들’ ‘가장 화려하였던 꽃잎을 문신으로 새긴 처녀들’ ‘해지는 언덕에서 불탄다’…….

붉은, 붉다 못해 검붉은 색채감을 곳곳에서 내뿜으며 죽음이나 늙음마저도 화사하게 만든다. 절정의 단맛을 향해 치달아가는 한여름의 검붉은 자두처럼 한젊음이 잉잉거리는 신열로 탱탱하다. “아, 나는 얼마나 젊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시 속의 여인이 스스로 매혹되어 저도 모르게 뽐내며 ‘적막히’ 선포하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승화, 정말 시 잘 썼었구나!

30년쯤 전 발표됐던 친구의 시를 찾아 읽으며 새삼 감탄한다. 독보적으로 감각적인 시를 썼던 엄승화. 다정하고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웠던 그녀. 우리 모두 젊었던 시절, 문단의 ‘선데이 서울’이라 일컬어졌던 이가 유포한 말이 있다.

“시단에 미녀 삼총사가 있으니, 김경미, 엄승화, 이상희(이름, 가나다 순)로다.”

그녀 셋 다 여전히 아름다운데, 엄승화만 글나라에서 멀리 있다. 한글나라-대한민국에서도 멀리 있다.

‘오랜 세월 공처럼 튀어올랐던 무릎에 휘감길 때 붉은 지렁이는 그곳에 있어 알 수 없는 세계의 뜨거움과 싸우고 이긴다.‘

오래 견딘다는 건 가장 힘든 싸움. 너는 싸웠고, 이긴 것 같다.

봄이면 사고치고 싶다던 승화야, 그곳은 이제 봄이 왔겠지. ‘9월의 봄’이란 제목, 어떻니? “문득 밀려드는 죽을 것 같은 쓸쓸함, 가슴이 에이는 쓸쓸함”을 무화시키지 말렴! 시를 쓰렴! 엄승화가 드디어 시를 쓴다면, 어떤 시를 보여줄지 너무 궁금하다.

-시평<문학집배원 황인숙>

 

매주 문학집배원이 보내오는 한 편의 시를 빼지 않고 읽는다. 이번 프롤로그 시는 거기서 가져 왔다. 뉴질랜드의 한적한 동네에서 시를 쓰며 와인가게를 운영하는 시인이라!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여인네다. 나는 이 시인을 로맨티스트라 부르고 싶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모를 가지고 떠난 것도 와인가게를 하는 것도 궁금하다. 영월이라는 고향도 반갑다. 혹여 뉴질랜드를 가게 되면 꼭 들러 와인을 마시며 시를 얘기한다면 즐거울 일이다. 아름다운 시인을 만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이 아닐 런지.

<도봉별곡>

 

 

2.산행기

시산회 제194회 도봉산 산행기 < 전작 >

 

산행일/날씨 : 2012년 9월 16일(일) / 맑음

 

산행코스 : 도봉산역/도봉산 탐방지원센타/보문능선/우이암/우이능선/우이동 입구

 

참석자 : 8명(김용우,김정남,나양주,박형채,신원우,위윤환,이경식,전작)

 

동반시 : 아아, 삶이 / 이경림

 

뒤풀이 : 우이동 버스 종점 부근 ‘이모네’ 집에서 전어회, 전어무침, 한치회, 매생이 칼국수, 막걸리

 

 

어제 밤, 종화는 새벽예배 참석으로, 재웅이는 사무실에 일이 생겨 참석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산행은 지난번 청계산 산행 때 당초 셋째 토요일에 산행하기로 한 연초 산행계획을 그 날 참석한 13명의 산우들의 결혼식 참석 등 여러 일정을 고려하여 부득이 일요일로 변경하여 가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연초에 정한 산행 날짜와 장소에 따라 산행을 하고 있으나 결혼식 등이 몰려있는 경우에는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여 계획을 조정해 오고 있으니, 지난 번 산행에 참석 못한 산우들은 이해해 주기를 ……….

 

오늘은 모처럼 쾌청한 날씨에 시원함이 느껴지는 산행하기에 좋은 초가을 날, 나는 산우들에게 나누어 줄 동반시 복사본과 약간의 요깃거리를 챙겨 오늘 만나기로 한 도봉산역을 향하여 출발, 가는 도중 지하철에서 원우로부터 따르릉 - 집에 지갑을 놓고 온 바람에, 조금 늦을 것 같네 – 휴대폰 연락이 왔다. 언제 어디서나 서로 연락이 되니 참 좋은 세상이다. 늘 긍정적이고 밝은 얼굴의 용우도 만났다.

 

주말 도봉산행 7호선 지하철은 손님의 대부분이 중장년의 남녀 등산객이다. 이들 중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세어 보니 약 80%가 손에 휴대폰을 들고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시산회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참 세상이 많이 변했다.

 

10시 조금 넘어 7호선 도봉산 대합실에 원우를 마지막으로 오늘 산행할 8명의 산우가 다 모였다. 서로 반갑게 수인사를 하고 들머리인 도봉산 탐방지원센터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

 

도봉산 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등산안내도를 보고 오늘 산행코스와 작가를 결정할 시간, 시산회의 나침반인 정남이가 산우들의 의견을 들어가며 도봉산 산행코스 중 쉬운 코스인 보문능선으로 올라가서 우이암과 우이능선을 지나 우이동 버스 종점으로 내려가기로 하였고, 산행기는 가나다순에 의거하여 내가 쓰기로 자진신고 했다.

 

탐방지원센터 앞 인산인해의 등산객을 뚫고 전진, 전진…… 도봉산 입구를 조금 지나 좌측의 도봉사 방향으로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갔다. 올라가는 길에 어린애를 목마 태우고 올라가는 서양인 가족도 보인다. 이십 여 년 전 우리들 모습인 것 같다.

 

올라가는 길, 약수터에서 다들 약수 한 사발, 음! 이맛이야.

 

컨디션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이능선과 도봉주능선의 갈림길에 도착, 이곳에서 잠깐 숨 고르기. 원우가 가져온 중국 태항산표 대추과자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정남이로부터 이인 친구가 하는 불교 마음공부에 갔다 온 얘기와 대학 1년 후배인 문재인의 과거 시위와 야구 얘기를 듣고, 인구감소와 핵가족화로 인한 아파트의 선호 평형변화,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한담을 하며 한참 휴식 후 좌측 우이암 쪽으로 출발!

 

능선을 따라가며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도봉산 주봉인 자운봉과 신선대, 주봉, 병풍바위, 칼바위, 오봉 등 능선 주변의 기암괴석과 암봉들, 멀리 있는 북한 쪽 산들과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이 한눈에 보이고 팔당댐, 예봉산과 검단산까지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아름다움에 심취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산행은 계속되는데 누군가 전망 좋은 곳에서 쉬었다 가자 한다.

 

산을 좋아하는 정남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쪽이 우리 집이라 한다. 도봉산이 좋아 이곳에서 7년째 살고 있단다. 정남이는 명산 자락에서 살면서 시산회 같은 모임을 이끌고 가는 사주팔자를 타고 난 것 같다. 늘 솔선수범 시산회를 챙기는 자네는 복 받을 것이네.

 

이곳을 다시 출발! 우이암 쪽으로 가는데 원우가 우이암이 이쪽에서 보면 성모마리아 뒷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 찬찬히 보니 영락없이 머리를 약간 숙인 성모마리아 모습이다. 천주교에 다니는 원우의 신심이 느껴진다. 같은 바위 하나를 두고도 보는 사람과 각도에 따라 소의 귀로, 남자의 거시기로, 손가락으로, 신성한 성모마리아로 다르게 보도록 한 창조주와 자연은 정말 오묘하다.

 

드디어 먹산회의 점심시간! 우이암 부근 작은 바위 밑 널찍한 곳에 깔판을 깔고 각자 가지고 온 송편, 떡, 김밥, 오리고기, 문어, 한과, 사과, 막걸리 등을 꺼내 놓는다. 시산회의 전통에 따라 오늘의 작가인 내가 음식을 먹기 전, 이경림 시인의 - 그 또한 시름 같은 것- 으로 끝나는 ‘아아, 삶이’ 라는 시를 읽었다.

 

다들 한 입 하려는데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산고양이 어미 한 마리가 곁에 와있다. 고기를 한 점 주니 얼른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누군가 아마 새끼가 부근에 있을 거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새끼를 데리고 와 떼 동냥을 한다. 떡과 과일을 던져 주니 냄새만 맡고 먹지 않는다. 아아, 고양이는 육식동물, 고기 몇 점을 더 주고 더 이상 주지 않으니 알아서 사라진다. 짐승도 자기 사는 지혜는 다 있는 법......

 

식사를 하면서 12월 대선 후보에 대한 촌평, 고등학교 시절 얘기, 건강 얘기, 연애담 등 종횡무진 엔도르핀이 나오는 화제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한 잔 하니, 한 시간 남짓 식사 시간이 쉽게 지나간다.

 

1시 반경, 우이암 계곡 숲길 쪽으로 하산하기로 하고 다시 출발!

 

멀리 북한산 백인만(재웅이 덕에 기억하고 있음) –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과 올망졸망한 기암괴석을 보면서 상쾌한 가을 공기를 마시며 숲길을 따라 계속 전진! 전진! 하면서 옆에 있는 양주한테 “시산회 회원들은 한 칠십 중반까지는 이렇게 산에 다닐 수 있을까?“ 라고 말을 걸어 본다.

 

양주 왈 “ 광고 산악회 가보니 1회 선배들도 산을 날라 다니는 분이 있데, 우리도 건강관리 잘하면 팔십 넘어서까지 다닐 수 안 있겠는가.” 한다. 나도 이 말에 완전동의한다. 아마 시산회 산우들은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등산은 대표적인 유산소운동으로 근육의 퇴화를 늦춰주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며, 심장을 튼튼하게 해준다지 않는가. 산우들!, 오랫동안 산에 함께 다녔으면 하네.

 

3시 경, 도봉산의 빼어난 경치에 심취해 쉬엄쉬엄 내려오다 보니 우이동 입구에 도착! 뒤풀이 할 시간. 다들 장소를 물색, 가을의 별미 전어가 있는 ‘이모네’ 집으로 만장일치 결정.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고소한 전어회, 시원한 한치회와 막걸리를 시켜 놓고 먹어가며 마시며 다음과 같이 시산회 계획을 의논하였다.

 

- 다음 산행지는 설악산 단풍구경을 위해 십이선녀탕/장수대+기사문항 코스로 한다.

 

- 내년부터 장거리 산행은 월요일 출근을 감안하여 가능한 토요일에 가기로 한다.

 

- 시산회 200회 기념책자는 발간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마나님들의 저녁식사 준비에 대한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건강식인 매생이 국수로 마무리하고 모두들 헤어짐…..

 

다음 산행은 설악산 단풍산행을 위해 예약해둔 25인승 버스에 시산회 산우들이 꽉 차기를 기대 하면서 설악산에서 보세! 올 해 못 본 친구들 모두………(끝)

 

 

3.산행지

이번 산행은 설악산 십이선녀탕계곡으로 올라 장수대로 내려오는 코스다. 3년 전 봄에 오른 적이 있고 모두 감탄했던 코스다. 열두 개의 소, 담 등으로 이루어진 코스인데 그때는 전례 없던 홍수로 많이 망가져 복숭아탕은 돌로 메워져 있었지만 이 좋은 가을에 그런 산을 오르지 않으면 어디를 오르랴! 가도가도 좋은 산이고 아직도 오르지 못한 코스가 많으니 두고두고 오르자. 우리는 왜 때어났을까. 10월이다. 10월의 햇볕과 보름달과 하늬바람을 맞기 위해, 가을산, 가을비, 구름, 안개를 맞기 위해 태어났다. 무더위가 가시고 신새벽에 무서리 내리는 가을이 오고 이슬도 맑고 차다. 이런 가을에 함께 설악의 향기에 잔득 취하고 머물다 오자. 사람은 혼자만 잘살도록 생겨 먹지 않았다. 볕이 좋은 가을은 어김없이 바람도 좋다. 시인은 초록이 지치면 단풍이 든다고 했다. 설악의 한자락에서 단풍의 향에 흠뻑 취하고 오자. 단풍은 혹독하게 춥고 지루하게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 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라 했던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바람도 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내려와서 기사문항에 들러 싱싱한 회로 가을잔치를 벌여보자. 모두 모이자.

<도봉별곡>

 

 

4.동반시

이번 시는 도봉산의 작가 전작 총장이 추천한 시다. 용우 총장이 동창회 카페에 올린 시다. 우리는 천양희 시인의 시를 자주 접했다. 시는 맘이든 재물이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기도라 했던가! 어렵게 올라 읊는 시가 너무 짧으면 싱겁다는 산우가 있었다. 이 시는 적당히 길고 인간의 아픔을 깊이 성찰함에 있어 당당한 시다. 시인을 이런 시를 즐겨 찾아낸다. 최근에 집안 모임이 있었다. 걱정이 없는 집안이 없었다. 이래서 부처는 삶 자체가 괴로움의 바다라는 일체개고라 했을까? 도서관에 다니면서 처음에 행복론에 관한 책을 찾아 읽는데 책의 종류 중 가장 많았으니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답도 나와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제는 정의는 항상 늦게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의 높은 벽을 기어코 뛰어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가지론의 3대 명제가 있다. 불가지론이란 '세상이 억 번을 넘게 바뀌어도 알 수 없는 것이있다'라는 철학적 이론이다. 첫 째 우주의 기원, 창조론에 대한 반론이다. 둘 째 신과 영혼의 존재,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도,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유신론에 대한 반론이다. 셋 째 선악의 귀결, 선이 악을 이기는 권선징악적 결론에 대한 부정적인 회의다. 선이 악을 이긴다면 낙원이지만 그런 낙원은 인간의 역사를 3백만 년이라고 해도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그것을 꺼낼 수 있는 것이 시가 아닐까!

<도봉별곡>

 

놓았거나 놓쳤거나 / 천양희

내가 속해 있는 대낮의 시간

한밤의 시간보다 어두울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어안이 벙벙한 어처구니가 되고

어떤 날은 너무 많은 나를 삼켜 배부를 때도 있다

나는 때때로 편재해 있고

나는 때때로 부재해 있다.

세상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만큼

확실한 오류는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다

불꽃도 타오를 때 불의 꽃이라서

지나가는 빗소리에 깨는 일이 잦다

고독이란 비를 바라보며 씹는 생각인가

결혼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혼에 성공한 것이라던

어느 여성 작가의 당당한 말이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내게 중얼거린다

삶은 고질병이 아니라

고칠병이란 생각이 든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물에도 결이 있고 침묵에도 파문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사람이 무서운 건 마음이 있어서란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한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큰 공백이 있을까

손가락으로 그걸 눌러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쓰고야 말겠다.

 

2012년 10월 5일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