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우암尤庵 송시열의 나라 / 도봉별곡
갓밝이 무렵
새벽안개 피워
아직 해는 불암산을 넘지 못 한다
날마다 찾아오는 명상의 시간
생각 없음과 마음 챙김의 차이
그 틈 사이로 문득
서가 안에서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는 책 한 권,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나 닮은 다혈질의 남자
요한 묵시록의 상징같이 까다롭고 음울한 사내
그들 사대부의 나라, 조선
어찌, 감히 백성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그를 위한 광장은 공맹公孟의 신전을 비롯한 사방에 널려있었고
임금조차 두렵지 않았던 자신들의 이기심 닮은 고집 앞에서
결코 무릎을 숙이지 않았던 그들만의 나라
일찍이 성현의 말씀을 두고 오직 한 길뿐
타협은 적합지 않았어라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 나는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뿐
서모도 여자이며
서얼도 남자이고 여자다
두 얼굴의 사내로 변신했다가
마침내 그들만의 권력과 명분과 죽음의 광장으로 나가
못 다한 북벌의 텅 빈 명분 같은 한恨은
그들만의 역사가 만든 오류
하찮은 예송논쟁에 지겹게 목숨 걸고
많은 사화를, 환국을 겪으며 무섭게 지켜온 지킨 아집을 위한 아집
마침내
마지막 네 번째 사약을 앞에 두고
무념무상無念無想
그리고 고집으로 찬 독백
“나의 죽음은 주자학만을 위한 순교다”
부활의 믿음이었을까
예언의 형식을 빌린 상징적 경고였을까
누구를 위한 확신이었을까, 아집이었을까
네 번째 사약의 은유만큼, 확신과 독선만큼 복잡한 성인과 악마의 얼굴을 대한다
광해 임금 몰아낸 서인들의 명분 뒤에 숨은 역사의 그늘 서늘해
정조가 노론 달래며 붙인
허상虛像의 송자宋子, 공맹公孟과 같은 반열로 환생하여
드디어 갑술환국, 요동치며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영남 남인들
영남인을 267년간 정권의 근처에도 발을 붙이지 못 하게 했다
불 사르며 불 지르며 불 태우며 격동으로 지낸 83년에 얻은 것은 무엇이며
응당 그는 소인배였을까
희대의 당쟁가였을까
신화로 살아남아
300년이 넘게 유지되어온 비밀의 열쇠 풀릴까
그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주장 많아도
정조가 조금 더 살았다면 그토록 억울한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그 아쉬움 풀릴까
*갓밝이 : 날이 막 밝을 무렵. 여명黎明
*송시열 : 1607(선조 40) ~ 1689(숙종15).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이 사람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송시열의 막무가내가 조선사회에 큰 폐해를 끼쳤다는 것인데, 과연 그에게는 성리학만 옳고 다른 사상은 글렀다는 식의 경직된 보수성이 있었다. 송시열은 당쟁이 극심하였던 17세기 후반의 인물이라, 시시비비의 여운이 몹시 길다.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가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는다. 사약으로도 쉽게 죽지 않아 네 번째 사약을 받고서 죽었다는 야사가 전한다.
*宋子 : 송자대전(宋子大全)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유학자, 성리학자인 송시열의 저서와 시문, 상소 등을 모은 모음집이다. 1795년(정조 20년) 정조(正祖)의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으며, 이때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하여 국가적 차원의 성인으로 존숭하였다.
*기해독대 :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위한 독대. 효종은 10만 포병 양성을 요청하였으나 송시열은 겉으로는 동조하는 척, 실제는 회의적이며 소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효종의 급서로 북벌은 어려운 일이 되었으며, 송시열은 북벌론자로 후세의 추앙을 받게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윤휴 : 진정한 북벌론자 윤휴는 사대부의 각종 특권을 폐지 및 축소해 민생을 강화하고 국력을 키워 광활한 요동 지역을 수복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동조하는 사대부가 거의 없었다. 효종의 아들 현종조차 급서하니 북벌론은 거의 소멸하였다. 숙종에게 사사되었다.
*제2시집 <시인의 농담>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