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273회 산행)
산 : 청계산
코스 : 원터골-매봉-옛골(한우 소고기로 뒤풀이)
소요시간 : 4시간
일시 : 2015. 11. 22. (일) 오전 10시 30분
모이는장소 :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 대합실
준비물 : 막걸리, 안주, 간식, 과일
연락 : 위윤환(010-6230-3180)
블로그 : blog.daum.net/yc012175
1.희망이 있는 시
희망(希望) ―전봉건(1928∼1988)
아름다운
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꽃과 사과이고 싶은 것은
꽃바구니의.
달빛에 씻긴 이슬을
이슬 머금은 배추가 진주(眞珠)처럼 아롱지며 트이는 아침을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를
태양(太陽)이 웃으며 내려오는 하늘… 그 눈부신 계단에 핀
진달래를
또 신문(新聞)이 음악(音樂)처럼 뿌려지는 거리를
생각하는 것은.
여기
무수히 검은 총(銃)알 자국 얼룩진
나무와 나무 사이
눈이 깔린 밤
… 여기에서.
오 두 마리
버들강아지 꼼지락이는 은(銀) 목걸이를 생각하며,
꽃바구니의 꽃 그리고
사과이고 싶은 것은… 당신의
가슴께에서.
구름도
지구(地球)도
인간(人間)도
생활(生活)도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다 함께 그리운 내가
전쟁(戰爭)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내 눈시울 속에
서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 겨울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이 서 있는
까닭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의 소용돌이인데 겨울이 오고, 탄흔 무수한 ‘나무와 나무 사이/눈이 깔린 밤’, 깨어 있는 한 병사가 있다. 방한복이나 제대로 입었을까. 어쩌면 닳아진 군복과 군화, 배도 고플 테다. 떠나지 않는 공포와 고통이 병사에게 ‘아름다운/어느 한 아름다운 날을’ 절절히 떠오르게 한다. ‘꽃바구니’ 같았던 사랑의 시간, 아 너무도 그리운, 눈에 삼삼한 ‘당신의 가슴께’ ‘꽃과 사과’! 달콤한 안식과 평화의 그런 날이 다시 올까. ‘푸른 바다 어리는 비둘기의 눈동자’ 같은 그날이. 소중한지 모르고 흘려보내던 일상이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다 함께 그리운’ 병사다. ‘구름도/지구도/인간도/생활도’! 신문도 참 오래 못 보았구나. 신문 파는 소년들이 손님을 부르는 외침으로 들썩거리던 거리, 시내 한복판의 소요며 분답도 평화의 그것인 양 어찌나 가슴 저리게 그리운지 ‘신문이 음악처럼 뿌려’진단다. ‘전쟁의 숯검정이 자욱이 얼어붙은’ 병사의 눈시울에 이 모든 것이 꿈인 듯 ‘아스라이’ 들어선다.
시 속의 병사는 시인 자신일 테다. 시인은 살아남아 시를 쓰는데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병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욱신거리는 이 상흔이 전봉건의 많은 시에 담겨 있다.
<황인숙 시인>
시 창작 교실의 시제가 ‘낙엽’이었다. 37년 전 가을, 뱀사골산장에서 자고 새벽밥을 지어먹고 반야봉에 올랐다가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을 거쳐 연화사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 피아골단풍은 지리10경 중 하나였다. 당시 지리산은 빨치산의 해방구였고 핏빛같이 선명한 단풍은 총에 맞은 빨치산의 피처럼 붉었다. 당시 영광에 남았던 가족들을 몰살시키고 도주했던 사람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모든 것은 조건을 원인으로 변하는 것임을. 인간은 단지 도구일 뿐, 종교적 사상적 이념의 희생물에 불과한 것들은 불쌍한 인간들이다. 도봉산 단풍의 빨간 색깔의 두 얼굴을 보며, 사람이 죽어 엉킨 핏빛과 낙엽이 되어 떨어진 단풍의 바랜 빛이 같은 색임을 노려보면서 늦가을을 보낸다.
<도봉별곡>
2.도봉산 산행기/도봉별곡
산과 코스 : 도봉산 입구-도봉사-도봉계곡-구봉사-도봉서원-입구
뒤풀이 : 바다장어구이, 전어구이, 홍합탕, 막걸리
참석 : 나창수, 조영훈, 이재웅, 위윤환, 김정남, 염재홍(뒤풀이 참석) 이상 6인의 시산인
아침에 식탁에서 TV를 보니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여준다. 전날 마트에 갔을 때, 뒤풀이를 굴찜으로 정했으니 생굴을 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룬다. 비가 내린다니 긴 가을가뭄에 반갑지만 오늘의 우리는 관산(觀山)을 각오해야 한다. 창밖을 보니 은행나무가 겨울 준비에 한창이다. 옆의 중국단풍나무도 노란 옷을 뽐내고 있다.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은 잎까지 먹여 살릴 힘이 없어 내려놓음으로써 긴 겨울을 살아남기 위함이다. 그들도 겨울잠 같은 휴식이 필요하다. 북한산 단풍은 서울생활 45년의 경험으로 소귀천계곡이 첫손가락을 꼽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수유역에 5인의 산인이 만났다. 집이 가까운 재홍이는 뒤풀이에 참석한다고 한다. 아카데미하우스를 지나 대동문을 거쳐 소귀천계곡으로 내려오기로 한 코스는 아깝지만, 긴 코스이므로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가다가 내려와도 될 코스를 상의했다. 필자 도봉별곡의 의견을 따라 도봉산 구봉사 옆 폭포까지만 오르기로 한다. 굴찜집은 통영에서 올라오는 굴이 3시에 도착하므로 매일 싱싱한 맛을 제공하기 위해 3시에 문을 여니 뒤풀이를 다시 정해야 한다. 장어구이, 훈제오리, 방어회, 멸치회 등의 의견이 나왔으나 내려와서 결정하기로 한다.
도봉산 입구에 도착하니 단풍의 색깔이 밝고 선명하다. 목포인(木浦人)의 가게에서 홍어와 막걸리를 챙기고 오르는데 천연색의 단풍이 산객들의 옷과 어우러져 멋진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폰으로 사진을 찍는 짧은 소리가 악기음처럼 흥겹게 들린다. 우리들의 산중단하계측한담(山中丹下溪側閑談)은 일정한 방향으로 가지 않아도 결코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산길은 끊어지는 법이 없으므로. 갈림길에서 철불(鐵佛)이 있는 도봉사 쪽으로 방향을 튼다. 붓다는 자신은 다만 ‘스스로 깨어난 사람’이므로 자신의 사후에 절대로 사리를 추리거나 등으로 신격화하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거듭했지만 세상일이란 한 사람의 마음대로 흘러가 주는가, 어디, 더구나 죽고 없는데. 사리를 얻으려고 다투다가 그것이 부족하니 불탑을 세우고, 고대 그리스인의 습관처럼 불상을 세우고, 불화를 그리는 행위를 보면 이슬람의 형태가 옳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은 경전의 글씨로 신의 모양을 만든다고 하니 오히려 본받을 일이다.
길은 밤새 도둑처럼 몰래 내린 가을비에 젖어 촉촉하고 하늬바람이 선선하여 산행하기에 매우 적합한 날씨다. 좋은 산과 단풍, 바람, 계곡의 물들과 더불어 오르는 반가운 친구들이 있어 오늘은 행복지수가 만점에 이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IS에 가입하려고 시리아로 간 청년의 생사여부에 화제가 걸린다. 인간의 8가지 의식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제7말나식은 마음 속 깊이 들어있으며 쾌와 불쾌의 분별심과 너와 나의 차별심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이기심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인간이 이기적일 때, 양보심이 없어지고 다툼이 생긴다. 개인 간의 다툼은 간단하게 끝날 수 있지만 이기심이 집단적으로 발생할 때, 국가 간, 대륙 간, 이념 간, 종교 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며, 돌이킬 수 없는 대량의 희생이 발생한다. 모든 싸움의 주범이 7말나식이므로 수행을 통하여 7말나식을 순화시켜 이타적으로 만들어질 때, 비로소 세상의 평화가 올 것이다. 그것을 자임한 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다. 온전한 수행을 완성하여 윤회의 괴로운 수레바퀴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만, 세상의 모든 중생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윤회하면서 중생을 바른 길로 제도하겠다는 사상이다. 일반 사람세계에서는 관세음보살, 지옥에서는 대세지보살의 보살행이 대표적인 경우다. 불교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 없다는 점에서 불교가 가장 평화적인 철학임을 인정하는 이유가 된다.
여승방인 금강암에 이르니 카톡 사진에 올린대로 단풍나무잎 전체가 한 가지 색으로 빨갛다. 산객 모두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옆으로 흐르는 도봉계곡은 밤새 내린 비로 제법 물이 불었다. 폭포를 제대로 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단풍나무 뒤로 장중하게 솟은 만장봉이 반갑게 보인다. 만장봉을 폰카에 담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다. 폰카의 한계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약사여래상이 노랗게 단장한 구봉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옆의 폭포는 밤새 내린 도둑비로는 부족한지 지난여름에 본 폭포의 수량에 비해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6년 전 약사여래상의 점안식 때 광경이 눈에 선하다. 우리의 불교는 기복신앙으로 가는데 이것이 도를 넘는 것이 아쉽다.
폭포 위의 6인용 돌 식탁에 자리 앉고 둘러앉는다. 배낭을 뒤져 꺼내놓으니 막걸리 4병과 번데기, 한과, 홍어가 차려진다. 배고픔이 반찬의 맨 앞에 선다는 것은 삶이 가르쳐준 지혜다. 다음은 부족함과 간소함, 아쉬움이 뒤를 잇는다. 옆의 계곡과 위를 보니 물과 느티나무 잎이 우리를 반긴다. 滿山紅葉이라고 유식한 재웅이가 덧붙인다. 부족한 식탁에 비해 우리의 화제는 끝을 모르고 부드럽고 조용하게 흘러간다. 아, 다양한 화제도 반찬이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도 반찬이 되었다. 사물을 사람으로 비유하면 인격화 또는 의인화라 배웠지만, 사람을 반찬이라는 사물로 비유하면 물화(物化)라 하던가. 인본주의적인 실존철학에서는 사람과 사물을 엄정하게 구분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산이 나고 내가 산이고 시가 되는 날이다. 시를 낭송하는 순서를 까먹은 것은 너무 조용하고 다감했던 분위기 탓이다. 앞으로 적은 수가 나와도 오히려 조용해서 좋으니 총장들은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게 그날의 최대수확이다. 마실 것 같지 않았던 처음의 분위기와 다르게 막걸리가 동이 나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다. 뒤풀이는 훈제오리로 굳어져서 다툼이 없다. 도봉산 단풍을 올해는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기억만 담아 하산한다. 도봉산이 도봉인 이유다. 도봉의 도가 단풍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징법이다.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진 테러는 간악한 우르바르스 2세 교황이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구호를 외치니 기독교도들이 탐욕을 일으켜 시작한 참혹한 전쟁, 즉 십자군전쟁이 원인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고 계속되는 ‘끝내지 못하는 전쟁’을 보면서 느끼는 소회가 깊다. 이슬람교도들이 인도를 침략하면서 불교도에게 자행한 인도 불교 나란자대학의 대학살을 기억한다. 우리는 용서했으나 잊지는 않는다. 기원전 6세기까지 그들의 신은 야훼 혼자가 아닌 여러 신이 있었으며, 전쟁의 신 야훼는 다른 신을 몰아내고 유일신이 되었다.<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88쪽> 과연 그들 중 자신들이 추앙하는 신, 야훼가 ‘전쟁의 신’이었음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같은 신을 모시면서 왜 그리도 반목하는가? 어느 신부님의 고백이기도 하다.<종교의 두 얼굴 - 평화와 폭력/박충구. 64쪽> 종교의 얼굴은 바로 평화라는 하나의 얼굴이어야 한다.
내려오니 차기 총장 재홍이가 기다린다. 뒤풀이 장소인 옛골토성으로 가다가 마주친 바다장어구이집에 이르러 모두의 눈길이 같은 뜻으로 모아진다. 젊음은 우리도 가져보았지만 흘러간 노래가 됐고, 우선 아주머니의 눈빛이 서늘해서 좋았고 안경 낀 아저씨의 가느다란 눈의 웃음이 좋았다. 산에서 읊지 못한 시는 늦었지만 읊어야 했고, 시평은 생략했다. 이제 어렵다는 등의 얘기가 없어져 고맙다. 다시 읽어보라는 애틋한 배려를 담고 다시 올린다. 그날도 나왔지만 우리만한 산행 모임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도 없음을 만천하에 공포한다.
가을 저녁의 말/장석남
나뭇잎은 물든다 나뭇잎은 왜 떨어질까?
군불 때며 돌아보니 제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꾸물대는 닭들
윽박질린 달이여
달이 떠서 어느 집을 쳐부수는 것을 보았다
주소를 적어 접시에 담아 선반에 올려 놓고
불을 때고 등을 지지고
배를 지지고 걸게 혼잣말하며
어둠을 지졌다
장마 때 쌓은 국방색 모래자루들
우두커니 삭고
모래는 두리번대며 흘어나온다
모래여
모래여
게으른 평화여
말벌들 잉잉대던 유리창에 낮은 자고
대신 뭇 별자리들 잉잉대는데
횃대에서 푸드덕이다 떨어지는 닭,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뭇잎은 물든다
바다장어구이를 앞에 두고, 전어구이는 몰래 감춰두고, 홍합탕은 가운데 두고, 이야기는 다시 무르익어 많은 얘기가 오고갔지만 차마 공개하기 어려운 것들은 생략한다. 마침 차기 총장인 재홍이가 나와서 내년 1년을 봉사하겠다는 확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매해 첫째 산행 때 거행하는 시산제는 추우니 춘삼월로 넘기자는 의견에 쉬운 결정이 아니므로 송년모임 때 거론하기로 했으니 다수결로 결정하면 되고, 위 총장이 알뜰하게 모아 회비에 여유가 있어 내년에 문집을 낼 때 쓰려하지만 눈꽃기차여행의 경비로 쓰자는 제안이 나왔다. 이것은 내년 초에 시행하는 것이니 차기 위 회장과 염 총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그때 시산제를 거행하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날 산행과 뒤풀이가 즐거웠으니 날마다 좋은 날 되시라.
서답단유수성 일일호시일(徐踏斷流水聲 日日好是日) 버리고 내려놓고 비워 천천히 걷는 발걸음에 흐르는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니 매일매일 즐거운 날이다.
2015. 11. 19. 도봉별곡 올림
3.오르는 산
청계산을 오른다. 이제 단풍은 다하고 남은 잎들의 운명은 갈 길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 세 번의 산행이 남았으니 10분의 1을 채우지 못한 산우들은 오라. 한우 소고기 잔치는 두위봉 산행 후, 횡성 한우를 먹어 봤으니 처음이 아니지만 자주 오고가는 기회가 아니다. 알뜰한 위 총장이 큰마음 먹고 쏘는 자리다.
4.동반시
도봉의 요청으로 기세환 산우가 보내왔다. ‘어린 시절 집사람 아버지와 연관된 시로 기억의
저편의 아련함을 따뜻한 체온으로 형상화 한 시‘라고.
김화연 시인은 산우들 어부인 중 두 번째로 등단했으니 마음껏 축하해주자. 시인의 어릴 적
상처가 되었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어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로 다시 다가온다. 시에 감정의
과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같이 제1의 덕목이다.
시인은 격정을 떨치고 주제를 놓치지 않음을 잘 유지했다. 이런 시를 기막힌 절창이라 한다.
미당 서정주를 시성이라 하는 이유는 짧은 말을 가지고 깊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시를 좋아한다. 시 교실의 젊은 시인들이 있지만 지극히 냉소적이며 자의적인
표현을 하는데, 나는 사정없이 혹평을 한다. 때로는 이런 시는 발표하지 말고 일기장에나
쓰라고. 나이테는 촘촘할수록 단단하고 오래 사는 나무가 된다. 시인의 나이테는 촘촘하다.
하여 시인의 미래가 넓고 깊게 보여진다. 선생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지만 동반자도
아니다. 외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기 바란다. 모두가 좋아할 시를 기대한다.
탱자가시의 눈물 / 김화연
보이는 것은 젖은 하늘과 쓸쓸한 들판
휘어진 등 뒤 업힌 입에서 투정이 새어나오면
때리던 할미의 크나큰 손
엉덩이 맞는 소리가 산을 타고
울림으로 돌아오면
혀에서 맴도는 소리 같아
앳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덩그러니 내팽겨진 탱자나무 울타리
탱자 가시가 스치면
아픔으로 올라오는 얼굴
눈물은 탱자의 가시처럼 아파서
동공이 커지기 전에
망막 속에 숨겨 두었다
반년 만에 오신 아버지
주섬주섬 옷을 입는 나를
머리만 쓰다듬고
신발을 신었다
무심한 듯 구르는 버스 뒷바퀴
채색 없는 먼지만 나를 껴안았다
멀어져가는 차창 문고리를 바라보며
먼지 쌓인 허수아비로 서 있었다
숨겨놓은 탱자의 가시가 다가온다
뒤를 향해 뛰었다
작은 돌담 우물에
머리를 숙인 채 그리운 이름을
어둠이 깜박거릴 때까지 토해냈다
2015. 11. 19.
산을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봉별곡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