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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새해 첫 산행 남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301회 산행)

새해 첫 산행 남산에 오릅니다(詩山會 제301회 산행)

산 : 남산

코스 : 동대입구역-장충공원-활터-정상-한옥마을-대한극장 옆 전주옥에서 뒤풀이

소요시간 : 3시간 반

일시 : 2017. 1. 8. (일) 오전 10시 30분

모이는 곳 : 전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 장충정 앞

준비물 : 안주, 간식, 과일, 막걸리

연락 : 염재홍(010-4948-6975)

카페 : cafe.daum.net/yc012175

블로그 : blog.daum.net/yc012175

 

1.시가 있는 산행

 

별을 보며
- 이성선(1941~2001)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거리

DA 300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근근이 별빛을 쳐다보며 나날을 견뎌 왔던 것. 한데 이제 어쩔 것인가. 내가 너무 쳐다봐 저 별들을 더럽히는 것은 혹 아닐까. 착함과 사랑에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바 아니라면 삶은 대체 무엇을 하자는 삶이겠는가. 그리고 선하고자 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따뜻한 저녁밥이 지중해를 표류하다 죽어 간 시리아 난민 소년의 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내 안락한 잠자리가 지하도 계단에 웅크린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아실 것이다. 시인은 60세를 일기로 스스로 세상을 내렸다. 풀에게 돌에게조차 미안해서였을 것이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맑은 시인은 빨리도 갔다. 이런 시인을 언제 다시 만나랴. 가슴 먹먹해지는 날이다. 그렇지 않아도 멍해지는 날인데.

<도봉별곡>

 

2.산행기

시산회 제300회 창덕궁 탐방기 / 이승렬

▣ 월일/집결장소 : 2016. 12. 18(일) /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 돈화문 앞 (13시20분)

▣ 참석자 : 28명 (일화, 종화, 진오, 양주, 창수, 기인, 재홍, 윤환, 경식, 승열, 윤상, 재웅, 삼환, 전작, 정한, 문형, 영훈, 광일 이상 산책 참석 18명 + 동주, 용우, 형채, 계신, 용복, 해황, 근호, 양기, 천옥 이상 납회 때 9명 참석 + 김재일 신규 참석)

▣ 산행코스 : 안국역(3번 출구)-돈화문-창덕궁-후원-동대문역(10번 출구)-뒤풀이식당(종로활어회집)

▣ 동반시 : "2017년을 맞으며" / 김용우

▣ 뒤풀이(납회) : 모듬회 및 매운탕 등에 소·맥주 / "종로활어회집"< 종로6가, (02) 763-8922 >

 

그렇게 춥지도 않은 날씨에 비나 눈도 오지 않아 야외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인 오늘, 오전엔 가족과 함께 성당미사에 참석하고, 시산회 300회 납회 산행 모임시간에 맞추기 위해 점심을 성당 옆 편의점에서 간단히 해결한 후 곧장 전철에 몸을 실어 약속 장소인 안국역으로 이동하였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김일화, 남기인 친구를 만나 함께 돈화문까지 걸어갔는데, 도착해 보니 벌써 몇몇 부지런한 친구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이재웅 산우는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여 친구들께 제공하는 인정을 베푸신다.

 

약속된 시간인 13시 20분에 창덕궁 탐방에 함께하기로 한 18명 가운데 17명이 모여 단체입장권을 구입하고, 조금 더 기다리다 13시 40분경에 곧 도착할 나양주 친구 이름을 검표원에게 기록하여 부탁을 한 다음 차례로 입장하였다.

 

돈화문을 통과하여 조금 더 나아가다가 13시 30분부터 시작된 창덕궁 궁궐길라잡이 정환선 해설사의 일반 탐방객 팀과 합류하여 창덕궁 전각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약 한 시간 동안 주의 깊게 들으며 제300회 시산회 산행(탐방)이 시작되었다.

 

이 기회에 창덕궁(사적 제122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잠깐 알아보면,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운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일제의 궁궐 훼손의도 일환으로 사료됨).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자연의 산세를 갈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4시 41분에 정환선 해설사의 창덕궁 전각 해설이 끝나고, 후원 해설이 예정된 15시까지 남은 시간에 일부는 근처 화장실에 다녀오는 등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후원 입구에 모여 김경숙 해설사의 창덕궁 후원 해설을 들으며 70분간의 후원 탐방이 시작되었다.

 

이곳 후원은 금원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엔 비원이라고 불리는 때가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45년 전인 육사 1학년 재학 중에 학교행사의 일환으로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함께 1971년 5월에 비원 벚꽃놀이에 참석한 기억이 있기도 한데, 사실은 '비원'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창덕궁 후원 관리를 위해 설치한 관리사무소 이름이었다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일제 잔재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창덕궁 후원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창덕궁 후원은 본래 후원(後苑) 또는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이라고 불렀으며, '태종실록'에 1406년(태종 6) 4월 창덕궁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원은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459년(세조 5)에는 후원 좌우에 연못을 만들고, 열무정(閱武亭)을 세웠다.

 

1463년에는 후원을 확장하여 경계가 거의 성균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창덕궁과 함께 후원도 불타버렸으나 광해군 때 복원되었다. 이때의 모습이 왕조실록의 주해에 기록되어 있는데 "기이한 화초와 괴석들을 늘어놓고 원유의 꽃과 돌 사이의 곳곳에 작은 정자들을 만들어 그 기교하고 사치스러움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다."라고 했다.

 

1636년(인조 14)에 지금의 소요정(逍遙亭)인 탄서정(歎逝亭), 태극정(太極亭)인 운영정(雲影亭), 청의정(淸漪亭) 등을 세웠고, 청의정 앞쪽 암반에 샘을 파고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으며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인조의 친필을 바위에 새겨놓았다. 1642년에는 취규정(聚奎亭)을, 1644년에는 뒷날 관덕정인 취미정을, 1645년에는 희우정(喜雨亭)인 취향정(醉香亭)을, 1646년에는 청연각(淸讌閣)인 벽하정(碧荷亭)을, 1647년에는 취승정(聚勝亭)과 관풍정(觀豊亭)을 세웠다. 1688년(숙종 14)에는 청심정(淸心亭)과 빙옥지를, 1690년에는 술성각 옛 자리에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을 세웠다. 1704년에는 대보단을 축조했고, 1707년에는 택수재(澤水齋)를 세웠다. 1776년에는 왕실의 도서를 두는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주합루(宙合樓)라 부르는 중층 누각이며, 그 아래 연못 남쪽에 자리 잡고 있던 택수재를 지금의 부용정(芙蓉亭)으로 고쳤다. 1828년(순조 28)에는 사대부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후원 안의 개금재 자리에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는 선원전을 지었다.

 

후원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주합루·영화당(暎花堂)·사정기비각·서향각(書香閣)·희우정·제월광풍관(薺月光風觀) 등의 건물들이 있는 지역이다. 둘째 영역은 기오헌(寄傲軒)·기두각(奇斗閣)·애련지(愛蓮池)·애련정·연경당이 들어선 지역이다. 셋째 영역은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승재정·폄우사(砭愚榭)가 있는 지역이다. 넷째 영역은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翠寒亭)·소요정·어정(御井)·청의정·태극정이 들어서 있다. 그밖에도 청심정·빙옥지·능허정(陵虛亭) 등이 곳곳에 있다. 후원의 구성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 그리고 앞에 펼쳐진 편평한 땅 등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꼭 필요한 곳에만 인공을 가해 꾸며놓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조원(造苑)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을 해설사와 함께 돌아본 70분의 시간은 조선시대 역사의 뒷모습(후원?)을 짧은 시간에 모두 섭렵해본 느낌이었다. 중간 중간에 김경숙 해설사의 의미 있는 코멘트였던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니면 '정조의 손자였던 기개 넘친 효명세자가 만약 왕위에 올랐더라면' 19세기 조선의 몰락을 막고, 열강과 일본의 강점을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말에 크게 동감하는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오늘 날씨만큼이나 우울한지 모르겠다.

 

16시 10분경 후원해설 막바지에 후원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750년 된 향나무 앞에서 김경숙 해설사께서 향나무가 천년이 되면 용으로 변하다고 하면서 앞으로 250년 뒤에 우리 서로 이 향나무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자는데 모두 이의 없이 큰소리로 '예!' 라고 대답하였다. 우리 시산회도 이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단체 사진을 몇 장 촬영하였다.

 

이어서 모두 납회 장소인 종로6가 '종로활어회집'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납회 순서를 가지게 되었다. 납회에는 창덕궁 탐방에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 10명이 차례로 자리를 함께 하였다. 먼저 300회 동반시를 저자인 김용우 시인이 직접 낭독하면서 납회는 시작되었다.

 

"2017년을 맞으며" / 김용우

 

꼬끼오

붉은 벼슬 새벽 울음

어둠 물러서고 태양을 맞아

새(新)끈 묶어

하늘만큼 큰 설레임

정갈한 아침 맞자

 

시대의 상처, 부끄러운 반성

촛불 켜고 횃불 들어

거짓과 아집의 벽 허물고

넘어진 민주공화국 바로 세워

스스로 울 줄 하는

바다처럼 깊은 희망 걸자

 

글(文)로 볏 달고 용맹(勇)의 갈퀴

어짐(仁)의 날개, 때(時) 아는 믿음

털 깃가진 빛의 도착, 여명의 새 날

천마총 歷史로 깨어나는 새로운 탄생

보통사람 사는 세상 알려

모두 함께 새집 짓자

 

내 눈의 주인 아니었음을

우리의 절실함 이만큼임을

나부터 변화의 주역되어

모두의 행진에 동행하자

 

병신아 가라

탄식도 가짜도 가라

뒤 돌아 보지 말고

 

丁酉年 새해 해오름

붉은 닭 뜨거운 기운

꿈꾸는 동녘 대문을 열자

 

동반시 낭독에 이어 위윤환 회장의 인사말과 염재홍 총장의 결산보고가 이어졌다. 염 총장은 현재 시산회 정원은 카톡회원 34명, 문자회원 1명 등 총 35명이라고 정리하고, 시산회 시인 2명(김정남, 김용우)의 시집발간(김정남 시인의 "바람의 그림자", 김용우 시인의 "저울에 앉은 생각"이 참석한 산우들에게 각자 배포됨)을 축하하며, 이 자리에 참석한 김용우 시인에게는 회장의 금일봉이 수여되기도 하였다. 금일봉을 받은 김용우 시인은 이를 다시 시산회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하였으나 다수의 시산회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차기 총장 선임안건 관련하여 염 총장이 추천한 한천옥 산우가 만장일치로 선임되었으며, 재경 20회 회장인 전작 산우가 300회 산행을 기념하여 시산회에 금일봉을 전달하였다. 이어서 시산회 문집발간 안건은 무기명 투표를 실시하여 찬성8, 반대17표로 발간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김동주 산우가 금년 산행에 잘 나오지 못한 것 과 내년 초 예정된 자녀 혼사에 부득이 친구들을 초청하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으로 납회 식사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말에 모두 박수로 감사를 표하였다.

 

재경 조 총장님과 전작 재경회장님의 내일 송년회 참석 재당부와 시산회 염 총장님의 건배사를 '마당발'로 제창하며 2016년 시산회의 납회를 마감하였다.

 

2016년 12월 20일. 이승렬 씀.

 

3.오르는 산

새해 첫 산행에 남산에 오름은 분명 즐거운 파격이다. 개인적으로 염 신임 회장은 임삼환 산우와 더불어 강북의 호주가였으며, 한 총장은 중학교 동창이니 조금은 안다고 치더라도 생각 밖이다. 그러나 그들의 권한과 더불어, 함께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다.

 

도봉은 ‘법과 등불’이라는 모임에서 ‘나눔과 베풂’을 목적으로 작은 손길로 독거노인, 노숙자, 탈북청소년 기술교육 등에 쌀과 식사를 제공하며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그날 여러 가지 사장으로 15년간의 모임을 완전히 끝내는 뒤풀이 때 회원들의 아쉬움이 많았던지 공부에 대한 토론이 오고가면서 취기가 올랐고 그 중 가장 문제가 많았던 도봉이 화장실 앞에서 넘어지는 사건이 있었었는데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 후로 술을 끊기로 결심했다. 담배는 덤으로 끊는다. 타산지석의 경우를 보라는 심정으로 올린다. 부상의 정도는 나 원장에게 들었겠지만, 넘어지면서 머리를 땅에 박았는데 5, 6, 7번 경추 사이에 있는 디스크가 원형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탈출하면서 신경에 손상을 가져왔다. 결국 너덜해진 디스크를 긁어내고 케이지를 넣어 원형을 유지했다. 그 과정에서 5, 6, 7번 경추에 철심을 박았음을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는 기분이 묘해졌다. 신경이 회복되기 전까지 절대 금주, 담배까지도 끊으라는 것은 분명 월권행위인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이 들어 재활기간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렸겠지만 길게 1년 짧게 6개월, 단 모든 신경이 완벽하게 돌아올 확률은 반반. 수술부위 절대 안정, 신경이 돌아오지 않은 다리 부위는 가슴에 지장이 없는 한도에서 편편한 길만 다닐 것. 5, 6, 7번 경추가 하나로 되기 때문에 영양 공급을 고단백으로 잘 할 것. 마지막으로 이 정도로 다행이지 이런 경우 정상적 상태를 기대하기 어렵다 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인가.

 

산행할 때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52병동, 신경병동은 비정상이 정상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래층 당뇨병동은 한 단계 위다. 오죽하면 간병 도우미 아줌마들이 기피하는 병동이란다. 결론을 말하자면 오래 살 일은 아니다. 실존을 용도와 동의어로 보면 실존의 의미가 없는 삶은 남에게 폐해를 주는 삶이다.

 

4.동반시

나와 함께 시집을 냈으니 시인의 말을 붙인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2집도 같은 시기에 나온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 둘이 번갈아가며 동반시를 내놓아도 거칠 것이 없으니 반갑기 그지 없다. 적어도 301회 산행의 감격은 각별하다. 산우 모두에게 고맙다. 산우들의 가호 덕분이다. 구사일생, 덤으로 살게 된 사람이므로 산우들에게 더 좋을 일을 할 것이 있을 것이다. .

 

정신은 침몰하지 않는다 / 김용우

 

먼 기억은 가끔

할 말을 잃어버릴 때 있지

다만 앞서온 옛날에게 잠시

자리를 내어주는 따뜻한 정신

생각은 가라않는 법 없이 살아나지

진실을 지키려는 혼이 있어

정신은 침몰하지 않는다

 

늘 위로는 자주

촛불을 켜고 대 낮임을 나중에 알지

단지 마음의 비옷에게 전하는 우산

어깨를 물들이는 공감의 포용

가슴은 젖지 않고 마르지 않는 사연

함께 이어진 존재의 밧줄 있어

정신은 침몰하지 않는다

 

긴 인연은 순간

캄캄한 터널에 갇힐 때 있지

오직 통과하여야 할 지상의 구치소

흔들어 바로 세워야 하는 망각의 통증

울타리는 넘어져도 경계선은 제자리

풀어야 할 꼬임은 명분이 있어

정신은 침몰하지 않는다

 

2017. 1. 6.

詩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