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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의자 위의 편지 / 도봉별곡

의자 위의 편지 / 도봉별곡

 

 

 

낡은 신은 이미 죽었으니

가슴 속에 신이 새로 탄생한다면

성지가 따로 있던가

항상 길 위를 떠돌다가

먼 길 돌아와 앉은 안락의자

 

죽음을 재촉하는

발신자 없는 편지는 잔뜩 쌓여있는데

안락의자에 앉아 죽으면 안락사가 된다던

옛 시인의 말이 생각나면 바보가 되어

울컥하는 심사 뒤틀려 편지를 뜯을 생각 잊은 채

다시 길 떠날 생각에 희망은 잠시 회생한다

 

결단코

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나는

허황한 전설 속으로 떠나며

삶은 자유로운 유희라는 생각을 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순례의 길에 선 채

태양은 무엇을 위한 희망이었던가

의심할 때 비로소 본능적으로

끝없는 암담함을 즐긴다

신은 암담함이었다는 것을

나는 신의 제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남겨놓은 의자 위에는

편지는 또 쌓일 테지만

그 중에 신이 보낸 편지 하나 있다면

마법과 주문 사이에서

그것만으로 만족하겠다

 

길과 의자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삶과 죽음의 가치를 보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는 흐린 날의 청춘이여

 

*제2시집 <시인의 농담>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