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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죄와 벌 / 도봉별곡

죄와 벌 / 도봉별곡

 

 

 

내 통증은 바람의 세기와 정비례하므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아파해야 하니 윤동주 님의 시는

한여름 마파람에 내리는

소낙비로 만든 지붕이 있는 집에 살고 싶은 내게는

운명적으로

기막히게 묵시론적이다

 

바람이 살랑거리던 날 오후

119차로 응급실에 실려 갈 때 가물거리던

의식은 언제 놓아버렸는지 모르겠고

아내의 고리눈에도 동요가 없던 나는 바람이 되어 달려온

두 딸의 눈물어린 눈에 비로소 시보다 좋은 술에 항복 선언을 했다

 

무조건 항복에도 불구하고

5, 6, 7 번 경추의 통증은 처음엔 오른 쪽 어깨 전체를 만 개의 바늘로 찌르다가

항복의 조건을 잘 지킨 대가로 어깨는 풀어주고

손끝의 통증을 가중시켜 긴 글을 쓰지 못하게 했고

술을 부르는 도봉산과의 교유를 막았고

하루에 1mm의 회복만을 허용했다지만 눈금으로 보이지 않으니

언제든지 재벌再罰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인과관계는 불가의 연기설과 꼭 닮아

명상과 선불교를 아는 척을 했다는 건방짐은 곧 죄라는 판결의 체벌로 나타나고

통찰능력도 없으면서

감히 1,000매의 철학과 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글을 세 개나 쓰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한 징벌의 결과이고

그렇게 쓰고 싶다면 아직 석삼년 준비를 더 단단히 하라는 것이고

시를 놔두고 왜 외도를 하느냐고

아직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름조차 모르는 ‘시의 신’이 내리는 엄중한 경고와 동시에 따뜻한 관심일 것이다

 

돈이 필요 없어진 나이에

돈이 드는가

돈이 벌리는가

돈으로 쓸 수 있는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가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있는가

쓰다가 생략하거나 줄여도 축약이라는 기법이라 봐줘서 괜찮고

이미지 하나쯤 떠올려 상상력으로 이야깃거리를 만들거나 혹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고는 쓰다가 행과 연을 가르면 운문시가 되고 그대로 놔두면 산문시가 되고

시는 우아한 미적 결과물이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우월 비교의 대상도 아니니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직유는 온전히 마음을 드러내서 좋고, 은유는 마음을 감출 수 있어 좋고, 환유법은 반은 드러내고 반은 감출 수 있어 좋고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주니 좋은 일 하는 거고

최후의 은유적 상징을 찾아내고는 절묘하게 구사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시를 놔두고

 

다만

당신만의 심장으로 당신만을 위하여

자유롭게 겸손한 언어로

검소하게 쓰시라

는 시를 놔두고

 

그러고 보니

악업의 원인과 결과라는 죄와 벌의 관계도 별 거 아니게 됐다

끊이지 않는 통증은 죽음보다 나은 것이고

묵시록은 어두워서 불가지론보다 솔직하지 못하다

 

 

*불가지론不可知論 : 우주의 기원, 신의 존재, 선업과 악업의 결과에 대한 증명의 불가를 인정하고 그 부분은 종교에 맡기자는 주장이며 무신론 쪽에 조금 치우쳐 있다.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쪽에 존재증명의 책임이 있다는 논리학적 주장을 폄.

*묵시록黙示錄 : 요한계시록. 신약의 마지막인 스물일곱째 권. 요한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기원후 90년 이후에 집필되었다. 사도 요한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서 썼다고 전하며, 예수의 재림과 천국의 도래 및 로마의 멸망 따위를 상징적으로 예언하였다. 고도로 상징적인 성서로서, 세상종말에 다가올 일들과, 교회와 악의 투쟁이 그 중심주제이다. 다가올 일들에 대한 환시들에 초점을 맞추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했던 위기의 시대에 관한 경고들을 담고 있으나 그리스도교회에서는 그것을 예수의 궁극적인 승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해석한다.

 

*제2시집 <시인의 농담>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