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연성과 가변성의 관계/ 보편적 인과의 법칙과 업의 법칙의 관계/ Bruce R. Reichenbach, The law of karma and the principle of causation/ Philosophy East & West, 38-4(1988), pp. 399.
Ⅰ. 윤회설 이해의 방향
내세의 존재는 불교의 윤회설이 성립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그러므로 내세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는 한, 윤회설은 종교적 가설로서 선택적인 믿음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가설은 허구라고 간주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잠정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윤회설이 과학 만능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과학 문명의 시대인 현대에 이르러 이제 윤회설은 확실히 그 기반을 상실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현대의 과학으로도 내세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이 같은 주장의 근거일 것이다. 이 경우의 현대 과학이란 물리 과학 또는 자연 과학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저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기 일쑤인 허구가 있다. 먼저 물리 과학은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 또 내세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이 곧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반론의 핵심은 내세의 존재 문제는 물리 과학의 취급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리 과학은 내세를 대상으로 취급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 과학을 모든 사실 판단의 최종적인 도구로 삼으려 한다. 이로 인해 내세의 존재는 믿고 싶은 대상이면서도 여전히 불신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내세의 존재가 사실이기를 바라는 희구는 생명과 삶에 대한 애착에서 기인하며, 그것을 불신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는 비경험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가치나 믿음의 선택에서는 비경험이라는 이유가 희구를 구속해 왔다. 비경험이 희구를 지배하는 구속력은 시대가 흐를수록, 과학이 발전할수록 더 강화되어 왔다.
그렇다고 하여 과학 문명의 사회에서는 내세에 대한 희구나 믿음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발달, 특히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사후 세계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노력, 사후 세계의 유사 체험, 환생에 관한 증언 등이 더욱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상을 시대적 상황이 빚은 일시적인 특수 현상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물리적 현상보다도 더 본질적인 관심사로서 진즉부터 인간 사회에 횡행해 왔던 것인데, 정보망과 언론 매체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자주 눈에 띄게 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환생에 관한 믿음과 증언이 티베트에서는 불교가 도입된 이래 의심의 대상이 아닌 사실로서 수긍되어 왔다. 다만 티베트가 중국 공산당 정권에 귀속된 이래, 티베트를 탈출한 달라이 라마의 망명 정부와 유민들의 활동이나 생활상을 통해 티베트 불교의 관습과 실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때마다 환생의 문제도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어 왔다. 이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의 존재를 입증하는 듯한 개인적 체험들은 우리의 주변에서도 기회만 주어지면 증언되기 일쑤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재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과학이 내세와 환생 등을 포괄하는 윤회설의 진상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내세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정신 과학 또는 행동 과학과 같은 다른 종류의 과학이 요청된다. 이 요청에 부합한 것으로서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연 불교의 윤회설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윤회설에서 불교 특유의 과학을 발견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전환은 먼저 윤회설을 비과학적인 허구라고 생각하는 선입관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이 같은 선입관은 과학의 의미와 기능을 협소하게 적용한 데서 기인한다.
과학은 현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 역사의 시초부터 가시적인 경험 세계에서 법칙성을 발견하여, 그 법칙성을 비가시적인 비경험의 세계로까지 적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발전해 왔다. 인간의 지성이 이 같은 방향을 추구해 간다면, 그것은 과학적 정신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불교가 과학적 정신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을 오히려 업보 윤회설1)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우선 필자는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가 된 한 과학도의 발언을 주목한다. 그의 발언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마티유 리카르가 본명인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프랑스의 과학도였으며, 티베트 불교의 승려로서 수행한 지 25년이 지났다. 그러한 그가 한때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바 있는 아버지와 주고 받은 대담이 비록 교양서로서 출판되기는 했지만, 그 내용은 매우 전문적인 토론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과학 교육, 특히 엄밀성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불교의 형이상학이나 수행의 접근 방법과 양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2) 그는 환생자를 찾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적인 행사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환생의 증거도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확인한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생의 기억과 같은 예외적인 현상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이 스스로 항상 고수하려고 애썼던 가장 객관적인 태도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3)
과학도였던 특별한 수행자의 발언은 윤회설에 대한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유용한 증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점이 그의 발언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윤회의 문제를 포함한 그의 불교 이해는 불교학의 정통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데 그의 발언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는 불교를 수행하는 정신의 노정에서 갖게 된 가장 심원한 확신이 환생자를 목격한 것과 같은 외적인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이고 명상적인 진리의 계속적인 확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4) 특히 윤회에 대해서 그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후에도 意識이 지속된다고 것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계시적인 교리에 속한다. 불교에서는 명상 체험의 차원에서 그것이 인식된다. 이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들이 불교에서는 부처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은 어떤 실체가 轉生, 즉 윤회한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윤회라는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 기능이나 지속성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다. 윤회를 계속 거친다는 것은 동일한 인격이 그렇게 지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조건으로 제약된 의식의 흐름이라는 뜻이다.5)
여기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無我 윤회이다.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는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실체적 원리가 없이 業에 의해 前生과 後生이 인과 관계로 지속되는 윤회이다. 이 같은 주장은 윤회에 관한 기존의 상식과 고정 관념을 허물어뜨린다. 기존의 상식이란,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사후에는 이 영혼이 육신을 빠져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육신을 갖게 됨으로써 재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는 영혼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이 형성된다. 많은 불교 신자들도 이 같은 상식과 고정 관념으로 윤회를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에서 인정하는 윤회가 아니다.
불교의 무아설은 영혼과 같은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무아설에 입각한 윤회설은 불교의 독특한 형이상학이다. 불교의 형이상학이 과학적 엄밀성과 양립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차적인 요인은 영혼 또는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아설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세의 존재에 대한 기존 과학의 한계를 지적했듯이, 영혼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으므로 영혼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데서 불교의 과학적 엄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과학적 엄밀성은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방법으로 佛說의 합리를 추구해 온 교리 연구의 전통6)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전통에서 業과 윤회는 항상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주제로서 취급되면서 합리 구축의 기본 대상으로 의식되어 있었다.
석가모니의 교설이 결집된 이래, 업과 윤회를 중심으로 추구해 온 합리 구축의 내용은 번잡함을 느낄 정도로 다양하지만, 그것이 正道로서 지향하여 근간을 형성해 온 것은 無我 윤회였다. 불교의 전통적 교학에서 윤회설은 무아 윤회의 노선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각양 각색의 해석과 탐구를 거쳐 왔다. 따라서 무아 윤회는 불교의 윤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요체가 된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한 바른 이해와 평가는 바로 이 무아 윤회를 성립시키는 논리에서, 그리고 무아 윤회와 인간의 이상적인 삶과의 부합 여부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무아 윤회의 성립 논리와 무아 윤회의 意義를 고찰하는 데서 드러나는 합리를 통해 업보 윤회설이 불교 과학으로서 재인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윤회의 기초적 논리
인간이 윤회한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것을 신뢰할 수 없는 난점을 누구나 한 두 가지는 지적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난점은 피상적이고 심정적인 것이다. 이것을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들이 윤회설에서 해명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난점으로 지적된다.
인간의 출생에는 무한한 異質性이 있는데, 윤회로써는 그 무한한 이질성을 납득하기 어렵다. 윤회에 전제된 의식과 기억을 갖는 자아가 현실적으로는 인정될 수 없다. 인격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기억의 연결성, 신체적 계속성, 심리적 계속성 등으로 보아 과거와 현재의 어떤 두 사람이 윤회에 의해 轉生된 본래의 한 인간임을 확증할 수 없다.7)
그러나 이러한 난점들이 모두 불교의 윤회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신체의 소멸 후에도 존속하는 영혼 또는 자아가 다른 신체를 형성하면서 재생을 반복한다고 주장하는 윤회설에 내재된 난점들이다. 그러한 자아가 없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교의 무아 윤회설이므로, 무아 윤회설이 추구하는 합리의 일면을 오히려 그 난점들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물론 무아 윤회의 관념으로써 그 난점들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서는 그 난점들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무아 윤회설로써 그 난점들을 극복하는 논리와 이론을 추구하고 구축해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번쇄한 이론과 현학이 출몰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속성을 간파한 현실적 당위성도 고려되어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의식하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출발한다. 의식과 행동이 곧 業이며, 윤회는 이 업의 인과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윤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업이란 감지할 수 있는 주체적 세계이고, 이성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대상의 세계는 아니다."8)라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교의 윤회설은 감지할 수 있는 주체적 세계와 이성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업의 논리로써 설명한다. 전자는 肉眼의 세계이고, 후자는 天眼의 세계라고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도 이성으로 이해가 가능한 언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 경우의 언어는 항상 유추되어야 할 사실을 상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삶이 현세로 그치지 않고 내세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라는 희구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는 문명의 시작과 함께 그 희구의 증표들을 남겨 왔다. 그러나 내세의 존재는 그처럼 뿌리 깊은 염원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인간에게는 대표적인 半信 半疑의 대상이었다.
『디가 니카야』(長部)라고 불리는 초기 불전에서 전하는 일련의 대화9)를 보면, 내세의 존재와 재생에 대한 회의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공감할 수 있다. 여기서 파야시(Payasi)라는 왕은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 중생들이 변화하여 재생하는 일은 존재한다.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인 異熟은 존재한다."10)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이 주장이 해결해야 할 의문을 토로한다. 그가 토로한 의문의 요지는 "불교인은 10善을 행하면 사후에 生天한다고 주장하지만, 天界에 태어났던 자가 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천계에 태어났던 일을 보고했다든가 使者를 이 세상으로 파견했다든가 하는 일은 없지 않는가?"11)라는 것이다.
매우 직설적으로 토로된 이 의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는 소위 生天說을 수용하여 내세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교의가 처음부터 의혹의 대상으로서 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불교의 외부에서는 내세의 존재와 인과응보의 논리를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무리들이 저마다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沙門果經12)이라는 불전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부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유물론자의 주장은 흔히 말하는 과학적 사고에 부합한 것으로서, 대부분의 현대인들도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처음부터 내세에 대한 믿음을 중시하고 권장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13)
그렇다면 여기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불교는 생천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수용에는 생천설을 부정하는 반론들에 대한 대응도 예견되어 있다. 이 불교측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 앞에서 언급한 파야시와의 대담이다. 파야시가 제기한 의문에 대한 불교측의 반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의 기초적이면서 포괄적인 논리이다.
윤회를 인정하는 기초적인 논리는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 중생들이 변화하여 재생하는 일은 존재한다.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인 異熟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윤회를 인정하는 포괄적인 논리는 파야시의 반문에 대한 답변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포괄적인 논리를 구성하는 중심 개념이 肉眼과 天眼이다.
생천설에 대한 반문의 요점은 생천을 경험한 자가 인간 세계에 나타나 생천이 사실임을 입증한 사례가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쿠마라 캇사파는 간접적인 비유로써 답변한다.
그는 먼저 "옥외의 변소에 빠진 사람을 구조해서 여러 가지로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다시 옥외의 변소에 떨어지려고 하겠는가?"라는 반문으로 "그렇지는 않다."라는 대답을 유도하고 나서, "천계에 비교하면 인간계는 옥외의 변소처럼 대단히 더러운 장소이다. 따라서 한번 천계에 태어난 자가 다시 더러운 인간계로 돌아오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라고 파야시의 반문에 답변한다.14) 이 같은 답변의 취지는 인간계를 초월해 있는 내세의 존재를 인간계에서 통용되는 발상이나 방식으로 입증한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한 데 있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파야시가 이 비유적인 설명에는 승복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내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그것을 부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로 내세의 존재를 부정한다.15)
5戒를 준수하고서 죽음에 임박한 친구에게, 불교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5계를 지키면 사후에 도리천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려 주도록 요청했다. 그 사람은 죽었는데도 아직 그 사람으로부터의 보고를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세계는 없다.
이에 대한 불교측의 반론의 요지는 "도리천의 하루는 인간계의 100년에 상당한다. 생천한 자가 도리천에서 이삼일만 머물러도 그 생천한 자가 인간계로 돌아오는 시기는 대단히 늦게 된다."라는 것이다. 이 반론의 취지도 앞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유한한 수명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한 개인이 현세에서 내세의 존재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파야시의 최종적인 반문은 도리천이 있다는 등으로 알려 주는 사람도 없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반문에 대한 쿠마라 캇사파의 답변은 생천의 입증에 관한 불교측의 기본 입장을 반영한다. 인간계를 초월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능력은 색깔에 대한 맹인의 인식 능력과 같다는 비유를 구사하는 이 답변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도리천이 없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은 선천적인 맹인이 색깔의 차이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세계는 이 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天眼에 의해서만 도리천의 세계를 알 수 있으며, 중생들이 변화하여 재생함을 알 수 있다.
왕이여, 참으로 그러한 다른 세계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이 육안으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왕이여, 숲속에서 음성과 소음이 거의 없는, 숲의 고독하고 격리되고 한적한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사문이나 바라문들, 거기서 굳건하고 열렬하고 초연하게 거주하면서 天眼을 정화하고 있는 그들은 청정하고 초인간적인 天眼으로 바로 그 다른 세계와 변화하여 재생한 중생들을 봅니다.16)
여기서 肉眼과 天眼의 대비는 우선 물리 과학과 정신 과학의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구체적으로는 肉眼이 감각적 인식력, 인습적 고정 관념에 의한 분별력을 의미하는 데 반해, 天眼은 초감각적 인식력, 기존의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직관력을 의미한다.
다만 天眼(dibba-cakkhu)이라는 표현 자체는 '초인간적'(atikkantam?nusaka)이라는 수식어가 명시하듯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와 인식의 영역을 초월할 수 있는 특수한 인식 능력임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생천설의 타당성을 여전히 수긍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초인간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능력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天眼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리킨다는 점이 인간 세계에는 그런 능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天眼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 세계에서 특별한 노력의 결과로서 획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삼고 있다. 따라서 天眼을 입증의 근거로 삼는 생천설의 타당성은 天眼이라는 개념이 함축하고 지시하는 내용의 타당성에 의해 결정된다.
우선 天眼을 신비 체험의 한 현상으로 간주하더라도 天眼이라는 입증의 근거가 타당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신비 체험은 순전한 허구나 환상이 아니라 '선명한 각성 상태'라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즉 많은 신비가들이 보고한 체험들을 조사해 보면, 신비적 체험은 '몽롱한' 것이거나 '혼동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감관에 의한 직접적 지각의 모든 속성들을 지닌 선명한 각성 상태로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17)
불교에서 天眼은 삼매 또는 禪定이라는 최고 차원의 명료한 의식 상태에서만 저절로 발휘되는 능력이며, 天眼으로 生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불교 수행론의 논리적 귀결인 동시에 부수적인 능력으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天眼이라는 개념은 '초인간적'이라는 수식어에 앞서 항상 '청정'이라는 조건으로 한정된다. 『맛지마 니카야』(中部)에는 생천설과 결부된 天眼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다음과 같은 마음의 삼매를 획득한다. 즉 마음이 집중되면, 그는 청정하고 초인간적인 天眼으로, 어떤 사람이 ... 正見을 갖추고서 육신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善處인 天界에 태어남을 볼 수 있다.18)
나는 청정하고 초인간적인 天眼으로 중생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태어나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중생들이 그 業에 따라 열등하거나 우수하고, 수려하거나 추하고, 善處로 가거나 惡處로 간다는 것을 안다.19)
肉眼과 天眼의 대비로써 생천을 입증하는 논리는 윤회의 기초적인 논리를 내포하고 지향하면서, 세간의 통념과 사실로써 초세간적 사실을 납득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인 것이다. 이 포괄적인 논리로써 천명하고 있는 진실은 확연하고 간명하다.
먼저 天眼이란 '청정한 인식'이다. 이것은 불순한 온갖 관념과 심리가 제어된 상태인 삼매에서 저절로 열리는 지적 능력이다. 그리고 생천설을 논하는 이 경우에 청정한 인식의 대상은 그 대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기초적 논리, 즉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 중생들이 변화하여 재생하는 일은 존재한다.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인 異熟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이다. 이 명제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승복하는 데서 天眼은 열린다. 또 天眼을 획득한다는 것은 이 명제를 이해하여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제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명제를 성립시키는 실제 논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 명제를 해체하여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인 異熟은 존재한다. 異熟이란 중생들이 변화하여 재생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재생하는 장소인 다른 세계는 존재한다."
재구성된 이 논리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異熟이라는 개념이다. 異熟은 불교의 업보 윤회설을 성립시키는 논리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異熟이라는 개념의 타당성이 업보 윤회의 타당성, 특히 무아 윤회의 타당성을 결정하며, 불교 특유의 윤회설은 이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Ⅲ. 異熟의 논리
윤회라는 말은 그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輪廻 轉生'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轉生이란 '流轉 生死'의 약칭이지만, 流轉과 生死가 각각 輪廻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윤회, 轉生, 流轉, 生死 등은 字義에 상위가 있더라도 불전에서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굳이 구별하여 字義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20) 往生이라는 말도 그 본래의 의미는 流轉이나 윤회이다.21) 이러한 말들이 공통적으로 내포하는 의미는 끊임없이 맴돌며 흘러가는 물줄기의 진행처럼, 삶과 죽음의 반복이 하나의 흐름처럼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이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윤회를 다음과 같이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왕이여,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바로 이 세상에서 죽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납니다. 저 세상에서 태어난 자는 바로 저 세상에서 죽습니다. 저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납니다. 대왕이여, 윤회란 분명히 그와 같은 것입니다.22)
그러나 윤회는 業(karman)과 결부될 때 비로소 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업은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윤회설을 대동한다. 그러므로 업의 법칙이 윤회설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일찍이 『增支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비구들이여, 무릇 業은 탐욕에 의해 만들어지고, 탐욕으로부터 발동하고, 탐욕을 인연으로 하고, 탐욕이 모여 일어나는 것인데, 그 업은 그것의 자체가 발생하는 그곳에서 異熟한다. [업을 지은] 그는 그 업이 이숙하는 곳에서, 즉 현세에서 혹은 다음 세상에서 혹은 그 다음 차례의 세상에서 그 업의 異熟(과보)을 感受한다.23)
이 설법은 증오(瞋)와 무지(癡)에 의해서도 업이 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발생하고 이숙한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이 설법의 요점은 3毒이라고 불리는 근본 번뇌24)인 貪.瞋.癡에 의해 형성된 업이 윤회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의하면, 異熟이 곧 업의 법칙임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위의 經文은 인간이 업의 이숙으로 성립된 존재임을 시사한다.25)
업과 윤회의 사상은 불교가 성립하기 이전에 이미 인도 사회에서 통용되어 있었다. 이것이 불교에 도입되어 불교 특유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업의 관념이 달라진 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업 관념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도의 전통적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서로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인도의 고대 사상, 즉 바라문교에서 유래하여 후대의 힌두교에서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업의 사상이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한 후에 다음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받는가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지은 행위, 즉 업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고 방식이다. 그리고 輪廻 轉生이란 인간은 단지 이 세상만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소멸한 후에 이 세상에서 지은 행위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다르게 태어난다는 사고 방식이다.
업과 윤회에 관한 이 기본적인 사고 방식은 불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도의 정통 사상에서는 자아(我, 아트만)라는 실체가 육신의 소멸 후에도 삶을 이어받는 자, 즉 윤회의 주체로서 고려되어 있다. 이 경우의 자아는 흔히 말하는 영혼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자아 즉 영혼이 업에 의해 삶의 양태를 바꾸어 간다는 윤회설은 현재의 인생을 내세를 위한 임시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오로지 보다 좋은 내세를 청원하는 생활 방도가 된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현재세도 과거세의 업에 의한 것이라는 체념을 낳아, 점차 인도 사회의 고질적인 계급 제도를 정착시키고 고정시켜 갔다고 평가된다.26)
불교의 윤회설이 위와 같은 기존의 윤회설과 다른 점은 자아나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알려져 있다.27) 이 차이에 따라 힌두교와 불교의 윤회설을 각각 '有我 윤회'와 '無我 윤회'라는 개념으로써 대비할 수 있다.28) 그렇다면 불교 윤회설의 특수성은 자아나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의 성립을 인정하는 논리에 있다. 그래서 불교 윤회설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되는 것은 윤회를 성립시키는 논리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대해 제일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영혼과 같은 주체가 없다면 무엇에 의해 윤회가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측의 통념은 5蘊에 의해 윤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만, 『구사론』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번뇌와 업'에 의해 윤회가 이루어진다고 해명한다. 이 해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앞에서 소개한 『증지부』의 설법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번뇌와 업이 그 의문에 대한 모범 답안으로 간주되며, 번뇌와 업은 윤회하는 5온의 실질적인 의미가 된다.
蘊들은 실로 찰나적인 것이고, 그것들에게 능력은 없다. '번뇌와 業으로 가득찬 것'(蘊)으로서 번뇌일 뿐인 것이 中有라고 불리는 相續에 의해 母胎로 들어간다. ... 따라서 이것은 아트만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성립된다. 蘊들의 상속은 번뇌와 業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母胎 속으로 변화해 들어간다는 것이다.29)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의 요점은 아트만(我)이라고 불리는 실체가 영혼의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아도 번뇌와 업에 의해서 윤회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회를 일으키는 번뇌와 업을 총괄하여 말할 경우에는 '업'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표현되어 왔었다. 윤회의 주요 원인은 업이지만, 이 업을 더 분별하면 '번뇌(惑)와 업'이 된다는 것이 『구사론』의 설명이다.30) 따라서 불교 윤회설의 골자는 "영혼은 없이 업에 의해서만 윤회한다."라는 것이다. 이 점을 일찍이 잡아함경에서는 "업의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유업보 무작자有業報 無作者)"라고 표명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윤회설의 핵심은 업의 과보, 즉 業報가 성립하는 논리에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 윤회설의 성립 근거는 업보의 논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업보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異熟이다.
앞에서 고찰한 윤회의 기초적 논리에서 異熟은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라는 표현으로31) 그 의미가 명시되었다. 이에 의하면 異熟이란 윤회에서의 업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개념이다. 이숙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는 『구사론』에서 '다르게 성숙하는 것'이라고 풀이되어 있지만,32) 이 말이 지닌 인과론적인 의미는 異熟因과 異熟果를 고려할 때라야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숙이란 원인이 되는 善.惡의 행위에 의해 나중에 苦.樂의 결과를 감수한다고 하는 인과법을 가리킨다. 이때 원인이 되는 것을 이숙인이라고 하고 결과가 되는 것을 이숙과라고 한다. 이것을 이숙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인과는 성질이 다른 결과를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선업이나 악업이라는 원인은 미래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결과, 즉 無記인 결과를 이끌기 때문에,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결과에 대해 선업이나 악업을 이숙인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 점을 일컬어 "원인은 선악이지만, 결과는 무기"(因是善惡 果是無記)라고 한다.33)
윤회를 성립시키는 인과법으로서의 이숙이 이루어지는 논리는 '善因樂果 惡因苦果'라고 단적으로 표현된다. 선업은 樂을 초래하고 악업은 苦를 초래한다는 것이 이숙의 논리이다. 여기서 樂과 苦는 선과 악처럼 과보를 초래하는 성질을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樂이나 苦를 無記라고 한다. 無記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기 때문에 선악의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 이처럼 業果인 고락은 業因인 선악과는 그 성질이 다르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이숙, 즉 '원인과 결과가 다르게 성숙하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다만 苦樂을 초래하는 원인, 즉 이숙인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善이거나 惡이다. 이 점을 『구사론』 제2장 根品의 제54송에서는 "이숙인은 오직 有漏로서의 不淨(不善)과 善이다."34)라고 설한다. 有漏란 번뇌가 아직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번뇌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 즉 無漏法은 당연히 無記처럼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無記와 無漏가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 이유는 동일하지 않다. 『구사론』은 그 이유를 설득력 있는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왜 無記法은 이숙을 일으키지 않는가?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부패한 씨앗과 같다. 왜 無漏法은 [이숙을 일으키지 않는가?] 渴愛에 젖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견실하지만 [수분으로] 젖어 있지 않은 씨앗과 같다.35)
이 설명에 의하면, 苦樂이라는 이숙과는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소진된 상태에 있고, 無漏法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은 갖추고 있더라도 아예 과보를 초래할 조건에 싸여 있지 않다. 이숙의 인과 논리를 이처럼 파악한 것은 합리적인 행동 과학을 제시하는 동시에 또 그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無漏法은 불교의 修道論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윤리적 적용에서는 행위 즉 업의 순수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無記 자체가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파악한 것은 업에 의한 자기 개선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업의 인과 법칙이 "선업은 선을 초래하고 악업은 악을 초래한다."(善因善果 惡因惡果)는 방식으로만 작용한다면, 과보로서의 선과 악은 다시 각각 선과 악의 과보를 초래할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므로, 행위자의 미래에는 改變의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된다.36) 이 같은 업의 논리는 숙명론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힌두교의 業의 사상은 그와 같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으로 숙명론과 결부되기 쉬웠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苦樂이라는 이숙과의 성질은 無記이며, 無記 자체는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라는 이숙의 논리는 과거의 어떤 행위가 영원히 그 행위자의 미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불합리를 해소하고, 숙명론을 부정한다. 행위의 합리적인 인과를 고려할 때, 어떤 악행이 苦라는 과보를 초래했다면, 그렇게 한번 초래된 것으로 다시는 苦果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악행자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전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숙의 논리는 숙명론을 파기하고,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개선함으로써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데서 성립된다. 『구사론』에서는 이 사실이 더욱 확실하게 인식되어 있다. 이숙과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으로서 제2장 根品 제57송에서 "이숙은 無記인 法이다."라고 설하고, 바수반두(世親)는 여기서 말하는 무기가 無覆 無記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37) 무부 무기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성스런 길을 덮거나 가로막지 않으며, 善도 아니고 不善(惡)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이숙과를 무기 또는 무부 무기로 파악한 것은 업이 인간의 미래를 숙명론적으로 구속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하나의 업은 그 과보를 초래하면, 재차 같은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異熟이 이루어지고 나면, 거기에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려 있는 것이다.38) 하나의 업이 계속 같은 과보를 초래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숱하게 지은 업들 중에서 나머지 다른 업의 과보가 초래되고 있는 것을 그렇게 착각한 것일 뿐이다.
이상과 같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없이 異熟으로써 성립되는 무아 윤회이다. 이숙은 업이 윤회를 진행하는 논리인 동시에 윤회 성립의 근거이다. 이 논리의 주역은 업이다. 이 업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업이 남기는 습관적인 기운, 즉 업의 習氣이다. 스티라마티(安慧)는 『유식 30송』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의 層'(3界)과 '나아가는 곳'(5趣)과 '출생의 근원'(4生)이 되는 모든 것들에서 선하거나 악한 업이 결실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異熟이다.39)
異熟이란 선하거나 악한 업의 習氣가 결실을 맺음으로써, 마치 끌어 모으듯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40)
대승 불교의 唯識學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업의 習氣'로서의 이숙을 알라야識(Alaya-vijñana) 즉 阿賴耶識이라고 부르며,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사용하여 種子라고도 부르는 것이다.41) 이처럼 유식학은 알라야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써 윤회가 바로 그 이숙으로써 성립된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異熟으로써 성립되는 윤회는 무아 윤회이다. 유식학이 알라야식이나 종자라는 개념으로써 轉生을 설명한다는 사실은, 불교의 윤회설이 有我 윤회쪽으로 선회한 듯한 오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회에 관해서는 알라야식이나 종자가 명백히 지시하는 실질적인 의미가 異熟이라는 점에서, 유식학의 기본 입장 역시 무아 윤회를 고수한다. 종자라는 개념이 그러하듯이, 알라야식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불교가 무아 윤회설을 고수한 데는 그 논리를 떠나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무아 윤회가 불교 특유의 목적42)에 부합한다는 점 외에도 인간의 가치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Ⅳ. 업보 윤회의 意義
1. 업보의 필연성
업과 윤회에 관한 불교의 이론이 아무리 치밀하고 정교하더라도,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관을 객관적 사실에 의해 검증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내세는 객관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직접적인 검증을 적용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하나의 이론이나 사상의 타당성과 신빙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해 온 것으로는 객관적 사실뿐만 아니라 당위적 사실도 있기 때문이다.
당위적 사실은 믿을 수밖에 없고 믿어야만 하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공통의 경험이 요구하는 합리성에 부합함으로써 믿어야 할 사실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믿음은 공통의 경험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방적이거나 강요된 믿음 또는 교조적인 믿음과는 다르다.
異熟에 의해 성립되는 윤회는 대표적인 당위적 사실에 속한다. 그것이 불교 특유의 사상이라고 해서 불교에만 국한되는 당위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특히 業報, 즉 업의 인과법43)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당위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가 "비구들이여, 업의 異熟은 불가사의이고, 思念해야 할 것은 아니다. 이것을 사념하고 있는 자는 광기와 고뇌에 빠지게 될 것이다."44)라고 훈계한 것은 업보 윤회를 당위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훈계는 업보가 객관적 사실로서 추론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업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45) 그러나 업보를 믿으라고 강조하는 데에는 그것을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당위성이 전제되어 있다.
인간 사회에서 축적된 경험은 '善因樂果 惡因苦果'라는 행위의 법칙에 객관성을 스스로 부여하며, 아울러 그 법칙을 사실로서 요구한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명하다. 衆賢이 『順正理論』에서 피력하고 있듯이, "善因樂果 惡因苦果가 아니라면, 持戒도 破戒도 구별이 없게 되고, 사람들은 살생을 행하고, 도둑질을 행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善因樂果 惡因苦果'이지 않으면 안 된다."46) 그러므로 그 행위의 법칙은 우선 윤리적 규범으로서의 당위성을 지닌다.
업보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삶에서 합리성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업의 인과법은 당위적 사실로서 인정될 수 없다. 객관적 사실로서 입증되지 않은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당위성은 공통의 경험에 부합하는 합리성에 의해 부여된다. 업의 인과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요청으로서의 합리성이 인정되지만, 이 합리성은 개인과 사회의 모든 행위에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면에서 업의 인과법은 객관적 사실로 믿을 만한 합리성을 지닌다.47)
첫째, 양심의 만족과 가책 : 선을 행하면 그 사람 자신이 양심적으로 만족하고, 악을 행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실이다.
둘째, 사회적인 상벌 : 선한 일을 하면 사회나 국가로부터 칭찬을 받거나 표창되고, 악한 일을 하면 제재나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조직과 질서가 잘 갖추어져 있는 사회에서 당연한 사실이다.
셋째, 心身 환경과의 유기적인 조화와 부조화 : 자기의 심신이나 주변 사회의 향상 발전에 유익한 선행은, 자기의 심신을 발전 조화시켜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회 환경과 조화하여 사회 환경을 진전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해 업의 인과법과 같은 행위의 법칙은 종교적 또는 도덕적 요청으로서 당위적 사실이 된다. 특히 불교는 업보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법칙을 객관화하는 데 주력하여 업보 윤회설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보의 필연성을 강조할 때, 이 필연성 또는 불가피성은 원인이 반드시 결과를 초래한다는 대원칙을 천명하는 것일 뿐이며, 이 대원칙이 모든 업에 대해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업은 다른 조건의 영향이 없을 경우,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업보의 필연성이지만, 결과를 초래하는 業力이 다른 조건이나 그 업의 성격에 따라 弱化되거나 소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불교에서는 인정한다.
2. 업보의 가변성
업의 약화나 소멸도 업보의 필연성이라는 대원칙에 어긋나거나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으로는 兩者가 모순하는 것처럼 간주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더 복합적이고 세밀한 교학적 고찰이 필요하다.48) 여기서 간략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불교의 업보 윤회설은 업보의 필연성과 업의 약화나 소멸을 함께 인정함으로써 더욱 합리성을 확보한다는 사실이다.
초기 불교의 설법에 의하면, 일단 지어진 업은 도중에 그 과보를 초래하지 않고 소멸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업보의 대원칙이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 초기 불교에서는 회개, 죄의 고백, 8聖道나 7覺支나 4無量心의 修習, 출가자로서의 수행에 의해 업을 소멸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설한다.49)
상반된 사고가 공존하는 듯한 이 설법은 업보의 대원칙이 파기된 것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재고찰하면, 여기서는 모순보다도 합리성이 발견된다. 업보의 대원칙이 유지되고 있다면, 업의 소멸이 가능하다고 설하는 것은, 업이 그 작용하는 양상에 따라 다양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업의 소멸은 다른 업에 영향을 미치는 업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가능하다. 그러므로 회개, 8성도의 수습 등은 다른 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한 업이라고 이해된다.
아비달마라고 불리는 교리 연구에서 업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그 종류도 세분한 것은, 업의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면서 업의 인과법에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다. 說一切有部의 업론은 이 노력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남방 불교의 上座部에서도 같은 노력을 쏟았다. 특히 이 상좌부에서는 업을 그 異熟에 대한 작용에 의해 令生業, 支持業, 妨害業, 破損業이라는 4종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에서 파손업이란 다른 업의 결과를 파손하고 자신의 결과를 낳게 하는 업이다.50) 업의 소멸은 이 파손업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아비달마의 업론에서 업은 기본적으로 定業과 不定業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부정업은 業果의 전환 가능성을 내포한다. 업과의 전환이란 받아야 할 업과를 받지 않는다든가 다른 업과를 받는 것으로 받아야 할 업과에 代用하는 것이다. 부정업에는 초래될 과보와 시기에 따른 구분이 있으며, 『대비바사론』의 설명에 의하면51) 과보가 정해지지 않은 업인 異熟 不定業은 일반적으로 전환이 가능하지만, 정업과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부정업은 전환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譬喩者로 불리는 일파는 5無間業을 포함한 모든 업은 전환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52)
한편 『成實論』에서는53) 고의로 지은 업 또는 작심하여 지은 업인 故作業마저도 眞智를 얻을 때에는 이숙을 받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만약 업에 대한 異熟 즉 業果가 획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해탈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으며, 眞智에 의해 이숙을 받지 않는 것은 마치 타버린 종자로부터는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54) 故作業은 이숙을 받지만, 不故作業은 이숙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업론의 통념이라는 점에서, 『성실론』의 이 같은 해석은 파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自業自得을 거부하고, 악한 세계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등의 고통을 감수하는 보살행을 고려하면, 『성실론』의 해석이 결코 파격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승 불교의 보살행은 업보 윤회의 법칙의 일부를 파기한 혁신적인 가치관의 반영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업보 윤회의 법칙을 업보의 필연성에 국한한 경우에 통용되는 이해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를 적용하면, 보살행은 업의 인과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보살행은 업보 윤회의 합리성을 오히려 더욱 고양하고 확대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보살의 특징은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면서도 윤회를 감수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보살도 업을 짓는 자이지만, 그 업은 범부의 의식과는 다른 차원의 업이다. 보살의 윤회에서 중요한 것은 誓願에 의해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경계에 태어난다는 점과, 廻向에 의해 자신의 선업을 업의 인과 관계를 떠나 다른 목적, 즉 자기와 타인의 깨달음을 위해 돌린다는 점이다.55) 이 점은 보살의 異熟에서 주요한 업이 서원과 회향임을 가리킨다. 보살은 서원과 회향이라는 업으로써 필연적인 과보를 가변적인 과보로 전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보살은 업보의 필연성에 의해 선한 세계에 태어나야 하지만, 서원으로써 악한 세계에 태어나며, 자기가 받아야 할 과보를 회향에 의해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의 업 개념으로 이해하면, 여기서 서원은 자기에게 초래될 業果를 파기한다는 점에서 破損業의 일종이며, 회향은 서원의 고유한 업력이 작용하는 것으로서 보살의 선한 의지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支持業의 일종이다. 특히 회향은 自業自得의 주체로서의 영원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 윤회에서만 업의 인과법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
대승 불교에서는 一乘 사상의 전개에 따라, 이제까지는 윤회로부터 해탈하여 완전한 열반(寂滅)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되었던 聲聞의 아라한과 독각이 아직 無上菩提를 얻지 않은 자이며 수행 도중에 있는 자로서의 보살이라고 간주된다.56) 이러한 보살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불가사의하게 변화된 삶과 죽음, 즉 不思議變易生死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不思議變易生死도 표면적으로는 업보의 법칙을 파기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大乘莊嚴經論』에 의하면 회향, 서원, 혹은 '삼매의 힘에 의한 변화신'이 不思議變易生死를 가능하게 한다. 『勝만經』에서는 이러한 윤회의 방식이 업보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님을 명시하기 위해 無明住地라는 특별한 업 개념을 도입한다. 無明住地는 부처의 경지에서만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미세한 無明을 의미하며, 번뇌가 없는 상태의 업, 즉 無漏業이다. 『승만경』에서는 바로 이 '무명주지'라는 무루업에 의해 不思議變易生死가 이루어진다고 설한다.57) 한편 『成唯識論』은 不思議變易生死라는 관념을 업론의 구조 속에 정립시켜, 그것을 '殊勝하고 미세한 異熟果'라고 정의하며, 의지와 願에 따라 성립되기 때문이라고 하여 意成身이라고 명명한다.58)
3. 업보의 필연성과 가변성의 整合
이상과 같이 불교 사상의 전개 과정에서 업보의 필연성과 업보의 가변성이라는 관념은 공존해 왔다. 양자는 모순되는 듯하지만, 그 역할에서는 업보 윤회의 논리를 보완하고 구축해 왔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의 공존은 업론의 整合性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업론의 정합성과 합리성을 추구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특히 업보의 가변성에 대한 經論의 고찰은 거시적으로는 불교 자체의 지향에 부합하고, 미시적으로는 업 자체의 성격에 부합한 것으로서, 업 이해의 당연한 귀결이다.
업의 일반적인 의미는 행위이지만, 교학의 전통에서는 업의 본질을 思라고 파악한다. 이 같은 파악은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意業 즉 思業이 가장 중시되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비구들이여, 나는 思를 業이라고 설한다. 생각하고 나서 몸(身)과 말(語)로써 업을 짓는 것이다."59)라는 『增支部』의 언명도 그 같은 파악을 뒷받침한다. 意業을 가장 중시했다는 것은 업의 본질을 思에서 찾은 것이라고 해석되며, 이 점에서 석가모니의 업론은 일반적으로 결과론이 아니라 動機論이라고 이해된다.60) 思란 행위자의 내면에서 발동하는 意思, 의지, 의향, 의도 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부파 중의 經量部는 思가 업의 본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견해가 통념을 형성하였지만, 남방 상좌부는 이 같은 이해를 더욱 철저하게 고수한다.
남방 상좌부에서는 내면의 의사가 표면적인 身業과 語業으로서 현출한 양태(色)를 각각 身表와 語表라고 부른다. 여기서 表는 행위자가 상대에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신체를 움직이는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그 행위 목적을 자신의 의사(意)에 의해 이해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행위자와 행위를 받는 자가 모두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의도'에서 업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라고 이해된다.61)
업의 본질이 思에 있다는 사실은 업보의 논리의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업보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업보를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업의 본질인 思가 異熟의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점에서 모순 없이 성립한다. 업보의 필연성이 적용되지 않는 보살의 不思議變易生死가 서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곧 보살의 선한 의지(思)에 의해 업과가 성립된다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아 윤회의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의지에 의한 자기의 개선이다. 이 지향은 업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와 부합하며, 인간의 윤리적 요청에도 부합한다. 이 점에서 "업과는 불가피하다라고 말하든 업과는 소멸한다라고 말하든 모두 윤리적 요청이고 인륜의 확립을 위해서는 양자 모두 진리이어야 한다."62)라고 말하는 것으로, 불교의 무아 윤회가 당위적 사실임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端言은 무아 윤회의 의의를 표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무아 윤회의 진정한 의의는 당위적 사실성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위적 사실로서의 합리성을 부여하기 위한 업보의 논리를 보강하여 정립해 왔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Ⅴ. 윤회설에 대한 재인식
해탈 또는 열반은 윤회의 반대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윤회를 극복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같은 진리관에 의해서도 업보 윤회설이 궁극의 진리가 아닌 세속적 차원의 진리라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업보 윤회설의 교리적 위상의 格下를 허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업보 윤회의 관념이 교리의 전반에 걸쳐 스며 있지 않거나 취급되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세속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출세간으로 진입하는 일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업보 윤회설은 출세간적 진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그 교리적 위상과 가치는 격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불가분한 관계는 "원시 불교에서는 업의 사상은 세간적 입장의 교설로서 받아들여진 것이지만, 그것은 불교 본래의 출세간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거기에 진입시키기 위한 前 단계로서 설해졌다."63)라는 설명에도 잘 지적되어 있다. 더욱이 다음과 같은 설명에 의하면, 세속적 진리인 업보 윤회설이 출세간적 진리인 緣起說과 직결된 것으로 인식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업보설은 불교의 第一義諦는 아니지만, 아직 제일의제를 이해할 수 없는 자를 위해 거기에 들어가는 전제로서 세속적 입장에서 채용된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의 入滅 후 부파 불교의 시대에 이르면, 업보설이 불교의 第一義說인 양 간주되어 연기설도 업보설로서 설명하게 되었다.64)
따라서 "일반적인 상식으로서의 통속적인 業說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입장의 교설로서 위치가 부여되기 때문에, 그것은 불교의 중심 교리일 수는 없다."65)라는 인식이 특히 무아 윤회를 지탱하는 업보설에는 타당하지 않다. 업보 윤회설이 세속적 입장의 교설이라는 점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불교의 중심 교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가 대중을 지도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궁극의 진리보다 우선하여 궁극의 진리를 이끄는 교설이다.
여러 가지 비유로써 업의 인과를 설하는 『디비야 아바다나』에서는 윤회설로써 12因緣을 각성하게 하려는 일화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윤회의 다섯 세계를 그림으로 묘사하는 5趣輪을 승원의 입구에 그리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면서, 중생이 죽어서 轉生하는 모습 옆에는 12인연을 시작과 끝의 양쪽에서 관찰하는 방법을 잘 볼 수 있게 하도록 당부한다. 아울러 모든 것이 무상함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속에서 벗어남을 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노력하고, 생사의 군대를 항복시키기를 코끼리가 초가집을 부수듯이 하라." 그리고 "이 法과 律 속에서 나태하지 않고 실천하는 자는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 고통을 종식할 수 있으리라."라는 두 개의 게송을 거기에 새기라고 지시한다.66)
이 일화의 내용은 윤회설의 취지가 12인연이라는 궁극의 진리에 진입하게 하려는 데 있음을 명시한다. 그리고 그 취지의 실현을 위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서의 실천적인 노력이다.
업보 윤회설이 의도하는 취지를 지금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해하자면, 현세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개조 또는 변신의 과정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윤회는 막연히 死後를 기약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현세에서 인간이 직접 체험으로 실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티베트 『死者의 書』를 어렸을 때부터 전수받았다는 한 해설자는 "이 책이 표면상으로는 죽은 자를 위해 씌어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삶에 관한 것이다. 붓다 자신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논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들은 당장의 실재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67)라고 소감을 토로하였다.
생활이 곧 업이라는 이해가 성립한다면,68) 현세의 생활 전체가 윤회라는 이해도 성립한다. 윤회의 현장인 이 현세에서는 인간의 업,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자신의 의식이 윤회의 다양한 양상을 결정하고 있다.
불교가 생천설을 수용하고 독자적인 윤회설을 전개한 사실에 대해서는, 방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교화 노력의 일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이다. 이 경우의 방편이란 '진실은 아니지만' '善意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한 수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견해에 따르면 윤회설의 가치는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윤회설의 내용은 현실과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불교의 신앙과 교학에서 업보 윤회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 업보 윤회에 관한 논의와 고찰의 深度를 고려하면, 업보 윤회가 현실과는 무관하게 그토록 진지하게 탐구되어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것보다는 오히려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 사실로서의 합리를 부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은 탐구 정신이 현저하게 감지된다. 불교의 과학적 엄밀성이란 이 같은 노력과 탐구 정신을 가리킬 것이다.
실제로 윤회설과 결부된 교리 탐구의 부단한 노력, 그 탐구의 치밀함과 다양함,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교 사상을 심화하고 발전시켜 갔던 탐구자들의 정신 세계 등에 관심을 돌리면, 방편적 차원의 교설이 윤회설이라는 통념은 저절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통념상의 방편에 대한 인식을 시정하여 불교 특유의 의미로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방편은 결코 사실이 아닌 것을 지칭하거나 저급한 교리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방편은 진실과 직결되는 통로이다. 다만 이 통로는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으며, 평탄할 수도 있고 굴곡이 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방편은 탐사와 발굴과 補修의 대상이 된다. 윤회설은 이 같은 의미의 방편이다.
윤회설을 둘러싼 교학적 노력은 진실과 직결된 통로를 개척하고 보수하는 탐구 작업이었다. 이 통로의 끝에는 깨달음의 세계, 절대 안온의 평등 세계가 있다. 생천설이라는 통로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불교는 기존의 통로를 확장 보수하고 정비하는 노력으로 대처해 갔다. 이 노력의 실체가 무아 윤회를 표방하는 업보 윤회설이다.
註)
1) 여기서는 業說과 윤회설을 총칭하여 업보 윤회설이라고 표현한다. 업설과 윤회설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윤회설은 업설을 내포하며, 윤회는 업의 결과로서 받는 과보, 즉 業報로서 성립한다.
2) 이용철(역), 『승려와 철학자』, Jean-Feançois & Matthieu Ricard, Le Moine et le Philosophe(서울 : 창작시대, 1999), p.28.
3) 위의 책, pp.92∼93.
4) 위의 책, p.93 참조.
5) 이 요지는 대화체의 표현을 필자가 서술적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위의 책, p.50.
6) 이 전통을 대표하는 것이 아비달마이다. 阿毘達磨(abhidharma)라는 말은 '法에 대한 것' 또는 '뛰어난 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포괄적으로는 敎法 연구를 가리킨다. 연구의 대상인 法은 석가모니의 설법으로서의 경전을 가리키므로, 경전에 대한 설명, 주석, 연구 등이 아비달마의 기본 의미이다. 특히 교법의 연구는 분석과 종합이라는 양면에서 철저하게 진전했으며, 그 진전의 과정에서 교법의 요목을 정리해 엮는 방식은 산만한 상태에 있는 교설을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파악하는 종합적인 연구의 가장 유력한 방법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방법이 아비달마의 동의어로 이해되기도 한다. 水野弘元, 『佛敎要語の基礎知識』(東京 : 春秋社, 1972), p.32 ; 櫻部 建, 『俱舍論の硏究』(京都 : 法藏館), p.29 참조.
7)
8) 佐佐木現順, 『業論の硏究』(京都 : 法藏館, 1990), p.25, n.2.
9) 『長部』의 제23경으로서 P?y?si-suttanta라고 불리는 이 경전은 業과 再生을 주제로 하여, 外道인 파야시와 불제자인 쿠마라 캇사파가 주고 받는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漢譯 대장경에서는 이것에 상당하는 내용이 大正句王經(大正藏, Vol. 1, pp.831∼5)으로 번역되어 있다.
12) 남방 불교의 팔리 경전에서 『長部』의 제2경인, 이에 상당하는 漢譯이 沙門果經(大正藏, Vol.Ⅰ, pp.107 ff)과 佛說寂志果經(大正藏, Vol.Ⅰ, pp.270 ff)이다. 여기서는 업의 과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쟁점이었고, 業果의 有無를 과보가 현세에서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하고 있다. 業報에 대한 인식이 매우 통속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6사 외도 중에서 자이나교의 니간타를 제외하면 한결같이 업과와 내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냄으로써 결국은 도덕을 부정한 것으로 귀결된다.
13)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生天은 항상 보시와 持戒 다음에 언급된다. 따라서 불교의 생천설은 보시와 지계가 필요 조건으로 충족될 때에만 생천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생천설은 南傳 律藏의 「大品」에서 야사라는 청년의 출가에 관한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보시는 수행자나 곤궁한 자에게 옷과 음식을 베풀라는 것이고, 지계는 5戒를 준수하라는 것이며, 생천은 그러한 善業의 결과로 사후에 천계에 태어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가르침은 불교의 중심 교리인 4성제를 설하기 직전에 제시된다는 점에서, 생천설은 보다 차원 높은 진리에 도달하는 교량의 성격을 띤다. 中村 元, 『ゴタマ·ブツダ』, 中村元選集 第11券(東京 : 春秋社, 1969), p.269 참조.
14) 石上和敬, p.952 참조.
15) 아래에서 제시하는 대담의 요지들은 위의 책, pp.952∼951 참조.
16) .
17)
18)
19)
20) 福原亮嚴, 「轉生の理論」, 『印度學佛敎學硏究』, Vol. 8-2(1960). p.51 참조.
21) 중아함의 차帝經에서 "이 識이 왕생할 뿐, 이 밖의 다른 것이 [왕생하는 것은] 아니다."(此識往生不更異. 大正藏, Vol.Ⅰ, p.766c)이라고 말하는데, 이 往生은 流轉과 윤회를 번역한 말이다. 즉 이것에 상당하는 팔리 어 문장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닌 이 識이 流轉하고 윤회한다."
22)
23)
24) 번뇌를 자세히 고찰한 후대의 번뇌론에 의하면, 모든 부수적인 번뇌들은 근본 번뇌인 이 3毒 중의 어느 하나에 속한다.
25) 이 經文에 관한 주석과 다른 경문들을 참고하여 종합하면, 이 경문에 담겨 있는 취지는 다음과 같이 파악된다. "업의 異熟으로 이루어진 인격적 신체라는 미묘하고 심원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된다. … 즉 업의 이숙은 인간 자체이고, 자기 자신 혹은 자기 존재의 기본이면서 불가사의하고 강력하다. 그것은 이전의 업에 의해 형성된 것이고, 神通으로도 제압할 수 없으며, 如來에 의해 비로소 인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玉城康四郞, 「業異熟の根本問題」, 『印度學佛敎學硏究』, Vol.27-2(1979), p.66.
26) 小川一乘, 「業論に對する龍樹の批判」, 『佛敎學セミナ-』, Vol.52(大谷大學佛敎學會, 1990), pp.4∼5 참조.
27) 잡아함경의 "업의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라는 經文은 이 점을 단적으로 표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大正藏, Vol.2, p.92c).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이 점을 "옮아 감이 없이 다시 태어난다."(na ca sa?kamati pa?isandahati ca)라고 표현한다(The Milindapañho, op. cit., p.71).
28) 필자는 이 시각에서 불교의 윤회설의 쟁점인 자아와 무아의 문제를 고찰한 바 있다(『윤회의 자아와 무아』. 서울 : 장경각, 1995).
29)
30) 福原亮嚴, 앞의 책, p.54 참조.
31) "선하거나 악한 業들의 결과인 異熟은 존재한다."
32) "여기서 이숙이란 어떠한 의미인가? 동일하지 않게 성숙하는 것이 이숙이다."(atha vip?ka iti ko'rtha?. visad??a? p?ko vip?ka?.) Abhidharmako?abh??yam of Vasubandhu, op. cit., p.89.
33) 雲井昭善, 「インド思想における業の種種相」, 雲井昭善(編), 『業思想硏究』(京都 : 平樂寺書店, 1979), p.53. 異熟을 '원인과는 성질이 다른 결과의 성숙'이라고 설명하지만, '因是善惡 果是無記'가 이숙의 특성을 명료하게 규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숙을 '원인과는 기능이 다른 결과의 성숙'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이숙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 있다.
34) 바수반두(世親)는 이 게송을 "不善과 善으로서 有漏인 法이 異熟因이다;
35)
36) 여기서 언급한 '善因善果 惡因惡果'는 원인과 결과가 성질상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의 '善因善果 惡因惡果'이다. 그러나 불교의 업보설에서 이 개념을 사용할 때는 그 취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업의 인과를 '善因善果 惡因惡果'로 이해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다. 이것은 異熟의 논리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숙과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서 이숙과는 다른 차원에서 업의 인과를 표현한 것이다. 이숙을 설명하는 '善因樂果 惡因苦果'가 업의 기능적 인과를 표현한 것이라면, '善因善果 惡因惡果'는 업의 심리적 인과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善因善果 惡因惡果'는 흔히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동일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지만, 업보설의 취지에서 생각하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가 같은 부류 또는 종류에 속한다는 관계를 지시한다. 『대비바사론』에는(大正藏, Vol.27, p.98b) '善因善果 惡因惡果'를 업의 성숙의 하나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성숙에는 2종이 있다. 하나는 같은 종류이고, 또 하나는 다른 종류이다. '같은 종류의 성숙'이란 곧 等流果이다. 즉 善은 善을 낳고, 不善은 不善을 낳으며, 無記는 無記를 낳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성숙'이란 異熟果이다. 즉 善과 不善이 無記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熟有二種. 一者同類 二者異類. 同類熟者卽等流果. 謂善生善 不善生不善 無記生無記. 異類熟者卽異熟果. 謂善不善生無記果.) 여기서 等流果의 等流는 동등한 흐름, 즉 같은 부류를 의미한다. 그래서 '善因善果 惡因惡果'는 '同類因 等流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실제로는 "선행자는 선행과 같은 부류의 결과를 얻고 악행자는 악행과 같은 부류의 결과를 얻는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것은 '善因樂果 惡因苦果'와는 다른 차원에서 업의 인과를 표현한 것이다. 木村泰賢, 『小乘佛敎思想論』, 木村泰賢全集 第五卷(東京 : 大法輪閣, 1968), p.587 참조.
37) "이숙은 無覆無記라는 法이다.
38) 하나의 업은 한 차례의 출생에서만 과보를 받는다는 이 논리에 異論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사론』에 의하면, 극히 강력한 업은 異熟果가 적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처음에는 현세에서 이숙하고 다음에 다른 生에서도 역시 이숙한다고 주장하는 논사도 있었다. 이 주장의 모호함을 불식하는 것이 하나의 업은 오직 한 차례의 生에서만 이숙을 초래하고 결코 여러 生에 걸쳐 이숙하지는 않는다라는 毘婆沙 논사의 주장이다. 여기서는 과보의 시기가 빠르거나 늦는 것은 업의 강도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 발아하는 종자도 있고 늦게 발아하는 종자도 있다는 사실로 비유한다. 舟橋一哉, 『業の硏究』(京都 : 法藏館, 1954), p.183 참조. 전자의 주장도 수긍할 만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만약 여러 生에 걸쳐서 이숙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미래 지향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대세를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후자의 주장이 '因是善惡 果是無記'라는 이숙의 논리에 부합한다. 한편 無記도 과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는 부파도 있었지만, 이는 소수 의견으로 그치고 대세를 이루지 못했던 점도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0) tatra ku?al?ku?alakarmav?san?parip?kava?ad yath?k?epa? phal?bhinirv?ttirvip?ka?. ibid.
41) 즉 바수반두는 『유식 30송』의 제2송에서 "異熟이란 '알라야'라고 불리는 識으로서 모든 것의 종자가 된다."(?lay?khya? vijñ?na? vip?ka? sarvab?jakam.)라고 천명한다. ibid.
42) 모든 번뇌는 무상하고 緣起的 존재일 뿐인 자기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에서 초래된 것이므로, 그 애착이나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해탈이 성취된다.
43) 業報, 業果, '업의 인과법' 등은 모두 '업의 異熟'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44) kammavip?ko bhikkhave acinteyyo na cintetabbo ya? cintento umm?dassa vigh?tassa bh?g? assa. A?guttara-Nik?ya, Vol.Ⅱ, p.80. 여기서 업의 異熟은 네 가지 不可思議 중의 하나이다. 다른 셋은 '부처의 경지'(buddha-visaya), '명상의 경지'(jh?na-visaya), '세계에 대한 思惟'(loka-visaya)이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불가사의한 것 중에서 '하나의 극도로 강력한 것'이 '업의 이숙'이라고 설한다. 玉城康四郞, 앞의 책, p.62.
46) 위의 책, p.6. 인간의 경험 중에는 善因樂果 惡因苦果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순정리론』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인과를 바르게 보고 있지 않은 것일 뿐이다. 마치 惡業을 행하여 樂果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다른 業因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 그 감춰져 있는 진짜 원인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책, p.5.
47) 水野弘元, 「業について」, 『日本佛敎學會年報』, Vol.25(日本佛敎學會, 1960), pp.318∼9 참조. 浪花宣明, 앞의 책, p.19, 재인용.
48) 우선 참고할 만한 두 편의 논문이 있다. ①平岡 聰, 「『ディヴィヤ·アヴァダ-ナ』に見られる業の消滅」, 『佛敎硏究』, Vol.21, pp.113 ff. ②浪花宣明, 「パ-リ上座部の業論 ⑴--業果の必然性」, 앞의 책, pp.3 ff. ①은 이 문제에 대한 해명 중의 하나로서 "재가자를 붓다의 가르침으로, 또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면, '방편'으로서 다양한 설명 방식을 취하더라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업과의 필연성이나 불가피성을 설하지 않으면 악업을 쌓을 가능성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업과의 불가피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또 이미 악업을 쌓아 그 과보로 괴로워하고 있는 자나 자신이 지은 악업을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業滅의 가능성'을 시사해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p.128)라고 이해한다. ②는 ①의 논문이 '업의 소멸'과 '業果의 소멸'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같은 주제를 취급하는데, 이 문제에 대해 "업의 소멸이란 人倫의 선악을 초월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해탈.열반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붓다는 인륜의 기반으로서 業果의 필연의 진리를 집요하게 설하면서, 그 인륜의 준수로부터 인륜을 초월한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다."(p.13)라고 이해한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양쪽의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②가 "초기 경전에서는 '업과의 소멸'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라고 파악한 것은 ①보다 타당성을 지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業論 자체의 논리로써 해명되어야 하고, 또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49) 經文의 전거는 平岡 聰, 앞의 책, pp.114∼6 참조..
50) 令生業이란 자신의 결과를 낳게 하는 업이다. 支持業이란 다른 善業이나 不善業을 후원하여 그 결과를 한층 명료하고 강하게 현출시키는 선업 또는 불선업이다. 妨害業이란 다른 선업이나 불선업을 방해하여 결과의 生起를 방해하는 업이다. 浪花宣明, p.15 참조.
51) 大正藏, Vol.27, p.593bc.
52) 舟橋一哉, 앞의 책, p.183 참조. 舟橋一哉는 이 같은 견해들을 고려하여 "아비달마에서 定業과 不定業이 설해지는 최대 이유는 불교의 실천도와 관련하여 '업의 可轉'이라는 사실을 설하기 위함일 것이다."라고 추정한다.
53) 大正藏, Vol.32, p.290c.
54) 舟橋一哉, 앞의 책, p.184 참조. 이는 아마도 모든 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故作業 중에도 과보가 정해지지 않은 업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