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atta의 역어이다. atta는 문맥에 따라 자아(SK atman)라고 옮기기도 한다. 이 문맥에서 atta는 단지 자기 자신을 뜻하지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의지하는 방법으로 아래에서 네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하고 계시는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은 자신을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들로 해체해서 불변하는 실체(자아)가 없음을 관찰하는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알아차리고, 판단하고, 정진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과 근심을 버리려 한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알아차리고, 판단하고, 정진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과 근심을 버리려 한다.
한역아함에는 無我와 非我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 두 개념은 한자의 뜻으로는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니까야에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이 두 개념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시면 기쁘게 듣겠습니다.
[각묵스님 답변]
지금에야 까페에 들어와서 질문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우선 생각나는대로 제 생각을 한 번 적어봅니다.
먼저 한역에서 無我와 非我라는 표현은 문맥에 따른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온은 내가 아니요 내것이 아니라는 문맥에서는 비아(내가 아님)로 한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경에서 무아와 비아는 큰 차이점 없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일본에서 나까무라 하지메 교수님 같은 분들이 무아라는 전통적인 번역 대신에 비아라는 역어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다분히 무아(자아가 없다)는 표현 대신에 비아(자아가 아니다)라는 이해를 선호합니다. 이런 이면에는 자아가 없다는 표현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자아가 아니라는 다소 편안한? 어법을 더 선호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분명하게 무아(자아가 없다)로 옮겨야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비아(자아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자아가 아닌 다른 어떤 실체를 상정하는 어법이기 때문입니다. 인도 부파 역사에서도 독자부에서는 초기경에서 오온무아(오온에 자아=실체가 없다)라는 표현을 들면서 "부처남께서는 오온은 무아라고 하셨지만 뿌드갈라(pudgala=人=個我=진인)를 설하셨다. 그러므로 뿌드갈라(진인)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비아라는 해석은 이런 자아는 없지만 자아아닌 또 다른 무엇은 없는 것이 아니다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피해야한다고 봅니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는가, 업의 과보는 누가 받는가, 업의 과보를 받는 자가 없다면 도덕적 인과를 부정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은 이미 불멸 직후부터 불교교단 내외에서 큰 논란 거리였고 그래서 불교 제파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여기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해야 했습니다. 특히 학문적으로 불교를 접근하는 사람들은 이런 무아와 윤회라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듯한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많은 고뇌를 하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하지메 교수님은 비아를 선호했다고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불교에서는 물심의 제현상을 흐름으로 본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답이 됩니다. 찰라생멸을 거듭하는 흐름으로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초기불교의 큰 특징입니다. 매순간의 흐름은 서로 조건지워져있습니다. 흐름이 윤회입니다. 한 순간에 일으킨 의도적행위(업)는 다음 순간의 흐름을 조건짓습니다. 이렇게 업은 흐름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삶은 무시무종의 흐름입니다. 이것이 무아와 緣起를 근본 가르침으로하는 불교의 입장입니다.
생각나는데로 적어서 뜻이 바르게 전달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아는 불교의 근본입장입니다. 이것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부처님 가르침을 오해하는 출발이라 봅니다.
이 정도로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미흡한 점이 있다면 다시 글을 올리겠습니다. 좋은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오 스님 대학원에 다시니기 때문에, 졸업한 이후에도 학술대회 때마다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 간략하게 답변해 보겠습니다.
1. 無我와 非我의 문제
이에 대해서는 본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린 제 논문 '중론 귀경게 팔불의 배열과 번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한국불교학> 제30집에도 실려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아인지, 비아인지 묻는 것은 넌센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아, 비아의 문제는 사상의 문제가 아니고, 언어학적인 문제입니다.
무아 또는 비아를 산스끄리어로 an-atman(장음부호 생략)이라고 하는데, 산스끄리뜨어는 영어와 같은 계통인 인도-유럽어족에 속합니다. 그리고 인도-유럽어족의 언어에서는 무와 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영어의 'is not'의 경우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Ther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에는 무가 되고, He is not a boy라고 할 경우는 비가 됩니다. 이는 산스끄리뜨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정의 접두어 'a'(자음 앞에서 쓰임)나 'an'(모음 앞에서 쓰임)은 무로 번역해도 되고 비로 번역해도 됩니다. 한국어로는 없다와 아니다가 모두 됩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문장의 맥락을 보고 판단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중촌원 등 많은 일본 학자들이 무아가 맞는지, 비아가 맞는지 토론을 벌여 왔는데, 한 마디로 말하면 이는 언어의 차이를 간과한 넌센스입니다.
삼법인이라 하면, 일체개고 대신 일반적으로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고통은 현실인식이지만, 열반적정은 모든 고통이 소멸된 결과로서 획득되는 결과이다.
열반이란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고요한 적정(寂靜)의 경지이며, 번뇌에 의해 다시는 오염되지 않는 완전한 청정(淸淨)한 경지를 의미한다. 일체개고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열반적정은 긍정의 뉘앙스가 강하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는 경전 편찬자들이 아마도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추구해야 할 긍정적 요소를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삼법인 가운데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가장 극명하게 차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아관념을 부정하는 제법무아의 가르침일 것이다. 제법무아는 개인적인 자아의 부정과 동시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것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가르침이다.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법무아를 설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자아라 할 만한 것이 없다’(제법무아)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9게송, <테라가타> 제 678게송)
한편 무아(無我)는 비아(非我)라고도 번역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 비아라고 번역할 경우 어떤 자아(영혼)가 긍정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인간을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오온이란 색(色, 물질), 수(受, 감각작용), 상(想, 개념작용), 행(行, 의지작용), 식(識, 식별작용)이다. 무아가 되었든, 비아가 되었든 의미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이외에 여섯 번째를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의 부정은 의식의 근원에 자리한 소유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경전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五蘊)은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늘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니 솔직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는 망상이 된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 역시 다섯 가지(오온) 이외에 여섯 번째가 존재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 우리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의 칼로 욕망의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한 금강석의 지혜를 부처님은 삼법인의 내용으로 요약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