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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역사 기록으로서의 맹자서

역사 기록으로서의 맹자서

 

리링의 손자 해설을 읽다가 전쟁 규모와 관련해 맹자가 언급한 말이 나오길래 맹자서의 해당 부분을 다시 들춰봤습니다. 맹자 진심 하편에 맹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나옵니다.

"武王之伐殷也, 革車三百兩, 虎賁三千人"

(무왕지벌은야, 혁거삼백량, 호분삼천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치러갈 때, 전차(革車) 3백대와 정예 전투병(虎賁) 3천명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전차 기준으로 10인 승제(乘制)였다는 소립니다. 전차 1대당 3인의 전차병과 7인의 보병이 배치되는 편제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무왕이 은나라를 치러갈 때의 년도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주무왕 11년 12월 무오일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그 시기가 대충 기원전 1035년 정도였던 모양입니다. 사기 주본기에 맹자의 말과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이에 무왕은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 이르기를, '은나라가 중죄를 지었으니 마침내 정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는 곧 문왕의 위패를 모시고 융거(戎車) 3백대와 호분(虎賁) 3천명, 갑사(甲士) 4만5천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은주왕을 정벌하러 갔다."

혁거나 융거는 다 당시 전차를 이르는 말입니다. 호분은 '범(虎)처럼 날쌘(賁) 병사'를 말하는 것이니 쉬운 말로 하면 정예병 정도의 의미겠지요. 사마천은 "戎車三百乘, 虎賁三千人(융거삼백승, 호분삼천인)"으로 맹자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것 이외에도 갑사(甲士) 4만5천명이 동원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차 3백대에 병력 4만8천명이 됩니다. 여기다 주나라와 연합한 여러 제후국들의 전차와 병력이 추가되었을 것이니 아마도 총 규모가 만만찮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항했던 은주왕의 병력은 그럼 얼마냐? 사마천은 70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기원전 1035년 경에 한 나라가 병력을 70만이나 동원했다? 이건 그대로 믿기가 좀... ^^

뭐 아무튼... 진시황의 분서 사건과 항우가 함양성을 불태운 사건 등으로 상고시대 기록과 전적(典籍)들이 많이 유실이 되었습니다. 해서 후대 고문헌 학자나 역사가들은 역사서에 해당 기록이 없을 경우 춘추전국시대에 활약했던 제자백가들의 책에 나온 말들을 자주 인용합니다. 공자, 맹자, 묵자, 순자, 한비자와 같은 사람들이 설마 거짓말이야 했겠습니까? 하는 것이겠지요.

그 중에서도 맹자와 순자, 한비자 이 세 명이 지은 책에 나온 말들은 거의 역사기록에 준할 만큼 언급이 자주 되곤 합니다. 특히 맹자는 그의 책에서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시경과 서경에 나온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해서 맹자가 하고 있는 말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시경과 서경을 봐야하는 불상사(?)가 생깁니다. '혁거삼백량, 호분삼천인'도 아마 서경 어디쯤 나온 말일텐데 제가 가진 서경 책을 아무리 찾아도 그런 워딩은 못찾겠습니다.

서경 주서에 태서(泰誓)(상중하)와 목서(牧誓), 무성(武成)이란 편명의 기록이 있습니다. 주무왕이 은주왕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그들에게 한 연설 내용과 은나라 정벌을 마치고 주무왕이 조치한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황하 나루터인 맹진(孟津)에서의 연설이 태서에 담겼고, 은나라 도성이었던 조가(朝歌)의 교외인 목야(牧野)에서 한 연설이 목서에 담겨 있습니다. 헌데 그 모두에 '혁거삼백량, 호분삼천인'이란 워딩은 보이지 않습니다.

맹자가 본 서경과 지금 제 손에 있는 서경의 내용이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맹자가 봤던 서경(당시의 이름으론 書)은 진시황의 분서(焚書) 이전의 것이니 한나라 초기에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해 복원한 지금의 서경보다는 더 자세하고 상세한 내용이 들어 있었겠지요. 맹자라는 사람이 워낙 깐깐한(?) 사람인지라 맹자가 언급한 시경과 서경의 기록들은 거의 사실 취급을 받습니다.

첨부 사진에 나오는 맹자 진심 하편의 맹자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군사 진영을 잘 펴고, 전쟁을 잘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나라의 군주가 인(仁)을 좋아하면 천하에 적이 없는 것이니,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면 북쪽 오랑캐들이 원망하고,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면 서쪽 오랑캐들이 원망하여 말하길, '어찌 우리는 (정벌을) 뒤로 하느냐?"고 할 것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 혁거(전차) 삼백대와 정예병 삼천명이었다. (은나라 백성에게) 무왕이 말하길, '두려워 하지 마라. 너희들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것이지 백성을 상대로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자 짐승의 뿔이 무너지듯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정벌이란 말은 바로잡는다는 것이니 각기 자신을 바로잡는다면 어찌 전쟁을 하겠느냐?"

여기서도 맹자는 "남면이정 북적원, 동면이정 서이원"이란 서경 상서(商書) 중훼지고에 나오는 말도 인용하고 있고, 서경 주서(周書) 태서와 무성에 기록된 이야기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또 유명한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개념도 나오고, '정벌(征)이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征之爲言 正也)'란 역성혁명(?)의 명분도 나옵니다. 맹자는 말미에 천하 사람들과 군주들이 각자 스스로 자신을 바로잡는다면 어찌 전쟁이 일어나겠는가? 하며 반문하며 글을 맺고 있습니다.

이렇듯 맹자를 읽는다는 건 역사를 읽는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맹자가 언급하는 시경과 서경의 기록을 후대인들이 믿으니까 말입니다.

[출처] 역사 기록으로서의 맹자서|작성자 오디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