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浩然)은 '물이 거침없이 흐르는 모양'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럼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문자대로 풀자면 '거침없이 흐르는 물과 같은 기운'이 됩니다. 문자상의 의미만 놓고 보면 어째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생각나는 게 도무지 유학자인 맹자의 말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호연지기란 용어의 출처가 바로 맹자 공손추편입니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맹자조차도 이 '호연지기'가 정확히 뭔지에 대해 "말로는 설명이 어렵다(難言也)"고 하고 있습니다. 용어의 창시자도 설명이 어려운 걸 제 소싯적 학교 선생님들이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여지껏 이름만 알고 의미는 모르는 대표적인 개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호연지기였습니다.
맹자서의 공손추편을 보면 맹자와 제자 공손추 간에 꽤 긴 부동심(不動心) 문답이 나옵니다. 그 끝에 바로 이 호연지기란 말이 나옵니다. 공손추는 맹자에게 "만약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도를(선정을) 행해 제나라가 그 전의 패권국가처럼 된다면 마음에 동요가 없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자신은 40세 이후로 부동심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공손추가 부동심을 용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부동심에도 정도의 차이, 즉 도(道)가 있냐고 묻자 맹자는 어쩔 수 없이 북궁유나 맹시사와 같은 용기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길게 설명하고는 결론적으로 공자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바르지 못하면 비록 누더기를 걸친 천한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스스로 돌아보아 올바르다면 비록 천만 명의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글의 맥락상 맹자의 취지는 이런 듯 보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용기란 스스로 돌아봐서 바르고 옳다고 여기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心)이 있을 때 제일 강하게 나오는 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설명을 듣고 공손추가 그럼 그런 부동심을 지니기 위해 선생님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제자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문제의 '호연지기'란 말이 나옵니다.
"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아지언 아선양 오호연지기)"
"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이해하고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그러자 제자인 공손추도 생소했던지 호연지기가 뭔지 다시 묻고 있습니다. 맹자 자신도 "말로는 설명이 어렵다(難言也)"고 전제하면서 다음처럼 호연지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曰 難言也(왈 난언야)
> 말로는 (설명이) 어렵다
2. 其爲氣也 至大至剛(기위기야 지대지강)
> 그 기(氣, 호연지기)의 작용이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해서
3.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閒(이직양이무해 즉색우천지지간)
> 곧음으로 기르고 해로움이 없는 것이니 천지지간에 충만한 것이다.
4. 其爲氣也 配義與道 無是 餒也(기위기야 배의여도 무시 뇌야)
> 그 기(氣, 호연지기)의 작용(爲)이란 의(義)와 짝하여(配) 도(道)와 함께 한다. 이것이 없으면 (마치 사람이) 굶주린(餒) 것과 같다
5. 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시집의소생자 비의습이취지야)
> 이것은(호연지기) 의가 쌓여서 생기는 것으로 갑자기 엄습한(襲) 의를 취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6. 行有不慊於心 則餒矣(행유불겸어심 즉뇌의)
> 행동함에 있어 마음에 흡족함(慊)이 없다면 굶주림과 같다.
7. 我故曰 告子未嘗知義 以其外之也(아고왈 고자미상지의 이기외지야)
> 그래서 고자(告子)는 일찍이 의(義)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의(其)를 마음 밖에(外之) 두었기 때문이다(以也)
사실 호연지기에 대한 맹자의 설명을 번역해 놓고도 그 의미가 선명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손에 잡을 수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가치를 이해하는게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쨌던,,, 제가 이해한 바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맹자는 사람의 선한 본성을 믿는 사상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義)와 인(仁)과 같은 선한 마음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의로운 마음이 잘 자리잡게(正心)하고, 계속해서 쌓아가는 노력을 할 때 생겨나는 것(集義所生者)이 호연지기라고 맹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해한 맹자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천만 인이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는 부동심에서 나오고, 그 부동심은 본래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의(義)로운 마음을 꾸준하게 쌓아가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으로, 그런 '부동심의 지극한 경지', 또는 '의로운 마음의 지극한 경지'를 일러 '호연지기'라 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뭐 쉽게 말하자면 '큰 의로운 마음'이 곧 '호연지기'란 말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말입니다.
청년들에게 "호연지기를 가져라"고 말했다는 정약용 선생의 말이 "Boys be ambitious"의 의미가 아니란 걸 부끄럽지만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