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국교가 된 이후 중국의 철학사는 권력의 안과 바깥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결부된 유교와 권력 외의 철학(도가와 불가)로 나뉜다. 한나라 멸망 이후 혼란의 시대인 위진 남북조 시대가 된고, 불교가 도래한다. 중국에 외래사상이 들어와서 토착한 것이 불교와 이 후에 들어 온 막시즘이다. 유교와 대립된 것이 노장 사상이다. 이 시대에 노자. 장자, 주역(삼현경)의 책을 중심으로 펼쳐진 철학을 현학이라고 한다. 우리의 상식적 생각과 분석적 이성적으로 잘 안 되는 것을 ‘묘하다’라고 하는데 그 ‘묘’보다 더 강한 말이 ‘玄’이다. 위진현학은 위진시대 현개념을 중심을 발달한 학파이다. 위진현학에 종사했던 많은 사람들이 죽립칠현이다.
*왕필
중국역사에서 최고의 천재로 꼽힌다. 26살에 요절. 주역과 노자에 관한 책은 그 분야 최고의 책으로 꼽힌다. 노자를 빌어 유교를 이야기했다. 인간은 본선상 제도적이다라고 주장함. 본성과 제도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는 본선상 제도적인 존재로 언어나 문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제도를 만들어 통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했다. 도덕경을 이야기하면서 유교의 통치철학을 전개했다. 그 개념중의 하나가 ‘무’이다.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나오지만 유 자체는 무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노자의 ‘무’를 강조하면서 ‘무’가 사실은 ‘용’이라고 함(無用之用). 도덕경5장의 ‘天地不仁’를 ‘천지불인 수생추’(천지가 짐승을 취해 풀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짐승은 풀을 먹고 생존한다.) ‘’불이인생구’(인간을 위해 개를 만들지 않았지만) ‘인식구’(그러나 사람들은 개를 먹는다.) ‘무위여만물(만물에는 ‘위’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기소용’(이세상 만물은 모두 적절하게 소용되는 곳이 있다.) 도덕경을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무위자연’ 등 도가의 사상 보다는 유가의 통치철학에 적합하도록 적절하게 해석을 했다
위진 현학
위진남북조, 중국 역사상 가장 사회가 혼란스럽고 분열된 이 시대는 정권 탈취의 악순환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부패와 전란 때문에 염세적인 세계관이 팽배하였다.
특히, 한나라는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통치계급은 사분오열되고 지주호족은 군대를 모아 자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한나라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고 그 결과 220년에는 한나라가 망하고 위(魏).촉(蜀).오(吳)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 뒤 위나라가 촉을 무너뜨리고 다시 서기 265년 사마씨(司馬氏)가 위나라를 대신해 서진(西晉)을 세웠지만 317년에 이르러 중국의 북쪽에는 흉노·갈·선비·강·저 등의 다섯 이민족이 서로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일을 반복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열었고 남쪽은 한족의 여섯 왕조가 바뀌는 혼란을 맞았다. 이 시기는 589년 수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는데 이 시기를 앞 시대와 합쳐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후한의 멸망부터 치더라도 무려 369년간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혼란은 지식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엄청난 사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유가사상의 몰락과 도교·불교의 대두이다. 그러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위나라가 한을 무너뜨리면서부터 위를 무너뜨린 서진이 망할 때까지의 약100년 간, 즉 위진시기에 유행한 현학이다.
위진현학은 노장사상이 중심이 된 새로운 사조였다. 이 흐름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한나라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선거제(選擧制)를 택하였다. 물론 추천 기준은 유학적 소양이었다. 그러나 집안끼리 서로 추천을 거듭하면서 명문 귀족이 문벌화하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정치·경제·문화를 모두 손에 넣은 명문 귀족들은 더 이상 벼슬을 얻기 위한 유가 공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으며 한나라 말의 혼란이 정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자유로운 생활태도를 부추긴 것이다. 위진시기에 들어서면 이들의 모습은 청담(淸談)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노자}, {장자}, {주역}의 삼현(三玄)을 중심으로 완곡한 풍자를 통해 자유로운 본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세속인들에게는 백안(白眼)으로 대했다는 완적이나 술을 많이 먹었고 나체로 잘 지냈다는 유령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위진현학의 주된 관심은 '자연'과 '명교'(명분교화)의 조화에 있었다. 명교는 봉건사회의 정치제도와 윤리도덕 등 봉건문화의 총칭이며 자연은 최고 법칙인 도로서 자연관과 인생관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경향은 바로 유가와 도가의 절충을 의미한다.
현학(玄學)은 기원후 3세기에서 6세기에 성행한 중국철학의 한 학파이다. 유교와 도교를 혼합하여 《역경》, 《도덕경》, 《장자》 등을 재독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세 책을 "삼현(三玄)"이라 부르며 숭상했기에 현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표적인 현학자로는 왕필과 곽상이 있으며, 이 두 사람은 각각 《도덕경》과 《장자》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한자 玄이란 기본적으로 "어둡다"는 뜻이지만, 더 나아가 "애매하다, 알 수 없다, 미스터리, 신비주의"라는 뜻이기도 하며,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정통 유교가 수기치인, 경세치국의 학문으로써 개인의 인간성을 수양하고 또한 세상을 평안케 하는 형이하학적인 정치철학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현학은 상술한 玄의 의미와 같이 밀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탐구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난세 와중에 국가의 권위가 떨어지고 아노미 상태가 펼쳐지자 현학자들 및 현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개인의 보신과 영달에 힘을 쏟으며 자연을 즐기고 미신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현학은 청담으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과시주의, 허무주의로 변질되었다.
알맹이는 없으면서 장황하게 허세만 부리는 말과 글을 가리키는 "衒學的"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