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간화선. 묵조선. 선

​영가 선사 9 / 이 몸은 허망하여 자성이 없다.​

직지심경(무비스님 강설) 76.

중국의 조사(中國 祖師)

영가선사 9 / 이 몸은 허망하여 자성이 없다.

師云 知身虛幻하야 無有自性이면 色卽是空이어니 誰是我者오 一切諸法이 但有假名이며 無一定實이라 是我身者는 四大五陰이 一一非我요 和合亦無라 內外推求에 如水聚沫이며 浮泡陽燄하야 畢竟無人이어늘 無明不了하야 妄執爲我하야 於非實中에 橫生貪着하야 殺生偸盜하고 婬穢荒迷하야 竟夜終朝토록 矻矻造業하니 雖非眞實이나 善惡報應이 如影隨形이라 應自觀身實相하고 觀佛亦然이니 故云 道在目前이라하며 心佛衆生이 三無差別이라하니라

영가스님이 말씀하였다.

“몸이 허망하여 자성이 없음을 알면 물질이 곧 공이거니 무엇이 나인가?

일체 모든 법이 다만 거짓 이름뿐이요 한 가지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나의 몸이라는 것은 4대와 5온인데 그것이 낱낱이 내가 아니요,

화합이라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이다.

안팎으로 추구하여 보면 모여 있는 물거품과 같고,

떠다니는 물거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아서

필경에 사람이라 할 것이 없다.

무명으로 인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잘못 집착하여 나라고 여겨서

실재하지 않는 가운데서 그릇되게 탐착하는 마음을 내어서

살생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음행도 하여 거칠고 미혹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업만 짓는다.

그 업이 비록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악의 과보가 따르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

응당히 스스로 몸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듯이

부처님을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렇게 하라.

그러므로 ‘도란 목전에 있다.’라고 하였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가 차별이 없다.’라고 하였다.”

 

해설 ; 영가스님의 이 말씀은 <영가집>이라는 책의 몸과 말과 생각의 업[三業]을 경계하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영가스님은 혜능스님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선불교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앞에서 소개하였던 <영가 증도가>와 여기에서 인용한 <영가집>이란 책이 우리나라에 일찍이 전래되어 널리 읽혔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업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부처님의 업이나 보살의 업을 논하지 않고 대개가 중생들의 미혹 때문에 짓는 악업을 말하게 된다. <영가집>에서는 중생들은 왜 악업을 짓게 되는가를 살펴본 내용이다.

악업은 모든 사람들이 이 몸뚱이가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나의 것으로 있어주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착각하는 데서부터 짓게 된다.

이 몸을 허망한 것이며 공한 것이며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아지랑이와 같은 것으로 관찰하는 지혜가 있다면 굳이 그렇게 불필요한 악업을 짓지 않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 있던 내가 없는데 달리 무슨 업을 짓겠는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분이 아니며, 인연도 아니며, 능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등바등 부귀공명을 위해서 부당하게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것은 이 허망한 몸뚱이가 꿈이 아니고 실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당한 기간 동안 있어 주리라는 본능적인 데서부터 오는 깊은 믿음 때문이다.

예컨대 따뜻한 봄날에 어쩌다가 날씨가 추워져서 눈이 많이 내렸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데 한편에서는 계속 녹아내리고 있는 경우와 꼭 같다. 설사 추운 한겨울에 내린 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모든 것을 인연에 맡기고 자연에 맡기고 자신의 분에 맡겨서 순리대로만 산다면, 그렇게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며, 남을 억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들은 일체가 인연으로 생기고 소멸한다. 즉 인연소기(因緣所起)다. 그 사실이 비록 고정된 실체는 없다하더라도 고통을 받는 것은 악업을 지음으로 일어난 일이다. 복을 누리는 것은 선업을 지음으로 오는 결과다.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다.

이처럼 육신의 진실한 모습은 텅 비어 없듯이 부처라는 것도 종내에는 텅 비어 없는 것으로 관찰하는 일이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라고 <영가집>은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