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상록

무아와 윤회

무아와 윤회

 

질문5

모든 것이 공한데, 무엇이 윤회하고, 4성제 3보가 어디있는가?

답:

공견의 위험성과 이제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하면 삼보와 사성제도 파괴된다고 하는 논적의 비판에 대해 용수는 모든 것이 공하지 않기 때문에 삼보와 사성제가 파괴된다고 하였다.

논적은 불교 교리 가운데 '이제(二諦)'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고 '공의 의미를 오해'했다. 있는 그대로의 참된 진리를 의미하는 '진제'와 상식에 부합하는 진리를 의미하는 '속제'. 진제는 '분별적 사고'를 '해체' 시킨다. 속제는 '분별적 사고에 입각한 체계적 가르침'이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가 없다며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르침은 진제의 가르침이고, 수행자는 오후에 식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시간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르침은 속제의 가르침이다. 선도 악도 없다고 말하는 초윤리(超倫理)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악을 행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가르침은 속제이다.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가르침은 속제이다. 진제와 속제 2가지 모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하는 소중한 진리(諦, satya)들이다.

이제의 구분을 모르고 <<중론>>을 공부할 경우 진제의 극단, 공의 극단에 치우쳐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다. 이런 허무주의를 공의 세계관이라는 의미에서 '공견(空見)'이라고 부른다. 일상적 세속적 삶은 진제가 아니라 속제의 규범이 지배한다. 우리의 모든 행 불행은 다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착하고 고결하게 살아야 하고, 수행자들은 열심히 수행을 하여 자신의 번뇌를 녹여야 하고, 모든 중생은 부처님을 우러러며 그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속제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공을 공부하고 공을 수행하다가 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공견에 빠질 경우 '모든 가치판단이 상실되어' 선악의 구분을 무시하는 '폐인'이 되거나 위의 논적과 같이 공사상을 비판할 수 있다.

공의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할 경우에는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어 주고 삶과 죽음의 고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기사회생의 명약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잘못 이해할 경우 독약이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칠 수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공견에 빠진 '허무주의자'가 되어 속제를 무시할 경우 가치판단이 상실되어 '막행막식'하는 폐인이 될 수가 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망상분별의 때를 씻어 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공을 세계관으로 삼는 것, 즉 공견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언어와 분별'로 이루어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마치 '뗏목'과 같은 것이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고하고 논증하기 위해 공의 가르침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경고와 논증은 공의 가르침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공의 가르침 역시 언어와 분별에 의해 표출된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뗏목'일 뿐이다.

공의 진리는 우리가 분별을 부수고 들어갈 때 만나게 되는 세상의 참 모습이기도 하지만, 그와 똑같이 우리가 체험하는 분별의 삼라만상을 가능하게 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체험하는 세상만사는 모두 연기된(얽힌) 것들이다. 따라서 모든 공한 것들이고 우리의 '이분법적 사유'가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다. '공은 세상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의 참 모습'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선언하듯이.

중음신(中陰(蘊)身) 역시 오온을 모두 갖추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몸에 해당하는 색온이 희박하고 미세하기에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중음신으로 떠돌다가 49일째 되는 날 어머니의 자궁속으로 들어간다. 49재.

오온은 궁극적으로 모두 고(苦)를 야기할 뿐이라는 윤회의 진상(苦)을 훤히 알고, 우리로 하여금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윤리(戒, 정어, 정업, 정명), 명상(定, 정념, 정정, 정근), 지혜(慧, 정견, 정사)의 수행인 팔정도를 그대로 실천하여 윤회의 원인인 모든 번뇌(集)를 끊을 경우 우리는 열반(滅)에 도달하여 더 이상 윤회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 12연기 중 무명이 사라지면 윤회하는 오온의 세계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무명'을 제거한 지혜로운 수행자는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고를 초래할 악행도 하지 않지만, 수행자로서 착하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업을 지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착한 일을 하지만 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이다. 해도 하는 것이 없다. 베풀긴 하지만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를 뿐 아니라 오른손 자신도 모른다. 마치 어머니가 다친 자식을 간호할 때와 같이 착한 일을 하고도 자신이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무명을 타파한 지혜로운 자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명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