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보이는 有邊(유변), 無邊(무변), 亦有邊亦無邊(역유변역무변), 非有邊非無邊(비유변비무변)이 곧 四句(사구)인데, 이 문장에서는 일체법이 본래 공하므로 四句(사구)는 모두 참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四句(사구)가 모두 부정되는 것을 百非(백비)라고 한다. 즉 四句(사구)란 어떤 진리를 긍정하기 위해 사용된 논식이 아니라, 자성을 지닌 실재로서 사물을 긍정할 수 없음을 알려 주기 위한 논식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을 有(유)라고 고집하는 데 대한 부정, 無(무)라고 고집하는 데 대한 부정, 有이면서 無라고 고집하는 데 대한 부정, 有(유)도 아니고 無(무)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데 대한 부정을 百非四句(백비사구)라고 하는 것이다.
四句(사구)의 논식은, 단지 네 가지 경우만이 아니라 사물의 자성을 고집하는 일체의 경우를 다만 네 가지 논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4 논식인 '非有非無(비유비무)'에 대한 부정은 일체의 논식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중관학의 百非四句(백비사구)가 성현영에 의해 중현과 같은 개념으로 수용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장자 [제물론]의,
"今且有言於此, 不知其與是類乎, 其與是不類乎與, 類與不類相與爲類, 則與彼無以異矣"
"금차유언어차, 부지기여시류호, 기여시불류호여, 유여불류상여위류, 칙여피무이이의"에 대한 곽상과 성현영의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곽상의 [注(주)]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 '시비가 없다'(無是非;무시비)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과연 시비가 있는 사람과 같은가 다른가? 같다고 말하려니 나는 시비가 없음을 시로 삼고, 저들은 시비가 없음을 비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러나 비록 시비가 다르기는 하지만 참으로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저들과 같다.
그래서 '類與不類, 相與爲類, 則與彼無以異矣(유여불류, 상여위류, 칙여피무이이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장차 저들과 다르려면 無心(무심)해야 하니 이미 시비를 버렸으면 또 버린 것을 버려야 한다.
버리고 또 버려서 버릴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뒤에야 버림이 없어도 버리지 않음이 없어(無遣無不遣;무견무불견) 시비가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장자} [제물론]의 내용은 彼(피)와 我(아)를 대립관계로 고집함으로써 발생하는 시비의 해소를 주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비를 해소하라고 말하는 것은 또 하나의 시비를 발생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시비하지 말라는 시비를 하게 되므로 사실상 지금 시비하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곽상은 시비하지 말라는 마음조차 부정하는,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한 無心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곽상에게서 이미 '부정의 부정', 즉 중현의 방법이 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위의 [곽상주]에 대한 성현영의 [疏(소)]를 보기로 한다.
'類(류)'는 비슷한 무리를 의미한다. 보통사람들은 어리석고 미혹되어 是(시)에 집착하고 非(비)에 집착한다(滯是滯非;체시체비). 이제 [제물론]은 저 세속적 집착을 벗어나고 미혹된 집착을 부정하려고 짐짓 시도 없고 비도 없다(無是無非;무시무비)고 말하였으니 이는 참된 道를 쓰려 함이다.
그래서 다시 '서로 같은 무리가 된다'(相與爲類;상여위류)고 말하였으니, 이는 '無是無非(무시무비)'를 다시 부정한 것이다. 이미 是非를 부정하였는데 또 부정함으로써(遣之又遣;견지우견) 바야흐로 重玄(중현)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는 성현영이, 곽상이 말한 부정의 부정(遣之又遣;견지우견), 즉 '無是無非(무시무비)'의 부정을 통해서 '無心(무심)'에 도달함으로써 참으로 시비를 벗어난 경계, 또는 방법을 중현의 개념을 통해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곽상이 말하는 부정의 부정, 즉 일체를 부정하여 하나의 알음알이도 허용치 않는 방법 내지 無心의 경계는 이미 {장자} [제물론]에서 제시되어 있는 바이다. 그것은 {장자} [제물론]에 보이는
"유시야자, 유미시유시야자, 유미시유부미시유시야자, 유유야자, 유무야자, 유미시유무야자, 유미시유부미시유무야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有始也者, 有未始有始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유시야자, 유미시유시야자, 유미시유부미시유시야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운데 "未始有始也者(미시유시야자)"는 앞서 天鈞(천균)과 兩行(양행)을 말하면서 이어지는
"古之人, 其知有所至矣, 惡乎至, 有以爲未始有物者, 至矣盡矣, 不可以加矣"
"고지인, 기지유소지의, 오호지, 유이위미시유물자, 지의진의, 불가이가의"의 '未始有物者(미시유물자)'와 같은 형식이다.
즉 옛사람이 지혜가 지극했던 이유는 '애초에 물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곽상은 "이는 천지를 잊고 만물을 버려, 밖으로는 우주를 살피지 않고 안으로는 자신의 한 몸마저 의식하지 않아 능히 텅 비어 집착이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성현영은 "세상만물이 모두 실재가 아니어서(非有;비유), 物(물)과 我(아), 內(내)와 外(외)가 모두 空(공)하며 四句(사구)가 다 부정되어 일체가 虛靜(허정)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有始也者(유시야자), 有未始有始也者(유미시유시야자)"의 '有始也者(유시야자)'는 일체 사물을 집착하는 세속인을 가리키며, '未始有始也者(미시유시야자)'는 일체의 집착을 떠난 지인의 경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곽상의 주에 의하면 '未始有始也者(미시유시야자)'는 역시 "시종을 초탈하여 생사를 하나로 한 경계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뒤에 이어진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유미시유부미시유무야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곽상은 이를 "시종과 생사의 대립을 떠나 하나로 한 사람은 그 하나마저도 부정하여 스스로 고르게 한 것만 못하니, 이는 하나마저도 잊음이다"라고 하여 부정의 부정으로 해석하였다. 성현영도 {장자소}에서 이를 중현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어서
"有有也者, 有無也者, 有未始有無也者,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
"유유야자, 유무야자, 유미시유무야자, 유미시유부미시유무야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가 보기에 {장자} [제물론]에 이미 중현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먼저 성현영의 설명을 보자. '有有也者(유유야자)'에 대해 성현영은 "삼라만상이 모두 虛幻(허환)이므로 有(유)를 드러내어 그 본체가 공함을 밝혔으니, 이 句(구)는 有(유)를 부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有無也者(유무야자)'에 대해서는 "無(무)가 있는가?라고 짐짓 물어 비단 有가 부정될 뿐 아니라 無도 부정됨을 밝혔다. 이 句(구)는 無(무)를 부정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有未始有無也者(유미시유무야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無가 있지 않음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짐짓 물은 것이니, 이 句(구)는 無(무)가 아님을 부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끝으로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유미시유부미시유무야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無가 있지 않음이 일찍 있지 않은가?라고 짐짓 물었으니, 이는 無가 아님도 아님을 부정한 것이다.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고 거친 데서 묘한 데로 들어가며, 有의 긍정으로부터 시작하여 無가 아니라고 마치니, 이는 사구백비를 초월했음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즉 성현영은 有, 無, 未始有無(미시유무), 未始有夫未始有無(미시유부미시유무)의 四句(사구)를 [중론]의 四句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四句(사구)의 형식에서 장자 [제물론]의 四句(사구)와 [중론]의 四句는 약간의 다름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四句(사구)가 다 같이 형이상자에 대한 무한소급을 부정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장자 [제물론]의 四句(사구)나 [중론]의 四句를 막론하고 모두 분석적 소급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무한하게 소급해도 여전히 분석에 대한 집착에 불과하다.
따라서 四句는 중론이나 장자 [제물론]을 막론하고 모두 분석적 사유로부터의 초월을 요구한다.
장자 [제물론]에서는 그것을 "俄而有無矣, 而未知有無之, 果孰有孰無也(아이유무의, 이미지유무지, 과숙유숙무야)"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한 성현영의 설명은, "앞에서는 유무의 자취로부터 비유비무의 근본으로 들어왔는데, 이제 비유비무의 본체로부터 유무의 작용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이 글의 앞에서는 사구를 통해 유무에 대한 집착(=분석적 무한소급)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는데, 여기에서는 반대로 유무의 집착을 초월한 정신 경계[곽상의 無心(무심)이나 성현영의 重玄(중현)의 경계]에서 유무를 관조하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영은 "俄(아)는 卽體卽用(즉체즉용)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유무의 작용에 나아가 비유비무의 본체를 밝힌 것"이라고 거듭 말하였다. 즉 '俄而有無矣(아이유무의)'는 '비유비무'인 본체가 '유무'의 작용을 일으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현영의 重玄(중현)이 體用(체용)으로 전환함을 주목해야 한다. 重玄(중현)을 '非有非無(비유비무)'에 대한 부정, 즉 개념분석의 무한소급으로부터의 초월이라고 한다면, 체용은 초월의 정신 경계에서 다시 현상을 관조함이 된다.
승조에게서 볼 수 있는 心體(심체)와 그 照用(조용)의 體卽用(체즉용), 用卽體(용즉체) 혹은 卽體卽用(즉체즉용)의 경계가 성현영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성현영의 중현은 분명히 반야공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이미 중현적 사유방법은 곽상에게도 있고 '장자' [제물론]에도 내재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한 성현영 역시 승조와 같이 인식에서의 초월과 체용론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당 초기에 이미 불교와 도가의 철학이 상호 침투하여 새로운 형태의 철학, 즉 선종을 발생할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시사한다.
4. 慧能의 頓悟와 체용론(혜능의 돈오와 체용론)
먼저 六祖壇經(육조단경)에 보이는 혜능(638∼713)이 말한 체용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善知識(선지식)이여! 定(정)과 惠(혜)는 무엇과 같은가? 마치 燈(등)과 光(광)의 관계와 같으니, 燈(등)이 있으면 光(광)이 있고 燈(등)이 없으면 光(광)이 없다. 燈(등)은 光(광)의 體(체)요 光(광)은 燈(등)의 用(용)이다.
여기에서 '燈(등)이 있으면 光(광)이 있고 燈(등)이 없으면 光(광)이 없다'는 것은 '燈'과 '光'의 인과관계를 규정하는 진술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燈은 光의 體(체)요, 光은 燈의 用(용)'이라는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體用論=因果論(체용론=인과론)이라는 추론을 재촉한다.
과연 체용론은 곧 인과론을 의미하는 것일까? 육조단경에 보이는 다음의 진술은 그러한 추론을 유보하게 한다.
定(정)은 惠(혜)의 體(체)요 惠(체)는 定(정)의 用(용)이니, 惠(혜)에 卽(즉)하였을 때는 定(정)이 惠(혜)에 있고 定(정)에 卽(즉)하였을 때는 惠(혜)가 定(정)에 있다.
善知識(선지식)이여! 이 뜻은 곧 定과 惠가 平等(평등)하다는 것이다. 道(도)를 배우는 사람은 생각하되, 定이 먼저 있어서 惠를 발생한다거나, 惠가 먼저 있어서 定을 발생한다거나, 定과 惠가 각각 別體(별체)라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法(법)에 두 모양(二相;이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진술은 定(정)과 惠(혜)의 관계가 단순히 因果關係(인과관계)가 아님을 분명히 말해 준다. 즉 위에서 "定이 먼저 있어서 惠를 發(발)한다거나, 惠(혜)가 먼저 있어서 定(정)을 發(발)한다거나, 定과 惠가 각각 別體(별체)라고 말하지 말라"는 언표는 양자간의 時間的(시간적) 성격과 非對等的(비대등적) 성격을 명백히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惠(혜)에 卽(즉)하였을 때는 定(정)이 惠(혜)에 있고, 定(정)에 卽(즉)하였을 때는 惠(혜)가 定(정)에 있다"는 진술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定과 惠는 相卽的(상즉적) 또는 相含的(상함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즉 육조의 말에 의하면, 양자는 '平等(평등)'한 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체용의 관계란, '燈(등)과 光(광)의 비유'가 지시하는 바와 같이, 분명히 원인과 결과의 관계이면서도 동시에 시간성과 비대등성은 부정되는 相卽的(상즉적) 또는 相含的(상함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양면을 통틀어 말하자면 '상즉적 인과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상즉적 인과관계'라는 것은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상즉'과 '인과'는 서로 모순관계가 아닌가? 여기에서는 이 문제의 논리적 타당성을 살피기 위한 논의는 일단 피하기로 하자.
그 대신 [육조단경] 내에서 '상즉적 인과관계'로서의 체용론이 무엇을 위해서 시설되었는가를 살펴보고 뒤에서 그 의미를 서술하기로 한다. 다시 말하면 육조단경에서 체용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자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는 定(정)과 惠(혜)를 체용관계로 규정한 이외에 또 眞如(진여)와 念(염) 역시 체용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즉 "眞如(진여)는 念(염)의 體(체)요, 念(염)은 眞如(진여)의 用(용)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진여란 물론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自性淸淨心(자성청정심)으로서, 육조단경에서도 역시 "性體淸淨(성체청정)"이라고 하여 진여의 청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六祖(육조)의 宗旨(종지)는 그가 "人性(인성)은 본래 淸淨(청정)하되 妄念(망념) 때문에 眞如(진여)가 덮여 있으니 妄念(망념)을 떠나면 本性(본성)은 淸淨(청정)하니라"라고 말한 데에 있다. 즉 心은 본래 淸淨(청정)한 眞如(진여)로되 다만 妄念(망념)이 眞如(진여)를 가림으로 인해서 미혹하다는 것이다.
육조는 그것을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 위는 밝으나 아래는 어두워 해와 달을 보지 못하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해와 달이 항상 밝다'는 것은 본체가 항상 스스로 작용을 일으키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眞如(진여)는 다만 청정한 자체를 지키지 않고 끊임없이 念(염)의 作用(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眞如(진여)와 念(염)의 體用(체용)관계이다.
진여가 本體(본체)로서 念(염)의 作用(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은, 육조가 말한 바 "本性(본성)이 念(염)을 일으켜 비록 見聞覺知(견문각지)에 卽(즉)해 있으나 萬境(만경)에 물들지 않아 항상 自在하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즉 본체의 작용인 염은 만물을 견문각지하되 만물을 대상화하여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자재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혜능이 말하는, 진여의 작용으로서의 염은 사실 무념의 염이라고 할 수 있다. 혜능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선지식아, 나의 법문은 본래 모두 無念(무념)을 종지로 하고, 無相(무상)을 본체로 하고, 無住(무주)를 근본으로 한다. 무엇을 無相(무상)이라 하는가? 相(상)에서 相(상)을 떠남이요, 無念(무념)이란 念(념)에서 念(념)하지 않음이요,
無住(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念念(염념)이 主着(주착)하지 않으나, 前念(전념), 今念(금념), 後念(후념)이 念念(염염) 상속하여 단절이 없으니, 만약 一念(일념)이 단절하면 法身(법신)이 곧 色身(색신)을 떠나게 된다.
念念(염념)이 상속하는 중에 일체법에 주착함이 없어야 하니 일념이라도 만약 머물면 念念(염념)이 곧 주착하게 되니 이를 얽매인다고 이름하거니와 일체법에 염념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으리니 이로써 無住(무주)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이상에 의하면 무념, 무상, 무주는 모두 글자 그대로 염이 없음, 상이 없음, 머무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無相者(무상자), 於相離相(어상리상)' 즉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떠남'이라고 하였거니와 의식의 대상인 사물 자체는 부정하지 않되 대상에 집착하지 않음을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대상이 자성을 갖고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의 소산이라고 한다. 위에서 혜능이 "前念(전념), 今念(금념), 後念(후념)이 念念(염념) 상속하여 단절이 없으니,
만약 一念(일념)이 단절하면 法身(법신)이 곧 色身(색신)을 떠나게 된다"고 말한 것도 역시 우리의 앞에 대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실은 염념부단히 상속하는 의식의 소산임을 알려 준다.
그래서 "念念(염념)이 상속하는 중에 일체법에 주착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우리가 의식 밖에 초월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일체 사물은 사실 의식주관에 의해서 표상된 대상임을 알고 그 대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밖으로는 대상이 사라지고 안으로는 그 대상과 대립한 주관의식도 또한 사라져서 주객이 모두 사라진 경계만이 남을 것이다.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념이라도 만약 머물면 念念(염념)이 곧 주착하게 되니 이를 얽매인다고 이름하거니와 일체법에 염념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으리라"고 혜능이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음에 얽매이는 것은 죽음이 자성을 갖고 실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얽매이게 되면 그 마음은 곧 부단히 상속하여 염념이 주착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그렇다고 주착하는 것일 뿐이므로 일체법이 공하여 자성이 없음을 진실로 깨닫는다면 곧 얽매임에서 놓여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얽매임에서 놓여난다는 것은 결코 의식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요, 상속하는 염념은 부단히 흐르되 단지 그것을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혜능은 "육진 경계 속에서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아 거래가 자유로운 것이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 이름한다.
일체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생각을 끊는 것은 그 또한 법에 얽매인 것이니 치우친 견해라 이름한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無念(무념), 無相(무상), 無住(무주)의 無(무)는 곧 '二相(이상)의 諸塵勞(제진로)를 떠남'이다.
즉 염을 자성을 갖는 실재로 집착하는 有邊(유변)이나, 염을 돈단하는 無邊(무변)에 떨어지는 일체의 헛수고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역시 혜능이 "자기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을 보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 깨끗함을 보면 도리어 깨끗하다는 망상이 생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단지 분별의식을 떠나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의식하는 염은 부정하지 않되 다만 대상에 대한 분별의식, 즉 대상을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대상을 지각하는 염 자체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진여는 염의 본체요, 염은 진여의 작용이다"라고 말한 혜능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살펴야 한다.
다시 한 번 확인하는바, 대상은 본체가 없는 무자성공이며, 우리의 마음 또한 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하다 함은 결코 그 존재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대상이 본체가 없는 무자성공이라 함은, 바꾸어 말하면 곧 나의 마음이 대상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그 자신은 대상화되지 않는 심체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공하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無一相可得(무일상가득)의 진여가 역력하게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작용, 즉 照用(조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진여는 無一相可得(무일상가득)이므로 照用(조용)히 곧 本體(본체)로서 '用卽體(용즉체)'요, 작용을 떠나서 본체가 없으므로 '體卽用(체즉용)'이다. 고형곤은 이를,
일체 대상의식을 가지지 않고 과거와 현재 사이에 接滅(접멸)과 引起(인기)가 단절되어 전후가 斷續(단속)될 때, 現今(현금) 찰나가 지나간 찰나를 ('지금 금방 지나간 것'으로 직관하는 현찰나의 과거직관 속에서) 회상하는 把持作用(파지작용)에 의하여 과거, 현재의 연결이 지어지지 않을 때,
中間自孤(중간자고)의 無心(무심)의 一念(일념)인 現今(현금)의 現前一念(현전일념)에서의 '看看 萬象與 森羅 只此一身常獨露(간간 만상여 삼라 지차일신상독로)'가 곧 無量壽 無量光(무량수 무량광)의 서방정토인 것이다.
라고 말하거니와, 역시 그가 말한 것처럼 "존재는 이미 훤하게 현전해 있고,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현전성인 常住涅槃(상주열반)이건만, 인간의 無明不了(무명불료)로 말미암은 주객대립의 표상세계 속에 존재는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즉 대상화한 무명의식을 떠날 때 존재는 본래 그대로 우리 앞에 현전하고 있다.
혜능이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여 위는 밝으나 아래는 어두워 해와 달을 보지 못하다가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드러난다"고 말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체용론의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해와 달은 항상 밝게 비추므로 본체성을 가지며, 그러나 그 자체는 작용을 떠나 독립하지 않으므로 무자성공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頓悟(돈오)가 성립할 토대를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진여 자성이 본래 훤하게 자신을 현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몰록 깨칠 것인가?
그 깨침은 혜능이 말한 대로 "見一切法(견일체법), 不着一切法(불착일체법)"의 깨우칠 것 없는 깨우침이므로 頓悟(돈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결국 '卽體卽用(즉체즉용)' '體卽用(체즉용), 用卽體(용즉체)'의 체용론이 아니고는 본체의 공성을 절묘하게 표현하여 돈오의 종지를 드러낼 길이 없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존재는 명백히 현전하며 照用(조용)을 일으키므로 眞如(진여)와 照用(조용)은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진여는 자체가 공하여 결코 작용을 떠난 독립적 실체가 아니므로 또한 照用(조용)과 相卽(상즉)해 있다. 체용론에 인과성과 상즉성이 맞물려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체용론은 결코 일반적인 본체론은 아니로되 묘하게 그 본체성을 드러내면서도 상즉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용론의 발견이야말로 중국불교인 돈오설이 성립하는 토대요, 불교와 도가의 교섭이 낳은 하나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5. 결 론
불교와 도가는 비판 철학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불교는 브라흐마니즘의 브라흐만을 비판하였고, 도가는 천의 인격적 주재성과 인위적인 문화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체론을 거부하는 불교의 공사상과 무위자연을 말하는 도가의 철학은 부정의 지혜이다.
그것은 부정이 부정에 머물지 않고 도리어 긍정을 낳기 때문이다. 공사상이 대승불교의 원천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승불교의 반야공사상은 二乘{이승=聲聞(성문)·獨覺(독각)의 小乘(소승)}이 생사를 두려워하고 열반만을 좋아하는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시설되었다.
그것은 {大般若經(대반야경)}의 "보살은 생사에 처함을 낙으로 여기고 열반을 낙으로 여기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모든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세간법이 공함을 아는 보살은 생사의 두려움에서 초출할 수 있고, 출세간법 역시 공함을 아는 보살은 열반의 쾌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체의 두려움과 즐거움의 이변을 떠나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이야말로 대승불교가 종교로 성립할 수 있는 근본정신이다.
즉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이변에서 능히 초월할 수 있는 주체적 정신 경계를 완성하는 데 불교의 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종은 이러한 정신적 초탈을 극대화하여 종교의 경계에서 미학적 경지를 열어 놓은 특징을 갖는다고 볼 수 있거니와, 여기에서 도가사상과의 교섭이 작용한다.
즉 도가사상과의 교섭을 통해서 주체적 초탈을 극대화한 중국불교로서의 선종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중국불교가 성립하는 철학적 근거가 체용론에 있음을 밝혔다.
반야공사상의 '非有非無(비유비무)'와 {장자}의 [제물론]에서 보이는 '無是無非(무시무비)'는 다 같이 생멸심 또는 분별심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패러독스이며, 또한 진리를 정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중생의 집착에 대해 '∼도 아니고, 또한 ∼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깨달은 부처의 마음은 정면에서 '∼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불교의 특징이 바로 '∼이다'라고 말하는 불성사상의 극치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논리, 즉 일체가 진리로서 우리 앞에 현전하고 있다는 체용론의 건립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도가에 깊이 침잠했던 승조가 반야공사상을 충분히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체용론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반야학과 도가의 만남을 전제한다. 그리고 사실상 체용론이 왕필에게서 시작되고 그 근거가 이미 노장에 내재했음을 밝혀서 체용론의 연원이 도가라는 것을 밝혔다.
물론 곽상의 자이독화설은 반야학과 도가의 사이를 좁히는 가교로 작용하였으며, 성현영에 와서는 중현과 체용이 어울리면서 도가와 불교의 상호 침투가 극대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선종의 돈오라는 중국불교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중국철학사에서 반드시 이러한 경로를 거쳐 선종이 이루어졌다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체용론이 돈오설의 논리적·철학적 배경이며, 도가사상과의 교섭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밝힌 [장자] [제물론]의 사유방법과 왕필, 곽상의 철학은 도가의 사상이 충분히 불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깊이와 폭을 갖고 있었음을 말하려는 것이고,
승조, 성현영, 혜능에 대한 서술은 불교가 반야공사상을 견지하면서 도가의 체용론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였음을 강조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논문은 사상사의 흐름을 다원적으로 보려는 관점의 소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