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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과 깨달음은 무엇인가

불교의 수행과정 및 계위와 분석

불교의 수행과정 및 계위와 분석

 

초기부파불교

 

중생의 삶, 고통의 삶을 청산하고 깨침의 길로 들어섰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폼이 잘 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생으로 살았던 습기(習氣)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여러 종파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단계와 과정을 설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는 곧 폼 잡는 단계에서 폼 나는 단계로 한층 성숙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깨침에 이르는 과정을 4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소승사과(小乘四果), 혹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한다. 성문이란 글자 그대로 붓다의 음성을 직접 듣고 수행하는 제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下化衆生)’ 보살이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하면서 성문은 홀로 연기의 진리를 깨치는 연각(緣覺)과 함께 소승으로 분류되었다. 성문과 연각, 보살을 흔히 삼승(三乘)이라 부른다.

성문사과에서 맨 처음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라고 한다. 이를 한자로 입류과(入流果), 혹은 예류과(預流果)라고 하는데, 깨침이라는 흐름(流)에 들어갔다(入)는 뜻이다. 이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사성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색·성·향·미·촉·법의 경계에 끌려가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수다원과에 들게 되면 욕계(欲界)와 색계(色界)를 7번 반복한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처음으로 양복을 입고 폼을 잡는 단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사다함과(斯陀含果)다. 일래과(一來果)라고도 부르는데, 천상계와 인간계를 한번 왕래한다는 뜻이다.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들었으나, 아직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윤회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다원과에 비하면 수행이 많이 익은 단계다. 비유하자면, 양복을 자주 입어서 몸에도 익숙하여 폼이 조금 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아나함과(阿那含果)다. 이 경지는 불래과(不來果), 혹은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하는데, 윤회하는 세계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행이 많이 익어서 더 이상 욕심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는 경지다. 양복을 입었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폼이 아주 잘 나는 상태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다.

마지막 단계는 아라한과(Arahan, 阿羅漢果)다. 이 단계는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은 경지다. 번뇌라는 도적을 죽였다고 해서 살적(殺賊)이라고 부르며,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을 이룬 성인 가운데 최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사찰에 있는 나한전(羅漢殿)은 바로 아라한을 모신 전각이다.

이처럼 성문사과는 번뇌를 끊은 정도에 따라 깨침의 질적 차이를 두고 있다. 경전에도 ‘누구는 수다원과에 들었다, 누구는 아라한과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이것은 수행의 차이에서 결정되지만, 근본적으로 얼마나 폼이 잘 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폼은 구체적인 삶에서 드러난다. 결국 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가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에 관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돈오돈수(頓悟頓修)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돈점논쟁의 핵심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얼마나 깨치고 닦았는지는 순간순간 부딪치는 경계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앞서 반복한 것처럼 폼 잡기도 쉽지 않지만 폼 나기는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출처] 깨침에 이르는 4단계(四果)|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사향은 사과라는 깨달음의 결과에 도달하는 원인이 되는 깨달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예류향은 성자가 되는 최초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견도(見道)라고 하며, 예류과에서 아라한향까지는 남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하는 단계인 수도(修道)라고 한다. 마지막 아라한과는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사향사과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각 성자의 새롭게 제거된 족쇄[번뇌]와 남아 있는 윤회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출처] 사향사과 사도사과 사향사득 사쌍팔배 사과향 팔보특가라 팔현성 팔성 팔배|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사향사과-위키백과

사향사과(四向四果)는 초기불교 이래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의 수행 단계[向] 및 도달 경지[果]를 말한다. 예류(預流)[수다원(須陀洹)], 일래(一來)[사다함(斯陀含)], 불환(不還)[아나함(阿那含)], 응공(應供)[아라한(阿羅漢)]의 네 성자가 각각 향(pratipannaka, paṭipannaka)과 과(phala)로 쌍을 이루는데, 여기서 향은 도(道, magga)라고도 한다. 사향사과는 사도사과(四道四果), 사향사득(四向四得), 사쌍팔배(四雙八輩), 사과향(四果向), 팔보특가라(八補特迦羅), 팔현성(八賢聖), 팔성(八聖), 팔배(八輩)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초기경전에서 붓다의 제자[聲聞]들 가운데 성자가 된 제자들을 네 쌍의 여덟 무리[四雙八輩]로 불렀다. 이들이 사향사과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붓다의 제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성자의 최고 경지가 아라한이었고 아라한이 되는 길에 대해서 세밀한 설명을 제시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독특한 수행론과 번뇌론에 근거해서 사향사과를 점진적인 깨달음으로 설명하고 있고, 테라와다에서는 지혜의 성숙단계에 따른 사향사과를 설명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사향사과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제자를 성문승(聲聞乘) 또는 소승(小乘)이라고 하여, 붓다가 되는 보살승(菩薩乘)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아라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붓다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살승(菩薩乘)이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한다.

 

내용

 

사향은

예류향[śrotāpatti-pratipannaka(범어.이하 범으로 표기), sotāpatti-paṭipannaka(팔리어.이하 팔로 표기)],

일래향[sakṛdāgāmini-pratipannaka(범). sakadāgāmi-paṭipannaka(팔)],

불환향[anāgāmi-pratipannaka(범), anāgāmi-paṭipannaka(팔)],

아라한향[arhat-pratipannaka(범), arahatta-paṭipannaka(팔)]이다.

 

사과는

예류과[śrotāpanna(범), sotāpanna(팔)],

일래과[sakṛdāgāmi-phala(범), sakadāgāmi-phala(팔)],

불환과[anāgāmi-phala(범·팔)],

아라한과[arhat-phala(범), arahatta-paṭipannaka(팔)]이다.

 

사향은 사과라는 깨달음의 결과에 도달하는 원인이 되는 깨달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예류향은 성자가 되는 최초의 깨달음의 순간으로 견도(見道)라고 하며, 예류과에서 아라한향까지는 남은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을 하는 단계인 수도(修道)라고 한다. 마지막 아라한과는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다는 의미로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사향사과의 체험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 각 성자의 새롭게 제거된 족쇄[번뇌]와 남아 있는 윤회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성자의 분류 새롭게 제거된 족쇄(번뇌) 남아있는 윤회의 종류
예류(預流 )수타원, 소따빤나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 의심, 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 인간과 욕계 천상에 최대 7 번
윤회
사악도(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에 떨어지)에 떨어지지 않음
일래 (一來 )사다함, 사까다가미 새로운 근절 없음. 탐욕, 분노, 무지의 엷어짐 욕계(도솔천 등 )에 한 번 윤회
불환 (不還 )아나함, 아나가미 감각적 욕망과 악의(惡意) 색계 (정거천)에 즉시 태어남
(化生)
응공 (應供 )아라한, 아라하따 색계(色界)에 대한 갈망,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갈망, 아만, 들뜸, 무지 없음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남

예류과의 증득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제자는 예류에 들도록 이끄는 “네 가지 요소”를 닦아야 한다. 지혜롭고 덕 있는 참된 사람[스승]을 섬길 것, 정법[참된 법]을 배울 것, 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임[如理作意], 윤리[戒]·집중[定]·지혜[慧]의 세 가지 실천[三學]을 닦음으로써 성자의 법에 이르게 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예류가 된 성자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다. ①붓다, ②담마, ③상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의 확립, ④성인에게 친숙하고 집중에 도움이 되는 도덕적 덕목인 다섯 가지 윤리[五戒]를 굳게 지키는 것이다. 법의 진리를 보고 나서, 예류는 남아있는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더욱 통찰을 길러 다음의 이정표인 일래를 깨닫는 것이다.

일래의 단계는 탐욕·분노·무지라는 세 가지 번뇌의 뿌리를 뽑을 정도로 약화시켜 도솔천 등 욕계에 한 번만 윤회하여 괴로움의 종식을 이룬다. 예류 혹은 일래를 얻은 제자는 다음의 두 단계인 불환과 아라한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불환의 단계는 다섯 가지 낮은 족쇄의 소멸을 통해 도달하고, 다섯 가지 높은 족쇄만을 남겨 놓는다. 아라한이 되면 무지를 뿌리로 하는 모든 번뇌가 소멸된다.

의의와 평가

사향사과의 성자의 전통은 현재 테라와다 불교에서 전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길이 붓다가 가르친 길이며, 그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전통이 동남아시아에서 전해오고 있다. 대승에서 폄하한 소승이 테라와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붓다뿐만 아니라 아라한(無學), 그리고 배움이 있고 덕이 있는 성자가 된 제자들[有學]도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활동하고, 세상을 위한 연민에서 삶을 살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과 인간은 물론 천신들의 행복과 선과 안녕을 위해서 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라와다를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처]사향사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작성자임기영불교연구소

 

 

아라한(阿羅漢)은 산스크리스트어 ‘아르하트(arhat)’와 팔리어 ‘아라한트(arahant)’의 음역으로 아로한(阿盧漢), 아라하(阿羅訶, 阿囉呵), 아려하(阿黎呵) 알라갈제(遏囉曷帝)로 음역하기도 한다. 한편 아라한은 그 의미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공양을 받을 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고 하며,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없앴다는 의미에서 ‘살적(殺賊)’, 진리에 상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응진(應眞)’, 모든 번뇌를 끊어 더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라는 점에서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불생(不生)’이나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하는데, 보통은 나한(羅漢)이라고 칭한다.

원시불교시대에 『아함경(阿含經)』과 소승 율장에서는 아라한을 수행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자로 불교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즉 성자(聖者)로 이해하였다. 여기서 성자란 모든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여 천안명(天眼明)·숙명명(宿命明)·누진명(漏盡明)의 삼명(三明)을 획득하고 수행의 목표인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을 지칭한다. 이후 상좌부 불교에서는 아라한 신앙이 쇠퇴하고 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 등 대승불교 국가에서 나한 신앙의 형태로 존속하였다. 중국에서는 삼장법사 현장의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가 번역되어 이를 근거로 나한도가 널리 유통되며 나한 신앙이 확산되었다. 특히 당 말에는 나한을 공양하는 나한공(羅漢供)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나한 신앙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나한 신앙과 나반(那畔) 신앙 혹은 독성(獨聖)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나반 신앙은 한국불교의 고유한 신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불법을 듣고 출가한 수행자인 성문이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를 거쳐 도달하는 최고 경지를 가리키는 불교교리나한.|작성자임기영불교연구소

 

 

 

사쌍팔배(四雙八輩)

 

무아론에 기반해 상을 갖지 않게 하는 가르침

사쌍팔배, 성문승 계위 소개

각각의 계위를 소개했지만

근본은 아상 극복하는 게 핵심

‘금강경’ 제9 일상무상분에 성문승(聲聞僧)을 수행계위에 따라 넷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다시 향(向)과 과(果)로 나눈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언급되어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넷이 되기 때문에 사쌍(四雙)이라 하고 통틀어 여덟 계위이기 때문에 팔배(八輩)라고 한다. 특정한 순간에 어디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된 것을 향(向)이라 하는데 그 마음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며, 방향이 정해져 나아가다 얻은 결과를 과(果)라 하는데 그 마음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향(向)은 범어로 마르가(mārga, 道, 길)이므로 도(道)라고도 일컫는다.

우선 일래자(一來者) 부분의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을 옮겨보면 “사다함은 한 차례 더 갔다옴을 일컫지만 실제로는 갔다옴이 없사온데, 그래서 사다함이라 일컫는다”라는 문장이 있다. ‘사다함’ 또한 ‘갔다옴’이란 의미이기에 ‘①갔다옴을 일컬음 – ②갔다옴이 없음 – ③갔다옴이라 일컬음’이므로 언뜻 보아서는 즉비논리(卽非論理)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해당 문구의 범어원문을 옮겨보면 “일래자(一來者)는 일래과(一來果)를 얻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일래과(一來果)를 얻었다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래자라고 일컬어집니다”라고 되어있기에, 속제와 진제를 넘나드는 즉비논리(卽非論理)에 의한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무아론에 기반하여 상(相, saṁjñā)을 갖지 않도록 하는 가르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를 일으키려는 경전에 한 분(分)을 할애하여 그저 성문승의 계위를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니, 이 또한 약해지려는 무아론을 복원시키려는 ‘금강경’의 요지에서 전혀 벗어나있지 않다. 그럼에도 사쌍팔배의 각 계위별 의미를 해당 범어를 참조하여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흐름에 참여하여 들어갔다는 의미의 예류(預流)는 범어로 ‘srotas[흐름]­panna[들어감]'로서 음역하면 수다원(須陀洹)인데, 해탈로 향하는 성스럽고도 커다란 흐름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수행자가 견도(見道)에 들어가 사성제의 이치를 깨닫고 청정한 지혜를 얻게 되면 예류향(預流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예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류과를 증득하면 더 이상 악처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으며, 천계와 인계를 최대 일곱 차례 왕복한 후엔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한 차례 다녀온다는 의미의 일래(一來)는 범어로 ‘sakṛd[한차례]­āgāmin[옴]'으로서 음역하면 사다함(斯陀含)이다. 예류과를 증득한 사람은 욕계의 수혹(修惑) 9품 가운데 앞의 6품을 끊게 되면 일래향(一來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일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일래과를 증득하면 천계와 인계를 한 차례만 왕복하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환(不還)은 범어로 ‘an[否定]āgāmin[옴]'으로서 음역하면 아나함(阿那含)이다. 일래과를 증득한 사람은 욕계의 수혹 9품 가운데 나머지 3품을 끊게 되면 불환향(不還向)이라 일컫는데, 그제야 불환과를 향해 나아갈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불환과를 증득한 이가 금생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하면 사후에 천계에 태어나 그곳에서 열반을 성취하므로 금생 이후 더 이상 욕계에 돌아오는 일은 없다.

아라한(阿羅漢)은 범어 아르한(arhan)의 음역이다. 아르핫은 동사 ‘√arh(~할 가치가 있다)'에서 온 말로서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공양을 올릴 가치가 있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불교 이전부터 훌륭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아라한'은 부파불교에선 모든 번뇌를 멸한 자로서 성문승 최고의 계위에 해당한다.

사향사과 가운데 예류과만 증득하게 되면 해탈을 향하는 큰 흐름에 들어서는 까닭에 그만큼 예류과가 중요한 셈인데 예류과를 증득한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이 ①유신견(有身見)을 극복하였고 ②회의적 의심을 극복하였으며 ③계금취견(戒禁取見)에서 자유롭다 하였으므로, 이 또한 무아론(無我論)을 기반으로 하는 아상(我相)의 극복이 핵심이라는 점은 ‘금강경’의 근본요지와 다르지 않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출처] 사쌍팔배(四雙八輩)|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불교의 사유방식

10가지 족쇄(samyojana)와 사향사과(四向四果)ㆍ사쌍팔배(四雙八輩)ㆍ10결(오하분결, 오상분결)ㆍ십사(오둔사, 오리사)

10가지 족쇄(samyojana)와 사향사과(四向四果)사쌍팔배(四雙八輩)

10결(結, dasa saṁyojjanāni)
=10가지 족쇄(足鎖)ㆍ결박(結縛)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십사(十使)
오五
하下
분分
결結
①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소멸 소멸 소멸 소멸 탐(貪) 오둔사
(五鈍使)

사혹(思惑)
혹은
수혹(修惑)
②의(疑)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소멸 소멸 소멸 소멸 진(嗔)
③계금취견(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소멸 소멸 소멸 소멸 치(痴)
④욕탐(欲貪)
(감각적 욕망, kāma-rāga)

약화 소멸 소멸 만(慢)
⑤진에(嗔恚)
적의(성냄, paṭigha)

약화 소멸 소멸 의(疑)
오五
상上
분分
결結
⑥색탐결(色貪結)
(색계 집착, rūpa-rāga)



소멸 유신견 오리사
(五利使)

견혹(見惑)
⑦무색탐결(無色貪結)
(무색계 집착, arūpa-rāga)



소멸 변취견
⑧만결(慢結)
(māna)


소멸 사견
⑨도거결(掉擧結)
(들뜸, uddhacca)


소멸 계금취견
⑩무명결(無明結)
(치심, avijjā)


소멸 견취견

▣ 번뇌 = 루(漏)ㆍ혹(惑)ㆍ전(纏)ㆍ결(結)ㆍ사(使)ㆍ취(取)ㆍ적(賊)ㆍ개(蓋) 등으로 나타난다.

▣ 5하분결(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

: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結縛)ㆍ다섯 가지 거친 족쇄(足鎖)

: 욕망의 세계[욕계(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 5상분결(五上分結, Uddhabhāgiyāni saṁyojjāni)

: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結縛)ㆍ다섯 가지 미세한 족쇄(足鎖)

: 미세한 물질의 세계[색계(色界)]와 정신의 세계[무색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번뇌.

▣ 십사(十使) : 오둔사(五鈍使)와 오리사(五利使)

: 오리사(五利使)와 오둔사(五鈍使)로 나눠지는데 이것은 그 성품이 예리하고 우둔함에 의하여 언제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므로 십번뇌(十煩惱)라고도 한다.

1)오둔사(五鈍使) : 사혹(思惑) 혹은 수혹(修惑, 수도에 의해 없어지는 혹)

: 누구에게나 근본적으로 있는 5가지의 번뇌를 말한다.

: 탐(貪)ㆍ진(嗔)ㆍ치[痴 =무명(無明)]ㆍ만(慢)ㆍ의(疑) 이니 이는 5리사에 비하면 그 성질이 지둔(遲鈍)하고 마음을 구사(驅使)시키는 번뇌이므로 둔사(鈍使)라고 한다.

2)오리사(五利使) : 견혹(見惑)

: 수행하는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5가지 번뇌를 말한다.

: 악견(惡見)[=유신견(有身見)ㆍ변취견(邊取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진리를 추구하여 일어나고 성질이 날카로와 중생의 마음을 구사(驅使)하므로 이사(利使)라 한다.

▣ 유신견[有身見, 오취온을 실재하는 아(我)와 아소유(我所有)로 집착하는 견해]

ㆍ아견(我見) : 오온화합생인 내 몸을 실재시 하여 삼독의 번뇌를 일으킴

ㆍ아소견(我所見) : 의식주 등을 소유함에 본래 주인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나에 따른 기구나 권속을 자기의소유로 잘못 집착하는 것.

▣ 변취(집)견[邊取(執)見, 단견(斷見)이나 상견(常見)의 어느 한쪽에 집착하는 견해]

▣ 사견(邪見, 잘못된 삿된 생각으로 인과를 부정하는 삿된 견해)

▣ 견취견(見取見,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여 진실한 견해라고 고집하는 견해)

▣ 계금취견(戒禁取見, 잘못된 규율과 의식에 대하여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으로 옮긴 실라바따 빠라마사(Sīlabbata-parāmāsa)는 종교적인 금계와 의례ㆍ의식을 지킴으로써 청정할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례ㆍ의식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도 Wrong belief in the practise, 또는 attachment to mere rules and rites등으로 풀이된다. 이는 중생을 삼계(三界)에 붙들어 매놓고 있는 10가지 족쇄 가운데 세 번째 족쇄이며 네 가지 집착 중의 하나이다. 성자의 초보 단계인 수다원도에 들면 유신견, 의심과 같은 족쇄들과 함께 모두 뿌리가 뽑히게 된다.

수행에는 바른 수행과 그릇된 수행이 있다. 바른 수행은 사성제를 알아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수행은 사성제를 몰라 ‘계율과 의식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 한다.

▣ 사향사과(四向四果)ㆍ사쌍팔배(四雙八輩)의 성자(聖者)

1. 수다원(須陀洹) :소따빤나(Sotāpanna)의 음역으로서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

거스를 수 없는 열반의 ‘흐름에 들어선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예류(預流)로 의역하거나 수다원(須陀洹)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stream-winner라고 한다. 중생들을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어놓는 열 가지의 족쇄(結, saṃyojana) 가운데에서 처음의 세 가지 족쇄인 ➀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➁회의적 의심(vicikicchā), ➂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에서 벗어난 분이다. 수다원은 또한 나쁜 세계(惡趣, apāya)로 인도할 만큼 강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잘라버리며 다른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 즉 사견과 함께 하는 탐욕에 뿌리를 둔 네 가지 마음, 그리고 의심과 함께하는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을 영원히 제거해버린다. 수다원은 구경의 열반에 도달하는데 까지 최대 일곱 생이 더 남아 있으며 나쁜 세계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2. 사다함(斯陀含) : 사까다가민(Sakadāgāmin)의 음역이며 일왕래(一往來)ㆍ일래(一來)

‘한 번만 더 되돌아올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일래(一來)로 의역하거나 사다함(斯陀含)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once-returner라고 한다. 수다원이 제거한 세 가지 족쇄이외의 다른 족쇄들을 더 제거하지는 않지만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희박하게 만든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해탈하기 전에 오직 한 번만 더 이 욕계에 태어난다.

3. 아나함(阿那含) : 아나가민(Anāgamin)의 음역으로 불래(不來)ㆍ불환(不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불환(不還)으로 의역하거나 아나함(阿那含)으로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none-returner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색계(色界)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 거기서 반열반(般涅槃)에 든다. 아나함은 ➃감각적 욕망(kāma-rāgā)과 ➄적의(paṭigha)의 족쇄를 잘라 버리며 성냄에 뿌리를 둔 두 가지 마음을 영원히 제거한다.

4. 아라한(阿羅漢) : 응공(應供)ㆍ응진(應眞)ㆍ살적(殺賊)ㆍ불생(不生)ㆍ무생(無生)ㆍ무학(無學)

아라하따(arhatta)는 아라한의 과위와 상태를 추상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술어이고, 아라한과를 얻은 이를 구체적으로 통칭할 때에는 아라한(arahant)이란 술어를 쓴다. 이 아라한은 모든 번뇌(kilesa)를 완전히 멸한 사람을 말하며, 제자(sāvaka)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도 모든 번뇌를 멸했다는 점에서 아라한이고 이 점에서는 제자와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는 정등각의 지혜(sammā-sambodhi-ñāṇa)로 제자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아라한은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놓는 열 가지 족쇄(結, saṃyojana)를 완전히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떤 존재로도 윤회하지 않는다. 즉 아라한은 존재를 욕계에 묶어두는 번뇌인 다섯 가지 거친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 뿐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오상분결(五上分結), uddhambhagiya-saṃyojana), 즉 ➅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자만(māna) ➈들뜸(uddhacca) ➉무명(avijjā)까지도 완전히 잘라낸 분이다. 그리고 나머지 불선한 마음들, 즉 사견과 함께 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 네 가지와 들뜸과 함께 한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까지 완전히 제거한 분이다. 이러한 아라한은 금생의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이 다하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아라한은 나이나 성이나 신분이나 승속(僧俗)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경에는 7살의 나이 어린 사미가 아라한을 얻은 예가 있고, 주석서에는 셀라(Selā)와 산끼짜(Sankicca)라는 이름의 나이 어린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ThaA.64; PvA.53) 또한 여성 아라한도 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략 400분의 남성 아라한들이 경에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비구이다. 하지만 앙굿따라 니까야(A.iii.451)에는 재가 아라한의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고, 야사(Yasa) 존자, 케마(Khemā) 비구니, 산따띠(Santati) 장관, 숫도다나(Suddodana)왕과 같이 재가자인 채로 아라한이 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밀린다빤하」(Mil.264~266)에서는 아라한과를 얻은 재가자는 그날에 바로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거나 반열반에 드는 길밖에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출처] 10가지 족쇄사향사과사쌍팔배,5하분결, 5상분결아라한|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사향사과의 성자의 전통은 현재 테라와다 불교에서 전하고 있다. 아라한이 되는 길이 붓다가 가르친 길이며, 그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전통이 동남아시아에서 전해오고 있다. 대승에서 폄하한 소승이 테라와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붓다뿐만 아니라 아라한(無學), 그리고 배움이 있고 덕이 있는 성자가 된 제자들[有學]도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활동하고, 세상을 위한 연민에서 삶을 살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과 인간은 물론 천신들의 행복과 선과 안녕을 위해서 법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라와다를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처]사향사과 사도사과 사향사득 사쌍팔배 사과향 팔보특가라 팔현성 팔성 팔배|작성자임기영불교연구소

 

 

 

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

서현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명상학전공 박사과정수료.

I 머리말.

Ⅱ 성인에 대한 이해.

Ⅲ 사향사과의 성립.

Ⅳ 맺음말.

요약문

빨리 문헌에서 말하는 성인은 사향사과를 말한다. 특히 사향사과에서 과를 성취한 사성인은

수행의 단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성인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단초는

빠른 시기의 빨리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다른 관점에서 이들을

연구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사향사과에서 사향과 사과를 묶어서 생각하지 않고 사향설을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사성인에서 사후의 생천과 연관되어 있는 일래와 불환은 현세에서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며, 성립과정에서도 예류와 아라한 사이에 후대에 유입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아울러 사성인의 정의설명에서 몇 가지 부합되지 않은 점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붓다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열반을 강조하였지만, 아울러 삼계윤회와 생천 또한 부정한

것은 아니다.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누구라도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윤회하는 과정에서 삼계윤회와 생천은 불가피한 전제이다. 그리고 사성인의 계위성립설에

있어서도 이들의 해석을 논증할만한 근거자료가 빨리 문헌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일래자에서 엷어지는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감각적 욕망의 탐욕, 악의 그리고 무명을

생기게 하는 근원적인 뿌리이므로, 열 가지 족쇄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향사과와

사성인은 고층문헌에서부터 전체 빨리 문헌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는 붓다에 의한 바른

교설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Ⅰ. 머리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nibbāna)이며, 열반은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탐진치가 소멸된 아라한은 수행의 결실이자 완성이다. 아라한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고통의

종식을 이루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아라한과 더불어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성인의 범주는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로, 이들은 주로 빨리 문헌에서 불⋅법⋅승 가운데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범부로 일컬어진다. 또한 이 여덟 사람 가운데 과(果)를 성취한 네 사람을 사성인, 즉 예류자(預流者, Sotāpanna, Stream Winner), 일래자(一來者, Sakadāgāmi, once Returner), 불환자

(不還者, Anāgāmi, Never Returner) 그리고 아라한(阿羅漢, Arahat,Noble one)이라 한다.

이 사성인은 열 가지 족쇄의 단계적인 제거에 따라 차별되는 경지이므로, 열 가지 족쇄제거를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열반의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성인의 이해는

수행의 성취과정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의 깨우침을

강조하는 우리불교 현실에서는 성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물론

사성인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어왔다.1) 이러한 연구들은 사성인의 위상에 대해서 문헌적으로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 이필원(2008). 예류과에 대한 고찰 ,「아시아연구」창간호, 경북대학교아시아연구소;

이필원(2009). 일래에 대한 고찰 ,「佛敎硏究」제 31집,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한상희

(2008).「초기불교에 나타나는 聖人의 성취와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 眞野龍海(1972). 一來に ついて ,「佐藤博士古稀記念 : 佛敎思想論叢」,

東京, 山喜房佛書林; 藤本 晃(2005). 四沙門果說の 成立と構造 ,「印度哲學佛敎學」第20;

藤田宏達(1959). 四沙門果の 成立に 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第14(7-2); 三友健容

(1979). 四沙門果說の 成立に ついて ,日本佛敎學會年報 第45; Jun Young, Jeong

(2002). “A textual study of material relating to Vipassanā meditation as found in Pāli

Buddhist scriptures”,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Gary Ow(2000).

“Ānanda's path to becoming an arahat-How he overcame the ten fetters to attain the four

stages of enlightenment”, California institute of integral studies; YiRu(2005). “A Study of

Nature, Characteristics and the Types of Stream-Winner(Sotāpanna) According to the Pali

Canon”,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등

이 성인연구 가운데 특히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빨리 문헌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서부터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이론에 대한 단초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성립이론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거나,

사성인은 불멸후에 네 단계의 계위로 정비된 것이지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이 아니라고 보는 경우 등이다. 또한 일래자나 불환자의 경우, 생천(生天)이나 삼계윤회가 전제되는 이 사상 자체도 불교가 아닌 우파니샤드의 해탈과 윤회 그리고 생천 사상에서 취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본고는 성인들에 관한 이러한 해석들을 재고찰하는데 목적을 둔다. 그 일환으로 빨리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성인의 의미 그리고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살필 것이며, 아울러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성립이론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에 대하여 재고찰을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빨리 문헌 가운데 니까야(Nikāya)를 주요 텍스트로 하고, 논장과 주석서

등을 보완자료로 사용한다. 이러한 성인연구는 성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자행(自行)의

성격을 띠고 있는 불교수행에서 올바른 성인관(聖人觀)을 확립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Ⅱ. 성인에 대한 이해

1. 성인(Ariyapuggala)의 의미

성인은 주로 범부와 대비되어 설명되고 있다. 성인을 의미하는 ‘아리야 뿍갈라(ariya-puggala)’는 고귀함을 뜻하는 ‘ariya’와 사람을 의미하는 ‘puggala’가 합쳐진 것으로, 이는 ‘고귀한 사람, 성인(聖人) 또는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 등을 의미한다.2) 물론 문헌에서는 ‘뿍갈라’ 없이 단지 ‘아리야’만으로 고귀한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2) 전재성 편저(2005) p.176;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1986) pp.77-8; G. P.

Malalasekera(1966) 2Vol. p.80; Yi Ru(2005) p.42. 아리야(ariya)는 베다어(Vedic) 아르야

(ārya)에서 유래된 단어이나 그 어원은 불분명하다. 아리야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아리안 족과 관련한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적인 의미이다. 아리안 족과

관련해서 아리야는 아리안 족을 의미하고, 사회적으로 고귀하고 구별되며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아리안 족의 관습, 이념과 조화를 이루며 아리안에게

존경받고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빨리(Pāli)의

ariya는 주로 (인명 앞에 붙이는)경칭의 의미로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고귀함, 성스러움’을

뜻한다.

『숫타니파타(Sutta-Nipāta)』는 아리야를 현상(dhamma)에 대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잘 아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3) 여기서 현상이라 함은 ‘진리, 열반, 오온 그리고 즐거움과

괴로움등’을 말한다. 그런가하면 범부의 빨리어는 뿌투자나(puthujjana)로, 이는 ‘보통사람,

속세의 사람’을 뜻한다.4) 범부는 주로 니까야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ā puthujjana)’라는 표현으로, ‘잘 배운 고귀한 제자(sutavā ariyasāvaka)’와 대치되어 나타난다.5) 특히 잘 배운 고귀한 제자라 함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의미한다. 물론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

이외에도 성인의 성취 노력과 방법 그리고 법을 이해하는 정도 등에 따라 빨리 문헌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6)

5) SN Ⅱ p.151, Ⅲ pp.42-47, Ⅴ p.362; MN Ⅰ pp.135-136, Ⅲ pp.227-228 등.

6) MN Ⅰ p.477[일곱 유형]; AN Ⅳ p.373과 Pug pp.73-74[아홉 유형]; SN Ⅴ p.204

[열 둘의 유형] 여기서 일곱 유형의 성인은 ①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

②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③몸으로 체험한 자(kāya-sakkhī) ④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 ⑤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 ⑥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ippatta) ⑦지혜로 해탈한 자(paññnāvimutta)이다. 아홉 유형의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유형에 ‘gotrabhū(種姓者)'가 추가된다. 또한 열 둘 유형의 성인은 아라한, 불환자의

다섯 유형, 일래자, 예류자의 세 유형, 법을 따르는 자 그리고 믿음을 따르는 자로 구성된다

이들 성인과 범부의 구분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홉 종류의

사람에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과 범부를 설명하고 있다.7) 뿐만 아니라 성인과 범부의 구분은 논장을 통해서 좀 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뿍갈라빤냣띠(Puggalapaññatti)에 의하면

범부는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예류도에도 들지 못하였으며 유학도 무학도 아닌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성인은 유학과 무학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7) AN Ⅳ p.372

A. 무엇이 범부인가? 범부는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그러한 현상들(dhammānaṃ)을

제거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을 범부라고 한다.

Pug p.12. Katamo ca puggalo puthujjano: Yessa puggalassa tīṇi saṁyojanāni appahīnāni na ca

tesaṃ dhammānaṃ pahānāya paṭipanno ayaṃ vuccati puggalo puthujjano.

B. 무엇이 범부와 성인인가? 여덟의 성스러운 사람이 성인이고, 나머지는 성인이 아닌

범부이다.

Pug p.14. Katamo ca puggalo ariyo: aṭṭhāriyapuggalā ariyā, avasesā puggalā anariyā

C. 무엇이 배워야 할 사람인가? 도(magga)가 구비된 네 사람과 과(phala)가 구비된 세 사람은

배워야 할 사람(sekha)이다.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asekha)이다. 나머지는

배워야 할 사람도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도 아닌 사람이다.

Pug p.14. Katamo ca puggalo sekho: cattāro maggasamaṅgino tayo phalasamaṅgino puggalā sekhā,

arahā asekho, avasesā puggalā neva sekhā nāsekkhā.

본 인용문 A의 경우는 예류도에도 들지 못한 사람을 범부라 하고 있다. ‘세 가지 족쇄를 제거

하기 위한 길(paṭipanno)’이란 예류도 또는 예류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1) 또한 C의 인용문에 의하면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無學)이며, 아라한을 제외한 사향사과의

나머지 일곱 사람은 배워야 할 사람(有學)이다. 그리고 범부는 유학도 무학도 아닌 사람이다.

11) 열 가지 족쇄는 ①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④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

⑤악의(惡意 또는 嫌惡, byāpāda) ⑥색계에 대한 탐욕(色貪, rūparāga) ⑦무색계에 대한

탐욕(無色貪, arūparāga) ⑧자만(自慢, māna) ⑨들뜸(uddhacca) ⑩무명(無明, avijjā)를

말한다. 이 가운데 처음 세 가지, 즉 ①~③을 세 가지 족쇄라 한다.

따라서 성인은 예류도에서 부터 아라한과에 이르는 여덟의 성스러운 사람[=사향사과 또는

사쌍팔배]을 말하며, 이들은 유학과 무학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이 아닌 나머지는 범부이다.

또한 인용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범부와 성인은 세 가지 족쇄의 제거 상태에 따라 구분되어지므로, 열 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20가지 유신견이 있으면 성인의 흐름에 들 수가 없다.12) 또한 마음이 탐욕에 오염된 것(貪染, sārāga)이 족쇄이므로,13) 마음이 번뇌로 오염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yathābhūtaṃ pajānāti)’ 마음의 수행(cittabhāvanā)이 있는지 없는지,14) 오온과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로 구분된다.15) 그러므로 성인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아야 함은 물론 무엇보다도 오온을 자아와 동일시하여 ‘내가 있다(asmi ti)’라는 자아관념[=유신견에 의한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단견(斷見,uccheda-diṭṭhi)]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열 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유신견은 모든 견해를 일으키며 족쇄를 이끌기때문에, 이를 알지 못하면 성인의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12) SN Ⅳ pp.285-287. 20가지 유신견이란 오온[色受想行識]의 각각에 대한 네 가지 형태의

자아관념을 말한다. 즉 색의 경우, 색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색을 가진 것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rūpavantaṁ vā attānaṁ), 자아 가운데 색이 있다고

여기는 것(attani vā rūpaṁ) 그리고 색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rūpasmiṁ vā

attanaṁ)을 말한다. 나머지 수상행식도 마찬가지이다. [MN Ⅰ p.300, Ⅲ pp.17-18; SN Ⅲ

pp.15-17, p.46, p.57, pp.96-98, p.102, Ⅳ p.287 등]

13) AN Ⅰ p.264.

14) AN Ⅰ p.10.

15) SN Ⅲ pp.81-82[오온]; AN Ⅰ p.71[사성제].

이와 같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 가운데 하나인 오온에 대한 집착[오취온]과 유신견

그리고 사성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분명한 앎’의 여부는 성인과 범부를 구분 짓는 전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번뇌의 잔재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2.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빨리 문헌에서 여덟 사람의 성인은 사향사과와 사쌍팔배라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 둘은 용어의 표현도 다르지만 용례 또한 다르게 쓰이고 있다. 사향사과는 ‘네 종류의 길[道]로 나아가는 사람[四向]과 네 종류의 과(果)를 확립한 사람(cattāro ca paṭipannā, cattāro ca phale ṭhit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길로 나아가는 네 사람이란 예류과⋅일래과⋅불환과⋅

아라한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즉 예류도⋅일래도⋅불환도⋅아라한도를 말한다. 그리고 과를 성취한 네 사람은 예류자⋅일래자⋅불환자⋅아라한을 말한다. 이는 빨리 문헌에서 설명되는 사향사과의 정형적인 표현이다.

예류자와 예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일래자와 일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불환자와 불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 아라한과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나아가는 자이다.

AN Ⅳ p.204, p.292, p.372; DN Ⅲ p.255; Ud p.56; Pug p.73. Sotāpanno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sakadāgāmī sakadāgāmī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anāgāmī anāgāmī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arahā arahāttāya paṭipanno.

본 인용문에서와 같이 사향사과는 여덟 사람의 성인을 설명할 때 주로 나타난다. 이렇게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설명한 위 인용문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후지모토 아키라(藤本 晃)는 “사문과 뿐만 아니라, 그 과로 향하는 단계(向)가 더해져, 사과와 사향을 아울러 설명하는

사향사과설이 경전에는 보여진다”고 설명한다.18) 이 설명을 통해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향사과설이 경전에서 일관되게 언급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18) 藤本 晃(2005) p.90. 四門果だけでなく その果に向かう段階(向)も加えて四果と四向

を並べ說く四 向四果說も經典には見られる.

그런가하면 사쌍팔배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cattār purisayugāni, aṭṭha

purisapuggalā)’으로,19) 이 용어는 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가운데 고귀한 승(僧,

saṅgha)의 설명에서 나타나고 있다.20) 승가는 주로 다음과 같은 정형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19) AN Ⅱ p.34, p.56; SN Ⅰ p.220, p.233, Ⅳ p.272; DN Ⅲ p.5; It 90게; Sn 227게.

20) 빨리어 상가(saṅgha)는 ‘무리, 모임, 집합, 교단, 승단, 승가(僧家)’의 뜻이다.[전재성

편저(2005) p.629] 그러므로 논자는 상가(saṅgha)를 승가로 번역하기로 한다.

승가는 청정한 믿음을 갖춘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이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 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 받을만하며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에서 위없는 공덕의 복밭이다.

SN Ⅱ p.69; AN Ⅱ p.34, Ⅲ p.286, p.315, Ⅳ p.406, Ⅴ p.183, p.330 등. Saṅ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s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uju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ñāya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sāmīcipaṭipanno Bhagavato sāvakasaṅgho, yadidaṃ

cattāri purisayugāni aṭṭhapurisapuggalā, esa Bhagavato sāvakasaṅgho āhuṇeyyo pāhuṇeyyo

dakkhiṇeyyo añjalikaraṇīyo anuttaraṃ puññakkhettaṃ lokassā t

본 인용문에서와 같이 사쌍팔배는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여덟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여덟 성인을 나타내는 사향사과와 사쌍팔배라는 두 표현의 쓰임이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상윳따니까야』의 「야자마나숫타(Yajamānasutta)」와 『앙굿따라 니까야』의

「앗따뿍갈라숫타(aṭṭhapuggalasutta)」 는 승가를 구성하는 여덟 사람을 사쌍팔배가 아니라

사향사과로 표현하고 있다.22) 이와 같이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향사과에 대해, 후지모토

아키라는 ‘승가의 다른 이름’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23)

22) SN Ⅰ p.233; AN Ⅳ p.292.

23) 藤本 晃(2005) p.90.

Ⅲ. 사향사과의 성립

1. 사향과 사과의 성립에 대한 논의

이렇듯 사향사과가 빨리 문헌에서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으나, 학자들은 사향사과의 성립설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몇명의 학자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사향사과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학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향사과는 최초경전의 편찬 때부터 이미 성립되어있었다는 의견이고, 다른 하나는 사향은

사과가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의견이다. 전자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미토모 켄요우(三友健容)와 후지모토 아키라 등이며, 후자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는 후지타

코타츠(藤田宏達)와 이필원 등이다.

먼저 전자의 설을 주장하는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최고의 경전이라는 숫타니파타에서도 사쌍팔배라는 용어가 보이고, 예류⋅일래⋅불환⋅아라한의 사단계가 향과 과로 나뉘어서 논해지고 있기 때문에, 꽤 일찍부터 이른바 사향사과의 이론이 성립돼 있었다."24)

24) 三友健容(1979) p.51.

"사사문과설의 성립을 경전의 성립 순으로 추측해보더라도, 이 설이 고층(古層)인 운문(韻文)

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의 전체에 걸쳐있고, 더구나 처음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논의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경전이 편찬되었던 시기에 사사문과설도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경전을 설하고 보급한 석존 자신이 처음부터 사사문과를 전부

설명했다고 고찰하는 편이 자연스럽다."25)

25) 藤本 晃(2005) p.98

이 두 학자는 숫타니파타에서도 사쌍팔배라는 용어가 보이며 고층(古層)인 운문(韻文)

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 전체에 걸쳐 사향사과가 향과 과로 나뉘어서 명확하게 논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경전 편찬 시부터 이 설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세존 자신이 처음부터

설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후지타 코타츠는 특히 사향의 성립 시기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비교적 고층에 속한다고 보는 경전에서 사향사과가 언급되는 예가 있지만[SN. Ⅰ.233; AN.Ⅳ.

292 등], 이것만으로 사향사과설이 고층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26)

26) 藤田宏達(1959) p.472, note.1.

이와 같이 후지타 코타츠는 아무리 고층에 속하는 경전에서 사향사과가 언급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것만으로 고층시기에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사향설은 후대에 사과설로

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필원은 이와 같은 후지타 코타츠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여하튼 Dhp와 Thī 등에 향(向, paṭipanna)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것과 사향사과를 말하고 있는 Sn의 Ratanasutta와 SN의 Sakkavagga의 성립이 Dhp/Thī보다 빠르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늦게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藤田宏達이 말한바 대로 사과(四果,cattāro phalāni)가 먼저 성립되고, 나중에 어떤 시기에 사향(四向, cattaro paṭipannā)설이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는 설이라고 생각된다."27)

27) 이필원(2008) pp.40-41

이처럼 이필원은 향(paṭipanna)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담마빠다(Dhammapada)』와 

『테리가타(Therīgāthā)』가 사향사과가 언급된『숫타니파타』의 「라따나숫타(Ratanasutta)」와『상윳따니까야』의 「삭카상윳따(Sakkasaṃyutta)」 보다 성립이 더 빠를 가능성이 있다고 하고 있다.28) 그래서 사향설이 사과설처럼 초기에 일찍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논증으로 ‘ 라따나숫타 의 경우 사향사과의 사람들로 구성된 승가에 관한 게송이 전체 17게송 가운데 7게송으로 다른 경전에 비해 많은 횟수이기 때문에, 이 경전은 승가가 집단으로 정비된 후나 또는 정비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일찍 성립된 경전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28) Sn 227게의 내용은 ‘ye puggalā aṭṭhasataṃ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칭찬받는

선한 여덟 사람, 이들이 네 쌍이다)’이다. SN Ⅰ p.233의 내용은 ‘Cattāro ca paṭipannā,

cattāro ca pahale ṭhitā. (네 종류의 길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과 네 종류의 과를 확립한

사람)’이다.

이러한 두 상반된 주장들에 대해, 논자는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경전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어느 경전도 확실하지가 않다. 단지 앞서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인용문에서와 같이『숫타니파타』와 운문경전을 일반적으로 고층경전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특히 전재성은『숫타니파타』의 고층성을 열 가지로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29) 그러므로『담마빠다』와『테리가타』의 성립시기는『숫타니파타』와 『상윳따니까야』의「삭카상윳따」 보다 더 빠를 가능성이 있으며, 사향설은 사과 성립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보는 이필원과 후지타 코타츠의 주장은 구체적인 논거제시가 충분하지 않다.

29) 전재성 편저(2004) pp.13-14; 최종남 외(2011) p.25

논자 또한 이들의 주장을 논증할 만한 직접적인 내용을 빨리문헌에서 찾지 못하였다. 오히려

미토모 켄요우와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과 같이 숫타니파타에서는 사쌍팔배의 용어와30)

일래자(sakadāgāmi)를 제외한 예류자와 불환자 그리고 아라한의 세 성인이 설명되고 있다.31)

여기서 예류자(sotāpanna)는 명칭으로 언급되지 않고, 예류자의 특성인 ‘세 가지 족쇄로부터

벗어남과 더불어 네 가지 악한 운명과 여섯 가지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승가의 보배’로 나타난다.

32) 이처럼『숫타니파타』는 사향사과와 사성인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30) Sn 227게. Ye puggalā aṭṭha sataṃ pasatthā, cattāri etāni yugāni honti. 여기서도

사쌍팔배는 승가를 이루고 있는 공양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다.

31) Sn 230게, 231게, 727게, 765게 그리고 Sn pp.139-150; Dhp 178게.

32) 네 가지 악한 운명(catūhapāyehi)이란 지옥(niraya), 축생(tiracchāna), 아귀계(petti-

visaya), 아수라(asura-kāyā)를 말한다. 여섯 가지 큰 죄악(cha abhiṭhānāni)이란

①어머니를 살해하고(mātughāta), ②아버지를 살해하고(pitughāta), ③아라한을 살해

하고(arahataghāta), ④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고(lohituppāda), ⑤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saṃghabheda)의 다섯 가지 무간지옥에 태어날 업보(ānantariyakamma)와

⑥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aññasatthāra'uddesa)을 말한다.

그리고『담마빠다』와 『테리가타』에서도 향과 과라는 단어가 보이고 있다.33) 붓다의

가르침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담마빠다』는 전체적으로 내용이 은유적이며 간결하다.

그래서 성인에 관한 내용 또한 직설적이거나 상세하지 않으며 언급횟수도 적은 편이긴 하지만

향과 과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테리가타』도 마찬가지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3) 향(向)으로 표현된 paṭipanna는 ‘따라가는, 나아가는, 실천하는, 도달하는’의 뜻이다.

[전재성 편저 (2005) p.456]

A. 지상에서의 유일한 왕권보다,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 예류과

(sotāpattiphala)가 탁월하다. Dhp 178게.

B. 화살의 제거를 알아서 나는 길을 선언했으니, 이렇게 길을 향해 나아간다면(paṭipanna)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게 될 것이다.Dhp 275게.

C. 그대들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여래는 단지 선언하는 자이다. 길을 향해 나아가는

(paṭipanna) 사람과 선정 수행을 하는 사람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Dhp 276게

D. 부정한 길[邪道]로 나아가는(paṭipanna) 나에게 당신은 고귀한 도(ariyamagga)를 갖게

하였습니다. 벗이여, 당신에게 목욕하는 옷(浴衣)을 드리겠습니다. Thī 245게.

본 A의 인용문은 ‘쏘따빳띠팔라(sotāpattiphala)’인 예류과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B, C, D의

인용문에서는 정확하게 사향[예류도, 일래도, 불환도 그리고 아라한도]의 하나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는 ‘빠띠빤나(paṭipanna)’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여진 용어가

아니라, 성인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향(向, paṭipanna)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성인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고 악마의 속박과 그리고 부정한 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담마빠다』와『테리가타』에서도 명확하지는 않지만 성인과 관련된

향과 과가 언급되고 있다. 뿐만아니라『숫타니파타』와『우다나(Udāna) 그리고『상윳따니까야』의 「삭카상윳따」등에도 사향사과라는 용어와 그 여덟 사람이 설명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네 종류의 니까야에서는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 설명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후지타

코타츠와 이필원의 주장과 같이 사과가 먼저 성립되고 나중에 어떤 시기에 사향설이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는 의견은 설득력이 약하다. 따라서 ‘사향사과설은 고층인 운문경전을 포함한 다섯 니까야에서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논의 대상은 아니라고 보는’ 후지모토 아키라의 주장에 논자는 더 무게를 둔다.

이제까지 사향사과의 용례와 성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쌍팔배 또는 사향사과의 여덟 성인은 주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사향은 사과의 성립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논증할만한 근거자료를 문헌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반면 사향사과가 일찍부터 언급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단초들은 숫타니파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2. 예류도[향]에 대한 논의

앞서 성인은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의 범위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이필원은 니까야에 한정해서 예류도는 성인이 아니며,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예류과를 획득한 수행자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과설이 먼저 성립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향(向, patipanna)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예류향은 성인의

계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8)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배경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류도란 삼보[佛法僧]에 대한 불괴의 믿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된 후에 그로부터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이므로, 본래 성인은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뿐이라는’ 후지타 코타츠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39)

38) 이필원(2009) p.24. 이필원은 이 논문 각주에서 “니까야에서 사예류지가 설명될 당시에는

예류향이란 개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 어떤 상태가 예류향인지는 의문이지만, 예류향이란

삼보에 대한 불괴의 믿음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구사론」

과 같은 논서의 이해와는 달라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부연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다음 각주에서 사향사과설은 사과설 이후에 성립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후지타 코타츠

(藤田宏達, 1959)의 견해를 따르면, 본래 성자의 계위는 사과(四果)인 예류과⋅일래과⋅불환과⋅

아라한과만이다. 이들 네 부류의 수행자가 바로 성자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向, patipanna’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예류향은

성자의 계위에 해당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39) 藤田宏達(1959) p.472. note.1. 四向說は 四果說の成立した後に それより派生的に考出さ

れたものと見られる.

이러한 논의에 대한 고찰로 먼저 예류도(sotāpatti-magga)의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Ⅱ장. 2절. 성인의 범위로서의 사향사과>에서 설명하였듯이 니까야에서는 사향(四向)을 도가 아니라, ‘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a)’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아비담맛따상가하(Abhidhammatthasaṅgaha)와「빠띠삼비다막가

(Paṭisambhidhāmagga)는 사향을 주로 도(magga)로 표현하고 있다.40)

40) Abhidh-s p.4; Paṭis Ⅰ pp.72-73.

예류도에서 예류의 빨리어인 소따(sota, 흐름)는 여러 용례로 쓰이기도 하나,41) 예류를 나타낼 때의 흐름은 팔정도(八正道, ariyoaṭṭhaṅgiko magga)를 의미한다.42) 그래서 예류자(sotāpanna)란 팔정도를 갖춘 사람을 말하며, 예류도란 ‘팔정도를 실현하기 위한 길로 들어선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예류도에 들어선 사람은 두 가지 형태의 사예류지 가운데 특히 ‘참사람과 사귀고,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원리를 갖춘 사람이다.43) 그래서 사예류지를 갖춘 예류도는 ‘견해의 성취(diṭṭhisampadā)’로 표현되고 있으며,44) 도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진 견해성취자(diṭṭhisampanna)를 예류자라 한다.45)

41) 이 흐름은 여러 용례로 쓰이고 있다. 주로 ①팔정도의 흐름으로[SN Ⅴ p.347]

②존재(bhava) 또는 윤회(saṁsāra)의 흐름으로[SN Ⅰ p.15] ③갈애(taṇhā)의

흐름으로[SN Ⅳ p.291] ④의식(viññāṇa)의 흐름[DN Ⅲ p.105]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T. W. Rhys Davids and William Stede(1986) p.725에서도 이 네 가지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법(dhamma)의 흐름이 예류의 기원적 의미라고 설명

하기도 한다.[藤田宏達(1959) p.465]

42) SN Ⅴ p.347.

43) 사예류지는 두 종류의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①참사람과 사귀고,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고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것이다.[SN Ⅴ p.347;

DN Ⅲ p.227] ②부처님[佛]에 대하여⋅가르침[法]에 대하여⋅승가[僧]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과 그리고 계행[戒]을 갖추는 것이다.[SN Ⅱ pp.69-71, Ⅴ pp.342-344,

pp.371-372, pp.387-389, pp.396-398, p.404, p.407; AN Ⅱ p.56, Ⅲ p.212, p.285, Ⅳ

p.406; DN Ⅲ p.227 등]. DN Ⅲ p.227에서는 ①을 예류도를 얻기 위한 구성요소

(sotāpattiaṅga)로, ②를 예류과를 얻은 자의 구성요소(sotāpannassa aṅga)로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예류지는 예류도와 예류과에 들기 위한 기본원리로 설명되고 있지만,

이는 네 성인 모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기본원리를

잘 수지하면서 수행한다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선정과 지혜를 통해 족쇄

에서도 벗어나 종극에는 열반을 얻게 된다.[SN Ⅴ pp.360-362]

44) AA Ⅲ p.414.

45) MA Ⅳ p.107.

그러므로 예류자는 견해에 해당하는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하며, 예류도는 이러한 족쇄들을 제거해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46) 이는 예류도에 나아가는 순간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를 포함한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과(phala)를 실현해 나아가기 때문이다.47)

이렇게 도의 마음에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과의 마음으로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게 된다. 이와같이 비록 여덟의 성인에서 도와 과가 따로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지만 도와 과의 시간적인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도와 과는 수행성취에서 수행의 결실[果]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그 결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별개로 구분될 수 없는 연속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앞서「뿍갈라빤냣띠」에서도 ‘세 가지 족쇄를 버리지 못해 예류도에도 들지 못한 사람은 범부이며, 나머지는 성인’이라고 하였다.

46) 대림ㆍ각묵 공역(2004) p.166.[관련 내용: p.171, p.393] 이 내용들에 의하면, 도

(magga)의 도(magga)의 마음은 정신적인 오염원들을 제거하거나 엷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도의 마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과(phala)의 마음은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각각의 네 가지 도는 그 과위에 해당하는

족쇄들을 제거해 나아간다.

47) Paṭis Ⅰ pp.71-73.

이처럼 예류도에 나아가는 순간 사예류지, 팔정도와 같은 여러 조건들을 갖추게 됨으로써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그 계위에서 수반되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해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예류과로 넘어가기 직전의 예류도 또한 세 가지 족쇄가 제거되고 사예류지를 갖추고 팔정도를

실현해 나아가는 길에 들어선 사람이므로 예류도[향]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예류도가 포함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은 고귀한 승가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공양⋅대접⋅보시⋅존경을 받을 만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없는 복밭(puññakkhetta)’이며,48) 지혜와 계행을 갖추고49) 그리고 도를 바르게 잘 닦는 사람들로 지칭된다.50) 또한 빨리 문헌과 주석서 등에서는 수행의 여러 성취 형태에 따라 일곱 종류의 성인을 설명하고 있다.51) 이 일곱 성인 가운데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와 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는 ‘예류과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한 길로 나아가는 자(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o) 또는 예류도의 순간에(sotāpattimaggakkhaṇe)’ 성취되는 자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여덟 성인의 첫 번째인 예류도[예류향] 또한 성인임을 알 수 있다.

48) AN Ⅱ p.34, Ⅲ p.36, p.86, p.315, Ⅳ p.406, Ⅴ p.183, p.330; DN Ⅱ p.94, Ⅲ p.227.

49) SN Ⅰ p.233.

50) DN Ⅱ p.94, Ⅲ p.227.

51) MN Ⅰ pp.477-479; Pug p.15; Vism p.659; Nyanatiloka Thera(1980) p.26f. ①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 ②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③몸으로 체험한 자(kāya-

sakkhī) ④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 ⑤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

⑥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ippatta) ⑦지혜로 해탈한 자(paññnāvimutta)이다.

이제까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예류도의 상태, 역할 그리고 수행성취 정도들을 살펴 보아도

예류도가 성인이 아니라는 예증은 희박하다. 또한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각 과를 지향하는

수행자를 향(向, patipanna)으로 설정했다는’ 이필원의 의견과 그리고 성인은 사과(四果)뿐

이라는 후지타 코타츠의 의견은 그 주장을 확인할만한 관련내용이 빨리문헌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우다나』를52) 비롯한 전체 니까야에서는 예류도를 포함한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이 명확히 언급되고 있으므로, 여덟 성인의 하나인 예류도[향] 또한 성인의 범주에 해당

한다고 볼 수 있다.

52) Ud p.56.

3. 사성인의 성립에 대한 논의

⑴ 사성인의 성립에 대한 문제점

사성인은 성인의 단계적인 계위(階位)로 빨리 니까야에서 정형화된 정의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53) 그러나 사성인의 계위 성립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사향사과의 성립설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논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사성인 순차적인 계위는 처음부터

정립된 것이 아니라 법을 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후에 수행의 계위로 정비된

것이며,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라는 것’이 주된 견해이다.

53) AN Ⅱ p.238.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예류자가 되어

쉽게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정등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확정된

사람이다.[예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일래자가 되어 한 번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괴로움의

종식을 이루게 된다.[일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불환자]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번뇌를 소멸하여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아라한]. [같은 내용: SN Ⅴ pp.356-357, p.376, p.406; AN Ⅱ

p.88, Ⅳ p.12; DN Ⅰ p.156, Ⅱ p.92, p.251, Ⅲ p.107. p.132; MN Ⅰ p.34,

p.141, p.226, p.465 등]

이 주장의 배경은 특히 수행 계위의 정비과정에서 후에 유입된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일래자와

불환자의 사후 생천사상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여러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다.

특히 마노 류카이(眞野龍海)는 여러 학자들의 논점을 종합적으로 고찰함과 아울러 불교 이전의

우파니샤드 사상과 비교하여 그 의미들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54) 반면 후지모토

아키라는 위와 같은 논의가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사향사과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성인 또한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임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55)

55) 藤本 晃(2005) p.86.

따라서 사성인의 과위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점과 그 배경들을 살며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과설은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이 아니라는 점이다.56) ‘현세에서 괴로움을 여읜 완전한

열반을 강조한 붓다는 사후설이나 재생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생에 기대하는

일래와 불환은 불설이 아니며, 현세에서의 여실지견의 해탈로 성취되는 예류와 아라한만이

붓다의 본지에 가깝게 성립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에 대한 논증으로 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 경우를 예시하고 있다. 하나는 예류와 아라한은 현세에서 여실지견[있는 그대로

의 앎과 봄(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을 실천하는 사람이다.57)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류와 아라한은 각각 독립된 품이 있는데 반해,58) 불환자는 한군데뿐이며59) 일래는 독립된

품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니까야에서는 예류와 아라한을 서로 연계하여 대비시킨 설명이 있으며 그리고 독립된 경(sutta)과 품(vagga)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래서 예류와 아라한은 사과성립 이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으며, 자연적인 연속으로 불교의 성격에 따라 발생된 사상으로 보고 있다.60) 반면 일래와 불환은 재생에 기대하는 설이므로 이들과 함께 구성된 사성인은 불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56) 宇井伯壽(1965) pp.246-248; 眞野龍海(1972) p.332.

57) SN Ⅲ p.160f[오취온], p.192[오취온], Ⅴ p.193f[오근], p.205[육근], p.208[다섯

느낌의 능력]. 오근⋅오취온⋅육근⋅다섯 느낌[sukkha, dukkha, somanassa, domanassa,

upekha]의 능력 발생에서 달콤함(assādañca)과 위험(ādīnavañca)과 소멸(nissaraṇañca)에

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면(yathābhūtam pajānāti)’ 예류자이고, ‘있는 그대로 알고나서

집착 없이 해탈하면(yathābhūtam viditvā anupāda vimutto hoti)’ 아라한이다.

58) SN Ⅰ p.14[아라한], p.160[아라한], Ⅲ p.73[아라한], p.161[아라한], p.202[예류자],

Ⅴ p.342[예류자]; AN Ⅲ p.429[아라한]; Dhp 90-99게[아라한].

59) AN Ⅲ p.421.

60) 眞野龍海(1972) p.338.

② 사과설은 불교의 본지(本旨)가 아니라고 보는 점이다.61) 후나하시 잇사이(舟橋一哉)는

재가도(在家道)에 의한 세간도(世間道)와 출가도(出家道)에 의한 출세간도(出世間道)에서의

두 종류의 생천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재가도에서의 생천은 천락(天樂)을 위한 것이고, 출가도에서의 생천은 생사(生死)를 여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류와 아라한이 불교의 본래적인

것이지, 출세간도에서 일래와 불환이 수행의 완성을 내세에 기대하는 생천설로 다루어 진 것은 사향사과설의 성립 과정이나 그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불교의 본지가 아니라고 한다. 또한 마노 류카이는 일래와 불환은 우파니사드의 생천설과 그리고 불교의 현세에서의 증득과 열반이라는 양사상이 그대로 사과설로 받아들여지고 유입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62) 그래서

우파니샤드의 내세관인 천도(天道, devayāna)와 조도(祖道, pitṛyāna)인 이도설(二道說)과

재사(再死, punamṛtyu)의 사상이 사성인의 계위에 유입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61) 舟橋一哉(1954) pp.38-39; 眞野龍海(1972) pp.333-334.

62) 眞野龍海(1972) pp.339-340; Dhp 126게, 174-177게. 물론 이도설 이외에도 제삼형

(第三型)이 있다. 여기서 천도(天道)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이 가는 천상으로 다시는

퇴전하지 않는다. 조도는 선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천상에 나지만 다시 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제삼형은 악업을 닦아 지옥 같은 악처에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정승석 저(1998) pp.145-146

이에 대한 논증으로 마노 류카이는 빨리 문헌에 나타나는 [우파니샤드적]용어와 불환의 생천을 예로 들고 있다.『담마빠다』의 「로카왁가(Lokavagga)」에서 나타나는 태양과 허공 같은

용어와 천상왕래는 인도사상의 신앙이 불교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이는 우파니샤드의 이도설

에서의 생천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보시와 내세의 안락이라는 용어도 우파니샤드의 보시,

조어, 복덕 등에 의해 생천이 약속된다고 하는 사상과 같다. 그리고 불환은 생천설로 표현되지만 적어도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 다는 면에서는 아라한과 차이가 없다고 한다.63) 또한 우파니샤드에서의 재사(再死, puna-mṛtyu)는 ‘한번만 태어난다는’ 의미에서는 일래와 통하지만,

재사하여 다시 천상에 생존하는 것(puna-mṛtymapajāyati)이므로 오히려 불환에 유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64) 따라서 마노 류카이 뿐만 아니라 일부학자들은 일래와 불환의 생천사상을 우파니샤드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의 본지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63) 眞野龍海(1972) p.340. 아라한을 상징하는 설명어에서 ‘최후의 생이다(ayaṃ antimā

jāti)[SN Ⅴp.423], 최후의 몸이다(abtimadeha)[SN Ⅰ p.14], 미래의 존재(punabbhava)를

받지 않는다’ 라는 점에서, 이 점은 불환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

64) 眞野龍海(1972) p.344.

③ 사성인의 성립 순에서도 일부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공통적인 견해들을 보이고 있다. 후지타 코타츠는 계위에 있어서도 일래는 사과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계위로, 이는 예류와 불환을 단계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65) 그리고 후나하시 잇사이는 오랜 수도과정에서 일래와 불환이 유입되어 사성인의 계위가 형성되었으며, 예류는 독립으로 설해졌으며 바로 이어서 일래와 불환이 설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류는 일래와 불환보다 더 오래 전에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66) 또한 미토모 켄요우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하지 못하고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자가 문제가 되어, 그 결과 계위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먼저 불환과가 설해지고 다음에 일래과가 설해진 형태가 되었다고 하였다.67) 따라서 이들의 의견에 따르면 사과의 성립 순은 아라한⟶예류자⟶불환자⟶일래자의 순이 되고 있다.

65) 藤田宏達(1959) pp.469-470.

66) 舟橋一哉(1952) pp.179-180.

67) 三友健容(1979) p.71

(4) 사성인의 정의에서 서로 중복되거나 부합(符合)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문헌에서 사성인의 차별은 열 가지 족쇄로 규정지어지고 있으므로, 이를 전제로 하였을 때 사성인의

정형문에서 서로 중복되거나 부합(符合)되지 않는 점이 보이고 있다. 정의에서 내용이 서로

중복되어있다는 것은 예류자에서 제거된 세 가지 족쇄가 일래자에 다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오상분결의 무명이 일래자에서 탐진치의 치(痴)로

언급되고 있으며,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만일 열 가지 족쇄에 의한 차제적인 제거를 전제로

한다면 일래자에서 엷어지는 것은 탐진치(rāgadosamoha)가 아니라,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과 악의(byāpāda)로 표현되었어야 한다. 탐진치에서의

치(痴,어리석음)는 무명의 의미로 대치되어 쓰이는 용어이므로, 만일 어리석음을 무명으로

간주한다면 열 가지 족쇄의 마지막인 무명이 일래자에서 언급되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관점에 대해서, 사성인을 다루는 학자들이라면 대부분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⑤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68) 아까누마 치젠(赤沼智善)은 사성인의과위 차별도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으며, 붓다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분류법이라고 하고 있다.

68) 赤沼智善(1939) p.167.

이와 같이 사성인의 단계적인 계위성립과 각 계위의 연결성에서 몇 가지 모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학자들의 주된 해석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논점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연구를 하였다. 그러나 빨리 문헌 상, 학자들이 연구한 논거(論據)들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쉽지 않은 한계가

있다.

⑵ 사성인의 성립 문제점에 대한 고찰

위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논점에 대해 세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일래와 불환의 생천사상, 사성인의 계위 성립설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성인의 정의에서 열 가지 족쇄와 부합되지 않은 점을 말한다.

① 일래와 불환에 대한 생천설이다. 이 생천설에 대하여 논의를 제기한 학자들과는 달리,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향사과의 성립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성인의 성립설에 대해서도 붓다의 직접적인교설임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후지모토 아키라는 ‘사과설이 생천이나 삼계윤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들어 이 사상 자체도 불교가 아닌 우파니샤드의 해탈과 윤회 그리고 생천 사상에서 취입된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삼계설은 숫타니파타에서도 전제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69) 또한 이어서 후지모토 아키라는 ‘첫 번째 선정에서 상수멸정까지를 기초로 하는 삼계설은 바라문교의 전통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붓다 자신에 의해 직접 설해진 것이며, 사과설 또한 최초의 운문 니까야인 숫타니파타에서 부터 이미 명확하고 일관되게 설해져 왔다고’ 주장하고있다. 논자 또한 사향사과의 성립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지모토

아키라의 견해에 타당성을 둔다.

69) 藤本 晃(2005) p.86. 후지모토 아키라(藤本 晃)는 ‘삼계설이 최고층 경전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나카무라(中村)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p.102. 각주 24] ‘『담마빠다』와

『상윳따니까야』Ⅳ권의「사가타왁가(Sagāthavagga)」를 번역한 나카무라는『담마빠다』

와「사가타왁가」가 만들어질 당시에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라는 관념은 성립되어 있었지만

아직 삼계설은 결부되어 있지 않았으며,『담마빠다』와『숫타니파타』의 중반에도 삼계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삼계설은 꽤 늦게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나카무라가

「담마빠다의 주석서」의 문구를 일부만 취한 것이지, 문구 전부를 읽으면 삼계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숫타니파타』에도 삼계설이 설명되어 있다고’ 후지모토 아키라는 주장하고

있다.

물론 붓다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열반을 강조하고 사후설이나 재생에 중점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삼계윤회와 생천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열반이다. 그렇지만 현세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수행자에게

수행상태에 따른 생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예류자 또한 최대한 일곱 번의 윤회를 거듭한

후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그러므로 일곱 번의 윤회과정에서 생천의 가능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또한 성인의 범위에 들지 못한 재가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현세에서 재가자의 실천도로서의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등에 의한 생천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70) 물론 불교성립 당시 인도에 존재했던 우파니샤드와 같은 여러 사상이 불교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빨리 문헌에서는 생천과 관련된 일래와 불환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있다.

『숫타니파타』는 색계와 무색계에 대해 소멸(nirodha)을 분명히 알고 해탈하면 불환자나

아라한이 되지만 소멸을 모르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고 설명하고 있다.71) 또한 예류와

아라한,72) 불환과 아라한73) 그리고 일래와 불환74)으로 연계시켜 대비 설명한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예류와 아라한 그리고 불환과 아라한의 연계 설명에서 이들을 구분 짓는 유일한

준거는 우빠디세사(upādisesa)로, 어떠한 경우라도 ‘집착이 남아있다면(upādisesa)’ 현세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집착의 유무는 불환과 아라한을 구분 짓는 준거가 되고

있으므로,75) 그래서 아라한은 ‘집착을 완전히 제거한 사람’으로 상징된다.76) 이와같이 생천을

나타내는 일래와 불환 또한『숫타니파타』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예류와 아라한과 더불어

서로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라한처럼 현세에서의 열반성취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환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생천을 통해서도 열반의 성취가 가능함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므로 사성인의 체계는 처음부터 함께 정립되어 있었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천에 있어서도 삼계에 사는 존재와 신들의 세계나 지옥에 태어나는 사람들에 관한 내용들이 있으며,77) 아울러 선정의 성취로 가게 되는 색계천과 무색계천 그리고 수행자들이 죽어서 태어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빨리 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다.78)

70) 藤田宏達(1971) p.901; 한상희(2008) p.91.

71) Sn 754게, 755게.

72) SN Ⅲ p.160, p.192, Ⅴ p.193, p.205, p.208.

73) AN Ⅲ p.81, p.143; SN Ⅴ p.237, p.285; Sn pp.139-150.

74) AN Ⅰ p.63. 이 경전에서는 내적으로 결박된(ajjhattasaññojano) 사람과 외적으로 결박된

(bahiddhāsaññojano) 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내적으로 결박된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떤

천계에는 태어나지만, 거기서 죽어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오는 자(āgāmī)’이며, 외적으로

결박된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떤 천계에 태어나, 거기서 죽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불환자,

anāgāmi)’를 말한다. 여기서 āgāmī는 ‘한 번 돌아오는 일래자(sakadāgāmi)’를 의미한다.

75) AN Ⅲ p.82; MN Ⅰ pp.62-63, p.481; SN Ⅴ p.181; Sn pp.139-149; It 46게.

76) Sn 354게; Th 1274게. Nibbāyati so anū saupādisesa.(그는 실로 남아있는 집착을 소멸하였다.)

77) Dhp 126게, 200게, 224게, 236게, 307게, 309게, 311게; SN Ⅰ p.53, pp.131-133, p.165,

78) AN Ⅱ p.126. p.160, Ⅲ p.348, Ⅳ p.401, Ⅴ p.138; MN Ⅰ p.455, Ⅱ.p.206; DN Ⅲ p.264;

Dhp 200게.

일래자인 사람은 도솔천에 몸을 나타냈다.

79) AN Ⅲ p.348,Ⅴ p.138.

비구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여의고 불선한 법을 떨쳐 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그는 그것에 매혹되고 그것을 갈망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발견하고, 그것에

입각하여 그것을 확신하고 거기에 자주 머물러 그것으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죽은 뒤에 범천의 무리인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80) AN Ⅱ p.126f. 이 인용문에서는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사람만 언급하였지만, 원문에는

네 번째 선정 성취자까지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 선정 성취자는 범중천(梵衆天

또는 梵身天, Brahmakāyika devā)⋅ 두 번째 선정 성취자는 극광천([極光天 또는 光音天,

Ābhāsarā devā)⋅세 번째 선정 성취자는 변정천(遍淨天, Subhakiṇṇā devā)⋅네 번째 선정

성취자는 광과천(廣果天, Vehapphalā devā)의 동료로 태어난다.

이와 같이 수행자들의 선정성취 정도에 따라 그들이 생천하여 머무는 천상세계는 차이가 있다. 상기 인용문에서 뿐만 아니라, 삿타와사숫타(Sattāvāsasutta) 는 욕계에 머무는 유정(有情,

sattāvāsā)과 더불어 첫 번째 선정으로 태어나는 범중천에서부터 여덟번째 선정으로 태어나는

비상비비상천에 이르기까지 아홉 종류의 유정들이 머무는 장소를 언급하고 있다81)

81) AN Ⅳ p.401; DN Ⅲ p.263. sattāvāsā는 ‘有情, 중생의 住處, 존재의 주처, 有情居’의 뜻이다.

[전재성 편저(2005) p.634]

이처럼 삼계윤회와 생천은 사성인의 성취와 수행의 핵심인 선정 수행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의 성취에 있어 선정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과 더불어 성인의

경지를 성취해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인 수행법이다. 그렇다면 선정 상태에 따른 생천은 현세

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 경우 한 번에서 최대한 일곱 번을 윤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 선정을 성취하여 그 세계에 태어났다하더라도 그에 따른 탐욕, 자만, 들뜸 그리고 무명과 같은 족쇄가 남아있다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단지 붓다가 현세에서의 열반을 특히 강조한 것은 생천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해탈에 장애가 되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열 가지 족쇄에 묶여 삼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범부들에게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깨우쳐주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② 사성인의 계위설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여러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수행 도중에 목숨이 다한 자가 문제가 되어 그 결과 계위설을 성립하는 과정에서 예류와 아라한 다음에 먼저 불환이

설해지고 다음에 일래가 설해졌으며, 특히 일래는 예류와 불환을 단계적으로 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또한 충분한 논거가 뒷받침되지 않고 있으며,

문헌에서도 합당한 근거자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숫타니파타』에서부터 사향사과라는 용어와 그의 여덟 사람이 계위별로 정형화되어 언급되고 있었으므로, 이 또한 크게 논의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에서 사성인이 연구되고 있지만,『앙굿따라니까야』의「사마나숫타

(Samaṇasutta)」는 과를 이룬 사성인만이 붓다의 바른 교설임을 강조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여기에 첫 번째 사문[예류자]이 있고, 여기에 두 번째 사문[일래자]이

있고, 여기에 세 번째 사문[불환자]이 있고, 여기에 네 번째 사문[아라한]이 있다. 다른 사문들에 의한 교설은 공허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바르게 사자후를 외쳐야 한다.82)

82) AN Ⅱ p.238. sīhanāda는 ‘사자후[부처님의 설법]’을 의미한다.[전재성 편저(2005) p.675]

본 인용문의 설명에 앞서 본문에서는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그리고 아라한을 규정짓는

정형문이 설명되고 있었으며, 이들 네 성인을 사문(samaṇa)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의 네 사문은 사성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인용문은 오직 네 단계의 사성인만이 붓다의 바른 교설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③ 연구자들은 사성인의 정의 부분에서 부합(符合)되지 않는 점을 주로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일래자의 정의에서 세 가지 족쇄의 재 언급과 탐진치가 엷어진다는 표현 그리고

아라한을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첫 번째는 예류자에서 이미 벗어난 세 가지 족쇄가 일래자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추론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미토모 켄요우는 ‘사성인의 성립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남는다고 하였다.83) 그러나 세 가지 족쇄의 재 언급은 그다지 논의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족쇄의 기준에서 일래자를 표현한다면,

일래자는 이미 세 가지 족쇄에서 벗어났으며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가 엷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일래자가 열 가지 족쇄 가운데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예류자와 같이 세 가지 족쇄뿐이므로, 이는 일래자의 족쇄제거 상태를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단순한 가정을 해 본다.

83) 三友健容(1979) p.65.

두 번째는 열 가지 족쇄의 점진적인 제거순서에 따른다면, 일래자에서는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가 엷어진다고 표현되었어야 정확하다. 하지만 탐진치가 엷어진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은 ‘탐진치가 제거된 아라한의 상태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아라한에 가깝게 고찰된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한다.84) 이처럼 빨리 니까야에서의

사성인의 정의는 각 과위에서 제거되는 내용이 열 가지 족쇄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일래자에서 언급된 탐진치, 즉 탐욕,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열 가지 족쇄의 감각적 욕망의 탐욕(kāmarāga), 악의(vyāpāda) 그리고

무명(avijjā)을 일으키는 근본 뿌리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84) 三友健容(1979) p.71; 藤田宏達(1959) pp.470-471

『앙굿따라니까야』는 ‘탐욕(lobha) 때문에 탐착(abhijjhā)이, 성냄(dosa) 때문에 악의(vyāpāda)가 그리고 어리석음(moha) 때문에 무명(avijjā)이 생긴다고’ 설명하고 있다.85) 여기서 탐착(abhijjhā)은『앙굿따라니까야』에서 네 번째 족쇄인 감각적 욕망의 탐욕(kamaraga)에 대치되어 언급되기도 한다.86) 이처럼 탐진치로 인해 탐착과 악의와 무명이 생긴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항상 탐욕과 성냄을 일어나게 한다.87)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이루(YiRu) 또한 ‘탐욕과 성냄은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와 거의 동의어이며, 탐욕과 성냄이 엷어진다는 것은 어리석음이 엷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88) 따라서 일래자에 대한 정의는 좀더 근원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일 뿐, 감각적 욕망의 탐욕과 악의의 족쇄와 다르지 않다. 또한 니까야에서는 족쇄의 완전제거와 엷어짐의 차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된 사람은 아라한이므로, 아라한의 과위에서 완전히 소멸되는 탐진치가 이미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한 일래자의 단계에서 엷어진다고 설명한 점은 사과의 계위 성립 상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85) AN Ⅰ p.194.

86) AN Ⅰ p.242.

87) 대림 외(2004) pp.121-123, p.459. 탐착(abhijjhā)은 탐욕의 뿌리(lobha-mūla)의 한

형태이며, 악의(byāpāda)는 성냄의 뿌리(dosa-mūla)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들뜸은

회의적인 의심과 함께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이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항상 탐욕과

성냄을 일어나게 한다.

88) Yi Ru(2005) p.80.

세 번째는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가 아닌 번뇌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번뇌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의 성취’는 아라한의 상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정의에서 오상분결의 제거라는 언급은 없지만, 어쩌면

‘번뇌 없는’이라는 이 표현 안에 ‘오상분결의 제거’라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오상분결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번뇌가 남아있어 ‘번뇌 없는(anāsava)’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로 네 종류의 니까야에서 표현되는 사성인의 정형구에서는 세 가지 족쇄,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 언급될 뿐 각각의 족쇄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장과

소부의 하나인『뿍갈라빤냣띠』와 『빠띠삼비다막가』에서는 열 가지 족쇄의 순차적인 제거에

따라 사성인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89)

 

89) Pug pp.17-18; Paṭis Ⅱ pp.94-95.『뿍갈라빤냣띠』는 열 가지 족쇄의 순차적인 제거에

따라 사성인의 단계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류자는 세 가지 족쇄를 제거한 사람이며,

그 다음 족쇄인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일래자에서 엷어지고, 불환자에서 완전히 끊어진다.

그리고 아라한은 오상분결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으로, 오상분결의 다섯 가지 내용 또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가하면『빠띠삼비다막가』도 열 가지 족쇄로 사성인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전에서는 열 가지 족쇄뿐만 아니라, 족쇄에 상응하는 잠재적

성향들을 추가하고 있으며 네 가지 과(phala)가 아니라 네 가지 도(magga)에서 단절되는

번뇌들로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성인의 정의에서 열 가지 족쇄와 완전히 부합(符合)되지 않은 몇 가지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는 각 성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유사한 표현일 뿐

사성인의 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성인의 정의는 논장과 소부의 일부에서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Ⅳ. 맺음말

빨리 문헌에서 말하는 성인의 범주는 여덟 사람으로 구성된 사향사과를 말하며, 이 가운데 과를 이룬 사성인은 불교수행의 계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성인의 형태이다. 이러한 사향사과와

사성인은 최고층 문헌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는 『숫타니파타』에서부터 빨리 문헌 전체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사향사과에 대해서는 주로 두 가지 논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향설은 사과설이 성립한 후에

파생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보는 점과 예류향[도]은 성인이 아니라는 점이 제시된다. 그리고

사성인에 대해서는 주로 세 가지 논점을 지적하고 있다. 계위성립에 있어서 순차적이지

않으며, 일래와 불환에서의 생천설은 불교의 본지도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성인의 정의에서 몇 가지 부합되지 않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후지모토 아키라

(藤本晃)는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해서 위와 같은 주장들을 부정하고 일관되게 붓다의

직접적인 교설임을 주장하고 있다. 논자 또한 후지모토 아키라의 견해에 타당성을 두고 고찰

하였다.

고찰한 결과 학자들이 지적한 논점들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그것들을 확증할만한 논거들이 빨리 문헌에서 쉽게 보이지 않았으며, 학자들의 논거제시 또한 충분하지 못한 면이 있다. 반면

빨리 문헌 가운데『숫타니파타』,『상윳따니까야』의 「삭카상윳따」,『담마빠다』그리고 

『테리가타』등에서는 사향사과라는 용어는 물론 사성인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우다나』는 사향사과의 여덟 사람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사향사과설과

사성인의 계위가 일찍부터 정립되어 있었다는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한 설명은 빨리 문헌 전체에서 더 체계화되고 명확해진다.

그런가하면 사성인에 대해서도 몇 가지 명확하지 않은 점이 지적되고 있으나 불교의 본지와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성인의 삼계윤회와 생천 사상은 아라한이 되지 못하면 누구라도

윤회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한 번[일래자]에서 최대한 일곱 번[예류자]을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는 불가피한 전제이다. 그리고 정의부분에서 일래자와 아라한의 경우는 열 가지 족쇄와 상응하여 다르게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유사한 다른 표현일 뿐 족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아까누마 치젠(赤沼智善)은 사성인의 과위 차별도 붓다가 설했다는 자료가 없다고

하였으나, ‘붓다가 설하지 않았다는’ 자료 또한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앙굿따라니까야』의「사마나숫타」는 오직 네 단계의 사성인만이 바른 교설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향사과설과 사성인의 계위에 대해서는 크게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빨리 문헌에 가까운 입장이라고 본다.

끝으로 사향사과와 사성인에 대한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는 성인에 대한 바른 이해를

확립시켜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와 가치를 지닌다고 확신한다.

[출처]빨리(Pāli) 문헌에 나타난 성인(聖人)의 의미와 그 해석에 대한 일고찰|작성자임기영불교연구소

 

사선정 팔선정

사선정(四禪定)에 대하여

 

 

사선정(四禪定)은 사선(四禪)사정려(四靜慮)라고도 합니다. 초선정(初禪定)2선정(第二禪定)3선정(第三禪定)4선정(第四禪定)을 사선정(四禪定)이라 합니다. 초선정을 이생희락정(離生喜樂定)이라 하고, 2선정을 정생희락정(定生喜樂定)이라고 하며, 3선정을 이희묘락정(離喜妙樂定)이라 합니다. 또 제4선정은 사념청정정(捨念淸淨定)이라 합니다.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에 이르기를

 

"네 가지 선정(禪定)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비구가 이미 모든 욕심과 좋지 못한 법을 여의고 심(: 거친 마음)과 사(: 미세한 마음)가 있으면 첫 번째 이생희락정(離生喜樂定)이라 하고, 만일 비구가 심()과 사()를 쉬고 마음이 깨끗하며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여 심과 사가 없으면 이것을 두 번째 정생희락정(定生喜樂定)이라 하며, 만일 비구가 기쁨을 탐하지 아니하고 보시행을 좋아하며 몸이 경쾌하고 묘한 즐거움을 얻으면 이것을 세 번째 이희묘락정(離喜妙樂定)이라 하고, 만일 비구가 즐겁다는 생각을 끊고 괴롭다는 생각도 없으며, 기뻐하는 마음도 없고 고뇌하는 마음도 없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으면, 이것을 네 번째 사념청정정(捨念淸淨定)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네 가지 선정이라 한다.' 라고 하셨다." 

 

 

1. 사마타 수련 색계(色界)의 사선정(四禪定)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전주(專注)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사마타(Samatha.)수행에는 여덟 가지 단계의 선정이 있습니다. 색계 4선정과 무색계의 4선정이 있습니다. 각 단계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습니다.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위타카(Vitakka : 겨냥하는 마음. ), 

위짜라(Vicāra : 고찰하고 지속시키는 마음. ), 피티(Piti : 환의심. ),수카(sukkha : 행복감. ), 사마디(Samdhi : 일념. 三昧)가 있습니다.

 

 

초선정(初禪定)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 중 위타카()위짜라()가 현저하게 나타나며 피티(환희. )와 수카(행복감. )가 일어납니다. 피티는 바라는 것을 성취함에 따른 만족감이라면, 수카는 성취했을 때 오는 실질적인 체험입니다

 

마음이 5장애(五障碍)로부터 벗어남에 따라 마음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고 그 결과 5장애는 더욱더 침범하지 못하게 됩니다.

 

<청정도론(淸淨)>에서는 피티와 수카를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오는 환희가 피티이고, 물을 먹었을 때 오는 시원함이 수카이다."

 

초선정이 숙달되면 자유자재로 원하는 시간만큼 선정에 들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지만 계속적 연습으로 숙달됩니다. 여기서 통달해야 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입정(入定), 성취, 선정의 시간, 출정(出定),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선정수련에 해당합니다.

 

) 오장애(五障碍) : 탐욕성냄혼침과 무기불안의심

 

 

2선정(第二禪定)

 

초선정에서 현저했던 위타카()와 위짜라()가 고요하게 되면서 제2선정으로 들어갑니다. 피티()수카()사마디(三昧)와 함께 일념이 되어 내적인 확신을 갖게 됩니다. 초선정과 2선정의 차이점을 보면, 초선정 경우에는 5장애로부터 보호의 성격이 강한 반면 2선정에서 피티가 현저하면서 '집중'의 상태가 일어납니다.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나아갈 때는 지금까지 이용했던 주제를 이용하든가 아니면 다른 알맞은 주제를 이용해도 됩니다(이것은 4선정까지 적용됨). 이 주제로서 배움의 상, 고정된 상, 우파자라 사마디, 앗파나 사마디로 나아가는데 숙달될수록 거치게 되는 단계적인 시간의 길이는 짧아집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더 높은 선정단계(팔선정까지 포함)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2선정이 숙달되면 집착하지 말고 3선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선정에서 현저했던 피티를 정제하고 수카와 사마디로 이루어진 상태로 나아가도록 다시 한 번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 우파자라 사마디는 접근적 삼매 중간단계로 불리우며 선정수련과 지혜수련 양자에 모두 이용됩니다. 앗파나 사마디는 선정의 성취라 불리우며, 수행자의 마음이 명상 대상에 완전히 집중된 상태.

 

 

③ 제3선정(第三禪定)

 

여기에선 피티가 고요해지고 몸으로 수카를 느끼면서 사마디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피티는 즐겁기는 하지만 마음의 쾌감과 불안정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정제되고 수카와 사마디만 남습니다. 그러나 수카 역시 4선정의 평등심(無心)에 비하면 아직도 상대적이고 거치른 면이 있으므로 이것 역시 집착하지 말고 다음의 제4선정으로 나아갑니다.

 

 

④ 제4선정(第四禪定)

 

수카가 정제된 4선정에서는 평등심(無心)과 사마디(一念)만 남게 됩니다.

평등심은 상대적인 선(善)ㆍ악(惡)ㆍ미(美)ㆍ추(醜)ㆍ희(喜)ㆍ비(悲)... 등으로부터 초연해집니다. 육체적 감각이 떨어져 나가고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비고비락(非苦非樂)의 순수한 일념의 상태에 듭니​다. 물론 이러한 평등심은 이전의 초선정ㆍ2선정ㆍ3선정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낮에도 달이 있지만 강한 햇빛 때문에 볼 수 없듯이 평등심은 보다 섬세하지 못한 위타카ㆍ위짜라ㆍ피티ㆍ수카로 인하여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3선정은 마치 해질 무렵에 달로부터 비쳐오는 부드러운 빛과 같고, 4선정은 밤이 와서 달이 중천에 떴을 때 맑은 빛이 사방에 비추어 어둠이 사라진 상태와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무심한 평등심으로 인하여 순수한 선정 상태에 들 수 있습니다. 4선정은 물질계인 색계(色界)의 마지막 선정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4선정도 고도의 집중력과 평온한 상태이지만 무색계(無色界)의 네 가지 선정에 비하면 아직도 선정의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2. 위빠싸나 4선정

 

 

① 초선정(初禪定)

 

알아차림(sati正念)이 예리하게 되어 현상의 사라짐이 분명해질 때 수행자는 직관적으로 현상에 내재해 있는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를 간파합니다. 삼법인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는 '현상의 바른 이해에 대한 지혜'를 포함합니다.

 

통찰이란 말이 팔리어의 위빠싸나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위빠싸나(vipassanā)의 위(vi)는 '여러 형태'란 뜻(삼법인)이고, 빠싸나(passanā)는 '본다'라는 뜻입니다. 즉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의 형태를 철견한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선정이 일어날 때는 위타카(尋), 위짜라(伺)가 현전하게 되고 수행자의 통찰력은 급속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속으로 파고 듭니다. 이러한 통찰지혜를 경험하면서 수행자는 성장해 갑니다.

 

 

② 제2선정(第二禪定)

 

초보 단계의 반조적인 생각을 고요하고 순일무잡한 집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수행자의 마음은 대단히 맑고 예리해집니다. 순간순간 급속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예리한 마음 집중으로 인하여 산만한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몸과 마음의 무상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때는 노력 없이도 수행은 저절로 되어갑니다.

 

겨냥하는 노력(위타카 尋)과 관찰해 보는 마음(위짜라 伺)이 고요해진 가운데기쁨과 행복감이 충만하게 느껴집니다.

 

첫 번째 선정에서는 위타카, 위짜라가 충만하지만, 두 번째 선정에서는 현상의 생, 멸을 꿰뚫어 보기 시작할 때 명료함ㆍ환희ㆍ신심ㆍ안온함 등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마음은 더없이 예리해지고 집중력은 깊어 갑니다. 깊어진 집중력으로 체험에서 오는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계속 수행한다면 부처님이 약속한 결실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환희와 정신적, 육체적 평온함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에 집착할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 중에서 가장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진보는 할 수 없습니다. 이때의 환희나 즐거움을 분명하게 관찰해서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집착이 일어나면 즉각 제거하고 배의 움직임(혹은 사념처 중 다른 주제) 관찰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진보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해야 합니다.

 

 

③ 제3선정(第三禪定)

 

환희(piti)가 점차 줄어들고 알아차림(mindfulness, 마음집중)과 집중력이 계속 깊어집니다. 현상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점점 깊어집니다. 7각지(七覺支) 중 평등각(平等覺)이 나타납니다. 마음은 순경계(즐거움), 역경계(불쾌함)에 흔들리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깊은 평온함이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몇 시간이고 앉아서 좌선할 수 있습니다. 몸은 청정해지고 가벼우면서도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3선정(三禪定)의 특성이며 행복감(sukka)과 일념(samādhi)의 요소가 현전합니다. 현상의 생, 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더욱더 깊어 갑니다.

 

두 번째 선정에서 세 번째 선정으로 나아감은 수행상의 대전환점입니다.

보통의 경우, 수행자는 마음이 설레는 흥분이나 전율에 자연적으로 집착하게 됩니다. 피티(환희)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수행의 사춘기입니다. 이것을 체험할 때 틀림없이 정진력을 향상시킵니다. 가능한 한 ,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는 한, 더 이상의 진보는 없습니다. 경전에는 이것을 어미소와 송아지(2선정)에 비유합니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제때에

젖을 떼지 않으면 사람에게 많은 젖을 줄 수 없게 됩니다.

 

세 번째 선정에서 행복감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가장 달콤합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집착하지 않고 무심하게 계속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관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통찰은 더욱더 예리해지고 명료하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를 지나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로 접어듦에 따라 대상의 처음과 중간 부분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은 현상이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부분만을 감지합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즉각 사라집니다. 종종 몸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직 사라져가는 현상만이

계속하는 것 같습니다.

 

수행자가 혼란하거나 당황해 하는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현상에 당황해 하고 불안 해 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립니다. 빈 허공만 남긴 채 그 다음 현상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립니다. 현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채 계속 사라짐만 보게됩니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울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이제는 조절 할 수도 없고 하나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는 냉정하게 계속적인 현상의 흐름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것을 '사라짐의 지혜'의 단계라 부릅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 행복감이나 평온함이 없고 육체의 고통이나 불편함이 없습니다. 다만 중립적인 무심한 상태에 있습니다.

 

 

④ 제4선정(第四禪定)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가 성숙되고 있는 동안에 두 번째 선정의 환희(pīti)는 세 번째 선정의 요소인 행복감(sukha)에 양보합니다. 보다 부드럽고 미묘한 평온함입니다. 세 번째 선정이 네 번째 선정으로 진보했을 때는 평등심(uppkkhā)과 일념(samādhi)만이 현전합니다.

 

마음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으며, 편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무심한 평등심이 일어납니다. 평등심은 마음을 균형시키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은 완전히 청정하고, 예리하고 날카롭습니다. 현상의 미묘한 성질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명료함과 함께 감지됩니다.

 

이러한 것은 초선정ㆍ2선정ㆍ3선정에서도 있어 왔지만 더욱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성질에 의해 감추어져 왔던 것입니다. 마치 태양이 있으면 달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선정의 각 단계는 행복감(sukha)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초선정에서는 5장애를 떨쳐버리고 보호되어 있는 즐거움입니다. 두 번째는 선정에서는 집중의 행복감입니다. 좋은 집중은 환희의 형태로 일어납니다. 세 번째 선정은 평온한 행복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지혜의 행복감을 경험합니다.

 

 

사마타 선정은 분별ㆍ관념과 착(着)이 따라다니는 유위법(有爲法)인 반면 위빠싸나 선정은 분별ㆍ관념과 착을 제거하면서 지혜를 계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정은 모두 조건화된 상대적인 현상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영역을 초월하면 궁극의 행복, 실재적인 행복을 맛봅니다. 그것이 위빠싸나 수행의 궁극적인 대열반(Pari-niibbāna)입니다.

출처 : 김열권 편저 위빠싸나에서 

 

 

 

유식학의 오위 수행설(修行說)/계위. 단계

​위에서 유식의 법상(法相)에 대해서 대략 설명하였다. 법상은 마음의 현상과 물질의 현상을 말한다. 그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진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을 마음의 실성(實性)이라고 이름한다. 위에서 마음이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眞如性)에 대한 설명을 삼무성(三無性)의 설명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삼무성의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위하여는 보살의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의 목적은 팔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얻는데 목적을 두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수행의 절차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등 오위로 나누어 설명하게 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량위(資糧位)의 수행

자량위는 수행의 자질을 향상하는 수행위를 말하며 이 수행위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보살들의 수행을 뜻한다. 자량위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것이며 수행의 절차에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위의 단계가 있다. 이들 삼십위를 모두 합쳐서 자량위라고 하며 자량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를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이 되는 번뇌는 정화되지 않으므로 매우 초보적인 수행위에 속한다.

그리하여 자량위에서는 미세하고 깊이 집착하는 마음은 정화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번뇌의 뿌리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번뇌형상이 남아있게 된다. 능취와 소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망심과 분별심의 번뇌망상을 야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2. 가행위(加行位)의 수행

가행위는 자량위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수행을 뜻한다. 이 수행은 난(煖)과 정(頂)과 인(忍)과 세제일(世第一) 등 사선근(四善根)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가행(煖加行)은 하품의 심사관(下品尋思觀)을 수행하며 경계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득정(明得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한다.

2) 정가행(頂加行)은 상품의 심사관(上品尋思觀)을 닦고 경계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증정(明增定)을 수행한다.

3) 인가행(忍加行)은 하품의 여실지관(下品如實智觀)을 수행하고 집착된 경계는 모두 공(空)한 것임을 인가하는 인순정(忍順定)을 수행한다.

4) 세제일법가행(世第一法加行)은 상품의 여실지관(上品如實智觀)을 수행하며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다. 여기서는 선정을 간단없이 수행하는 무간정(無間定)을 닦는다.

이와 같이 가행의 보살행을 실천하면 집착심과 차별심을 발생하는 능취와 소취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만을 정화하게 된다. 분별기의 번뇌는 후천적인 번뇌를 뜻하는 것이며 여기서 진일보하여 근본이 되는 번뇌를 정화하려면 부단하게 보살도를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통달위(通達位)의 수행

통달위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자량위와 가행위를 통하여 부단히 수행한 결과 진리의 눈이 트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분별의 지혜가 발생하여 진여를 체달하고 달관하게 되며 이러한 경지를 통달이라고 한다. 통달은 진리를 통달했다는 뜻으로서 진리를 통달했기 때문에 마음에는 집착과 탐욕을 나타내는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지게 된다.

분별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 견분(見分)의 분별작용이 없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견분의 분별작용이 없어진다는 것은 능취와 소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식이 실현되게 되며 따라서 진여성(眞如性)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 칭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고 지전의 수행위를 자량위와 가행위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통달위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의 수행위를 뜻하며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를 말한다. 초지보살의 경지는 비록 견분(見分)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별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분별은 없지만 아직도 반연하는 작용이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4. 수습위(修習位)의 수행

수습위는 위에서 말한 통달위에서 정화하지 못한 마음을 더욱 정진하여 정화하는 수행위를 말한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은 나 자신이 공한 것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인연의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극미(極微)의 형성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는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으려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금강유정은 최상의 선정을 뜻하며 이 선정은 제십지보살(第十地菩薩)의 수행심에만 나타나는 선정이다. 번뇌의 정화는 제6의식과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초지(初地)에서부터 점점 정화되기 시작하여 제칠지(第七地)의 보살수행에서 번뇌장이 정화되고 아집이 단절된다.

그 후 보살은 더욱 수행하여 아직도 단절되지 않은 소지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법집을 정화하기 위하여 계속 수행하여야 하며 제십지(第 十地)에 진입하여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단절하게 된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되면 그동안 번뇌의 장애를 받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던 지혜가 활발하게 나타나서 모든 법체를 확실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 지혜들을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칭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망식이 정화되면 나타나게 되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고,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의 번뇌종자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도의 수행을 통하여 망식(妄識)의 번뇌가 정화되면 마음의 진여성에 발휘되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는 번뇌장이 정화되면 열반(涅槃)이 실현되고 소지장이 정화되면 보리(菩提)가 발생한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보리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며 보살도를 수행하는 가운데에 마음의 번뇌가 한하나 정화된 이러한 수행들을 모두 합쳐서 수습위(修習位)의 수행이라고 한다. 수습위의 수행은 초지보살의 수행으로부터 제십지보살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되는 수행이다.

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구경위는 자량위와 가행위와 통달위와 수습위의 수행을 통하여 팔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량위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 삼겁을 다시 분류하면,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劫)이 걸리고, 통달위에서 제팔지보살의 수행위인 수습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이 소요되며, 제팔지보살의 수습위에서 구경위에 오르기까지 1겁이 걸린다.

이들 수행기간을 모두 합치면 3겁이 된다. 3겁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등 이타적인 수행을 해야만이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타적인 수행 가운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7) 방편(方便), 8) 원(願), 9) 역(力), 10) 지(智) 등의 바라밀을 뜻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십종의 바라밀을 수행하면 유식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을 깨닫고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들 십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보시바라밀은 물질과 정신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물질을 베풀어준다는 재시(財施)가 있고, 진리를 설명하여 사상을 길러주는 법시(法施)가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보시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들을 계몽하고 복되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지계바라밀은 보살 스스로의 계율을 잘 지키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삼취정계는 첫째,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의 범죄를 방호하는 율의계(律儀戒)를 실천하고, 둘째, 중생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고 심지어 짐승의 공포까지도 없애주는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실천한다. 셋째,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이익을 가져다주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를 실천한다. 이와 같이 이타적인 계율이 삼취정계이며 대승적인 계율사상이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 인욕바라밀은 모든 일에서 고된 일을 참고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욕은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諸察法忍) 등 3인(忍)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3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원해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항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안수고인은 추위와 더위 등 자연의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제찰법인은 사성제(四聖諦) 등 여러 진리를 관찰하고 진리를 통달하기 위하여는 어려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정진바라밀은 선법을 행하고 보살행을 할 때 게으름을 퇴치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정진은 피갑정진(被甲精進)과 가행정진(加行精進)과 무퇴정진(無退精進)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피갑정진은 병사가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근면하게 전투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것과 같은 근면성을 말한다. 둘째, 가행정진은 견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감하게 완수하는 근면성을 말한다. 셋째, 무퇴정진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근면성을 말한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 선정바라밀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함이 없이 미세한 번뇌까지도 정화하는 선정을 뜻한다. 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수행하여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고 인연법과 더불어 유위법(有爲法)을 반연하는 후득지(後得智)를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지혜바라밀은 선정을 닦아 발생되는 지혜를 말하며 지혜는 마음의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분별심이 전환하여 나타나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삼라만상이 인연법으로 형성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알게 되면 중생의 불성도 알게 된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자는 대자대비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하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7)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 방편바라밀은 방(方)은 훌륭한 방법과 정직을 뜻하고 편(便)은 편리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근기에 계합하는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활용하여 구제사업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편바라밀로 말미암아 마음속 깊이 발생하는 미세한 번뇌를 단멸하게 된다.

8) 원바라밀(願波羅蜜) : 원바라밀은 보리와 열반을 속히 증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원(願)은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내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구보리원은 큰 깨달음과 불과(佛果)가 성취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 이락타원은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뜻한다.

9) 역바라밀(力波羅蜜) : 역바라밀은 보살이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하면서 보다 더 힘을 내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역(力)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이 있다. 수습력은 모든 힘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가행하는 것을 뜻하고 사택력은 모든 진리를 지혜롭게 선별하고 사리를 진리롭게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10) 지바라밀(智波羅蜜) : 지바라밀은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승의(勝義)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속에 있는 모든 것과 중생의 근기까지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살이 수행하는 십바라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보살은 자량위의 수행을 할 때부터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는 십바라밀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집약한 수행관이며 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사회를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으로 말미암아 본래 소유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장애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번뇌가 없어지고 동시에 모든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번뇌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불성에서 발휘되는 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며 무애자재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망식이 강하면 지혜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지면 망심이 약해진다는 말과 같이 자량위 때부터 지혜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여 구경위에 도달해서는 망식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혜만 원만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들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이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이 정화되어발생하는 지혜이며,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주의 진리를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불타의 삼신(三身)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불타는 사지(四智)를 구족하고 삼신(三身)을 구족하였으며,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들에게 미치기 되며 삼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법신(法身)은 자성신(自性身)이라고도 하며 이는 진여(眞如)의 체성이며 진리적인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만법의 체성이며 모든 진리의 의지처이고 여러 덕(衆德)의 집합체인 것이다.

2) 보신(報身)은 3겁(劫)을 수행하여 과보로 받은 불타의 몸을 말한다. 불타는 과보를 받아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십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공덕으로 받은 과보를 혼자서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의 실천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수용신은 여래의 대원경지와 제팔식의 진여성을 말하며 이는 여래 자신만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다. 타수용신은 십지보살들이 수용하는 불타의 덕성을 말하며 이는 평등성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응신(應身)을 뜻한다.

3) 화신(化身)은 여래가 하급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성소작지를 변현하여 나타내는 불신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화신을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한다. 변화신은 자량위의 보살과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거주하는 불신을 말한다.

위에서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등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들 수행사상은 이타적인 원리로 구성되었으며 이타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하여서도 다시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불타의 자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근본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유식학이 흥기하여 전래된 역사와 팔식을 비롯하여 여러 교리를 설명하였고,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나타내어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사상도 함께 설명하였다. 이들 내용들은 비록 자세하지는 못하더라도 유식학의 길잡이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체계있고 자세하게 쓴 글을 발표할 것을 기약하고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