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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시에서 계절과 사랑을 읽다

시와 미와 삶-시와 산문의 구별 / 김춘수

시와 미와 삶-시와 산문의 구별


제2부 아! 김춘수   

 

에 내포된 의식적 지향에 대해 논하고 있다. 시는 창조 문학이고, 산문은 토의 문학이므로, 이를 통해 '창조'와 '토의'라는 술어의 의미가 자세히 밝혀진다. 내용의 성격에서 산문이 토의적, 비평적이라면 시는 지시적, 창작적일 것인데, 토의적 성향이 주지적, 객관적, 고전주의적 지향을 보이는 반면 창작적 성향은 주정적, 주관적, 낭만주의적 지향을 보인다. 김춘수의 시론에서 산문시는 매우 특별한 장르로 취급받는데, 그 이유는 시와 산문의 차이가 "내용의 성질에서나 "정신의 방향에서나 이처럼 명확하기 때문이다.

 

산문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장르의 위기에 나타난 장르로, “시대의 경향이 주지적 토의적(사적)인 데서 오는 시의 비극"(형태론』, 76쪽)이라는 것이 김춘수의 설명이다. 이 같은 수사는 일견 산문시의 정체성의 혼란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시와 산문의 결합은 시류적이지만 시와 산문의 구별은 본질적이라 여겼기 때문에, 김춘수는 형식이 산문이면 내용은 반드시 토의적이어야 하고, 내용이 토의적이면 형식은 반드시 산문이어야 한다는 규범을 수립했다. 정지용과 김영랑과 서정주의 몇몇 시에 대한 분석을 보면, 이 규범이 평가의 원칙으로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7)

형식으로서 시와 산문 및 그에 본유적인 속성 간에 설정된 본질적인 경계가 침해된 경우에 대해 김춘수는 '얄궂다' '이상하다' '모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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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정지용의 호수 1」, 김영랑의 동백잎」과 「꿈밭에 봄마음」, 서정주의 「봄」과 「부활」에 대한 비판을 시인별로 요약한다. ① 정지용 기지를 내용으로 했는데, 산문 형태를 택하지 않아서 얄궂은 형태"를 낳았다. 감각적 내용인데, 산문 형태가 아닌 것은 "이상하다.”(『형태론』, 50쪽) ② 김영랑 감각적 언어가 산문 형태를 가지지 못한 것은 "모순"이다. 감각적 언어가 산문 형태를 가지지 못한 상태가 시를 우습게 하고 있다. (형태론, 51쪽) ③ 서정주: 산문 형태의 문장에 음률을 드러내는 것은 "호기(好)에 지나지 않는다."(형태론」,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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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습다' '희화화한다' '호기이다' 같은 술어를 써가며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실지로 시와 산문의 내재적 자질이 그렇게 명확하게 판정될 수 있는 것일까? 실제 비평에서 토의적 성격과 지시적 성격, 비평적 성격과 창작적 성격은 물론 주지적, 객관적, 고전주의적 지향과 주정적, 주관적, 낭만주의적 지향을 구별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판단은 기껏해야 상대적일 뿐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김춘수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답을 내놓는다. "오직 시가 되고 非詩가 되는 것은 시인의 성실과 기량에 달려 있다”(『형태론』, 19쪽)는 것이다.

이것은 시와 역사 및 시와 산문의 구분 기준에 대한 대답인 동시에 시의 정의에 대한 답변인데, 이 대답 속에는 낭만주의의 기본 원리인 개인주의와 주관주의와 기술주의가 집약돼 있다. 그가 말하는 '시인'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서 '개인' 임은 자명해 보인다. '성실' 이란 말은 「處容斷腸』수록 평문에도 나왔던 것으로, 주관적 진실을 뜻했던' 리얼리티' 의 유의어다. 기량' 이란 기술적 재능을 가리키는 낱말이므로, 역시 앞의 자료에 나왔던 '기교'란 말의 동의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 시작된 논의는 여기에 이르러 개연성과 실제성, 보편성과 개별성은 말할 것도 없고 창조성과 토의성의 구분까지도 폐기하고 오로지 주관성과 기술성의 해명에 집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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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형태론』에는 실제 비평(批評)의 이론적 토대를 서술한 세 개의 절이 포함돼 있다. 서문을 대신하는 「시 형태론 서설」과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시와 시에 있어서의 형태' 란 부제를 단 「서론」및 「시에 대한 인간적 태도와 비인간적 태도(하나의 전제로서)」라는 절이 그것들이다. 이 중 '서설' 은 형태의 역사를 대상으로 발생학적 추론을 제기한 것이고, 「서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몰튼의 시론에 의거해 장르론적 설명을 제시한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시의 본질을 규정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한 논의로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작품 분석과 가치 판단의 '전제'가 된다. 제목에 들어 있는 '전제' 란 말은 허사가 아니고 시사기술의 근거를 적시하는 실사다. 두 가지 태도 중 김춘수는 후자에 경도돼 있고, 그런 입장에서 '비인간'이란 어사를 '형식' '방법' '기술''주지' 등의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으로 취했다.

 

시를 대하는 태도에 두 가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시를 내용의 면에서 보는 태도와 형식 즉 방법의 면에서 보는 태도가 그것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종합적인 제3의 태도가 있겠으나 그것은 이념이고 현실적으로는 그 비중이 전기 두 가지 태도의 그 어느 쪽에는 더 많이 기울어져 있음을 본다.) 시를 내용의 면에서 보는 태도는 보다 시를 두고 '느끼는 그것이라고 하면 형식 즉 방법의 면에서 보는 태도는 보다 시를 두고 '생각하는' 그것이라고 할 것이다. 전자를 낭만주의적 태도라고 하면 후자는 고전주의적 태도라고 할 것이다.(「형태론』, 45쪽)

 

인간적 태도와 비인간적 태도는 개념적으로는 반대 관계지만 현실적으로 모순 관계를 이룬다. 전자의 핵심은 내용, 주제, 느낌에 있고, 후자의 요체는 형식, 방법, 생각에 있다. 전자는 "내용 편중의 낭만주의”로 귀착되고, 후자는 "형식 편중의 고전주의"로 낙착된다.(『형태론』, 45쪽) 느끼는 태도는 주정적”이고 생각하는 태도는 지적"(형태론』, 45쪽)임은 앞에서 검토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시와 산문, 시와 역사의 구분에 대한 김춘수의 견해에서 자동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사실이다.

 

제2부 아! 김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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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구별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고, 그 자체로는 중립적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구상이 가져오는 현실적 결과는 아주 독특한 것이어서 주목을 요한다. 시와 역사, 시와 산문을 가르고, 그에 더해 내용과 형식, 주제와 방법을 나눔으로써 결국 '현대시’는 어떤 것이 되는가? 시인으로서 김춘수의 입장이기도 한 비인간적 태도는 그 논리적 귀결로서 예술과 현실 및 전문가와 일반인의 낭만적 분리를 야기한다.

 

'느끼는 주정적 태도는 인간의 일반적 태도라고 하겠다. '느끼는' 은 인간만사나 우주삼라만상에 대하여 느끼는' 일일 것인데, 시인뿐만이 아니라, 학자도 정치가도 상인도 노년도 소년도 남자도 여자도 다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주지적 태도는 이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때의 '생각하는' 은 예술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일 것인데, 예술을 또한 시의 형식이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아무나 이 '생각하는' 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식이나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방면의 전문가에 국한된다.(형태론』, 45~46쪽)

 

김춘수의 설명에 의하면,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전혀 다른 행위다. 전자의 주체는 인간 일반이고, 그 대상은 세계일반이다. 반면에 후자의 주체는 특수 계층이고, 그 대상은 특수 현상이다. 후자는 "형식이나 방법을 기술적으로 구축하는 태도"(형태론」,46쪽)이므로 비평과 창작을 망라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 입장에 서면 어느 경우에나 사고와 인식의 대상은 현실과 분리된 예술에 한정된다. 예술의 대상이 예술 그 자체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예술이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는 이 상황은 바로 낭만주의가 창안한 내재주의적 기획의 목표에 해당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는 김춘수의 발언은 시의 본질은 시 자신이 수행하는 자기근원의 탐구 속에 있다"28)는 낭만주의의 상투어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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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선정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주체의 설정에서도 주지적 태도는 낭만적 편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술의 담당자가 전문가에 국한된다는 생각에서 예술적 천재를 존중하고, 정신적 귀족을 인정하며, 문화적 특권을 보장하는 낭만적 의식의 기미를 엿보는 것이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러한 제한이 낭만주의가 고착화시킨 천재적 인간과 평범한 인간, 예술가와 관객, 예술과 사회적 현실의 간극이나 "아마추어와 거장사이의 간격"30)을 표현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시를 형식 즉 방법의 면에서 보고 생각하는 주지적 태도에 대한 기술은 역설적이게도 김춘수가 말하는 고전주의란 곧 낭만주의를 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시와 예술과 방법과 기술을 등가로 간주하는 "시라고 하는 예술방법, 기술)의 입장" (형태론』,54쪽), 더 간단히는 “예술방법, 기술)의 입장' (형태론』, 55쪽)의 실재성을 예증하는 사례와 그에 대한 해석은 김춘수 시론의 거점이 낭만주의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전자가 보다 윤리적이라 하면 (허무에 대하여 뭐라고 설령 말하고 있

 

28) Tzvetan Todorov, 비평의 비평」, 90쪽.29) Arnold Hauser, 앞의 책, 249쪽.30) 같은 책,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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