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否定)의 변증법(辨證法) - 김명인 시의 진폭(振幅) / 시와 미와 삶(제3부 삶의 심연(深淵)과 미적 섬광(閃光))
김명인 시인의 시집 동두천』과 『바다의 아코디언을 대비해 그의 시의 진폭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전자는 첫 시집으로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고, 후자는 같은 출판사에서 2002년에 나왔는데, 그사이에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이라 제한 다섯 권의 시집이 상재됐다.
이 글의 의도는 김명인 시의 개략적인 윤곽을 검토해 그 전모를 파악하는 데 소용될 수 있는 단서를 찾는 데 있다. 매우 제한된 자료를 다루는 이 정도의 작업으로 1973년에 등단해 시력으로만 이립의 세월을 넘긴 시인의 작품 세계가 요해될 수 없음은 분명한 일이니, 다만 시세계의 주지와 요체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색인이나마 적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동두천』은 역사주의의 견지에서 민족 문제, 국가 문제, 노동 문제를 구체적 보편의 차원에서 탁월하게 형상화한 시집으로 평가할 수 있다. 뒤표지에 적은 '시인의 말에다 김명인은 이 시집의 근간을 이루는 제재와 동인을 간명하게 요약해 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불우했던 유년 시절,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 월남전 참전 경험이 작품의 주된 동기를 이루며, 체험과 표현의 진정성이 시의 바탕을 이룬다. 여기서 이 시집의 정조(情調)적 속성이 ‘막막함' '괴로움' '고통스러움' '뉘우침'등의 말로 표시되는 것은 형식화의 두 계기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내용이나 정서의 수준을 넘어 시의식이나 주제 의식의 차원에서 이 언표를 살피면, 김명인 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사유의 단층이 나타난다. 두 문단씩 한 단락을 이뤄, 두 단락으로 분절되는 이 짧은 글에서 문단과 문단, 단락과 단락은 부정의 논리에 따라 연결된다. 뒤에 오는 문단이 앞의 문단을 부정하고, 뒤에 오는 단락이 앞의 단락을 부정한다. 전건 부정이 사고의 계기를 형성하고, 부정의 부정이 실천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시인의 말을 이끄는 사유의 논리를 부정의 변증법이라 규정해도 무방할 듯하다.
안개에 묻힌 막막한 한 시절이 더없는 괴로움으로 다시 떠오를 적마다, 나는 나를 묶는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유년 시절의 추위와 주림, 동두천에서의 쓰라렸던 경험, 그리고 월남전의 체험까지도 나는 나의 앞날과 더 이상 관련되지 않도록 지워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시의 바탕이 진정성으로 이해될수록 더욱 불가해한 고통의 뿌리에 나는 닿아 갔고, 스스로를 확인하는 괴로움 속에서는 시를 선택한 것까지를 포함한 수없는 뉘우침이 왔다. 결국 내가 쌓은 시간의 양만큼 나는 살아 있었고, 그것이 내가 헤쳐 온 전부의 세계였다.
지나온 길 / 도봉별곡
지난 세월을 전체적으로 보면/돌아보면
구부러진 곳곳마다 만나야 하는
선택의 길목에서
최선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오늘을 살고 있다.
가지 않은 길을 되짚어 보면
밖에서 보면 가시덤불 또는 풀이 무성한, 아무도 가지 않아 닳지 않은, 신작로를 닮아 쭉 뻗은 길 등
그러나 그 이상은 보여주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과
지나온 길은
(미래 언젠가의 시간과)
맞닿아 있을까
지나가면서
군데군데 수렁에 빠졌으며
잘 헤쳐 나왔어도
그 생채기가 남아
오늘을 괴롭히곤 한다./괴롭힌다
뉘우치고 잊으려 할수록
더 깊게 삶을 덜어간다
시를 선택한 것은 안타까움 위
쌓아온 것과 (생채기가) 덜어간 것을
계산하여 남은 것이
지금의 내가 서있는 시간과 공간 아니겠는가
1998IMF외환위기와 극복과정, 재기와 갈등, 오랜 법정투쟁, 승소 후의 무소득, 단념 후 공부 – 역사⋅우주물리학⋅뇌과학⋅철학⋅문학⋅양자역학, 시와 만남, 장애로 남은 사고, 시집 발간, 통증 치료와 재활을 위한 헬스⋅수영
인용한 첫 단락의 두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의 변증법은 발화의 형식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구성한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는 지시되지만 현재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양자의 부정적 경계로만 인식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다음 단락에서 시인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구현하고 있는 시로서 ‘그 고통의 언어'를 불가피하게 수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정이 곧 긍정은 아니어서, 지금의 시는 부정의 동기를 포함한 것으로 수긍된다. 거기에는 욕망의 한계와 내성의 미숙에 기인하는 요소가 섞여 있는데, 시인은 그것을 종국에는 헐어 버려야 할 '모호함' 이라 지칭한다.
부정의 사연과 부정의 연쇄로서 '시인의 말'은 결국 부정의 결과로서 도래할 먼 '미래'를 지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지금으로서는 언젠지 알지 못하는 때로,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결과로서만 재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정의 의식이 필연의 인식으로 연결되고, 필연의 인식이 다시 덕목의 실천으로 전환된다는 점에서, 이 담론은 변증법적 사유와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산문으로 비교적 평이하게 기술된 시의식은 작품에서 부정의 절대화로 구현된다.
여뀌풀은 억센 풀 길바닥에도 돋는 잡풀
꿈속에서도 제 나라 말 더듬는 아이를 보면 눈물나지만
어둡기야 캄캄한 밤 하늘에 더욱 멀리 던져진
헬로 너의 고향은 머나먼 별
한밤중에는 나도 내 고향으로 웅크리고 길 떠나지
한낮이 되어도 사라지지 못한 어느 이슬 속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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