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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람과 종교 바람과 종교 바람과 함께 왔지만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더위가 이끌어낸 바람의 사색 참으로 기막힌 여름이었다. 기억하기 귀찮아하고 글쓰기 싫어하는 사람도 훗날 를 쓰라 하면 틀림없이 그 유명했던 1994년의 여름과 이번 2016년의 지긋지긋한 더위를 더듬어 회고할 게 분명하다. 그런 혹심한 더위 속에서 절박해진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바람, 바람이었을 것이다. 산바람 골바람 가림 없이, 맞바람 뒷바람 마다않고, 선풍기바람 에어컨바람 거침없이 그저 기나긴 동면을 앞둔 곰 마냥 닥치는 대로 틈나는 대로 미풍, 약풍, 강풍 할 것 없이 모조리 포식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기껏 하룻밤의 휴면도 챙기지 못하면서 말이다. 말 그대로 바람 잘날 없이 우리는 그렇게 바람을 안고, 이고, 업고 여름을 나고야 말았.. 더보기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8)] 동북방 유목민 제국 요·금·원·청의 흥망 [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8)] 동북방 유목민 제국 요·금·원·청의 흥망 농경·유목 융합형 오랑캐, 10세기 이후 중원 지배 수·당, 돌궐·위구르 몰락하자 중원·오랑캐 모두 강력한 패권 사라져 ‘잡식성’ 선비·거란·여진·몽골, 중원문명 빠르게 흡수해 안정적 통치 ▎사하라 사막의 캐러밴 행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캐러밴 상인들을 거론하지 않고 인류의 문명 발전을 이야기할 수 없다. / 사진:세르게이 페스테레프 30년 전 강의실에서 중국사를 가르칠 때 가장 기본 도구는 개설서(통사)였다. 미국산으로 페어뱅크와 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 일본산으로 미야자키의 [중국사], 그리고 중국(대만)산으로 부낙성의 [중국통사]가 번역본이 나와 있어서 활용할 수 있었다. ​ 이번 작업을 위해 보다 근래에 나.. 더보기
신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양상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 신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양상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 ①기성종교, 신종교, 사교는 어떻게 다른가 ②한국 신종교의 중심사상 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와 신종교운동의 전개 ④신종교의 변용 민중종교사상의 전개와 외래종교문화의 충격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 관료 중심의 봉건적 지배구조가 해체되어 사회구조가 변화하게 되는데 신분질서의 이완, 자본주의의 맹아, 사회경제적 모순의 확대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분질서의 상향이동은 두드러진 현상으로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다수의 하위신분층과 소수의 양반신분층간의 균형이 요구되는 조선왕조의 지배구조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지게 됐다. 붕당정치 및 벌열화(閥閱化)로 인한 신흥양반형의 급격한 증가와 족보의 유행이나 직첩(職帖)의 남발로 인한 하위 신분층의 상향 이동은.. 더보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의 고대 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속, 언어 등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는데, ?삼국유사?는 단군을 나라의 시조(國祖)로 언급한다.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 왕명에 의해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젊은 벼슬아치 8명의 도움을 받아 여러 사서를 참고해 만들었다. '삼국사기'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기전체 형식의 총 50권짜리 역사책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삼국유사'는 일연선사(一然禪師, 1206〜1289)가 저술한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 더보기
"청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다" 2017.01.28 "청나라-만주국은 곧 '우리 민족사'다" 2017.01.28 이론(異論)의 역사 청 황가 시조 탄생설화인 ‘세 선녀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 신화 속 청 황가 ‘포고리옹순’은 누르하치의 6대조이자 조선 태조 때 회령 여진부락 지방관을 지낸 ‘맹가첩목아’다! 지난호에서는 청(淸) 시조(始祖)의 기원설화인 ‘삼선녀(三仙女)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영웅’ ‘포고리옹순’이 회령의 지방장관이었던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와 같은 지방에서 살고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 또 한 명의 인물이 청나라 사서에 등장한다. 그 이름은 ‘두두 멘터무(都督孟特穆, 도독 맹특목)’. 그 역시 누르하치의 6대조다. 그렇다면 맹가첩목아와 두두멘터무는 어떤 관계일까? 등은 포고리옹순 가문을 ‘금(金)나라의 남은 부락’ .. 더보기
존재하지 않는 漢族의 후예 중국인의 역사 존재하지 않는 漢族의 후예 중국인의 역사 1 개념의 정립 오늘날의 차이나인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신들을 한족이라고 내세우고, 또한 중국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이렇게 부르는 데는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역사를 왜곡하자는 저의와, 또한 차이나 주변에 있는 국가들이 그 호칭에 속아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한족이라는 명칭과 중국이라는 명칭은 차이나인에게는 남을 속이는 명칭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명칭이기도 하다. 지금 차이나 사람들은 차이나 역사 5,000년 동안 존립과 존재가 불확실한 자신을 내세워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강대한 민족, 유구하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 사는 한 화교가 차이나문화원 게시판에 차이나가 거짓말쟁이임을 일깨워주.. 더보기
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원정 2016.01.13. 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원정 2016.01.13. 17. 1099년 상반기의 상황 1099 년 5월 13일 마침내 십자군은 아르카의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4개월 이상 지속된 이 공성전에서 십자군은 아무것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만 입고 물러난 셈이었다. 여기에 이 때까지의 인적 손실 및 보에몽, 보두앵, 블루아 백작등이 이탈한 문제 때문에 십자군은 이미 규모가 좀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만약 이 시기 무슬림 세력들이 연대해서 이들을 공격했다면 십자군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가호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징벌이될 수도 있지만) 가 있었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당시 무슬림 세력의 상황을 생각할 때 이는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불경스런 자들과 맞.. 더보기
국력이 융성할 때 중국엔 늘 ‘帝國의 피’가 흘렀다/2010.09.19 “중국인들은 모든 정복자들을 거꾸로 정복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진 민족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한 말이다. 중국을 한때 정복했던 몽골·거란·만주족이 한족(漢族) 문화에 동화된 사실(史實)을 압축한 표현이다. 중국의 마지막 세 왕조는 원(元)-명(明)-청(淸)이었다. 한족의 중국은 이민족들이 정복한 영토와 역사와 문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중화제국(中華帝國)’을 구축했다. ‘팍스 몽골리카’ 시기에 몽골인은 서유럽·인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면적 3300만㎢)을 점령했다. 로마제국의 최대 판도보다 5.6배나 더 넓었다. 청나라 전성기였던 18세기에 만주족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훨씬 넓은 영토(1470만㎢)를 지배했다. 중국 역사 속에는 국력이 강할 때면 주변국을 정복하는 ‘제국의 DNA’가 흐른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