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록

관악산으로 모십니다(詩山會 제21회 산행)

관악산으로 모십니다(詩山會 제21회 산행)

산 : 관악산

코스 : 청사역-중앙공무원교육원-육봉능선-549고지-안양유원지

일시 : 2005년 9월 25일(일) 9시 30분

소요시간 : 오름 2시간 내려옴 2시간

모이는 장소 : 전철 4호선 과천 제2청사역 7번 출구

준비물 : 중식, 살엄음 낀 서울막걸리 1병씩, 우천시는 우의

연락 : 한양기(017-729-3457)

산을 오른다

몇 해만인가 참으로 홀가분하게

집 나오면 생활의 궁핍도 곤곤한 나의 투쟁도 나의 것이 아닌 듯 여겨져

좀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면

혹시 신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오리나무숲을 헤치고 개암나무잎을 만져도 보며

산을 오른다

내가 위로 올라갈수록

발갛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들이 하나 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이고

나는 그래서 나, 탄식이라도 내뱉고 싶지만

이 큰 산에 비해 내가 너무 작은 것 같아

아뭇 소리 않고 오른다

산은 위로 오를수록 더 깊어지는데

나는 저 아래 도시에서 한 뼘이라도 아파트 평수를 늘리려고

얼마나 얕은 물가에서 첨벙대기만 했던가

세상을 휘감고 흐르는 강물이 되지 못하고

하릴없이 바짓가랑이만 적셔 왔던가

산에 오르는 일을 한낱 사치로 여기던 내 어리석음과

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애타던 조바심을

솔방울로 힘껏 멀리 내던지고는

한 발 두 발 오르다가 보면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이 세상에 결국은 고생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저기까지만 더 가 보자,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내 나름대로 언뜻 결론 지어 보면서

칡넝쿨을 만나면 칡넝쿨로 누워 얼크러지다가

시누대숲을 만나면 시누대로 서서 흔들리면서

산을 오른다

내려갈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나는 나를 잊고 오르리라

깊은 밤에 여우가 다가와 내게 꼬리를 툭 치고 지나갈 일을

잠시, 상상해 보기도 하리라

 

안도현 시인의 <모악산을 오르며>라는 내용상의 산문시로 모악산은 전주 근교에 있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에게 유폐됐던 금산사를 품에 안고 있는 산으로

호남 4 경 (모악 설경, 변산 하경, 내장 추경, 백양 설경) 중의 하나이다.

2002년 몹시도 세찬 바람이 불던 한겨울에 올랐는데 정상은 바람에 날리지

않은 포근한 함박눈이 내렸다.

정상에서 바람 한 점 없이 내리는 눈을 고즈넉이 맞으며 전주의 육회와 비빔밥,

소주를 떠올렸으니 어찌할 수 없는 애주가인가!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의 고달픈 삶도 허무한 세월도 쉼 없이 흐른다.

바람불어 슬픈 날이라도 되면 우리가 남한강변에 나가 슬픔을 씻으면 슬픔도

바람도 함께 흐른다. 아니면 가슴시린 10월에는 설악의 대청봉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사철 부는 높새바람에 그러한 삶도 세월도 날려보내자.

높은 것이 산 뿐이랴 우리가 희망과 우정도 사랑도 함께라면 한 없이 높은 산도 오를 수 있다.

도움쇠가 약간은 힘든 여름을 보냈는가 봅니다.

 

 

9월의 첫째 일요일의 새벽에 호텔 롯데의 곰돌이상이 아닌 너구리상 앞에 7시에

모이기로 했으나 역시 부부동반팀인 박 산우네와 도움쇠네가 늦었습니다.

나는 5분이고 박 산우는 집이 가장 가까운 대도 25분이나 늦었는데 가까운 사람이

더 늦는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고 표정도 약간의 실갱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만 여인네들은 음식과 화장, 해우소 출입까지 세 가지를 해야하니

이해해 주기바랍니다. 더우기 김순단여사의 명품인 양파김치와 고추장아찌를

생각해서라도... 30분이 늦었지만 명산인 오대산을 간다는 설레임을 안고 힘차게 출발!

분명히 25인승으로 예약해서 25인승인줄 알았으나 기사석까지 합해 22인승밖에

안되었으니 마지막에 불참통보한 나원장,남기인 산우,이계신 산우가 참석했더라면

빈 좌석이 없었을 테니 참으로 좋았겠지요.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어쨌든 18명의 산우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했습니다. 12인승이나 15인승 승합차는

고속도로를 주행하기에는 불안하였으나 이 차는 중형이라 안정감도 있어 교통비의

부담은 되나 앞으로 애용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경기도의 산을 가기에는

승합차가 적합할 수도 있으니 사정에 따라 정할 일입니다.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하고 진부 I.C로 나와 오대산 공원 매표소에서

18인의 표를 끊었는데 한양기 산우가 끊었으면 여인네 3명을 제외한 15인분만을

끊었을 텐데 정직한 임 수석에게 맡겼으니 정직하게 끊을 수밖에...우리가 부처님의

도량에 와서 정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상원사와 월정사 두 곳의

문화재가 있어 두 곳의 관람료를 내야하니 그만큼 다른 국립공원보다

비쌌고 그러한 돈이 제대로 쓰인다면 좋겠지만 공원의 보호에 우선적으로

쓰이고 남은 돈의 대부분을 절의 중축에나 쓰이는 것을 보면

두 곳 중에 상원사 한 곳 만을 관람하였으니 한 곳의 관람료는 할인을 받았어야

하는데 입장료는 아깝지 않으나 관람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 비포장된 전나무 숲길을 가는데 차가 전후좌우로

흔들리며 가는 것이 어린날의 소달구지를 탄 기분이었을 겁니다.

울퉁불퉁한 길을 가다가 기 산우가 문을 열자고 해서 열었을 때 들리는 탄성...

차안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도심에서는 죽었다가 두 번 깨어나도 결코

맛볼 수 없을 정도로 신선했고 건강했으며 달콤했음을 잊지 맙시다.

 

상원사 주차장에 내리는 순간 약한 가랑비가 내리니 몇 산우는 우의를 사려 갔으나

우의는 계절을 막론하고 얇고 가벼운 바람막이용 겉옷과 함께 항상 배낭 속에

있어야함을 유념하십시요. 위 산우의 선도로 내려올 때 들르기로한 상원사를

먼저 들렸는데 유려한 옛 절의 자취는 온데 간데 없고 증축 중인 밝고 우람한

사찰의 모습은 내게는 오히려 흉물로 다가 왔습니다. 다만 상원사 동종만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으나 그 또한 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비로봉을 향하여 나아가고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중대사자암이

보이는데 입구의 우(右)용안수(龍眼水)는 무심히 흐르고 증축 중이라 약간은

씁슬한 마음으로 지나쳤습니다. 능선의 반대 편에서 옛날에 흘렀던 좌 용안수는

발견하지 못 했다는데 발견하는 날에는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국가가 된다했다던데 지금도 세계로 뻗어나가는 국가인데 도참설과 같이

믿거나 말거나... Believe or not !

 

절이나 교회는 신앙의 전당이고 적당한 크기의 전당을 그 누가 매도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비생산적인 교세확장을 위하여 더 많은 베품과 정직한 포교를

하지 않고 끊임 없이 그들의 전당만을 키우는 병폐는 그 누가 고칠 것인가!

 

불자들은 처절한 수행과정을 거쳐 한 소식을 들어 마침내 깨우치면 해탈하여

삼라만상의 이치를 다 알게되고 우매한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혹세 및 오도하는데 소위 깨우친 고승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은 더 깊은 곳으로 숨어들거나 속세를 향해

고작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만을 늘어 놓는 것이 전부이다. 이미 석가모니 부처 이전부터

수 많은 부처가 있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만년에 걸쳐 수 많은 선인들이

깨우쳤고 그것이 불경이라는 형식을 통해 세상에 전파되었으므로 더 이상 깨우칠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교리대로 베풀고 실천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혹 불경이 없다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없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처럼

인간의 본성이야 본래 착하지 않는가! 본성대로 행하면 된다.

 

기독교인들은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을 내세워 항상 그를 믿으면 구원이

가까워 왔다고 무지몽매한 세인들을 무민 및 오도하는데 오늘날의 불행한

세계의 현상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힘으로 모든 악을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너희가 그것을 고치고

행하라"면서 내가 보기에는 그럴듯한 완벽하면서도 답답한 궤변을 2000년 동안이나

내세우고 써먹었으니 감성이 풍부한 우리민족 중 단순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속기 쉽다.

그들의 교리에서도 더 이상 배울 것도 깨우칠 것도 없으며 십자군전쟁같이

사악한 전쟁을 일으킨 것도 그들이다. 이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 이전의 구약전서를 포함한 신약전서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 및

논리를 내세우며 접근하는 무리들에게는 이단이라는

굴레를 씌우며 그들만의 세계를 굳게 구축하며 기득권을 버리지 않는다.

 

회교도들은 성전의 굴레를 씌우며 똑 같은 행동을 하는데 모든 종교의 배타적인 방어적

행태임에 틀림이 없으나 우리들은 그것들의 잘못을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느끼지 못한다. 석가모니, 예수, 마호메트 등도 사람의 아들임이 분명하고 후세의

추종자들이 그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을 신격화하고 이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종교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차라리 식량증산의 기술을 발달시켜 인류를 배불리 먹이고 경제공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개발하여 그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고

IT 산업을 발달시켜 삶을 편하게 하는 것이다.

 

한가위 오후의 잔뜩 뒤틀린 심사로 나타난 짜증섞인 무지몽매한 斷想이었슴을 고백합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소위 용안수가 고인 샘터가 나타났는데 작고 더럽기도 하여

내가 보기에는 콧물샘이라 했더니 임 수석이 웃으며 공감하더이다.

비로봉까지의 능선이 용의 등이라면 적멸보궁 터는 용의 뿔의 자리이고

능선의 좌우에 눈이 있지 뿔 앞에 있는 것은 코의 위치인데...ㅉㅉㅉ

적멸보궁의 앞에 서니 안개가 시야를 가려 주산인 비로봉도 좌 청룡 우 백호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한 모퉁이 같았는데 진신사리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보궁의

앞에서 아는 척 약간 큰소리로 산우들에게 설명했더니 갑자기 한 젊은이가

성역이라며 조용히 하라기에 기에 눌려 움찔했는데 즉시 반박을 하지 못한 것이

산행내내 억울(?)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머리를 숙이기 싫은 것이 아직도

건방이고 치기일까요?

참고로 전국의 5대 적멸보궁은 다음과 같이

영축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오대산 상원사,사자산 법흥사,태백산 정암사이고

그외에 구미 도리사, 고성 금강산 건봉사에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습니다.

건봉사의 사리는 치아사리인데 묻혀있지 않고 유리창 안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금강산 건봉사라 했는데 금강산의 끝자락이라는 의미이고 휴전선과 인접해 있는

남한의 고성에 있습니다. 젊은 날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을 지나면서 완만한 경사의 능선길을 따라 올라 가면서 보니 아름드리 소나무,

참나무과의 나무들이 우뚝 서 있는 것을 보며 탄성이 나왔고 역시 명산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다만 안개때문에 주변의 멋있는 경관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비가 내리지 않은 것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외길인데다 젊은이 못지 않은 위 산우가 앞장 섰으니 선두는

걱정할 것이 없었으나 후미는 선두와 10 여분 이상 차이가 나니 도움쇠는 어쩔 수

없이 박 산우와 보조를 맞추느라 동행을 해주는 한 교장과 새벽 3시에 해장국을

마셨다는 이재웅 산우와 보조를 같이 했는데 박 산우는 도움쇠도 자기처럼 기력이

떨어져서 빨리 올라가지 못해 선두와 멀어졌다는 걱정을 했으나 그 특유의

너스레이고 모두가 사고나 낙오 없이 완주하는 것이 도움쇠의 책임이고 희망입니다.

해서 도움쇠의 위치는 처지는 여자나 후미와 동행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은 날 한국산악회 회원으로서 오대산은 산행경험이 많아 리더로서 수 차례 선두를

섰으나 다른 높은 산을 오를 때는 거의 구조반원으로서 후미에 섰던 경험이

훨씬 많았습니다.

 

정상을 200 여미터를 앞두고 기력을 회복한 이 산우를 먼저 보내고 점점

더 처지는 두 사람을 10 여분을 기다리다 소리를 쳐도 답이 없고 통화도

안 되어 선두와 너무 떨어지면 진행방향을 잡는 것이 걱정이 되어 혼자

올라가니 정상은 안개와 세찬 바람에 오래 있을 형편이 아니었으나 그 추위에

떨면서 흩어져서 식사를 하고 있는 다른 산악회를 보면서 오히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고 두 사람을 빼고 일단 기념사진 한 컷! 사진사 이원무 산우는 항상 무료로

사진인화를 해주는데 그에 대한 배려를 고민해봅니다.

추워하는 마나님에게 바람막이용 겉옷 두장을 입히고 세찬 바람과 안개에 진행방향을

고심하던 차에 마지막 두 사람도 올라오고 두 사람만의 사진을 찍고 진행방향을

상의하였는데 김순단여사는 용감하게도 예정대로 상왕봉으로 내려가자 했으나

그쪽 방향을 보니 안개와 세찬 바람을 맞으며 능선길을 1시간 이상 걸어가야하는

악천후 속의 산행길이고 점심 때도 지나고 나머지 산우들은 오던 길로

내려가자는 눈빛들...

당연히 안전산행을 택하고 하산은 회귀하는 코스로 결정하고 하산!

5분쯤 내려오니 5평정도의 공간에 자리잡았는데 위 산우는 먹을 자리는 귀신같이

잘 잡는데 그만의 뛰어난 능력이니 앞으로 위 풍수라 합시다.

잘 삶아진 낙지, 살얼음 낀 막걸리, 먹을 터 잡기...그만의 전매특허이니

앞으로도 세 가지는 계속 책임지소서.

 

즐거운 식사시간!

16명이 둘러 앉고 나와 한 교장이 가운데 앉아 좁지만 그런대로 좌정하니

그 순간부터 먹산회로 변하고 홍어회,낙지,삶은 파,양파김치,고추장아찌,풋고추

등등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의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주고 받는 막걸리잔 속에

분위기는 화기애애...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흥겨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어느덧 배가 차니 김삼모 산우의 조용한 시낭송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치뤄졌는데 산우들의 가슴에 그 시가 어떻게 다가왔는지...

 

뒤풀이가 거론되었는데 마침 봉평에서는 메밀꽃축제를 겸한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있고 메밀묵에다 메밀꽃술을 한잔씩 더 하자고 내가 제안하자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동의하고가벼운 마음으로 하산하여

장평 I.C로 빠져나가는데 시내에는 여러 개의 에드벌룬이 떠 있어 한눈에 봐도

축제분위기가 무르익은 듯 했으며 메밀꽃밭에서 사진을 안 찍을 수 없는 일,

길가의 메밀꽃밭에서 홀로 혹은 이이삼삼오오 짝을 지은 사진축제를 벌이고

내가 자주 갔던 미가연이라는 메밀음식 전문식당에 자리 잡고 메밀묵,전병등을

안주로 메밀꽃술을 곁들이며 광고 20회 동기들이 시산회 20회 산행기념식을

겸한 20-20 기념 건배를 하는데 분위기는 다른 손님들에게 해가 될 정도로

시끌시끌했지만 우리만의 축제여서 조금은 미안했으나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흥미도 즐거움도 반감되는 법, 수 차례의 건배등 시끄러웠지만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기분으로 뒤풀이를 마치고 김삼모 산우와 이재웅 산우가

화끈하게 베풀었는데 출혈이 심했겠지만 그만큼 즐거웠으니 그만큼 감사합니다.

이왕 늦는 김에 끝으로 축제장터에 가서 무대에서 시산회 대표가수들이

노래도 하고 엿장사와 춤까지 추었으니 그날도 내내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서울까지 오는 차 안에서의 해프닝은 모두 잊고 이해하기로 합시다.

오해에서 세 걸음 물러서면 이해가 되고 이해를 이해하면 사랑이 됩니다.

그놈의 술이 원수지...하하하

20 이라는 성년의 문턱을 넘기 위한 할례의식 정도로 생각합시다.

 

<징기스칸의 교훈>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조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징기스칸은 어렸을 적부터 찾아온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인류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인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역경은 있는 법, 이겨내는 자만이 승자가 된다.

IMF 환란위기 때 징기스칸을 읽으면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습니다.

기회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태백, 삼팔선,사오정,오륙도는 요즘의 어려운 세태를 웅변으로 나타내주는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나이들어 감에 따라 가장의 위치를 상실해가고 사회에서

열외가 될 때 이를 조금이나마 같이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우정어린

친구들이 아니겠습니까! 부인과 친구외에는 자식은 말동무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한 친구조차 없을 때 그 누가 있어 우리의 외로움을 덜어주겠습니까!

있을 때 잘 합시다. 나이들어 외롭지 않도록...

 

 

이번에 갈 산은 사랑의 전도사 조문형 산우가 추천했던 관악산의 육봉능선입니다.

7월 9일에 가고자 했으나 비로 인하여 연기했던 코스이니 꼭 올라가 봅시다.

관악산은 서울 근교의 4대 명산 중의 하나이니 그의 선도를 받아 이 좋은 가을의 문턱에서

우리의 만남이 산(자연), 우정, 음식, 시(정신)가 함께 동반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모두 동참합시다.

9월 17일에 21회 산행을 하고 싶었으나 추석연휴의 앞자락에 끼여 산우들이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으므로 부득이 한 주를 미뤘습니다.

 

산행하기에 하늘과 땅과 기후가 우리들의 편인 가을입니다.

10월의 첫 째 주는 설악의 대청봉에서 향긋한 위스키를 마시며 동해의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 하고자 합니다. 3대에 걸친 덕을 쌓아야 수평선과 맞닿으며 불같이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본다는데 우리 산우들이야 수 많은 덕을 쌓았을 테니 우리도

시도해 봅시다. 밤 11시경에 떠나는 무박산행입니다.

내려와서 동해의 바닷가에서 싱싱하고 맛난 회를 먹을 수도 있겠지요.

 

10월의 셋 째 주는 장수대-대승폭포-대승령-흑선동계곡-백담사-백담계곡 코스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대승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아래에서 휘몰아 치는 거센 바람에

하늘로 치솟으면서 물보라가 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면 평생의

자랑거리가 되고 환상적인 경험이 될 겁니다. 탄성은 절로 터집니다.

휴식년제가 시행되고 있는 흑선동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때 묻지 않은 절경과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환상의 단풍을 볼 수가 있고

백담사에서 가을 햇살아래 맛있게 커피를 한 잔씩 하고

백담계곡으로 가면서 계곡물의 황홀한 비취빛을 볼 수 있다면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산을 오를 때 시를 동반하면 가슴에 담겨지는 아름다운 감정들로

힘듬은 반이 되고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간혹은 시가 날개로 다가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한층 가볍게 해줘서 힘든 산을 오르기 쉽게 해주기도 하죠.

산우들이 산을 오르는 실력이 일취월장함에는 분명 여태까지의 동반시도 한몫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매년 9월에는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는 詩부문에 미당(서정주)문학상과 소설부문에서

황순원문학상 시상식이 열리는데 이번 산행에 詩부문의 당선작을 동반하려 했으나

다음으로 미룹니다.

후보작들은 많으나 언어의 함축,비유,상징,사유(思惟)의 반전이 너무심해 기성시인들

조차 이시 들에 대한 해설이 없으면 난해할 듯합니다. 소설부문의 당선작은 대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주인공의 의식이 지극히 냉소적이며 자기중심적이고 소극적인

점이 많아 읽다보면 이런 어두운 주제를 왜 쓰는지 왜 이리도 길게 재미없게 쓰는지

짜증이 나지만 시는 짧은 순간에 읽고 느끼면 그만인 점이 좋고 소설은 스토리를

기억해야 타인에게 읽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시는 스토리를 기억할 필요도

없고 냉소적이지도 않고 소극적일 필요는 더욱 없으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한 없이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시를 읽기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가을에는 시를 읽기에 좋은 계절이고 여름엔 수필류,겨울에는 소설을 읽는 것이

제격이죠. 그러면 봄에는... 당연히 들로 산으로 놀러 다녀야죠.

글만 읽을 겁니까! 일만 하겠나이까! 돈만 벌겠나이까! 즐기기도 해야죠.

이번 산행의 동반시는 빛고을 光州의 양림동에서 태어나신 김현승 님의 <가을의 기도>

입니다. 이시가 관악의 육봉능선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 오는지 기대해 봅시다.

살아 계시면 아흔이 넘은 분입니다.

그가 20代 초에 쓴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를 소개해 봅니다.

거침 없는 사나이 , 자칭 국보, 무애(无涯) 양주동 교수의 추천으로 이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시문단에 등단합니다.

1930년 무렵,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절, 시인은 그 나이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반추하며 반성도 해봅니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김현승

아침 해의 祝福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크고 작은 琉璃窓들이

瞬間의 榮光답게 最後의 燦爛답게 빛이 어리었음은

저기 저 찬 하늘과 추운 地平線 위에 붉은 해가 피를 뿌리고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그들의 恍惚한 심사가 멀리 바라보이는廣闊한 하늘과 大地와 더불어

黃昏의 默想을 모으는 곳에서

해는 날마다 그의 마지막 情熱만을 세상세 붓는다 합니다.

여보세요. 저렇게 붉은 情熱만은 아마 식을 날이 없겠지요.

아니 우랄山 골짜기에 쏟아뜨린 젊은 사내들의 피를 모으면 저만 할까?

그렇지요. 東方으로 귀양간 젊은이들의 情熱의 會合이 있는 날

아! 저 하늘을 바라보세요.

黃金窓을 단 검은 汽車가

어둡고 두려운 밤을 피하여 黎明의 나라로 화살같이 달아납니다.

그늘진 山을 넘어와 曠野의 詩人--검은 까마귀가 城邑을 지나간 후

어두움이 大地에 스며들기 전에

列車는 安全地帶의 輝煌한 메트로 폴리스를 향하여

黑暗이 切迫한 北部의 雪原을 脫出한다 하였읍니다.

그러면 여보! 이날 저녁에도 또한 밤을 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적막한 몇가지 일을 남기고 해는 졌읍니다그려!

참새는 素朴한 깃을 찾고,

산 속의 토끼는 털을 뽑아 둥지에 찬바람을 막고 있겠지요.

어찌 灰色의 포플러인들 五月의 茂盛을 回想하지 않겠습니까?

불려 가는 바람과 나려오는 서리에 한평생 늙어 버린 電信柱가

더욱 가늘고 뾰죽해질 때입니다.

저녁 配達夫가 돌아다닐 때입니다.

여보세요.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허다한 사람들에게

幸福한 時間을 프레센트하는 郵便物입니까?

해를 쫓아 버린 검은 狂風이 눈보라를 날리며 凱旋行進을 하고 있습니다그려!

불빛 어린 窓마다 구슬피 흘러 나오는 悲戀의 頌歌를 듣습니까?

쓸쓸한 저녁이 이를 때 이 땅의 居住民이 부르는 遺傳의 노래입니다.

지금은 먼 이야기, 여기는 東方

그러나 우렁차고 빛나던 해가 西쪽으로 기울어지던 날

오직 한마디의 悲歌를 이 땅에 남기고 先人의 발자취가

어두움 속으로 永遠히 사라졌다 합니다.

그리하여 눈물과 한숨, 또한 내어버린 웃음 위에

漂浪의 歷史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쓰여져 왔다 합니다.

그러면 여보,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당신들!

쓸쓸한 저녁이 올 때 窓밖에 안타까운 집시의 노래를 放送하기엔

--당신들의 情熱은 너무도 크지 않습니까?

漂浪의 歷史를 그대로 흘려 보내기엔

--당신들의 마음은 너무도 悲憤하지 않습니까?

너무도 오랫동안 차고 어두운 이 땅,

울분의 덩어리가 數千 數百 强烈히 불타고 있었읍니다그려!

마침내 悲戀의 感情을 발끝까지 찍어 버리고

金붕어 같은 삶의 기나긴 페이지 위에 검은 먹칠을 하고

하고서, 强하고 튼튼한 歷史를 또다시 쌓아 올리고

캄캄하던 東方山 마루에 빛나는 해를 불쑥 올리려고.

밤의 險路를 千里나 萬里를 달려 나갈 젊은 당신들--

情緖를 가진 이, 일만 사람이 쓸쓸하다는 겨울 저녁이 올 때

구슬픈 저녁을 더더 裝飾하는 가냘픈 旋律 끝에 매어 달린 曲調와

당신의 작은 깃을 찾는 가엾은 마음일랑 작은 산새에게 내어 주고

綠色 등잔 아래 붉은 會話를 그렇게 할 이웃에게 맡기고

여보! 당신들은 猛烈한 바람이 추운 거리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읍니까?

소름찬 당신들의 일을 하여야 하지 않겠읍니까?

2000년 9월 21일 새벽에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시산회 도움쇠 金 定 南 올림

 

*도움쇠가 바빠져서 모든 연락은 연락쇠가 합니다.

메일로 답을 남기면 도움쇠가 받지만 연락쇠에게 참석 여부를 꼭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