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낙조 / 도봉별곡
새벽달이 가늘게 기울어가며
가을 닮은 명주바람이 분다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어둑새벽에
오늘은 굵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선다
두물머리 지나 남으로 난 길 따라
회한과 집착으로 평형을 유지한 바퀴를 달고
마파람을 앞세운 열차는 졸음을 쫓으며 단호하게 달린다
햇빛은 차가운 강을 태우고
열린 남한강은 무정하게 초가을을 쳐다본다
요사채 밑
자비무적慈悲無敵을 새긴 화강석 앞에서
핏빛 양귀비꽃은 잔혹을 보태며 요염하게
피보다 슬프게 피었다
사천왕의 눈빛보다 강하게 피었다
나의 전생이 절을 지키는 금강역사였을 가능성이 궁금해져
천년 은행나무에 묻는다
당신의 전생은 무엇이었느냐고
은행나무는
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내 업은 영원히 나무라고
다만
자신의 키가 하늘 끝에 닿을 때까지
자신의 잎이 온 세상을 덮을 때까지만
유효하다고 웃는다
법당 앞에 잣나무가 없어
화두는 안개 속 한 모퉁이를 돌아간다
애써 붓다의 눈을 외면하고
절 마당에 법성게法性偈*가 없는 아쉬움을 지장전地藏殿이 달래준다
팔각의 관음전은 팔고八苦를 의미했을까
의문은 괴로움을 낳고 번뇌로 변해
범종각의 동종이 스물여덟 번 아플 때
삼층탑을 서른세 번 물구나무로 벌서고 탑돌이를 하니
별빛이 내려와 번뇌를 식혀준다
산문山門을 나서며
한참 내려오다 길과 숲 사이 좁은 틈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탐욕을 씻으면
시간조차 덧없어진
여섯 번뇌의 길목에서 스산해진 마음을 안고
산문을 돌아보니
잣나무가 깨달음의 순간을 떠올리라고
동그라미를 그린 빗물을 안고 손을 흔든다
금강경에서 붓다는 열 번을 주었다 빼앗는다
그러나
손바닥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여
텅 빈 열차를 타고 돌아올 때
문득 비구름 사이로 잠시 터진 서쪽 하늘을 쳐다보다
비로소 알게 된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의 변증법적 요체要諦는 무소유다
호박琥珀색 낙조는
양떼구름을 품은 하늬바람이 되어
굵게 울었다
*법성게法性偈 :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수록되어 있으며 7언 30구의 한문으로되어 있다. 내용은 한 마디로 불교에서의 법(法), 즉 진리의 세계를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수행 완성에 관한 것과 남의 수행을 어떻게 이롭게 하느냐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행 방편과 수행 공덕에 관해서 설하였다.
*진공묘유眞空妙有 : 불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공(空)은 이 세계의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표방하는 개념이다.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용수(龍樹)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가 바로 공의 뜻임을 천명하였다. 연기는 이 세계의 만물이 다양한 인(因)과 연(緣)의 조합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 세계에 있는 만물의 관점에서 볼 때, 만물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생성과 변화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만물이 공(空)하므로 비로소 생동감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계의 만물과 공의 원리가 서로 장애함이 없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때, 진공 그대로 묘유가 된다는 관점이 성립한다.
진공묘유의 관점에 따르면, 진정한 열반이란 이 세계의 현실 속에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만물 자체에 공의 이치가 온전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같이 대승불교에서 제창된 내용 역시 이러한 진공묘유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제2시집 <시인의 농담>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