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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청계산으로 모십니다(詩山會 제217회 산행)

청계산으로 모십니다(詩山會 제217회 산행)

산 : 청계산

코스 : 대공원역-이수봉-청계산역(하산은 그때 결정)

소요시간 : 3시간 반

일시 : 2013년 9월 8일(일) 10시

만나는 곳 : 전철 4호선 대공원역 2번 출구

준비물 : 살얼음 낀 막걸리는 꼭, 물 많이, 간식 간단히

연락 : 조문형(011-259-2915))

사진 : blog.daum.net/sisan20

산행기 : blog.daum.net/yc012175

카페 : cafe.daum.net/K-20

 

 

1.詩를 통한 時論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김광규 번역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시는 휘황찬란한 달빛에 비친 뜬금없는 약속에 제 몸을 싣지 않는다. 넘실대는 환상의 파도 위에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영광스러운 생애를 꿈꾸지 않는다. 시는 꿈에 부푼 성공의 확신 따위가 허황되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에서 사실주의의 본령을 확인한다. 예쁜 말로 피워낸 나무 한 그루를 양지바른 곳에 심는 대신, 시는 고통으로 내려앉은 한줌의 재를 쥐고서 벌거벗은 몸으로 부당한 현실과 싸운다. 서정적인 감동의 세계에 몸을 내맡기는 대신 시는 비루한 일상을 땀내 나는 언어로 담아낸, 몹시도 이지적 산물이다. 서정시의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시인의 저 말에는 흥에 젖어 감행한 선택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때,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가 곧잘 삶을 속일 수도 있다는 경고가 숨어 있다.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요즘 김용우 산우의 시를 읽으면서 그의 시는 서정적인데 내 시는 내놓지는 않았지만 몇 편 더 있어 살펴보니 청산도를 빼고는 경구시라 한다. 삶의 통찰을 표현하는 것들이므로 재미가 있을 수 없다. 그의 시는 발전 가능성이 많지만 내 시는 곧 한계에 달 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그의 시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우리에게는 산과 시, 우정이 있었고 이제 시인까지 생겼으니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이 훨씬 풍요로워질 거다.

현대에 들어와서 박정희 정권 이래로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박근혜 정권에 이르기까지 영남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어 호남인들의 울분을 사고 있는 것은 맞으나 긴 역사를 돌아보면 영남인들의 회한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보면 식곤증이 몰려올 때가 있으니 졸음을 쫓기 위해서 흥미로운 역사책을 읽을 때가 있다. 특히 조선 당쟁사는 잠이 달아날 만큼 재미가 있어 최근에 읽은 책을 메모한 것을 올리니 잠시 쉬어갈 것을 권한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이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역사/이덕일 등 당쟁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알게 된 것과 우리가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간단하게 쓴다. 아래의 책의 저자 노상추의 심정을 보면 당쟁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 문숙자 지음

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 후기의 삶 - 양반과 노비와 관련하여

노상추 : 경상도 선산 안강 노씨(1746~1829) 노상추가 갑산에 부임하면서 쫓겨 간다고 느낀 것은 자신이 영남 출신이라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인 중심의 영남 사람들은 중앙 정계가 노론 중심으로 돌아가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계 인사가 발표될 때마다 노상추는 영남 사람으로서 명단에 포함된 이가 몇 명인지 일일이 기록하면서 영남 인사들이 차별을 받고 있음을 되새기곤 했다. 남인의 무리가 관직에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오로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현실은 그에게 울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때는 영남인의 세력 없음을 한탄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110, 205, 212, 213쪽 참조.

 

선조 대에 이르러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되어 둘 사이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일본 통신사의 당론에 따른 거취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은 서로 견해의 차이가 심해 논란이 정계를 뒤덮었지만 서애 류성룡이 속한 동인의 힘이 강했는지 전쟁 준비 불요론이 힘을 얻었다. 임진란 후부터 책임 논쟁이 극심하게 벌어진다. 부사 학봉 김성일은 의성 김씨로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다. 문벌적 이유로 영남인은 퇴계 계열이므로 남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숙명적이다. 율곡 이이를 태두로 하는 기호학파는 서울, 경기, 호서, 호남의 일부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도봉별곡은 의성 김씨로서 의성 김씨는 크게 3대파로 갈라지는데 학봉 김성일파, 천전(내앞)파, 모사재파로 갈라진다. 학봉파와 천전파는 안동에 지역 기반을 두면서 남인의 학맥을 유지하고 나의 중시조인 모재 김안국은 율곡의 학문과 같은 계열이며 경기도 이천에 지역 기반을 두고 서인의 학맥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를 보더라도 본향과 성씨에 따라 당파를 가르는 것은 오래 전에 의미가 없게 됐다.

 

광해군 때는 동인 계열의 북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정권에서 밀린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추대한다. 이른바 오랜 서인 정권의 서막이 시작된다. 당쟁이 극도로 심화된 숙종 대에 이르러 기사환국을 거치며 남인이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지만 갑술환국(1694년)을 맞으면서 남인 즉 영남인들은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1961년)를 성공 시킬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268년 동안 소외되고 정권과 멀어지게 된다. 그들이 생각하면 참으로 긴 세월이다. 호남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후퇴해 버린 10년'도 길다고 느끼는데 268년이면 길어도 너무 길다. 영남인들이 그것들을 참아내고 극복한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할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책의 저자 노상추가 한탄한 것처럼 긴 세월 동안 영남인들도 서인 정권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영조도 서인 정권의 비호를 받았고 개혁 군주 정조도 서인 정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서인에서 패가 갈라진 시파와 벽파의 싸움이 치열해져도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이용하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비밀편지/안대회 지음'이라는 책을 보면 벽파면 원수 같은 정적인데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짜고 치는 고스톱을 즐겨야 했던 정조의 심정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을 막아주고 개혁의 선봉에 서 줄 장용영을 설치한 지 얼마되지 않아 정조가 죽고 벽파가 정권을 잠시 잡았지만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죽으면서 벽파는 몰락하고 1806년 정조가 키운 시파가 정권을 잡는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는 1863년까지 이어지고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정권은 계속 서인의 손을 떠나지 않는다. 흔히 안동 김씨인 시파의 영수 김조순 일족이 정권을 잡은 것을 두고 영남 정권이라고 오해를 하는데 그들은 안동 김씨라기보다는 장동(오늘의 효자동 일대)에 살아 장동 김씨라고 불린다. 왕족인 전주 이씨 일족이 전주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들은 한양에 살았던 서인으로서 영남인의 남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후, 지역 차별로 인한 지역 갈등이 심해졌다고 그리 서운해할 것도 아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은 민감해지지만 나처럼 일찍 공직을 버린 사람들이나 생업에 바쁜 사람들에게는 강 건너 불 같은 일이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리그다. 한양 쪽이 그러한데 조선시대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물며 신춘문예 당선자도 지역을 표시하는현재의 환경과 풍토에서 하루 아침에 없어질 것은 아니나 결론이다. 지역의 구별은 필요할 수 있지만 차별은 없어져야 한다. 원흉은 박정희다, 새누리당은 그것을 즐기고 있고.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저술에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고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으니 옛날이나 오늘에 이르러서도 맞는 말이다.

<도봉별곡>

 

 

2.산행기

시산회 제216회 삼천사계곡(삼천사, 진관사) 산행기/이재웅

일 시 : 2013. 8. 24(토)

집결지 : 연신내역 3번 출구

산행코스 : 연신내역→(승합차)→진관공원지킴터(진관사입구)→진관사→진관사계곡 윗길→

비봉(옆길)→사모바위→삼천사계곡→삼천사→뒤풀이집→(승합차)→연신내역

참석자 :조문형(총장), 한양기, 조영훈, 정한, 임삼환, 이경식, 위윤환, 신원우, 박형채,

김종화, 김정남, 김용우, 고갑무, 김진오(오늘 신입), 그리고 필자 이재웅[이상15명]

동반시 : 여행 떠나기/목필균 (김용우 산우 추천)

자작시 발표 : 당구야 놀자/김용우

 

입추(8/7), 말복(8/12), 처서(어제8/23)가 지났는데도 섭씨 30도가 넘는 땡볕 무더위가 지속되는 터라 시산회 집행부가 시원한 물을 접할 수 있는 계곡이 있는 코스로 오늘의 산행을 정한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한다.

 

오전 10시, 연신내역 3번 출입구에 오늘 산행할 15명의 산우들이 집결, 집행부의 아이디어 로 뒤풀이할 음식점에서 픽업(Pick Up)나오게 한 승합차를 타고 ‘진관사입구’까지 편하고 신속히 이동하였다.

 

오늘의 216회 산행에는 김진오 친구가 새로운 시산회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모두들 새 산우를 환영해 맞이하는 분위기였다. 고교 졸업 후 젊은 한참 시절에 각자의 생활전선에서 상하좌우 그리고 뒤를 살펴 돌아볼 겨를 없이 바삐 지내온 과거를 지금 탓할 수는 없는 일, 우리가 현재 인생 후반부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한 달에 두 번 하는 시산 회 산행에 김진오 친구처럼 새로이 참여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진관사입구를 들머리로 하여 오전 10시 30분경에 오늘의 산행은 시작되었다.

 

10분쯤 포장도로와 목재 계단 길을 걸어가니 좌측에 진관사 사찰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고 일행들이 진관사 경내를 답사한다.

 

<진관사의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진관사를 소개하는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싣는다.>

☞ 비구니스님들의 단아한 수행처인 진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또한 수륙도량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진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 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진다.

 

수륙도량인 진관사에서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 등의 혼령들에게 불법(佛法)을 강설(講說)하고 음식을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물과 육지에 떠도는 모든 조상 영가들을 천도시키기 위한 천도재를 목적으로 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여는 사찰이라고 하는데, 금년의 수륙재를 안내하는 플랭카드가 대웅전 현판 바로 아래에 걸려 있고 그 프랭카드에는『조선시대 수륙재의 전통을 계승한 국행 수륙대재, 2013.10.12.(토)~13(일)』라고 씌여있었다.☜

 

이 사찰의 종무소에서 신도들의 기도/봉양을 접수하고 안내하는 50세 전후로 보이는 우아하고 예쁜 한 미녀가 우리 일행 몇 사람을 상대로 ‘국행 수륙대재’를 설명하고 수륙대재 때에 시간을 내서 참여할 것도 권한다. 그 미녀는 필자가 보기에도 참으로 우아하고 예쁘고 완숙한 모습이었고 함부로 가벼이 대하지 못할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우리에게 친절했으며 우리 일행 중의 한 산우는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이름 생략) 그 여인의 면전에서 “보살님은 얼굴이 참으로 곱고 맑고 투명하신데 어떻게 수행을 하면 그렇게 됩니까?”라는 멘트를 큰 소리로 날리자 다른 어떤 산우가 “보살님을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되지 않은가”로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약 10분간의 진관사 답사를 한 후 10시 40분경부터 13시까지 진관사 → 진관사계곡 → 비봉(옆길) → 사모바위까지의 섭씨 30도가 넘는 땡볕 무더위 산행을 2시간 남짓 했다.

 

날씨는 덥고 산 오름은 가팔라서 산행 출발 30분 정도 지난 11시에 첫 휴식시간을 가졌다.

이 첫 휴식에서 김용우 친구가 옛날식 꽈배기(맛이 매우 좋았음)를 다량 준비해 와서 18명 전원이 간식을 할 수 있었고 김정남 친구가 나눠준 오이와 함께 꽈배기를 먹으니 오전 간식 이 충분히 해결되었다. 특히 옛날식 꽈배기를 푸짐하게 준비한 김용우 산우에게 감사를 드 린다.

 

오후 1시경에 사모바위 부근의 한 장소에 점심식사 자리를 잡았다.

점심식사를 위해 펴 놓은 자리 위에 먹산회답게 갖은 먹을거리가 놓여진다.

각자 가져온 막걸리, 묵은김치(한양기), 각종 떡(지참자 기억 못함), 김치전과 홍어무침(조문 형), 가오리무침과 약밥(김종화), 바나나와 6년근 홍삼(신원우), 지초술, 당귀술과 곰배나물조림(임삼환), 두부와 한과와 오이(김정남) 그리고 조영훈의 찹쌀떡피자 등등 진수성찬이었다. 열거한 음식 외에도 더 있는데 필자가 기억력이 부족하여 더 이상은 열거를 못하니 열거에서 빠진 산우들이여 이해해 주시게들.

 

(오늘 음식에 대한 필자의 고백) : 식사 도중에 조영훈 친구가 구석진 자리에서 ‘찹쌀떡피 자’를 꺼내놓자 그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찹쌀떡피자가 맛있는 것을 금방 알아채고는 한 쪽 씩을 떼어가서 먹는데 난 슬쩍 두 쪽을 떼어서 먹었습니다. 나 때문에 어느 한 친구가 찹쌀 떡피자 맛을 못 봤을 것을 이제 와서 생각하니 많이 미안해서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합니다. 맛있는 찹쌀떡피자를 힘들여서 만들어주신 조영훈의 어부인님께 이 필자가 시산회의 이름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찹쌀떡피자를 맛보지 못한 여러 친구들이여, 이해해 주시기 바라네.

 

점심식사 자리를 잡고 난 후 자리에 앉고 보니 몇몇 산우들이 보이지 않는다. 뒤에 오는 그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를 하자는 산우들도 있었으나, 배가 고파서 앞에 있던 음식을 한두 번 먹다보니 뒤쳐진 산우들이 도착하기 전이 지만 식사가 진행 되어 버렸다. 뒤쳐졌던 산우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음식이 처음처럼 풍성 하지 않았는데도 늦게 온 산우들이 내색 없이 흔쾌히 식사를 하여 주셨으니 그 넓은 마음 씀씀이에 필자가 대신 감사를 표합니다.

 

점심식사 도중에 동반시를 낭송하는 시간이다. 그날 산행의 기자에게 영광스럽게 주어지는 모처럼의 시낭송 기회인데 김용우 산우가 추천한 목필균 시인의 ‘여행 떠나기’를 낭송하게 하였다.

 

제216회 북한산 삼천사계곡 산행 동반시

 

제목 “여행 떠나기/목필균 (김용우 추천 시)

 

파도처럼

무지한 갯바위도 부서지며 껴안을 수 있고

세월이 아프면 목청껏 울 수도 있게

바다로 가볼까

 

소나무처럼

숨찬 바람 소리도 다듬어 읽을 줄 알고

마르지 않는 추억 속에 서성거릴 수 있게

산으로 가볼까

 

들꽃처럼

질긴 그리움에도 무던히 기다릴 줄 알고

아픈 사랑도 삭여서 피어날 줄 알게

들로 가볼까

 

아무도 날

부르지 않은 곳에서 파도도 되고

소나무도 되고 들꽃도 되었다가

겁 없이 누워버릴까』

 

위의 동반시에 이어서 김용우 산우의 자작시 발표 낭송이 있었다. 김용우 친구는 금년의 어느 때인가부터 당구를 열렬히 배우고 있는데 요 몇 달 만에 상당한(?) 수준까지 당구실력이 올라간 것이다. 그러면서 ‘당구야 놀자’라는 제목의 시를 자작하여 오늘 친구들 앞에서 그 시를 발표하였다. 모든 친구들 그 시낭송을 듣고 연발 감탄사를 토해낸다.

 

제목 : 당구야 놀자/김용우 (자작시)

 

사각의 직선하나로는 부족하여 하나를 더해 만든 긴 울타리 되고

그럼으로 입사각과 반사각의 기하학이 새롭게 탄생하는 마당 되니

하양 빨강 노랑의 공 셋이서 두께와 속도로 회전무대의 세상 되어

돌리고 집어넣고 빗겨치고 당겨치고 밀어치고 잘라쳐야 길이 된다

 

담벼락에 부딪쳐야 공이 제 갈길을 가는 것이어서 소리가 좋아야 하고

때로는 뒷길과 모퉁이를 돌고 돌아 쿠션의 빗각과 큐질이 맞아야 하고

적구로 인한 목적구의 방해를 피하는 길에도 진한 키스의 아픔이 있고

백차를 타게 되는 허망함과 두점 포인트의 헛발치기는 깊은 탄성이다

 

공은 서로 직선과 곡선으로 부딪치며 어울러지게 만나야 한다

하얀 마음가진 소년의 호기심으로 그림을 그리고 순수해야 한다

빨간 열정으로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뜨거운 집중이어야 한다

노란 성숙과 절제가 주는 품격과 예를 다듬고 키우는 배움이 된다

 

혼자 하는 기록경기가 아니다

친구가 있어야 기대도 웃음도 신음도 아쉬움도 즐거움도 공존하게 된다

한게임 두게임 시간은 바람처럼 빠르지만 새로운 시작은 늘 설레고 좋다

도전 받아주고 마지막 지하철도 보내며 때론 알밤 까는 우정무대도 된다

 

완성이 없는 오직 과정만이 아름다운 경기가 아니겠는가

파도가 없이는 비구름과 바람에 지혜로온 뱃사공이 나오겠는가

오늘 부족함과 모자람이 있어 다음의 약속이 반성이며 발전이다

사각의 공간에서 곡선과 직선의 교합이 주는 소통이 바로 도이다

 

당구야 놀자!

 

점심시간은 이렇게 먹을거리 잔치에 시낭송에 정다운 벗들과 신선놀음을 만끽하고는 오후

2시에 하산행군을 시작하였다.

 

사모바위를 지나서 승가봉을 향해서 200m쯤 가다가 좌측으로 내려가면 삼천사계곡길 코스 다. 인원이 15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인지라 임삼환 친구 등 6명의 친구들은 사모바위에서 곧 바로 내려가는 응봉능선코스를 타고 하산하였고 나머지 친구들은 삼천사계곡 코스를 타 고 내려가다가 삼천사계곡의 시원한 계곡물에 탁족을 즐겼다.

 

오후 2시30분에서 오후 3시경까지 약 30분간의 계곡물 탁족은 마지막 가는 여름 피서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오늘의 기자인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사진 찍느라 무척 분주하긴 했지만)

오후 3시 30분경에 삼천사에 도착하였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 삼천사 건물의 화려한 단청, 삼천사 입구에 높이 세워진 두 개의 석탑 등을 감상하면서 사진촬영도 하였다. 유서 깊은 사찰이란다.

 

번창하고 있는 절인지 큰 공사도 한창이다.

 

<인터넷 “다음” 에서 검색한 “삼천사”에 대한 소개 내용 중 일부 내용>

☞ 삼천사는 서기 661년(신라 문무왕 1) 원효(元曉) 대사가 개산(開山)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승병들의 집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마애여래 길상터에 진영 화상이 삼천사라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 현재의 주지 평산 성운 화상이 부임하여 경내에 위치한 마애여래입상이 천년 고불(古佛)임을 입증하여 보물로 지정받고 30여 년의 중흥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 산령각, 천태각, 연수원, 요사채 등의 건물과 세존진신사리탑, 지장보살입상, 종형사리탑, 관음보살상, 5층 석탑, 중창비 등을 조성하여 현재의 문화재 전통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도도량, 참회도량, 수행도량으로서 확고히 자리하게 되었다.☜

 

삼천사를 지나 10분쯤 내려와서 오늘 우리의 산행 뒤풀이 장소인 ○○가든 식당의 큰 방 한 칸에서 15인의 일행이 다섯 시간 넘는 무더위 속 산행의 피로를 닭백숙, 파전, 맥주, 소주 등으로 오후 4시부터 오후 5시 20분까지 한 시간 여의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오늘의 뒤풀이 비용 중 15만원은(금액을 구체적으로 표기하는 건 좀 어색할지 모르지만) 오늘 입회한 김진오 친구가 신고인사로 쾌척하였다고 조문형 총장님이 소개하였다.

(나도 2005년 8월 15일 제19회 산행 때 입회하여 제20회 오대산 산행 때 입회 턱을 냈었 는데 그로부터 만 8년이 흘렀고 산행 횟수로도 거의 200회가 흘러버렸네요)

새로 입회한 김진오 신입 산우가 앞으로 오랜 세월을 시산회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뒤풀이 도중에 한양기 친구의 돌발 발표에 그에 호응한 신원우 친구의 무반주 아카펠라(?) 육성 타령에 오늘의 산행 분위기 절정의 박수소리가 북한산 전체를 흔들었다. 그 내용인 즉, 한양기 친구가 황석영의 ‘여울물소리’에서 A4용지 2장에 자필로 미리 채록하여 준비해 온 ‘오봉산 타령’과 ‘산 타령’의 두 가지 중 ‘오봉산 타령’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잠시 설명을 하자 이 설명을 듣고 있던 신원우 친구가 돌연 일어서더니 ‘오봉산 타령’을 실제 로 불러 보겠단다. 모두들 박수로 호응하자 신원우 친구가 ‘오봉산 타령’을 무반주 육성으 로 한바탕 하자 청중들의 중간박수에 또 한바탕의 타령을 구성지게 하여 뒤풀이장의 분위기 를 한껏 띄워서 모두들 박수와 박장대소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한양기 친구와 신 원우 친구에게 필자가 참석자들을 대신하여 고마웠다는 뜻을 여기 산행기에 싣겠네. 그런데 한양기 친구는 당초의 생각은 ‘오봉산타령’과 ‘산타령’ 중 ‘산타령’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려 고 했었으나 준비해 둔 ‘산타령’종이를 미처 찾지를 못해서 ‘오봉산 타령’ 종이를 차선책으 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으로 이 필자는 이해하는데 ‘오봉산 타령’을 소개했기에 신 원우 친구가 생음악 육성 아카펠라 타령을 하여 좌중 분위기를 한껏 띄울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어 오히려 잘 된 거라 생각되네(산행 도중에 한양기 친구가 ‘산 타령’사본을 필자에 게 주면서 오늘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산타령’을 소개할 뜻을 표한바가 있었음). 오늘 한양기 친구가 준비하고 신원우 친구가 노래한 ‘오봉산 타령’과 원래 한양기 친구가 소개하려고 마음먹었던 ‘산타령’을 아래에 게재한다.

 

오봉산 타령

 

오봉산 꼭대기 에루화 돌배나무는

가지가지 꺾어도 에루화 모양만 나누나

에헤요 어허야 영산홍록의 봄바람

도봉산 만경봉에 백학이 춤추고

단풍진 숲속에 새 울음도 처량타

그윽한 준봉에 한 떨기 핀 꽃은

바람에 휘날려 에루화 간들거리네

삼각산 꼭대기 채색구름이 뭉게뭉게

만학의 연무는 에루화 아롱아롱

백운대 암벽에 홀로섰는 노송나무

광풍을 못 이겨서 에루화 반춤만 춘다

인왕산 마루다 국사당 짓고

임 생겨지라고 노구메 정성을 드리네

삼청동 골짜기 졸졸 흐르는 시냇물

꽃피고 새 울어 심신이 쇄락해 지노라

에헤요 어허야 영산홍록의 봄바람

-(황석영 “여울물소리”에서 채록)-

 

산타령

나니나 산아지로구나 어뒤어나에 나나지루 산이로구나

오수산 십일봉은 은자봉이 둘러있고

도령청대 거자봉은 옥계수가 둘러있다

수락산 폭포수는 동구재 만리재라

약잠재 누에머리 용산 삼개가 둘러있다

동소문을 내달아 문넘어 얼른 지나

다락원서 돌려보니 도봉망월에 천축사라

동 불암 서 진관 남 삼막 북 승가요 ※필자 註 : 한양기 친구가 ‘서 진관’이 대목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함

우연히 잠두에 올라 한양 성내 굽어보니

인왕 삼각은 용반호거세로 북국을 고여있고

한강 종남은 여천지 무궁이라

-(황석영 ‘여울물소리’에서 채록)-

 

다음 9월 8일(일)의 산행지는 4호선 서울대공원역에서 집결하여 청계산에서 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뜰에 나와 단체사진 촬영을 끝으로 뒤풀이 절차를 모두 끝냈다. 뒤풀이 음식점이 제공하는 승합차에 몸을 실어 오후 5시 50분경에 연신내 전철역 근처에 하차하여 오늘의 산행은 마감이 되었다.

시산회 친구들이시여! 시산회 산우들이시여! 모두들 건강관리 잘하여 우리의 산행이 길게길게 이어져 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필을 놓겠네.

 

2013. 9 .6. 이재웅 올림

 

 

3.산행지

제목을 적으면서 217회에 눈이 멈추면서 잠시 생각이 밀려온다. 오랜 세월인데 참으로 고마운 산우들이다. 큰딸의 결혼식을 치루면서 시산회가 있어 든든하고 외롭지 않다는 안도감으로 내내 즐거웠다. 시산회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임 수석의 진중한 말을 되새긴다. 무더워서 빨리 선선한 가을이 오면 여름 동안 밀린 산행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한 지가 오래지 않아 벌써 성큼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느낌이 든다. 3. 4. 5월과 더불어 9.10.11월은 산에 오르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이다. 9월에는 일요일이 다섯 번이 있어 세 번의 산행을 해야 한다. 가을에는 두 번쯤 원거리 산행을 하면 좋겠다는 집행부에 제안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설악산(백담사-수렴동대피소(1박)-마등령-공룡능선-희운각대피소(1박)-설악동계곡-비선대-설악동. 2박 3일 코스)을 오르고 싶고 지리산(중산리-법계사-천왕봉-장터목대피소(1박)-백무동계곡-백무동. 1박 2일 코스)도 다시 가고 싶다. 휴식년에 걸려 아직도 가지 못하는 설악산 화채능선을 누구를 꼬드겨 올라가 볼까나. 인천에서 배를 타고 금요일 밤에 떠나 일요일 밤에 돌아오는 한라산 백록담을 오를까나. 산우들의 뜻에 따라 단풍 산행을 갈 테니 아직은 희망사항이다. 이번 산행은 삼천사계곡 산행 때 정한 대로 청계산으로 가니 빠르게 지나가는 가을을 청계산의 이수봉에서 반갑게 맞이하자. 새 시인의 새로운 동반시가 있으니 우리들의 가을은 더욱 풍성해질 거다.

 

4.동반시

드디어 산우 중에서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우리가 이런 순간을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려 왔던가. 삼천사계곡 산행 때 동반시를 낭송한 후, 자진해서 자작시 '당구야 놀자'를 발표하고 다음 날에 준비해놓은 시를 보내왔다. 꼭 등단해야 시인이 아니고 우리가 불러주면 시인이 되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패러디하면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와서 시인이 되었다'. 내 시와 용우 산우의 시를 비교하면서 잠시 이지엽 시인의 '현대시 창작법'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을 올리니 한 번 읽어주기 바란다. 산처럼 시도 우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시는 시일뿐. 존재만으로도 아름답다. 이재웅 산우가 시 선정의 권리를 내게 미뤄 김용우 산우의 시를 기쁜 마음으로 올린다. 그 날은 아주 기쁜 날이 되므로 그의 시를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참가의 즐거움을 누리자. 읽을 수록 감칠 맛이 나는 서정시다. 내 시는 기성 시인들이 기피하는 잠언시에 가깝다.

 

만연체와 간결체

시 창작의 초기부터 뼈대만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금물이다. 기본기를 익히는 연습은 치밀한 세부 묘사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이에 대한 탄탄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간결한 시 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만연적인 문체로의 시 쓰기가 목소리로 굳어지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에 대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는 지름길이다. 세부 묘사를 소홀히 한 채, 이를테면 간결함만을 추구하여 잠언적이고 명구적인 표현에 매료되어 그것을 본질로 삼는 것은 당장에는 보기 좋을지 모르지만 바로 밑천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 창작은 등단이 목적이 아니다. 좋은 시를 쓰는 것이 목적이고 이는 단거리가 아니라 평생을 달려야 하는 장거리 마라톤이다.

 

 

저울에 앉은 생각 / 김용우(2013. 7. 10)

 

배가 고프다

허기진 생각을 몸 안의 여기저기 꾸역꾸역 다 채워넣고

이젠 닫힌 귀 열어 물주전자로 넘치듯 가득 부어 넣어

부족할 눈금을 걱정하며 살그머니 저울에 앉아 본다

저울의 눈금이 풀죽은 듯 천천하다

 

보고 싶다

날마다 눈앞의 가슴으로 만나야 하는 그리움과의 목마름

멀어도 멀지 않게 손 내밀지 않아도 손잡는 소리 들린다고

나무를 닮자는 생각포대 가득한 듯하여 저울에 앉혀 본다

저울의 눈금이 성난 듯 통통 요동친다

 

비워 본다

가늘고 긴 호흡으로 드디어 내준 하얀 속살의 항아리 같은 바닥

아픈 내 마음의 깁스도 풀고 칼칼하게 씻어 풀나무 가지에 걸고

초록의 바람이 부니 심장을 열어 내 마음 저울에 올려본다

저울의 눈금이 깃털처럼 고요하다

 

계단에 앉아본다

윗 계단은 아랫 계단을 탓하지 아니하고

아랫 계단 또한 윗 계단의 무게를 말하지 않는다

아래의 윗 계단도 위의 아랫 계단임을 알기 때문이다

계단과 계단사이의 공간은 비움이고 채움이다

서로의 인정이 계단의 버팀이고 존재의 틀이다

계단을 저울에 세워본다

 

아!

눈금이 꿈적도 않는다

절대균형은 질량이 없는가 보다

 

2013. 9. 5. 신당도서관 休雨齋에서

 

詩를 사랑하는 山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도움쇠 김정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