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작시

시인의 농담 – 12월의 상자 / 도봉별곡

시인의 농담 – 12월의 상자 / 도봉별곡

 

12월의 상자 안에는
3월의 새벽과 12월의 저녁이 들어있고
죽순의 희망과 동짓달의 회한으로 꽁꽁 묶었다
배달지는 고향의 선산 부모님 산소 밑 소나무

작년 이맘때 염라대왕 앞에 섰다
대왕이 명부상서에게 이름도 맞고
머리도 백발인데 얼굴은 50대 초반이니
이상하다며 다시 확인하란다
상서는 확인하더니 실수했다고 머리를 조아린다

부아가 난 시인은
미련이 남아있지 않은 이승으로 내려가기 싫으니

그냥 황천에서 지내게 해주던가
내려 보내려면 수명을 배로 늘려달라고 항의하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난처해진 상서는 120살까지 살아야 하는데
지루하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내 평생의 화두는 120살까지 살아
앞니는 커녕 이빨이 하나도 남지 않은
120살 조주 영감님이 내준 화두 숙제는
판치생모板齒生毛인데 아직 풀지 못했으니
그 나이까지 살아서
앞니에 털이 나는가 보면 화두가 풀릴 거라는

작고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염래대왕이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지금 달나라에서 계수나무를 캐오는 세상이라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시인은 농담도 못하냐고 했더니
조주 영감이 농담한 걸 가지고 흥정하냐고
그 문제를 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깨달을 거라고 했더니
깨달아서 뭐 할 건데? 반문한다
세상을 웃음만 존재하는 곳으로 바꿔보겠다고 했다
가상하다고 하더니 그것은 신도 못하는 짓이란다
그러면 자기가 할 일이 없어진다고 한다
농담했다고 실토했다

실랑이에 재미가 없어진 대왕은
자기가 화두의 답을 안다고 한다
말해보라 했더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란다
그것은 질문이지 답이 아니라고 비웃었더니
나더러 바보란다
이유는 내려가서 잘 생각해 보란다
여기는 아직 아날로그 세상이라 실수가 많아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큰 선물상자를 준다
내려가서 풀어보라고
120살이 되면 돌아온다는 약속은 꼭 지키라며

내려와서 상자를 풀었더니
안에는 작은 종이에 중간 크기로
‘염라대왕의 농담 2016년 12월 8일’이라고 쓰여 있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다
화두라는 게 질문이 답이고 답이 질문인가보다
깨달음이라는 게 있는 건지 뇌의 장난인지

‘깨달음은 없다’는 지휴 스님의 말이 맞는 건지
깨달아서 뭐 할 건지

막막해진 2017년의 12월, 춥다

 

*제2시집 <시인의 농담>에 수록.

이 시는 시집의 마지막 수록시이므로 다음부터 제3시집 <방랑자의 노래>에 수록한 시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