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천)대공원둘레길을 돕니다(詩山會 제412회 산행)
모이는 때 : 2021. 6. 27.(일) 10 : 30
곳 : 전철 4호선 대공원역 2번 출구
준비물 ; 전과 동
안내자 : 산악대장 김종화
1.시가 있는 산행
헌사 / 김규동
말하지 않는
하늘과 들아
말하지 않는
임들과 산천초목이
우리 가슴 휘감으니
유월은
차마 되새길 수 없는 추억이고나
제 동족끼리
피 흘려 싸우다니
삼천리 내 강토
불바다 만들다니...포연 속에 사라진
수많은 형제들
검은 흙에 묻혀 세월은 가고
남북의 대결 속
우리는 살아서
위태로운 번영의 시대를 누린다...남북이 하나가 되는
눈부신 탄생의 아침은 언제이냐.“
오늘은 마침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원래 전쟁은 민간인이 더 죽거나 다치고 정작 전투를 치룬 군인은 덜 죽는다.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심한 예를 들어보면 지금의 독일, 당시 신성로마제국과 주변의 신·구교도 간의 30년 전쟁에서 전 인구의 5분의 2가 광기 서린 종교적 학살과 역병, 기아 등으로 죽은 사람 중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 군인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소유했으므로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으나 민간인들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스 신교도 간의 민간인이 죽고 죽이는 광경이 극심했다고 하니 정치인들과 직업적 종교인의 책임이 막중하나 그들은 ‘신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라고 강변하고 끝났다. 이럴 때는 구교의 신과 신교의 신이 다르지 않겠느냐?에 의문이 간다.
우리의 경우 한국전쟁을 두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유엔의 기치 아래 세계 16개국과 중국, 북한, 소련이 치른 마지막 국제전쟁이라고 규정 짓는다. 개인적으로 영광에서는 3만5천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내 할아버지 자손의 순수 혈통 중 12명이 한 날에 죽었는데 기가 막힌 것은 16살의 여학생이었던 작은고모도 아니고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애들도 아니고, 갓 태어나 이름을 짓지 못해 이름조차 없는 갓난애를 기일에 ‘김 모’라고 적어 어머님이 설립한 영광비룡양로원에서 매년 음력 9얼 9일에 합동제사를 지내온 것은 분명 참상이었다. 그 죽음은 훗날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해 저지른 10배 100배의 복수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애사가 있었는지 조정래의 태백산맥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거라며 막내 작은 아버지께서는 먼 하늘을 보며 입버릇처럼 말씀을 이어갔다. 그 복수극으로 수많은 미망인이 생겼으니 만석꾼의 며느리인 어머님이 물려받아 아꼈던 재산을 털어 양로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하면서 그분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리고 돌아가셨다. 물론 나의 경우 ‘1억을 남겨주면 1억짜리 바보를 만들고 10억을 물려주면 10억짜리 바보를 만들더라’는 주변 부자 그룹의 뒷담화를 들은 어머님은 그러한 명분으로 한 푼의 유산도 주지 않았다.
내가 소설가였다면 작은아버지와 고모를 비롯한 주변의 부추김으로 그런 이야기를 풀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도 시인이라 잊어버리고 간다. 마지막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분이 살아계신다. 아버님의 첩이다. 그분도 남편이 좌익으로 몰려 훗날 들어온 우익에게 희생당해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서 아버지께 두 아들과 몸을 의탁했으니 명분은 시체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고 들었다. 내가 마음이 동하여 그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면 여러 사람의 아픈 기억을 재생하는 짓이 된다. 역사적 시간으로 보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겠으나 혹은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경구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둬야 후세의 시금석이 된다는 것은 다른 한 편의 명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행여 그런 슬픈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면 그 슬픔이 내 몸 안에서 병으로 생물학적 변이를 일으켜 ‘촛불’의 최영희 작가처럼 완성과 함께 유명을 달리 했을 것이다.
한반도 주변은 강대국이 많아 언제든지 전쟁의 개연성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국강병의 길을 가야 한다. 지금은 여야의 정치인들이 나라를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하나 일부 경제적·명예적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기생충처럼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여 나라의 양분을 빨아먹고 있으니 그들을 쳐다보아야 하는 우리의 걱정이 낮은 하늘이라도 깊게 찌른다. 화제를 정치로 삼는 것은 참으로 함께 죽어가는 가련한 짓이다. ‘카더라’ 통신은 기레기들이 낳고 그런 부정확한 이야기를, 정확한 판단조차 잊어버리고 앉기만 하면, 지껄이는 특히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악화는 양화를 구축(쫓아낸다는 뜻)한다’는 명언은 더욱 뚜렷하게 가슴에 낙인을 찍는다. 갈 길은 멀고 해는 기울어간다.
어두워지기 전에 밝은 빛과 음식이 기다리는 천당의 문에 도달해야 한다. 70즈음에는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옛날에는 ’고려장‘이라는 버려짐과 공자의 ’종심‘이라는 완성이 있었다. 지금은 김형석 교수가 천하에 ’인생 65부터라‘고 공언한 뒤에 ’시작‘이 있게 되었다. 유투브에 여러 사례들이 올랐으니 참고하여 결정하고 살아야 한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유투브에서 들려주는 정미조의 ’개여울‘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와 김수철의 ’나도야 간다‘에서 ’젊은 나이 눈물로 보낼 수 있나‘는 구절과 첫사랑을 떠올리며 ’떠난 사람 꽃잎 위에 못다쓴 사랑‘은 일요일 아침 가슴과 머릿속에 묘하게 여운을 남긴다. 70의 정상쯤에서 귀중한 기억은 높낮이를 따질 것 없이 고통과 행복을 떠올리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개인사가 길었다. 양해하시라. 작년에 시를 준비하려고 쓴 분량이 원고지 2만분이 되었다. 장편으로 20권의 분량이므로 2년의 여유를 주면 쓸 수 있겠으나 현재 나의 마인드와 모드-이재웅 산우의 전용어-를 바꿔야 한다. 그것들 때문에 시인 선생님과 네 번의 다툼이 있었다. 다만 그 싸움은 니전투구(泥田鬪狗)는 아니었으니 그 기간까지 더하면 상당한 기간이 되리라.
2.산행기
"시산회 411회 '북한산자락길' 산행기"<2021.06.12(토)> / 위윤환
◈ 일시/집결 : 2021년 6월 12일(토) 10시 30분 /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
◈ 참석 : 20명 (갑무, 세환, 일화, 정남, 종화, 진오, 기인, 형채, 재홍, 윤환, 경식, 원무, 윤상, 용복, 동준, 정한, 영훈, 근호, 양기, 황표)
◈ 산행코스 : 홍제역-실락어린이공원-북한산자락길-전망대-포방터-산골마을-백련산-홍은4거리-뒤풀이장소-홍제역
◈ 동반시 :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 김시천
◈ 뒤풀이 : 탕탕이, 낙지볶음에 막걸리와 소·맥주 / '목포세발낙지'<홍제역 근처> → 일화 산우 협찬
‘북한산자락길’을 산행하는 날이다. 근래에 가장 많은 산우들이 집결지인 홍제역1번 출구에 모였다. 모두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을 하여서 감염의 걱정이 덜어서 인 것 같기도 하다. 몇 친구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움이 더 했다.
약속시간의 오차시간 내에 모든 산우가 모여 기분 좋게 들머리를 향해 출발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인지 6월 초여름의 더위가 조금 있었으나, 걷기에는 별로 힘들 지는 않았다.
'북한산자락길'은 홍제동의 북한산 허리를 타고 조성된 산책길이다. 들머리는 실락어린이공원에서 시작하여 중간에 홍록배드민턴장과 북한산전망대를 지나 마지막에 옥천암 근처까지 총 4.5km의 무장애의 길이다.
자락길의 전체 구간을 10% 이내로 경사도를 유지하고, 전체 길이의 90%가 넘는 4.15km는 목재의 데크를 깔아서 노약자나 임산부, 유모차 등 보행 약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배려한 산책로이다. 누구나 편안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코스인 것 같다.
또한 자락길에는 30개의 안심번호가 설치되어 있다. 산행 시에 긴급상황 발생 때 근처의 안심번호를 확인 후, 상황에 맞는 기관(경찰서, 소방서, 서대문구)에 연락하면 즉각적인 출동과 처리가 가능하다고 한다.
홍제역 모임장소에서 들머리인 실락어린이공원까지 가는 길에 아파트단지 옆 가파른 계단 오르기가 조금 힘들기는 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아주 완만한 산책길이었다. 팔각정의 첫 휴식터에서 잠시 자리를 잡고, 과자류와 커피를 들며 지나간 날의 담소를 서로 나누는 휴식의 시간이었다.
걷기가 부담 없이 편한 데크길을 한동안 걸으니 제1구간의 종점인 홍록베드민턴장이 나오고, 제2구간 북한산둘레길 7구간(옛성길)입구가 나온다. 이젠 제3구간은 얼마 남지가 않았는데, 앞에 전망이 잘 보이는 ‘북한산자락길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조망의 명소인 전망대에서는 인왕산, 북악산, 안산이 바로 보이는 곳이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뚜렷하게 보이질 않아도 모두들 이곳 전망대에서 인증사진을 남긴다.
표방터 시장으로 내려가는 샛길에 접어들어 자락길 옆의 공터에 돗자리를 깔아 자리를 잡고, 가지고 온 음식과 막걸리로 배를 채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항상 순서에 준하듯 오늘의 산행 안내자인 내가 형채 산우가 추천한 동반시("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 김시천 시인)를 낭송하였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 김시천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소쩍새 울음 따라 마냥 걷다가
앞산 풀숲에
꽃이슬 되어 눕지요
새벽하늘 별 하나
바라보지요
여기서 거기까지
그리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아침 햇살에 눈을 뜨면
패랭이꽃 두어 송이
피어 있지요
그대 있는 곳
그리 멀지도 않은 곳
손 내밀면 지척인 곳
그대 머물다 간
내 마음 속
꽃자리
휴식터에서 간식을 마치고 시간관계상 종점인 옥천암으로 가는 것은 포기를 하고 되돌아서 반대쪽으로 가다 지난번 산책코스를 답사할 때에 백련산 쪽에서 자락길과 합류지점을 알았었기에 그 길로 안내를 하였다.
한참을 하산하다 보니 산골마을의 이정표가 있었고, 팔각정의 쉼터가 있어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이제는 도로만 넘으면 홍은4거리가 보이는 백련산이다. 산우들 중 일부는 도로길을 따라 홍제역으로 이동하고, 인왕산 등의 전망을 보고 싶어 하는 산우들은 백련산으로 갔다. 백련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인왕산, 안산 등의 조망이 깨끗하게 보인다.
홍은4거리에서 산우들을 다시 만나 뒤풀이 장소인 ‘목포세발낙지’ 식당으로 갔다. 산우들 모두가 좋아하는 세발낙지 ‘탕탕이’와 낙지볶음에 막걸리와 소․맥주를 곁들여 마시면서 흡족한 뒤풀이를 즐겼다. 마스크를 선물한 정한(기노석) 친구와 뒤풀이의 경비를 협찬한 일화 산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산회 산우들이 소중하고 웃음과 행복을 주는 나의 보물인 것 같았다. 다음 산행지인 검단산 산행 때 모두들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를 기원하면서...
2021년 6월 20일(일) 위윤환 씀.
3.오르는 산
지리산 종주를 꿈꾸고 있다고 하니 목의 부상을 아는 지인이 “오라버니는 죽지 못해 안달을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므로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다. 70살이 넘어가는 점에서 아래의 글을 조용히 음미해보자.
“후덕하게 하느냐 아니면 야박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長短의 열쇠가 되고. 겸손하게 하느냐 아니면 교만하게 하느냐의 여부가 화복의 열쇠가 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냐 아니면 사치하고 게으르냐의 여부가 빈부의 열쇠가 되며, 養生을 하느냐 아니면 욕심대로 사느냐의 여부가 사람으로 남느냐 귀신으로 돌아가느냐의 갈림길이 된다.” -신흠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
4.동반시
시를 배우고 익힌 지 10년이 넘어간다. 이제야 겨우 시를 대충 훑어보면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모두 만만한 시가 아니다. 행채가 등산 즈음에 보내주는 시가 그렇다. 그런 시를 동반시로 선정하니 두고두고 그 작업을 해주기 바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비로소 꽃 / 박무웅(박형채 배급)
그 꽃이 보이지 않는다
봉황천변,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흰 불꽃
나는 그 주인 없는 땅을 차지한
흰 꽃무리의 지주(地主)가 좋았다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마음껏 꽃 세상을 만들어내던 개망초꽃
있어도 보이지 않고 보여도 다가오지 않던
그 꽃, 개망초꽃
땅을 가리지 않는 그
백의(白衣)의 흔들림이 좋았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멈춤’을 생각하니
내가 가진 마음속 땅을 모두 내려놓으니
거기 시간도 없고 경계도 없는 곳에 비로소
보이는 그 꽃
내 안을 밝히는 그 꽃
보여야 꽃이라지만
보아야 꽃이다
2021. 6. 25. 늦은 밤에 썼다.
시를 사랑하는 산사람들의 모임 詩山會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