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인간을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지러울 만큼 아득한 일이겠지. 우리는 지금부터 나를 들여다 볼 텐데,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각자 모두 왜 세계를 갖고 있어. 물리적으로는 누구에게나 같은 수치로 표현되는 시공간이지만, 그래서 한시대 한공간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이거 있어, 내가 있어 의미 있는 나의 세계와 네가 있어 의미 있는 너의 세계가 똑같지는 않지. 너에게 나는 네 세계 속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네가 너의 세계 속 사람이 아니야. 나의 세계는 나와 함께 있고 나와 함께 소멸할 거야. 그럼 내가 소멸하고 난 다음에는 이 세계가 없어지냐고? 글쎄 어떻게 될 것 같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참 궁금해. 누군가를 다 알아야 그를 사랑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오히려 사랑의 조건은 ‘모른다’는 것일 수도 있어. 흐흐, 사랑을 해 보면 알게 되는 진리야), 나는 나를 몰라서 사랑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겠더라고. 내가 날 다 해명하고 죽어야 하는데 죽을 때까지 내가 날 모르고 죽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불안했어. 내 능력 갖고서는 안 되니, 어떤 위대한 지식/지성이 날 해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 그러다 내가 날 알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나’라는게 정말 있는지 없는지조차 영 모르겠다는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어. 내가 가진 많은 가면이 나를 헷갈리게 하거든. 어떤 건 가면이고 어떤 건 아닌 것 같은데 구분이 안 가는 거야. 이런 혼란은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아직도 나는 잘 모르는 나와 사귀고 있는 중이야. 내 앞에 나라는 존재는 영원한 수수께끼니까.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탁 신전의 돌에 쓰인 말이다. 많은 그리스인에게 이 글귀의 교훈은 글귀가 새겨진 돌만큼이나 확고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격언을 그렇게 풀이하지 않았던 듯하다. ‘세상을 움직이려면 우선 너 자신을 움직여라.’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너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말하는 너 자신에 안주하지 마라.’ ‘너의 내면을 알아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너 자신을 알아라.’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라.’ 신전의 다른 편에는 ‘지나치지 말라’고 쓰여 있어 당시 그리스인들은 ‘지나치지 말고 너 자신을 알라’는 교훈을 항상 옆에 두고 살았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참 무서운 분이야. 너희 자신을 알라니.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이야? 만약 다른 건 둘째 치고 ‘너 자신부터 알아라’라는 말이 없다면 평생토록 그 구절을 볼 때마다 첫 번째로 새로 해야 하는 엄청난 숙제가 주어진 셈이야. 안다는 건 또 얼마나 무서운 말이야. 얼마나 알아야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말이지. 어쨌든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은 평생우리 자신을 사로잡는 질문이니까. 좀 쑥스럽지만 그 화두를 여기서 잠깐 붙잡아 볼까 해. 우선은 인간이란 생물에 대하여 알아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그 다음엔 어떻게 나의 삶을 꾸려갈 것인가를 말해 보자고. 그러니까 인간, 나, 인류 이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나를 탐구 하자는 거야. 친절하게 굴지도 마라? 뭐라? 친절과 어떤 관계가 있나, 그런 친절은 진짜로 필요 없다고? 그렇다고 암굴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 천정에서 감 떨어지는 것을 바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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