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시, 사랑에서 행복을 찾다 썸네일형 리스트형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 더보기 답장들 / 이승희 답장들 / 이승희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직도 멀었다는 거.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 이 폐허를 다 지나려면 멀고 멀었으니 좀 반짝인들 어떤가요. 저녁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끝도 없이 자라고 있어요. 그렇게 폐허는 말없이 자라는 세계. 당신에게 주지 못한 머리핀 두 개를 반짝이게 하는 세계. 누가 지나든 넘어진 채 좀 있어도 되는 슬픔에 대해 천천히 이름을 지어보는 일. 녹슬고 멍들어서 이제 좀 자유로워지는 일. 그해 여름의 골목에서 멈춰 선 기차들이 고개 숙인 채 여름 내내 중얼거리는 말을 듣는 일. 내겐 없는 기억들이 되돌아와 내 뺨을 후려칠 때 왜 그래요라고 말하지 않는 일. 폐허 속에 나를 가만히 잠재우는 일.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려 애쓰는 일. 그렇게 반짝이는 일. [출처] 시|작성.. 더보기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그 꽃들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모든 꽃은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 이산하, [악의 평범성]에서 - 창비시선 453, 2021. 2. 5 더보기 왼쪽은 어지러운 생각과 함께 / 정복여 왼쪽은 어지러운 생각과 함께 / 정복여 딱딱한 기억을 베고 잠이 들었던가 옆으로 돌아눕자 무엇인가 어깨를 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 몸을 조금씩 조여갔다 얇고 끈끈한 실들이 몸 전체를 감아가고 있었다 지난 밤 벽 위에 집을 짓던 작은 거미 한 마리 그놈을 그냥 놓아둔 것이 잘못이였다 놈은 밤 동안 침대로 올라와 내 몸을 친친 감고 나를 타고 기어다니고 있었다 목과 가슴 사이에 얽힌 거미줄을 떼어내면 손가락에 척척 달라붙어 끈끈한 액이 묻어났다 오른손의 거미줄을 떼어내면 거미줄은 왼손으로 옮겨갔다 손이 닿는 데마다 끈끈한 액체가 길게 늘어났다 팔을 벌린다거나 몸을 뒤틀 때마다 거미줄은 여러 갈래의 거미줄이 되었다 나는 차츰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묶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벽 가장자리 거미의 집으.. 더보기 환상의 빛 / 강성은 더보기 개여울 / 김소월 개여울 /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 김소월, 『진달래꽃』, 열린책들, 2004, 173 ~ 174쪽 왜 이 시가 자주 노래로 만들어지는지, 낭독해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가도 아주 가지 않겠다’는 저 말의 깊은 속뜻을 자꾸만 생각하게 됩니다. 단순히 남겨 둔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대책 없고 속절없는 약속은 아닙니다.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빈 둥지 하나 남겨 놓겠다는 이기심 가득한 마.. 더보기 군말 / 한용운 군말 /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더보기 자화상 / 서정주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 더보기 이전 1 2 3 4 5 ··· 3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