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과 시, 사랑에서 행복을 찾다

가벼히 / 서정주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더래도 가벼히 한눈 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한다. 더보기
화사(花蛇) / 서정주 화사(花蛇) / 서정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더보기
꽃 / 김춘수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더보기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 윤동주 ​ ​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 나는 플랫폼에 ​간신히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는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더보기
빛나는 자취 / 박용철 빛나는 자취 / 박용철 다숩고 밝은 햇발 이같이 나려 흐르느니 숨어 있던 어린 풀싹 소근거려 나오고 새로 피어 수줍은 가지 우 분홍 꽃잎들도 어느 하나 그의 입맞춤을 막아보려 안합니다 푸른밤 달 비쵠 데서는 이슬이 구슬되고 길바닥에 고인 물도 호수같이 별을 잠급니다 조그만 반딧불은 여름밤 벌레라도 꼬리로 빛을 뿌리고 날아다니는 혜성입니다 오― 그대시어 허리 가느단 계집애 앞에 무릎 꿇고 비는 사랑을 버리옵고 몸에서 스사로 빛을 내는 사나이가 되옵소서 고개 빠뜨리고 마음 떨리는 사랑을 버리옵고 은비둘기같이 가슴 내밀고 날아가시어 다만 나의 흐린 눈으로 그대의 빛나는 자취를 따르게 하옵소서 박용철전집, 시문학사, 1939 더보기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 더보기
정오 / 전동균 정오 / 전동균 획 숲 그늘을 흔들며 지나가는 청설모의 모습으로 바람 소리로 무언가 내 몸을 번개처럼 뚫고 가는 땅의 문이 열리고 돌들이 날개를 펼치는 순간 이 세상 너머 빛도 어둠도 없는 시간이 찾아온 것인지 사람으로 빚어지기 전 소용돌이치는 울음 속에 잠긴 느낌 온 세상을 삼킨 불덩이를 안은 느낌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가야 하지? 나뭇잎들 찢어질 듯 떨고 공기들은 발톱을 번쩍이고 *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에서 - 창비시선432, 2019. 6. 5 더보기
야광별 / 김경후 야광별 / 김경후 별이 빛나지 않는 밤 별이 빛나는 방을 만든다 아득한 천장과 어둑한 벽 구석구석 문방구에서 사온 야광별들을 붙인다 이 별은 악몽을 위해 저 별은 불면을 위해 빨리 별이 빛나는 밤을 만들자 하지만 아무것도 빛나지 않는 별 가득한 방 별도 방도 잠 속에도 어둠만 기다랗게 뻗어나갈 뿐 야광별 설명서: 이 제품은 충분히 빛을 받지 않으면 빛을 내지 못합니다 130억 광년 떨어진 별의 누군가도 빛난 적 없는 지구와 빛난 적 없는 지구 위 나를 벽에 붙이고 영원히 기다리고 있을까 밤이 빛나길 빙하기 별똥별은 빙산을 가르고 떨어졌다 그 별은 지금 어느 어둠이 되었는가 깜깜한 야광별이 박쥐처럼 모여든 깜깜한 별밤 두 눈을 부릅뜨고 벌겋게 빛을 찾아 헤매는 밤 *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에.. 더보기